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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항구> 1639년 클로드 로랭作 캠버스에 유채, 루브르
클로드 로랭(1600~1682)은 프랑스 화가이나 생애 대부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1630년대 말기에 그는 이탈리아에서 선도적인 풍경화가로 대우받았다. 점진적으로 작품의 크기는 커졌으며 인물수는 적어졌다. 이 작품은 마치 연극무대처럼 배경과 인물들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계산되어 배치되었다. 건물을 구성하는 선들을 눈으로 따라가 보면 화면중심을 향하고 있다. 원근의 소실점을 태양 가까이 설정한 것이다. 화가는 이것으로 간단히 원근을 해결했다. 더불어 태양 주변에 있는 색채의 농담이 미묘한 빛의 계단을 만들어냈다. 해지는 항구 풍경을 이처럼 멋들어지게 그려낸 화가는 없었다. 화면속의 모든 색채와 육지를 향해 낮게 스며드는 석양빛, 물체의 위치, 원경의 수평선과 지는 해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관람객의 시선을 모은다. 그뿐만아니라 전경의 인물들은 균형있게 배치되었다. 하늘과 바다를 무대의 배경처럼 이용해 그위에 인물들과 건물을 배치시켰다.
<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치는 풍경> 1662~1663년 클로드 로랭作 캠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이 그림에서는 화면 전체의 장면을 현실과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금빛 광선이나 은빛 대기 속에 이 모든 것을 무르녹아 들어가게 묘사했다.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처음으로 사람들의 눈을 뜨게 만든 화가가 바로 클로드 로랭이었고, 또 그가 죽은 뒤 거의 백 년쯤 되었을 때 여행객들은 그의 기준에 따라서 실제의 풍경을 평가하곤 했다. 만약 어떤 풍경이 클로드가 그려 보여준 시각 세계를 그들에게 연상케 하면 그것을 아름답다고 찬미하고 거기에 앉아서 야유회를 즐기곤 했다.
<세비아의 물장수>1619~1620년 디에고 벨라스케스作 캔버스에 유채. 런던 웰링턴 박물관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1599~1660)는 카라바조의 ‘자연주의’의 방침을 흡수하여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데 그의 예술을 바쳤다. 위 그림은 그의 초기 작품의 하나로 세비야 거리에서 물을 팔고 있는 노인을 그린 것이다. 지치고 주름살 투성이 얼굴에 누더기 망토를 걸친 노인과 둥근 모양의 토기 항아리, 유약을 바른 단지의 표면과 투명한 유리잔에 어른거리는 빛 등 모든 것이 너무나 실감나게 그려져 있어서 그 물건들을 마치 손으로 만져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이 그림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여기에 표현된 물건들이 아름다운지 아닌지 또는 이 장면이 중요한지 아닌지 물어볼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색채도 엄격하게 말해서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갈색과 회색, 녹색 계통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전체는 너무도 풍요롭고 원숙한 조화 속에 어울려 있어 이 그림 앞에 한번 서 본 사람은 결코 이 그림을 잊을 수 없게 된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 1649~1650년 디에고 벨라스케스作 캔버스에 유채,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
100년전 티치아노가 그린 <교황 바오로3세>작품을 보고 벨라스케스의 원숙한 붓놀림과 색채의 섬세한 조화로 표현해 낸 그림이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다. 사진만으로는 원화가 어떤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피카소도 이 작품을 44번이나 그렸고 고야, 마네, 베이컨 등 많은 작가들이 존경하는 스승으로
그의 그림을 모사하였다.
