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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장
"으음!"
백산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신이 돌아온 백산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광경은 자신의 사부와 비슷한 수염을 가지고 있는 중년인의 모습이었다.
"왜 나는 기절했다 깨어날 때마다 남자가 있는 거냐고. 여자가 걱정스런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진맥을 하고 있었던지 백산의 손목을 쥐고 있던 인물이 한순간 멍한 얼굴이 되어 백산을 내려다보았다. 기절했다가 깨어나는 놈치곤 이상한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산의 몸에 힘이 돌아오고 사물이 점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 눈을 비비던 백산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인물을 관찰하듯이 쳐다보았다.
옷인지 천 조각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헤진 넝마로 간신히 중요부분만 가린,
불그레하니 혈색 좋은 얼굴에 상당히 젊어 보이는 호남형의 얼굴이 불쾌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 하나 이상한 점은 꽤 젊어 보이는 얼굴인데도 불구하고 온 얼굴을 뒤덮다시피 하고 가슴까지 내려온 수염이었다.
백산은 사부를 경험해봐서 알고 있다. 저렇게 젊어 보이지만 다 속임수다. 실제로는 이미 죽어도 몇 번을 죽어야 될 만큼 나이가 들었을 것이다.
"이것 보쇼, 왜 남의 손은 쓰다듬고 있던 거요?"
자신을 구해주었어도 절대로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 철면피, 자신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고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막말을 하고 있다.
"이런 육시랄 놈! 다 죽어가는 놈을 구해주고, 혹시 잘못될까봐 조석으로 진맥해주었더니 뭐가 어째?"
노인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보통사람이라면 이런 경우에 처하면 먼저 구해주어서 감사하단 말부터 한다. 그게 아니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횡설수설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놈은 정신이 말짱하게 돌아왔음에도 감사하단 말은커녕 자신이 여자가 아닌 것에 더 불만이었고, 진맥하기 위해서 쥐고 있던 손은 쓰다듬고 있다고 표현을 했다.
한마디로 자신이 남색을 밝히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벌컥!
"백랑! 오라버니! 큰 형님!"
조천영과 철목승 그리고 나머지 일행이 일제히 문을 밀치고 들어서며 반가운 표정으로 백산에게 다가섰다.
"몸은 이상이 없는 거죠?"
"이제 괜찮아요?"
"괜찮나?"
두서없이 물어대는 일행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것만 하면 괜찮은데 조천영과 소운은 백산의 몸 상태를 점검하려는 듯이 손으로 이리저리 찔러보기도 하고 탁탁 치기도 하면서 몸의 이곳저곳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만!"
결국 견디다 못한 백산이 소리를 팩 지르고 말았다.
"험! 험!"
조용해진 일행을 향해서 백산이 입을 열었다.
"우선은 몸 상태는 정상! 아픈 곳 없음. 그리고 누님, 나 허리도 멀쩡하오!"
멍--!
오두막이 꽉 차도록 들어와 있던 일행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백산과 조천영을 바라보았다.
허리가 이상 없다니, 그것도 조천영에게만 따로 한 말이었다.
조천영의 얼굴이 벌겋게 붉어졌다.
백산과 처음 관계를 갖던 그날 밤 사부노릇을 한답시고 남자는 허리가 생명이라는 말을 했던 것이 실수였다. 이렇게 공개석상에서 저런 말을 할 줄이야….
얼굴이 붉어진 조천영이 수십 쌍의 눈동자를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허리가 이상 없다니."
조금 전부터 얼굴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던 노인 같지 않은 노인이 백산을 향해서 대뜸 반말을 해댔다.
백산이 고개를 돌려 흰 수염의 인물을 쳐다보았다.
"거 이상하단 말이야! 생긴 것은 분명 사오십 대인데 저놈의 수염은 팔십 대란 말이야…."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긴 수염의 인물을 쳐다본다.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뭔가 할 말이 있어서 고개를 돌린 것 같은데 수염만 응시하다 보니 자신의 할 말을 잊어버리고 딴 소리를 하고 말았다. 아마 댁은 누구냐고 묻고 싶었을 것이다.
"섯다!"
"넷! 큰 형님!"
"설명해 줘, 남자에게 왜 허리가 생명인지…."
