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충렬사(忠烈祠)의 봄
* 2021.3.4.
▣ 위치 ; 부산시 동래구 충렬대로 345 / ▣ 부산 유형문화재 제7호
부산충렬사 전경
정문 앞에서부터 소나무는 멋지게 가꾸어져 있다.
정문 앞 오른 쪽에 명자나무가 많다.
정문 안쪽 옆
돌에 새긴 약도.
연못 의중지
충렬사 忠烈祠
*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신 부산지방 순국선열의 영령을 모신 곳이다.
* 임진왜란은 일본의 전국시대를 무력으로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정권의 안정과 영토 욕을 채우기 위하여 일으킨 침략전쟁이다.
당시 조선은 일본에 대한 정보가 어두워 이들의 침략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터에 조총이라는새로운 무기로 무장하고 몰려오는 왜적을 막기에는 중과부적이었으나 우리 선열은 의연한 기개로 적과 싸우다 최후를 맞았다.
* 충렬사는 1605년(선조 38년)에 동래부사 윤훤(尹暄)이 동래읍성 남문 안에 송공사(宋公祠, 송상현 사당)를 세워 忠烈公 宋象賢 부사를 모시고 매년 제사를 지낸 것에서 시작되었다.
* 1624년 (인조 2년) 에는 선위사 이민구의 건의로 忠烈祠라는 賜額(사액 ; 사당의 명을 왕으로 부터 하사 받음)받고 부산진성에서 순절한 忠壯公 鄭撥(정발) 장군을 함께 모시게 되었다.
* 이후 1652년(효종 3년)에는 충렬사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선열의 충절과 학행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강당과 동서재를 지어 安樂書院이라 하고,사우祠宇(사당)와 서원書院(교육)의 기능을 갖추었다.
* 1709년(숙종 35년)에는 충렬공과 충정공이 순절할 때 함께 전사한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 교수 노개방, 유생 문덕겸과 양조한, 비장 송봉수, 군관 김희수, 겸인 신여로, 향리 송백, 부민 김상 등의 위패를 모신 별사를 옛 송공사 터에 건립하였다.
* 1736년 (영조 12년)에는 별사別祠에 모셨던 분들을 충렬사에 합향(合享 ; 함께 모시고 제사함)하였으며
* 1772년(영조 48년)에 다대첨사 윤흥신 장군을 추배하고
* 임진왜란 때 송상현공과 정발 장군을 따라 순절한 김섬과 애향(각각 부사와 첨사를 모시던 애첩 혹은 관기?
따라 죽어 열녀였다)을 위해 충렬사 동문 밖에 사당을 세웠다. (당시 남존여비 사상이 나타나네.)
* 충렬사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와 보수를 하여 현재 95, 804 ㎡(28,980평)의 경역에 본전 외 15개 동의 건물이 있으며,
* 부산지방에서 순절한 93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5월 25일 온 시민의 정성으로 제향을 올린다.
송상현의 단호한 항전의지의 말 ; 전사이가도난비
2005.5.25.
학정 이재익 시인이 2005년 충렬고 교사 재직시에 학생들을 인솔하고 충렬사 제향에 참석하여 참배한 사진 2매 삽입함.
2005년 5월 25일, 부산충렬사 제향에 참가한 충렬고 학생들. 임진왜란 413주년 추모행사.
2005년 5월 25일, 부산충렬사 제향에 참가한 충렬고 학생들. 임진왜란 413주년 추모행사.
소나무 분재
분재같은 소나무.
분재같은 소나무.
동백꽃은 흐드러지고.
* <기념관> ; 임진왜란 기록화와 유물 전시.
* 맞은 편에는 <소줄당> 이 있다. 안락서원 강당이다.
소줄당은 임진왜란 선열들의 충절은 해와 달보다도 밝고, 태산보다도 높다는 뜻으로,
한유의 '이제송(夷齊頌; 백이와 숙제 칭송 )'에 나오는
'소호일월 부족위명(昭乎日月 不足爲明)
줄호태산 부족위고(崒乎泰山 不足爲高)'
에서 따온 당호(堂號, 집이름)이다.
* 현재 안락서원 현대적 강당 역할은 충렬사 정문 밖, 충렬사를 향한 오른쪽 현대식 건물로 운영되고 있다. <안락서원 교육회관>이다.