<시녀들> 1656년 디에고 벨라스케스作 캔버스에 유채.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하면서 가장 비밀스런 그림이라고 한다. 중심부에는 마르가리타 공주가 있고 공주 좌우로 두 시녀가 있다. 화면의 오른쪽 아래에 난쟁이 두 사람이 있고 왼쪽 중간에 서있는 사람은 화가 벨라스케스이고 화면 중심의 거울에 필리페 4세 왕과 왕비가 있다. 오른쪽 중간에 시녀 둘이 있고 마지막으로 문 밖에 집사가 앞쪽을 보고 있다. 상상해 보면 예술을 사랑했던 필리페 4세는 궁정화가인 벨라스케스를 가까이 두고 왕실 그림을 그리게 했다. 어느날 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데 공주와 어릿광대가 와서 재롱을 부리는 것을 보고 재미있는 그림을 그리게 된다. 상상력이 뛰어난 화가는 왕과 왕비를 작은 거울속에 숨겨버리고 마르가리타 공주를 중심으로 시중드는 시녀와 난쟁이를 그린다. 거기에 그림그리는 화가 자신까지 등장시켜 세상에서 가장 궁금한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필리페 4세 가족이 주인공이라 하기엔 왕과 왕비가 너무 미미하고 중심에 서있는 공주와 시녀 두명과 난쟁이 두명도 나름 무게감이 있기에 주인공인 듯하나 화가 자신을 화면에 등장시키는 기발함은 벨라스케스 자신이 주인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화가는 왕과 왕비를 보고 있고 왕과 왕비는 공주를 보고 있고 시녀들은 공주의 시중을 들고 있으며 등장인물의 시선은 서로를 연결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벽 거울에 보이는 왕과 왕비는 벨라스케스가 보고 있는 곳에 왕과 왕비가 있을 것이란 추측을 하게하고 바로 그 지점이 관람객의 위치가 된다는 것이다. 캔버스의 한정된 공간을 거울을 이용하여 확장된 공간을 연출한 것이 <시녀들>을 더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고 있다. 이 외에 여러 학자들의 상상과 주장이 있다.
<야경-야간순찰> 1642년 렘브란트 반 레인作 캔버스에 유채, 암스텔담 국립미술관
렘브란트(1606~1669네델란드)는 스페인의 벨라스케스와 벨기에의 루벤스와 함께 17세기 최대의 화가로 손꼽힌다. 그의 작품은 대상을 묘사하는데 있어서는 사실적인 표현을 구사하지만 화면 전체를 어둡게하고 중심과 강조점만 밝게 처리하여 드라마틱한 효과를 내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한다. 이때문에 오늘날 그를 가리켜 ‘빛과 어둠의 화가’라고 일컫는다.
<야경>은 지금은 유명한 그림이지만 당시에 인기많았던 렘브란트를 매장시킨 그림이기도 하다. 민간경비대로부터 오늘날 단체사진처럼 대원 전원의 모습이 담긴 그림을 그려달라는 의뢰로 그렸더니만 그림에서 몇몇만 밝게 나오고 나머지는 어둡게 나왔다고 하여 이 그림을 의뢰한 경비대는 무척 불쾌해했고 당시에는 일부 사람만 편애했다, 일부에게 돈을 더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렘브란트 그림의 의뢰가 떨어지면서 그를 경제적 나락으로 몰아버렸다. 정작 그를 몰락시킨 이 그림은 그의 대표작으로 재평가 받고 불멸의 걸작으로 추앙받는다. 제목과는 달리 낮이 배경이다. 그림 표면의 색채가 퇴색되고 먼지와 때가 끼어서 더 어두워 보이는 것이었는데, 이 때문에 야경이라고 잘못 제목이 붙어왔다.