그곳에 있는 인물들이 왜 허리에 대해서 모르겠는가! 다만 보름간이나 기절했다 깨어난 그 상황에서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그것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어쨌든지 형님이라는 사람의 명령을 받은 섯다는 설명을 시작했다.
"예! 그러니까 남자에게 있어서 허리라는 것은 무인에 비교하자면 이 도(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 즉 여자를 제압하기는 했는데 이 도가 없다면 상대를 죽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입니다."
"……?"
"섯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쉽게 좀더 그럴싸…아냐 됐어!"
좀더 쉽게 설명하라고 다그치던 백산이 갑자기 섯다를 중지시키며 일행을 쳐다보았다.
"여기서 결혼한 사람? 쉽게 말하면 마누라 있는 사람. 어이! 거기 중년 늙은이, 댁은 결혼해본 적 있소?"
백산에 의해 중년 늙은이라 불린 인물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육시랄…."
"아 됐어요, 됐어! 화내면 정신 건강에 안 좋으니까 그만하고 내 말 마저 들어요.
가만히 보니 여기는 마누라 있는 사람이 석 대인 한 명을 빼고는 아무도 없네? 그런고로 허리의 중요성에 대해서 아무리 떠들고 이야기를 해보아야 말짱 도루묵이라 이거야.
그러니 전부 잊어버려요, 전부!"
말을 마친 백산은 '누님, 나 허리 괜찮아!' 하면서 조천영을 찾으러 나가버린다.
남아있던 일행은 모두가 멍한 얼굴로 백산이 나간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으아악!"
중년 늙은이의 입에서 분노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 것도 묻지도 못한 채 새카맣게 어린놈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고 말았다. 그것도 중년 늙은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철 대협! 저놈이 원래 저렇게 싸가지가 없는가?"
철목승을 쳐다보는 중년 늙은이의 눈동자가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고정하십시오, 어르신. 말하는 것은 저래도 악의는 없습니다. 참으십시오, 어르신!"
놀라운 일이었다. 이 중년 늙은이가 누구이기에 천하의 철목승이 어르신이란 표현을 쓰고 있는가.
"내 아무리 이곳에서 백 년을 살았다지만 저렇게 버릇없는 놈은 처음일세."
철목승의 얼굴을 보아서 참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성격상 이런 것을 보고 그냥 넘어갈 인물은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강호를 횡보하던 백여 년 전만 해도 천장지옥마(千丈地獄魔)하면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쳤을 정도로 공포의 대명사였다.
비록 세월이 흘렀고, 주변 여건으로 인하여 그의 성정이 많이 무디어지기는 했다지만 그래도 욱 하는 그의 성미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때 조천영을 찾기 위해 나간 줄 알았던 백산이 문을 벌컥 열며 다시 들어왔다.
그리곤 중년 늙은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주위를 빙빙 돌더니 느닷없이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이며 '이게 몇 개로 보이오?' 하는 것이었다.
조천영으로부터 그의 나이를 듣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자 들어왔음에 틀림없었다.
순간 천장지옥마의 눈동자가 홱 돌아가며 백산을 향해서 거칠게 일장을 내질러 버렸다.
그렇게 나이를 처먹고도 멀쩡하느냐는 표현을 손가락 두 개를 가지고 했으니 아무리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도 화가 날 만도 했다.
쾅!
거친 타격음과 함께 백산이 문을 뚫고 그대로 날아갔다.
"아이고, 세상 사람들아 여기 좀 보소! 저기 나이는 백오십이나 처먹고 죽지도 못한 노망난 늙은이가 젊은 사람을 잡네. 아이고! 아이고!"
밖으로 튕겨나간 백산의 입에서 중년 늙은이를 욕하는 곡소리가 귀혼곡에 메아리쳐 울렸다.
천장지옥마의 얼굴이 붉게 물들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대기 시작했다.
공경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이제 정신을 차린 놈답게 가만히 있어주기만 해도 된다. 그런데 노망난 늙은이라니….
"이런 육시랄 놈!"
"어르신 제발 참으십시오. 저를 봐서라도 제발…자네들 뭐하나 빨리 저 친구 좀 말리지 않고!"