* 기념관 바로 아래에는 <의열각> 이 있다. 임진왜란시 외로운 여성들의 혼령을 모신 사당이다.
본전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아래쪽 좌우에 멋진 소나무가 양쪽에 심어져 있다. 이것은 왼쪽 소나무
이것은 오른 쪽 소나무. 옹벽에 덩굴이 무성하다. '송악' 이라고 한다.
오른 쪽 소나무와 옹벽의 송악 덩굴
오른 쪽 소나무
오른 쪽 소나무
오른 쪽 소나무 가지를 자세히 보면 멋진 모양이 있다.
오른 쪽 소나무 가지를 자세히 보면 멋진 모양이 있다.
본전에서 내려다 본 전경
충렬사 기념관의 임진왜란시 부산의 항쟁 기록화
동래부순절도. 송상현 부사.
부산진순절도. 정발장군
부산분전순국도
동래보국충정도
▩ 천곡결서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은 왜적과 끝까지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성이 막 함락될 무렵에 부친에게 하직을 고하는 詩 ‘천곡결서(泉谷決書)’를 남겼다.
외로운 성에 달빛이 흐린데 여러 진은 깊이 잠들고 있도다.
군신의 의는 무겁고 부모의 은혜는 가볍도다.
<原詩> 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 충렬공 송상현 동래부사
1) 1551(명종 6년)~1592(선조 25년),
* 출생지는 서울, 부친 송복흥의 고향은 전남 정읍(아마도 천곡사지 부근일 듯)
* 묘소는 청주(덕흥구 수의동), 순국 직후 왜장 히라요시가 매장한 것을 임진왜란이 진정되자 어느 때인가 청주로 이장하였고, 1610년 광해군 때 비문은 송시열 짓고, 송준길 글씨를 씀.
2) 본관 여산, 호 천곡(泉谷)
3) 1576년 별시문과 병과 급제
4) 경성판관, 승정원 등, 춘추관, 공조, 호조 정랑, 경성판관, 배천군수 등 역임
5) 종계변무사(명이 이성계가 이인임 자라고 틀린 호적 고집한 것 고쳐달라고 청원하러 간 사신)의 질정관으로 명에 갔다 옴.
6) 사간원 집의, 사재감 군자감 正 거쳐서, 1591년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 승진하여, 동래부사로 부임함(임진왜란 1년 전)
7) 임진왜란시, 1592년 음력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한 왜적이 동래성에 도착해
* 협박 ; 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 달라)
* 송부사는 목패로 응답 ; 戰死易假道難(싸워서 죽을 망정 길을 비켜주기 어렵다)
* 힘껏 싸우다 중과부적, 함락 직전에 조복을 껴입고, 천곡결서 남기고, 단좌(端坐) 순사(殉死)함. (향년 42세)
* 적장 히라요시가 충의를 인정하여 동문 밖에 장사지내줌.
8) 추증 ; 이조판서, 좌찬성, 시호 ; 忠烈 (충렬공)
9) 제향처 ; 부산 충렬사, 개성 숭절사, 청주 신항서원, 청원 충렬묘, 고부 장충사 등.
내성수사결의도
다대진성결전도
수영유격전투도
[ 題宋公祠 ]
송상현 부사를 추모하는 시, <제송공사> 는 동래부사 이원진의 시라 하는데, 액자에는 이세근 시라? 같은 제목의 시가 또 있나 보다.
임진왜란을 용사의난이라고 표현하였네.
송상현 부사를 추모하는 시 <차운> 소줄당 주련은 동래부사 권이진의 시라하는 데. 액자에는 장곡 박영희? 글씨를 쓴 분인가보다.
충렬사 송악 덩굴. / 송악은 선운사에 가장 멋진 것이 있다. (주차장에서 계곡을 따라 절로 올라가는 초입부 언덕에 있다. )
우뚝한 지조의 상징 소나무
3월 4일 현재 충렬사 목련은 이르다. 한 일주일 후면 만개하리라.
충렬사 왼쪽 언덕 위에 있다.
씽가지 소나무
충렬사 매화
3월 4일 현재
위패를 모신 가장 위쪽 본전 왼쪽에 장애인이 드나드는 길의 문옆에 가장 멋진 매화나무가 비교적 이른 시기에(3월 4일) 꽃을 화려하게 피운다.
본전의 좌측에 노약자 출입문.옆에 매화가 가장 멋지다.
상춘객 여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