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산책14.남천참묘
제14관 남천참묘(南泉斬猫)
南泉和尙, 因東西堂爭貓兒, 泉乃提起云, 大衆 道得卽救, 道不得卽斬卻也. 衆無對. 泉遂斬之. 晩趙州外歸. 泉擧似州. 州乃脫履安頭上而出. 泉云, 子若在卽救得貓兒.
남천화상께서 동당과 서당의 수행승들이 고양이를 두고 싸우자 고양이를 집어 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들 들어라. 너희들이 도에 관해 한 마디를 하면 고양이를 살려주고, 도에 관해 한 마디를 못하면 고양이의 목을 쳐 버릴 것이다.”
수행승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남천화상께서는 즉시 고양이의 목을 쳐 버리셨습니다.
그날 저녁 늦게 조주스님이 외출에서 돌아왔습니다. 남천화상께서는 낮에 있었던 일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조주스님은 신을 벗어 머리에 쓰고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남천화상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조주가 만일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南泉和尙을 많은 책에서 ‘남천화상’으로 읽지 않고 ‘남전화상’으로 읽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두꺼운 옥편을 찾아봐도 그리 읽는 이유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공부를 많이 했다는 분들에게 여쭤 봐도 뚜렷한 대답 없이 다들 그렇게 읽는다고만 하십니다. 泉은 ‘샘 천’이지만 때로 ‘돈 천’으로도 쓰입니다. 돈은 ‘전’으로 흔히 읽으니 ‘남전’으로 읽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이 글에서는 정확한 근거를 찾을 때까지 ‘남천’으로 표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좀 어이없는 상황입니다. 깨달은 스님이 이유 없는 살생을 하다니요. 그것도 기숙사 사동별로 학생끼리 패싸움을 하는 현장에서요. 다른 책에 보면 동당에서 기르는 고양이를 서당 학생이 발을 부러뜨려 양쪽 사동 수행승 사이에 패싸움으로 번진 모양입니다. 수행승이란 자들이 한심하게 패싸움을 하니 그 모습을 본 남천화상께서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것이지요. 그래서 도에 관한 그럴싸한 한 마디를 못하면 고양이를 죽이겠다고 한 것이지요. 아무도 말을 못하니 결국 고양이를 죽일 수밖에 없었지요. 완전히 조직폭력배와 같은 일처리 방식입니다. 저녁에 그 이야기를 들은 조주 스님은 발에 신는 신발을 머리에 신고 나가버립니다.
우리는 살면서 “규정과 상식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무척 능률적이고 실수 없는 일처리가 되겠지요. 비교적 일을 잘 하는 모범생들의 일처리 방식입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가야 합니다. 시대가 바뀌고 생활양식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기 때문에 규정과 상식이 이대로 유지되는 게 합당한지 늘 “반성해 보고 창조적으로 변화시켜” 적용하는 게 좋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일은 잘 하지만 꽉 막힌 사람이라는 평을 들어선 곤란합니다.
저 같으면 남천화상에게 대들었을 거예요. 좀 배포가 있다면 이 정도 말했겠지요.
“만일 화상께서 고양이 목을 치신다면 저는 스님의 목을 치겠습니다.”
물론 사우지 말았어야지요. 설령 싸우다가도 스승이 오시면 얼른 죄송하다고 하고 미안하다고 화해했어야지요. 스님을 협박해서라도 고양이를 살렸어야지요. 조주스님은 단박에 조직폭력배 같은 동료와 살생을 한 스승을 꾸짖는 퍼포먼스를 합니다. 발에 신는 신발을 머리에 썼으니 “상식과 규정에 반하는” 스승과 동료를 꾸짖은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은 “반성과 창조”를 할 수 있는 경지에 있다는 것을 웅변으로 말한 것이지요.
깨달음은 무애(無碍)의 경지에 올라야 합니다. 장애와 거리낌이 없는 경지에 올라야 합니다. 신을 머리에 쓰는 경지 말입니다. 또한 자재(自在)의 단계에 올라야 합니다.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우뚝 선 주인공의 삶이 되어야지요. 스승이 고양이를 죽이는데도 말 한마디 못하는 노예 같은 삶을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하지만 무애와 자재의 자유로운 삶은 규정과 상식의 삶을 제대로 살아낸 다음 반성과 성찰과 창조에서 얻어지는 깨달음으로 이루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말을 짧게 해야 하는데 그게 아직 잘 안되네요. 저도 부지런히 수행해야 하겠습니다. 힘든 상황도 한 발 물러나 평안하게 바라보시면 좋겠습니다. 모두 좋은 날 보내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