철목승이 노인네를 결사적으로 붙잡으며 광견조를 향해서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은 석숭과 나머지 일행이 재빠르게 밖으로 뛰어나와서 백산을 향해 다가왔다.
백산의 이죽거림으로 천장지옥마라는 늙은이도 화가 났지만 백산 또한 이 늙은이에게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노인의 무공은 자신이 보기에도 거의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늙어가던 얼굴이 다시 젊어질 정도이면 가히 짐작하고도 남지 않겠는가.
그런 자가 밖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던 자신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런데도 구해주는 것은커녕 경고 한번 해주지 않았던 행사가 괘씸했다.
"백 소협, 자네 왜 그러나? 저분의 연세를 알고서도 그렇게 하는 건가?"
광견조와 같이 나온 석숭이 쓰러져 있는 백산을 향해 도대체 노인네의 성질을 돋우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천장지옥마는 생명의 은인이질 않는가.
"저분이 자네나 여기 이 친구들을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 주었는지 아는가? 마치 친 혈육처럼 돌봐주셨네. 그런 분에게 감사의 말씀은 못 드릴망정 도발하는 언행만 하고 있으니…."
도대체 백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백산이 정신을 잃고 난 후 이곳에 도착한 그들은 막 동굴에서 나오던 천장지옥마를 만났다.
불영전륜쇄옥진을 뚫고 온 자신들을 놀라운 눈으로 쳐다보던 그는 인사니 뭐니 하는 것도 없이 광견조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마기에 당한 이들을 그대로 방치하면 결국 실혼인(失魂人)이 아니면 백치가 된다고 했다.
주변에서 키우던 약초를 가져와서 광견조 전원에게 먹이고, 부러진 팔다리를 치료하는 의술은 놀라웠다.
마치 수십 년간을 의생으로 살았던 사람처럼 정확하게 광견조원들을 치료한 것이다.
그리고 철목승과 석숭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천장지옥마(千丈地獄魔) 갈태독(葛太獨).
그 노인의 이름이었다. 천장지옥마라는 말에 깜짝 놀란 사람은 강호무림에 대해서 누구보다 박식하던 석숭이 아니라 철목승이었다.
마도의 인물답게 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백년 전의 공포의 대명사로 알려졌던 인물, 또한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천고의 의술로 생사지옥마(生死地獄魔)라고까지 불리던 사람이 그였다.
그가 익힌 천장지옥마공은 마공 서열 이위의 무공으로 철목승의 천마심공 다음으로 강한 무공이다.
그것도 천마심공처럼 정공의 장점을 취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순수한 마공, 즉 정통마공인 것이다.
따라서 강호를 횡보(橫步)하다 우연히 발견한 이곳 유형마지는 그에게 있어서 최고의 연공장소였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천장지옥마공을 연성하기도 전에 쌍천불인 마료신승과 마불신승이 이곳에 들른 것이다. 갈태독과 마불신승은 서로의 말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삼 일간을 싸웠다.
역시 소림이었다. 마공 서열 이위의 무공을 익힌 갈태독이 마불신승에게 지고 말았다.
조건이란 단순한 것이었다. 자신들이 유형마지를 없앨 테니까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마료신승이 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무공을 전혀 모르던 마료신승이 평생을 연구했다는 불영전륜쇄옥진의 설치는 귀혼곡 내부에 만 개의 불상을 만들어 세우는 작업부터 시작되었다. 만 개의 불상이 진의 모태였던 것이다.
그 불상들이 마기를 흡수하여 전륜나한에게 공급하는 것이었다.
백산 일행을 그렇게 고생시켰던 전륜나한이 유형마지의 마기 덩어리였고, 그 마기가 부활의 비밀이었다.
거의 오 년 만에 모든 작업이 끝났다.
평생을 연구한 마료신승조차도 해진이 불가능한 '불영전륜쇄옥진'이 귀혼곡을 뒤덮어버린 것이다.
진의 설치를 끝낸 세 사람은 이 귀혼곡을 유형마지로 만들어버린 마의 근원지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찾아낸 곳이 지금 이 초막이 지어진 곳의 앞에 있는 거대한 동혈.