<얀 지크스> 1654년 렘브란트作 캔버스에 유채, 암스텔담 지크스 컬렉션
렘브란트의 후원자이자 친구인 얀 지크스의 초상화는 그의 예술적 기량, 즉 금실로 짠 끈의 광택이나 주름깃에 아롱거리는 광선 등을 표현하는 기량을 마음껏 과시했다. 그는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판단할 권리는 화가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러한 완성은 ‘화가가 그의 목적을 달성한 때’라고 했으며 그래서 그는 얀 지크스의 장갑낀 왼손을 단순한 스케치 형태로 남겨둔 채 완성해버렸다. 그럼에도 그러한 것은 오히려 이 인물상에서 느껴지는 생명감을 고양시켜주고 있다. 우리는 마치 이 인물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자화상> 1655~1658년경 램브란트作 목판에 유채, 빈 미술사 박물관
만년의 렘브란트의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분명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그의 추한 모습을 결코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아주 성실하게 관찰했다. 우리가 이 작품의 아름다움이나 용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성실성 때문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인간의 실제 얼굴이다. 여기에는 포즈를 취한 흔적도 없고 허영의 그림자도 없으며 다만 자신의 생김새를 샅샅이 훑어보고, 끊임없이 인간의 표정에 내포되어 있는 비밀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탐구하려는 화가의 꿰뚫어보는 응시가 있을 뿐이다.
<세례 잔치> 1664년 얀 스텐作 캔버스에 유채, 런던 월리스 컬렉션
그 당시의 다른 많은 미술가들처럼 스텐(1626~1669)도 그림만 가지고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여관을 경영하여 돈을 벌었다. 그는 이 부업을 즐겼던 것 같다. 왜냐하면 여관업은 그에게 흥청거리며 노는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그의 희극적인 인물 유형을 모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평민들의 유쾌한 생활의 한 장면인 세례를 축하하는 장면이다. 편안한 방 한 구석에 아기 어머니가 누워 있는 침대가 있고 친구들과 친척들이 모여 아기를 안고 있는 아버지를 둘러싸고 있다. 유쾌하게 놀고 있는 사람들의 여러 유형과 형상들은 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모든 세부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화가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 화면에 혼합시킨 솜씨가 매우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전경에 등을 보이고 서있는 인물만으로도 한 폭의 훌륭한 그림이 되고 있다. 원화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작품의 화려한 색채들이 주는 따사로움과 부드러움을 쉽게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델프트 집들의 풍경-작은 거리> 1658년 얀 스텐作 캔버스에 유채, 암스텔담 미술관
화창한 볕이 아까웠는지 문 앞에 의자를 내어와 한가하게 레이스를 뜨는 아낙네, 그 앞에서 서로 머리를 박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열린 문으로 보이는 비질을 막 마치고 손을 씻는 하녀. 붉은 색 벽돌 건물과 잘 어우러져 한적하기 이를 데 없다. 어디에서 꼭 본듯한 골목풍경이다.
<뿔로 만든 술잔이 있는 정물> 1653년 윌렘 칼프作 캔버스에 유채, 런던 국립박물관
<도자기, 과일, 앵무조개 잔이 있는 정물> 1660년 윌렘 칼프作 캔버스에 유채
정물화는 미술가들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훌륭한 실험장이 되었다. 윌렘 칼프(1619~1693네델란드) 같은 화가는 빛이 색유리 위에서 어떻게 반사되고 흩어지는지를 연구했다. 그는 또 색채와 질감의 대조와 조화를 연구하고, 화려한 페르시아 양탄자와 번쩍이는 도자기, 다채로운 색깔의 과일, 윤이 나는 금속 장식물들을 참신하게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전문 분야를 파들어가는 이러한 화가들은 스스로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그림의 주제란 과거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과 사소한 사물들로도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우유를 따르는 하녀> 1658년 요하네스 베르메르作 캔버스에 유채
