The Beguiling of Merlin 1874 Oil on canvas 186 x 111 cm (73 x 43 3/4 in) National Museums and Galleries on Merseyside
Edward Burne-Jones 에드워드 번 존스 (1833-1898)
원서와 번역서, 두 판본에 똑같이 실린 번 존스 경의 "속임수에 빠진 멀린(The Beguiling of Merlin)'입니다. 번 존스의 작품은 예전에 웹사이트에서 아서 왕 전설 쪽 자료를 찾다가 알게 되었는데 좋아하는 풍 가운데 하나죠. :)
그는 신화, 그 중에서도 아서 왕 전설에 한결같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 작품 또한 그렇구요. 넋나간 표정의 멀린이 바라보는 것은 니무에(Nimue)입니다. 니무에는 여러가지 다른 이름들을 갖고 있는데, 가장 잘 알려진 이름으로는 비비안, 또는 비비앙, 에비안느 등이 있습니다. 워즈워스는 니나,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아서 왕 전설에 관심한 이들에게 더 잘 알려진 이름으로 '호수의 여인'이란 닉네임이 있습니다. 토머스 맬로리 경의 <아서 왕의 죽음>의 스토리(이 책은 번역이 안 되었지만 영화나 소설 등에서 많이 보셨을 겁니다)에 익숙해진 이들이라면 아서에게 엑스칼리버를 준 여인네,라고 하면 아하~하실 겁니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란슬롯을 양육한 여인으로도 등장합니다.
하지만 번 존스의 이 작품의 이야기는 또 다른 판본입니다.
니무에(비비안)는 멀린의 제자였습니다. 주로 멀린의 필사를 돕고 예언을 기록하는 일을 했지만 야망이 컸죠. 혼자서는 아무리 기고 노력해도 멀린의 경지에 오르지 못할 것을 알고 그를 유혹합니다. 이 때의 멀린은 우리가 알고 있는 멀린보다 나이를 덜 먹었고(하지만 젊진 않고), 그만큼 현명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니무에의 사랑을 얻는 대신 자신의 주문(spell)과 마법의 비밀을 모두 알려줍니다.
이 곳은 브로셀리앙드 숲. 예로부터 요정이 나온다는 마법의 숲입니다. 멀린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사랑에 눈이 멀어 손발에 힘을 뺀 채 멍하니 니무에를 바라봅니다. 사랑을 나누기 위해 나무가 많이 우거진 숲으로 들어왔을 겁니다. 이미 사랑을 나누었는지, 나눌 참인지, 멀린은 산사나무에 기대어 있습니다.
니무에는 스펠북(spell book)을 들고 마지막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에 답을 들으면 멀린이 알려준 바로 그 주문으로 멀린을 옭아매고 가둘 겁니다. 살짝 비튼 몸, 뱀처럼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번 존스는 팜므 파탈(妖婦)의 이미지를 니무에에게 투영했습니다. 이 장면을 아주 잘 묘사한 테니슨의 시 구절이 있습니다. "A storm was coming, but the winds were still, and in the wild woods of Broceliande, Before an oak, so hollow, huge and old It looked a tower of ivied mason work, At Merlin's feet the wily Vivien lay. ... lissome-limbed, she Writhed towards him, slided up his knee and sat, Behind his ankle twined her hollow feet Together, curved an arm about his neck, Clung like a snake." (알프레드 테니슨, 'Idylls of the Kings' 중에서) 멀린이 기대고, 그를 둘러싼 산사나무는 잠시 후 뱀처럼 그를 붙들고 얽어버릴 나무입니다(그림에서 그는 이미 사로잡힌 듯합니다). 니무에는 산사나무로 그를 잡아 멀리 탑에 가둡니다.
어떤 판본에서는 죽였다고도 하고, 어떤 판본에서는 니무에가 진실로 그를 사랑하여 자신만 접근할 수 있는 지하 세계에 숨겼다고도 합니다. 니무에의 발빛에 알게 모르게 핀 흰 꽃은, 멀린에 대한 사랑이 아주 거짓이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이 작품이 의미하려는 바는 무엇일까, <소유>에서도 멀린과 니무에(메를린과 비비앙)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애쉬와 헤어진 크리스타벨은 프랑스에 있는 사촌네 집에서 삽니다. 이 이야기에 대한 크리스타벨과 그의 숙부, 그리고 사촌인 사빈느의 대화는 힌트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남성에 대항하는 여성의 이야기로요. 그녀가 원했던 것은 그 남자가 아니라 그의 마술의 힘이 아니었을까요?------그러다 마침내 그의 마술로 그를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그리고, 그 다음엔.... 그 많은 재주와 함께 그녀는 어디로 가버렸죠?" "예상치 못한 이야긴데." "저에겐 하나의 그림이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 승리의 순간을 그린 그림인데----그래요.----전혀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죠" 내(사빈느)가 말했다. "너무 의미만 쫓는 것은 만성절에 어울리지 않아요." "이성이 잠을 자야 된단 말이지?" 크리스타벨이 말했다. "의미 이전에 이야기가 있잖아요." 내가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이성이 잠을 자야 된다구." 그녀가 다시 말했다. (vol.2 p.171) 크리스타벨이 가지고 있다는 그림이란 그녀의 동성 애인 블랑슈가 그녀에게 그려준 '멀린과 비비안'이란 그림입니다. 비비안이 유혹의 노래를 불러 멀린을 사로잡는 순간을 그린. 번 존스 경의 작품 주제와 비슷하죠?
크리스타벨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는지, 저 말을 할 그 순간의 감정에 비추면 짐작할 듯도 합니다. 하지만 설명은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설명을 위해 늘어놓아야 할 것이 너무 많고, 하지 않는 편이 하는 것보다 많은 의미들을 남겨둘 수 있으니까요.
이런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크리스타벨이 살았던 빅토리아 시대는 여성의 처지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는 시기였고, 크리스타벨은 그런 각성의 과정에서 치열한 고민에 빠져 있던 시인이자 여성 중의 한 명이었다고. 그것은 그녀의 대표작인 '멜루지나'뿐 아니라 여러 시들에 함께 드러납니다.
크리스타벨에게 비비안은 어떤 존재였을까, 애쉬와 크리스타벨을 멀린과 비비안의 이야기에 빗대어 보면 어떤 그림이 나올지 생각해보는 것도 참 재밌습니다. 그나저나 크리스타벨 말대로 비비안은 주문을 모두 배우고 어디로 갔을까요? 그걸 배워 뭘 하려고 했죠? -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