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후광(後光)의 크기는 둥근 것으로
그 위치의 마음의 단계이다.
이 경지에서 마음의 정화(淨化)가 진행되어
생활에서도 족함을 깨닫고 집착에서 벗어나
우주는 나,
우주즉아(宇宙卽我)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는 분을 붓다라고 부르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모세, 크라리오, 마구갈리스, 바바리, 브루샤나 등도 붓다의 경지에,
마음은 넓고 웅대한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
상상단계 빛의 대지도령,
신(神)과 표리일체의 여래(如來)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62년 현재 425명, 지구상을 지배하고 있는 대지도령이,
천상계 즉 실재계에 계시는 것 같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상단계에서 저단계를 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아래 단계에서 상단계를 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빛의 양의 구역(區域)에 따라]라고,
다른 곳(=심행)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마음의 넓이의 단계를 서술한 것이다.
A*K는 중국에서 태어났다.
7세기 천대산(天臺山) 장안선사(章安禪師) 밑에서
법화경의 경문을 서사(書寫)했던 것 같다.
중국시대는 서기로서
항상 혼(魂)은 견실한 일만을 해 왔기 때문에,
금세에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 상인의 길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항상 딱딱한 일을 하고 있으면
역시 편협된 마음을 만들기 때문에
풍요롭고 둥근 마음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까,
편협된 것의 수정을 명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전생윤회(轉生輪廻)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계층에서 태어나고 배워서 현재가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혼(魂)의 체험을 통해서
웅대한 마음이 만들어져 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이 세상의 물건을 저 세상에 갖고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 그 계층은 마음의 기준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태어난 환경이 왕이든 대통령이든 거지이든
기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기준은 자신이 만들어 낸 환경으로
어떻게 올바르게 살고 어떻게 사람들을 구하며
어떻게 조화된 자신을 만들어냈는지
그것들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회적으로 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그 수행은 힘들다는 것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또 혹독한 거지 생활을 하면
마음까지 가난하게 되어
세상을 원망하고 타인을 원망하고 끝내는 신까지 원망하고 마는 것이다.
역시 이러한 양극단의 인생에서는 깨닫기 힘들다고 할 것이다.
좀처럼 쉽지 않은 것이다.
육체주(肉體舟)는 변하지만,
우리에게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혼이고,
그 중심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육체는 인생에 있어서 단지 배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는 시간의, 마음과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것이다.
즉 직업 등으로 차별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빛의 천사들 중에는 어부도 있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렇다.
그들은 어려운 생활환경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한 것이다.
고타마 붓다의 제자 우파리는
카피라 바스트에서 (노예 계급인) 이발사 출신이다.
마하카샤파는 호농(豪農) 출신이다.
이처럼 인간은 태어난 환경에 의해,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각에 의해
올바른 마음의 잣대를 깨닫고 대중을 고통에서 구제하고
그 실행력으로 사람들이 성자라고 칭해 주는 것이다.
마음의 빈부에 의해 그 인격은 정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불변적인 신리이다.
그 기준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도
스스로의 마음과 행위의 결점을 용기를 갖고 수정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악한 마음을 극복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깨달음은 타인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힘은 마음의 척도에 불과한 것이다.
이 척도를 어떻게 사용하여
올바르고 풍요롭고 자애에 충만한 둥근 마음을 만들어내는 가는
스스로의 노력과 용기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신의 자식으로서의 개개의 생명의 존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개개의 생명이라는 위대한 가치를 누구나가 갖고 있는 것이다.
금강석도 연마하지 않고서는 아름다운 광택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얘기를 듣고 있었던 질문을 한 주지는
그냥 아연하여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라한이라고 하는 경지의 설명을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았는데
불교하고는 관계없는 23세의 청년이
잠재되어 있는 위대한 보고의 문을 열고
얘기하는 진실의 말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렸다.
주지도 몹시 감동하였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과거세가 있고,
마음의 녹음기가 있어서 그곳에 기억되어 있는 것이다.
주지는 말했다.
“예, 잘 알았습니다.
믿을 수 없는 진실이 생무지의 청년의 입을 통해 말해졌기 때문에 놀랐습니다.
생명의 전생윤회(轉生輪廻)도 함께 알게 된 것은
정말로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주지의 입장에서는 처음 경험이고
경문을 외워 근행이라는 행위를 하고 있는 장사꾼이므로
좀처럼 신리(神理)와 접할 기회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2,500여년 전 바라문의 사로몬들이
붓다 스트라(불교)를 스스로의 눈으로 본 것처럼
구래의 누습을 타파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이다.
불교를 생활의 수단, 직업으로 삼고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교의 창시자였던 고타마 붓다도,
크리스트교의 창시자인 예수도,
모두 생 초보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당시에도 유태교가 있었고 바라문교가 있었으며
진정한 신리(神理)는 먼지와 티끌에 묻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는 이른바
신리(神理)가 생겨나기 전의 선도자로 출현하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신리(神理)에 눈뜬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이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