베르메르(1632~1675)의 작품 중에서 의미심장하고 거창한 주제를 다룬 것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작품은 전형적인 네델란드 가옥의 실내에 서 있는 순박한 인물들을 보여준다. 위의 그림은 인물이 들어있는 정물화이다. 이렇게 단순하고 가식이 없는 그림이 불후의 명작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 규명하기는 쉽지 않다. 명작이 된 이유중 하나는 바로 질감, 색채 및 형태들을 치밀하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베르메르의 표현 기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밝고 정확한 화면 속에는 고심하거나 힘들여 제작한 흔적이 없다. 형태를 흐릿하게 만들지도 않고 윤곽선을 부드럽게 만들었고 그러면서도 입체감과 견고함의 인상을 주었다. 그의 최고 걸작들을 그처럼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드러움과 정확성을 불가사의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결합시킨 데 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1665년 베르메르作 캔버스에 유화
‘북구의 모나리자’라고도 불리운다. 이름에서 암시하듯이 소녀가 걸고 있는 진주 귀걸이를 그림의 초점으로 사용하였다. 베르메르 특유의 미묘한 빛의 표현, 단순하지만 조화로운 구성, 선명한 색체가 특징이다. 빛의 효과를 사용하여 두 번 이상의 붓터치로 그려진 진주는 왼쪽 위부분이 밝게 빛나고 있으며, 아랫부분은 하얀 옷깃을 반사하여 부드럽게 비추면서 맑고 투명한 느낌을 준다. 그림에서 머리에 터번을 두른 진주 귀걸이 소녀는 누군가를 보기 위해서 왼쪽 어깨를 틀어 고개를 돌리고 있다. 큰 눈동자와 관능적인 입술, 특유의 시선과 표정이 보는 사람에게 비밀스러움이 어우러진 신비감을 주고 있다.
☆
신교가 교회의 외면적인 치장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면 할수록 로마 교회는 더욱 열렬하게 미술가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 가톨릭 세계는 중세 초기 미술에 부여했던 단순한 임무, 즉 글을 못읽는 사람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역할 이상으로 미술이 종교에 공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술은 글을 못읽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너무 많이 읽은 사람들까지도 설득해서 개종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많은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이 교회를 변형시켜 그 찬란함과 아름다움으로 보는 이를 압도해 버리는 거대한 장식물로 만들기 위해서 소집되었다. 교회당 내부에서 중시되는 것은 세부가 아니라 교회 전체가 주는 전반적인 효과이다. 무대 장식과도 같은 현란한 미술은 주로 잔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 나폴리生)라는 한 미술가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르네상스조각의 거장이 미켈란젤로라면 바로크 조각의 거장은 베르니니였다. 베르니니는 벨라스케스보다는 한 살 위였고 렘브란트보다는 여덟 살이 위였다.
<페르세포네의 납치> 1621~1622년 베르니니作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저승의 신 하데스가 제우스신과 농업의 신 데메테르 사이에 태어난 페르세포네를 들판에서 납치하는 극적인 순간을 묘사했다.
<다윗> 1623~1624년 베르니니作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도나텔로나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이 조용히 서서 생각하는 모습이라면 베르니니의 다윗상은 막 돌을 집어 던지려고 몸을 비틀고 있는 일촉즉발의 순간을 보여준다.
<아폴론과 다프네> 1622~1625년 베르니니作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큐피트의 화살을 맞은 아폴론이 다네프를 쫒자 그녀가 월계수 나무로 변하고 있는 극적인 순간을 보여준다.
<발다키노-천개天蓋> 1633년 베르니니作 베드로 대성당
성 베드로의 무덤위로 실타래처럼 비틀어 놓은 네 개의 나선형의 기둥은 베르니니가 인간의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지붕위 네 귀퉁이에는 조각상이 서있고 맨 꼭대기에는 황금 십자가가 빛을 발하고 있는데 십자가 끝의 높이까지가 29m다 네 기둥안에 중앙제단이 있고 이 제단을 중심으로 네 방향으로 뻗은 홀 안에서 예배를 본다.