십여 일 동안 무엇인가를 상의하던 두 사람은 급기야 마불신승이 그 동혈 속으로 뛰어들었고, 마기는 현저하게 약해졌으나 한번 들어간 마불신승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몇 년 후 마료신승은 자신을 화장해서 그 뼈와 재를 섞어 이곳에 고루 뿌려달라는 유언과 함께 열반에 들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이곳을 떠나려 했던 갈태독의 발목을 잡는 사건이 생겼으니, 바로 마료신승의 육체를 태워, 재와 뼈를 뿌려준 곳에서 조그마한 풀들이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마기에 의해서 완전히 황폐해진 이곳에서 생명의 창조를 목격하고 말았다.
마기를 흡수하기 위해서 한달 여 동안을 지체했던 것이 백 년으로 변해버린 순간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이야기해주마! 백산이라고 했더냐?"
언제 나왔는지 천장지옥마 갈태독이 철목승과 같이 나와서 두 사람의 옆으로 자리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가문의 원수를 찾아 평생 손에 피를 묻히고 살았던 나는 불심이 뭔지 모른다.
그러나 마료성승과 마불성승의 위대함은 알고 있다. 이 세상에서 어느 누가 이런 곳에서 자신들을 희생하여 악을 제거하려 하겠느냐? 누가 알아준다고…."
갈태독이 얼굴을 들어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이 일생을 통해 유일하게 존경했던 두 인물을 회상하고 있는 듯 보였다.
마료신승의 유해를 뿌린 이곳에서 마불신승을 기다리며 무공을 완성하기로 했다.
천장지옥마공을 대성하는 데 십 년이 걸렸다. 저 동굴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마기를 가지고 무공을 대성한 것이다.
무공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긴 그는 동굴 속을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러나 절반도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나올 수밖에 없었다.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를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다시 무공연마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마료신승이 남기고 간 심득과 자신의 천장지옥마공, 그 두 가지를 가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그가 다시금 마혈 속으로 들어간 것은 백산 일행이 이곳에 도착하여 전륜나한과 한창 싸움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는 그 끝을 보았다, 악마의 입처럼 거대한 공동(空洞)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마기를.
그러나 마음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마기를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되돌아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기절한 백산과 광견조원들을 싣고 들어오는 철목승 일행을 만나게 된 것이다.
백산이 보기에도 갈태독의 무공 경지는 가공했다. 천하제일인인 철목승도 한 수 아래로 보았던 그가 감탄할 정도였다.
무공을 익힌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백산은 강호 무림상의 최고 강자라는 인물들을 대부분 접해 보았다.
자신의 사부와 남궁세우 그리고 철목승, 풍신개, 조천영까지, 모두 강호상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막강한 고수들이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노인네에 근접한 고수는 아무도 없었다.
나이가 백오십이라는데 이미 반로환동(返老還童)을 겪었는지 오십 대 정도로밖에 보이질 않는다.
백산이 처음으로 자신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일 것 같은 고수를 만난 것이다. 지금껏 백산을 기분 나쁘게 했던 원인이었다.
자신들을 도와주지 않아서 심통을 부렸다고 했던 것은 핑계일 뿐이고 자꾸만 위축되는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었다.
백산의 몸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투기였다. 자신도 모르게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에 저절로 투기가 발산되고 있는 것이다.
옆에 있던 철목승이 흠칫 놀라며 백산을 쳐다보았다. 그도 백산의 몸에서 발산되는 기운을 느낀 모양이었다.
'놀랍군! 나조차도 아무런 느낌 없이 대하던 친구가 어르신을 보고 투기를 내뿜는다? 그럼 이 친구의 능력이 저 분과 대등하단 말인가….'
자신의 능력으로도 그 끝을 알 수 없을 것 같던 갈태독에게 경쟁자로서 투기를 느끼고 있는 백산에 대해 철목승이 놀라고 있었다.
이제서야 백산의 끝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영감! 나하고 한판 합시다!"
가만히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고 있던 백산이 느닷없이 갈태독을 향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의 눈은 어떤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고 상대를 만났다는 즐거움이 넘치고 있었다. 무공을 익히기 전 뇌룡현에서 장한수와 싸울 때의 바로 그 표정이었다.