<성 테레사의 환희> 1645~1652년 베르니니作 로마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부속 코르나로 예배실의 제단
성 테레사는 16세기 수녀로 그녀가 본 신비스러운 환영을 글로 쓴 유명한 책을 남겼다. 그 책에서 그녀는 천상의 환희를 느낀 순간을 이야기하면서 주님의 한 천사가 황금으로 된 뜨거운 화살로 자기 심장을 꿰뚫자 아픔과 함께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로 충만됨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베르니니가 감히 표현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순간의 광경이다. 우리는 그 성녀가 구름을 타고 황금빛 햇살의 형태로 위로부터 쏟아지는 빛줄기를 향해서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을 본다. 천사가 공손하게 그녀에게 다가서고 있으며 성녀는 기절한 채 황홀감 속에 빠져있다.
이 인물들이 배치된 방법이 대단히 교묘해서 이들은 제단이 제공해주는 훌륭한 틀 속에 아무런 받침도 없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위쪽의 보이지 않는 창으로부터 광선을 받고 있는 듯이 보인다. 우리는 그때까지 미술의 영역에서 한번도 시도된 일이 없는 얼굴 표정의 격렬함이 표현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라오콘과 두아들>의 두상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베르니니의 옷주름 처리 방법도 그 당시로서는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즉 고전적인 방식으로 인정되어온 품위 있는 옷주름으로 흘러내리게 하지않고 흥분과 움직임의 효과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옷자락이 몸부림을 치듯 펄펄날리게 했다. 베르니니의 이러한 강렬한 효과들은 얼마 안 가서 유럽 전역에 퍼져 모방되었다.
성 베드로 광장의 설계자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이다.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 대성전을 설계하면서, 가톨릭교회가 그곳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있다는 뜻을 전하고자 했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을 머리로 두고, 반원형의 회랑 두 개를 팔로 묘사함으로써 성 베드로 대성전이 두 팔을 벌려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성 베드로 광장 양편에 각각 네 줄로 늘어선 토스카나식(도리아식보다 더욱 단순한 양식) 기둥 284개와 벽에서 돌출된 기둥 88개로 이루어진 베르니니의 회랑은 1656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667년에 완공되었다. 16m 높이의 원기둥꼴 대리석 기둥 위에 있는 140개의 성인상은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조각한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연회>1750년경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플로作 프레스코 베네치아 라비아 궁
18세기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대부분 뛰어난 실내 장식가들이었으며 치장 회반죽 세공과 대형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는 기술에 있어서 유럽 전역에 이름을 날렸다. 그 가운데 제일 유명한 사람은 베네치아 출신의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플로(1696~1770)이다. 이 그림은 티에플로에게 화려한 색채와 호화스러운 의상 묘사를 과시할 모든 기회를 준 주제인 <클레오파트라의 연회>이다.
그것은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위해서 사치에 달한 향연을 베푼다는 이야기인데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값비싼 산해진미의 요리들이 쉴 새 없이 들어오지만 클레오파트라는 감명을 받지 않았다. 그녀는 자부심이 강한 주인 안토니우스에게 자기는 그가 지금까지 제공한 어떤 음식보다도 더 값비싼 음식을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그녀의 귀걸이에서 그 유명한 진주를 떼어내어 그것을 식초에 녹여 마셨다. 티에플로의 프레스코는 그녀가 안토니우스에게 그 진주를 보여주는데 한 흑인 하인이 그녀에게 유리잔을 내밀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와 같은 프레스코는 그리기에도 재미있었을 것이며 보기에도 역시 즐겁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이렇게 재치가 넘치는 작품들이 그 이전 시대의 보다 차분한 작품들보다 영구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장식적인 그림은 이것이 놓여있는 장소를 벗어나면 그 의미를 상실한다고 본 것이다.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시대가 끝나고 있는 것이다.