백산의 상태를 인지한 갈태독의 얼굴이 경이롭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이놈이 벌써 고독을 느끼는 것인가? 나이 서른도 채 안 되는 녀석이 벌써 절대자의 고독을….'
갈태독의 느낌은 정확했다.
백산이야 워낙 무신경한 탓에 설사 그런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갈태독의 강함을 보고 싸우고 싶다는 열망을 느꼈다는 것이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나지막이 중얼거린 갈태독이 백산의 열망에 불타는 눈동자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좋다! 그럼 너도 나의 부탁 한 가지를 들어줄 수 있겠느냐?"
"마혈(魔穴) 말입니까?"
갈태독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백산을 알고 있는 모든 이들, 석숭과 석두 그리고 광견조원들의 눈빛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백산이 어떤 인간이었던가! 하늘이 무너져도 손해나는 일은 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백산 아니던가. 그런 그가 비무 신청을 하는가 하면 저 노인네의 부탁을 들어준단다.
그것도 공짜로.
그러나 단 한 사람 철목승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자의 반열에 올라있던 그만이 백산의 기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또다시 목표가 생겼군….'
철목승이 두 사람의 절대자를 쳐다보았다.
지금껏 자신의 무공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냉추렴이 졸라서 마지못해 나온 외유였지만 지금 생각하니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무는 몸을 좀 회복한 후에 하는 것이 좋겠다. 너나 나나 몸 상태가 최상이 아닌 것 같으니…그리고 네놈 몸속을 한번 살펴볼 수 있겠느냐?"
"무슨 소리요, 몸속을 살펴보다니?"
"네 녀석의 몸은 말이다, 네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느 무엇도 침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건 개인적인 호기심이다."
"보쇼.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백산이 순순히 오른팔을 내밀었다. 기절해 있을 때 실컷 만져놓고 뭘 또 그러냐는 표정이었다.
"이놈아, 내 진기를 받아들여야지?"
진기를 밀어 넣으려던 갈태독이 백산을 향해서 소리를 팩 질렀다.
또다시 단 한 치도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튕긴 것이다.
"어떻게 하는 건데?"
"뭐라고? 네놈이 어떻게 무공을 익혔는지 모르겠다. 이질적인 기운이 들어오면 몸속으로 유도하면 될 것 아냐?"
"진작 이야기할 것이지 큰소리는…."
* * *
"똑바로 안 박아? 야 모사, 너 이 자식, 제대로 안 해?"
소살우를 비롯한 광견조 열두 명 전부가 땅에 머리를 박고 입에서 단내가 풍길 정도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 새끼들아 그러고도 너희들이 형제야? 어떻게 형님과 형수를 공격할 수가 있는 거지? 소살우, 입이 있으면 말 좀 해봐. 새끼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정파인들에게 당해서 의식을 잃고 있던 소살우와 모사 그리고 마차 길을 만들기 위해서 과도하게 힘을 쓴 나머지 기절했던 광견조.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지도 못했고, 자신들이 저질렀던 사건을 듣기는 했지만 그때의 기억이 없는 고로 전혀 현실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건을 빌미로 새벽부터 시작해서 저녁때가 다된 지금까지 이렇게 기합을 받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의 머릿속에 우리를 형제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눈곱만큼만 있었어도 그럴 수는 없는 거야!
부모가 정신을 잃었다고 자식을 죽이는 것 보았어? 혈육을 보게 되면 잃었던 정신도 돌아오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 새끼들아! 자, 복창한다. 광풍 제 일계!"
"광풍대원은 한 형제다!"
"소리가 그것밖에 안 돼? 더 크게!"
벌써 수천 번도 더 외친 것 같았다.
새벽부터 시작된 광풍 제 일계의 복창은 종일토록 계속되었고,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광견조원들 전부가 목이 쉬어서 목소리조차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그깟 정파 놈들에게 얻어터지고 도망을 쳐, 일어섯!"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기합을 받은 광견조원들인데도 마치 강시의 움직임처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퍽! 퍽! 퍼퍽! 퍽!
백산의 몸이 비호처럼 날아다니며 광견조원들에게 주먹을 날리고 있으나 누구 하나 쓰러지는 이도 신음을 지르는 이도 없었다.
묵묵히 침묵으로 백산의 손과 발길질을 받아내고 있었다.
광견조원들에게 내리는 구타도 기합과 마찬가지로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석숭이 와서 말리고 소운이 와서 백산을 말리려 했지만 백산의 눈빛 한번에 아무 소리 못하고 초막으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그리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잘 들어라! 이 세상 그 누구도 너희들을 다치게 할 수 없다. 강호 무림인뿐만 아니라 그놈이 설사 이 나라의 황제라 할지라도 절대 안 된다. 알겠나!"
"옛-!"
광견조원들의 쉰 대답소리가 절벽을 타고 울렸다.
"너희들과 나를 다치게 하거나 죽일 수 있는 자는 우리 자신들밖에 없어야 한다.
저번처럼 너희들이 미친다거나 또 패악무도한 인간이 되었을 경우 그 단죄는 우리가 한다.
내가 죽여준다는 말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미쳐서 인간이 되지 못할 때 나를 죽여줄 수 있는 자는 너희들이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런데, 지금 네놈들의 실력으로는 나의 털끝 하나 건들지 못한다 말이다.
그런 너희들에게 어떻게 내 목숨을 맡길 수 있겠나? 실력을 쌓아라! 실력을…
거대한 힘 앞에서 진식(陣式)이 다 무슨 필요가 있느냐, 태풍 앞에 놓여진 가랑잎이 무슨 힘을 발휘하겠느냐. 이겨라! 자신을 이겨라!"
광풍대원들의 죽음은 광풍대만이 내릴 수 있다는 소리였다. 세상 그 누구도 광풍대원을 단죄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자신도 잘못될 경우에는 형제들에 의해서 죽고 싶다는 생각, 그런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멀리 그들이 보이는 곳 초지 끝자락에서 철목승과 갈태독이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 녀석도 알고 있는가! 자신의 운명을."
"아닙니다.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르신."
두 사람이 이미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백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알고 대비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의원다운 말이다. 보통 시한부 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대할 때 두 가지 방법을 쓴다.
환자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고 인생을 정리하게 한다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서 평상시와 다름없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
매일매일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맛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어느 것이 낫다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두 가지 방법이 모두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아마 의원으로서의 갈태독은 전자를 더 선호하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저 친구가 그것을 알게 된다면 스스로 떠나버릴 인물입니다. 행동은 저래도 정이 무척 많은 친구니까요…."
백산을 바라보는 철목승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서려있었다.
더 이상 불행해질 것도 없는 가장 바닥에 있던 저들이 간신히 잡은 행복인데 그것이 사상누각(沙上樓閣)처럼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믿는다네, 자네가 결코 운명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운명이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지 주어진 것이 아니니까 말이네….'
철목승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어둠을 타고 조용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전부 해산!"
백산의 외침소리와 함께 광견조 열두 명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를 악물고 버티기는 했지만 백산의 기합은 너무나 지독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오고 있는데도 광견조의 온몸이 땀에 절어있는 모양새가 그들의 고단한 하루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백산의 마음을 알기에 고강한 무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내공을 운용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기본 체력으로 하루 동안의 기합을 견디어냈던 것이다.
거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광견조를 향해서 초막 안으로부터 조천영과 소운이 음식을 가져오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시작된 광견조원들에 대한 백산의 기합이 아무래도 쉬이 끝날 것 같지 않아 설봉산 입구의 객잔까지 가서 준비해온 술과 음식이었다.
"너무 언짢게들 생각하지 말아요! 동생들이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니까요."
백산의 행동이 너무 과했다 싶었는지 조천영이 대원들을 향해서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형수님! 저희들은 기분이 좋습니다. 지금껏 커오면서 누가 야단친 적도 때려준 적도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에게 매 맞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형님이 그렇게 해주신 겁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말하는 소살우나 듣고 있는 광견조 일행에게서 따스함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들이 왜 야단을 맞지 않고 매를 맞지 않고 컸겠는가.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 당하는 그런 학대를 무수히 받고 자랐을 것이다. 진정 그들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매를 들고 야단을 치는 그런 경우를 당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누가 줄 수도 스스로 가질 수도 없는 존재인 부모, 그런 부모의 정을 느껴보지 못한 이들에게 따뜻함이 쌓여가고,
백산에게 맞아서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어색하게 미소 짓는 광견조원들의 표정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밝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의 괄시(恝視)와 냉대에 대해 유일한 반항이었던 살기 띤 미소가 실제의 훈훈함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은 미약했지만….
"왜? 그렇게 패고 나니 미안하냐? 혼자서 먹게."
초막으로 들어와서 남은 음식 중 이것저것을 집어먹고 있는 백산을 보며 갈태독이 비아냥거렸다.
왜 안 그렇겠는가. 이른 새벽부터 시작해서 저녁 무렵까지 기합을 주고 패고 했으니 아무리 잘못을 했다 해도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계면쩍은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 어기적거리며 초막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미안하긴 뭐가? 난 또 나를 위해서 맛있는 것을 준비했나 싶어서 들어왔더니 똑 같잖아!"
변명 같지 않은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술을 한 아름 안고 밖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어나갔다.
딴에는 미안하기도 했다.
방심한 것도 아니고 실력이 모자라서, 그것도 강호 구대문파라는 대 문파의 검진에 갇혀서 그렇게 된 것을 가지고 너무 힘들게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형수님이 따로 준비한 것이 없었나 보죠?"
광견조 일행은 백산이 없어서 섭섭했는지 말투에는 반가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언제 기합을 받았냐는 듯 태연한 행동이었다.
"자, 한잔씩 하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백산이 술병을 들어올렸다. 이런 분위기가 좋았다. 가족 같은 분위기, 가장 바라던 분위기이기도 했다.
밤새도록 이어질 것 같은 술자리가 파하고 광견조원들이 하나둘씩 그 자리에서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어느새 들고 나왔는지 조천영이 이부자리를 가지고 와서는 일일이 광견조원들에게 덮어주고 있었다.
"저들이 이제는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아요!"
광견조원들에게 이불을 덮어준 조천영이 백산 곁으로 웃으면서 다가왔다.
이 사람만 만나면 모두들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자신도 그렇고, 불행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작지만 자산들만의 행복을 만들어가는 것 같아 흐뭇했다.
"저들은 나보다 더 한이 많은 이들이야. 나야 복수할 대상이라도 있지만 저들은 그런 것도 없잖아요.
자신들을 버렸던 부모와 멸시했던 세상, 그것이 바로 저들의 한(恨)이지.
그 한이 저들을 이만큼 성장하게 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고 또한 더 이상의 성장을 가로막는 것이기도 하고요…."
한으로 쌓인 마음이 단기간에 그들을 고수로 만들었으나 그 한들이 초극으로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스스로 극복해 나가야지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어찌되었던 북경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이놈들을 일류무사 초입까지는 만들어놓고 말겠어!"
순간 자는 줄 알았던 광견조원들의 몸이 여기저기서 움찔거렸다.
백산과 조천영이 호젓하게 있는 것을 본 광견조 일행들은 두 사람만의 은밀한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자는 척 귀를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다리던 무아의 경지에 드는 작업은 하지 않고 북경 가는 길이 힘들어진다는 말만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자려는 순간 드디어 그들의 귓가로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왔다.
저쪽으로 멀어지고 있던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데 열두 명의 광견조원들이 자신들이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며 상체를 들어올렸다.
"섯다! 시작할 것 같냐?"
그래도 그 방면에서 가장 선수인 섯다를 향해서 잔뜩 기대 어린 표정으로 소살우가 물었다.
"잠깐만요. 형님이 보채기는 하는 것 같은데…조금만 더 기다려봐야 될 것 같은데요?"
귀를 세우고 있던 그들에게 허탈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비무(比武)하는 날이잖아요, 몸이나 제대로 추슬러요!"
조천영이 실망스런 말을 남기고 초막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쩝! 밖에서 하는 것도 제법 운치가 있을 것 같구먼! 너무 추우려나…."
"…?"
백산의 중얼거리는 소리에 웃음을 참던 광견조 일행이 일제히 자리에 누우며 '야! 아무 일 없단다. 자자, 자!' 하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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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감사합니다
다음을 기다릴게요.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즐감
항상 감사 합니다 즐독 하고 갑니다
즐감합니다
감사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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