☆ <로코코>
바로크 시대를 이어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들뜬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의 유행을 말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로코코는 바로크나 르네상스처럼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조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18세기는 로코코 뿐만아니라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가 병존하는 시대이며, 이 시기에 유행하고 나타난 예술양식들은 서로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카테라 섬으로의 순례> 1717년 앙투안 바토作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그리스의 키테라 섬은 고대 비너스 신전이 모셔진 사랑의 성지이다. 이곳은 비너스(아프로디테)가 바다의 물거품에서 탄생하여 조개껍데기를 타고 파도 위를 떠돌 때 바다 아래로부터 홀연히 솟아서 비너스를 맞아주었다는 섬이다.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가 지은 ‘아프로디테 송가’에는 비너스 여신이 서풍의 입김을 타고 섬에 당도하자 계절의 여신 호라이가 비너스를 맞아주었다고 한다.
바토(1684~1721 프랑스)
는 사랑의 섬을 순례하는 젊고 기품있는 남녀들의 사랑 이야기를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순례’라는 제목의 설명으로는 키테라 섬에 당도하여 하선하는 순간인지, 키테라 섬에서 한 나절을 보낸 청춘남녀들이 이윽고 일상으로 귀환하기 위해 배에 오르는 순간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다수의 등장인물로 채워진 구성은 자칫 산만해지기 쉬우나, 바토는 화면을 좌우로 나누어 배경의 명암을 구분하고, 섬의 완곡한 능선을 따라 배치된 인물들에게 사랑의 여러 성숙 단계를 할애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줄거리를 짜는데 성공했다.
<그네> 1768년 프라고나르作 캔버스에 유채, 런던 월레이스 컬렉션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1732~1806프랑스)의 로코코 시대의 관능과 쾌락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얼핏 보면 한 여성이 풀숲에서 단지 그네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지만 이 그림에는 수많은 재미있는 도상들이 있다. 여성의 뒤편에는 그네를 끌어주는 조금은 나이가 들어보이는 남성이 있고, 여성의 앞에는 뒤로 넘어져 여성의 치마 속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 남자가 있다. 또한 여성의 왼쪽 신발은 벗겨져 저 멀리 날아가고 있다. 젊은 남자의 머리위에는 사랑의 신 큐피드가 여성을 바라보면서 입을 손가락으로 막고 있는데, 큐피드가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하는 것을 보면 그네를 타는 여성과 그 앞의 남성은 매우 비밀스러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젊은 남녀의 비밀스러운 밀회를 적나라하지 않고도 흥미롭고밝게 그려놓은 이 그림은 꼼꼼이 보면 볼수록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만든다.
<구리냄비, 자기단지 등이 있는 정물>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作
<시장에서 돌아옴> 1738년 샤르댕作 캔버스에 유채,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궁전
<감사 기도> 1744년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作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귀족풍의 몽상적인 로코코 미술이 퇴조하면서 화가들은 당대의 보통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는 감동적이거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샤르댕(1699~1779프랑스)은 위 그림에서 한 여인이 식탁위에 저녁을 차리면서 두 아이들에게 감사 기도를 드리라고 말하는 소박한 장면을 보여준다. 샤르댕은 이러한 서민 생활의 평온한 광경을 좋아했다. 눈에 띄는 효과나 날카로운 비유를 추구하지 않고 가정적인 정경의 시정詩情을 느껴 화폭에 담은 면에서 그는 네델란드의 화가 베르메르와 유사하며, 색채는 고요하고 은근하다.
<볼테르 상> 1781년 장 앙투안 우동作 런던 빅토리아 박물관
장 앙투안 우동
(1741~1828프랑스)은 사실주의 조각의 선구자이며, 특히 흉상 조각가로 유명하다. 볼테르의 날카로운 기지와 통찰력있는 지성과 또한 위인의 깊은 동정심을 느낄 수 있다.
<조지 워싱턴> 1788년 장 앙투안 우동作 버지니아주 의사당
워싱턴이 대통령이 되기전 미국 독립 전쟁을 마치고 퇴역한 장군으로서 군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편히 서 있는 모습이다. 이 상의 오른쪽 외투깃에는 단추 하나가 떨어져 나가 있다. 이는 그가 이룬 업적에 비해 의외로 느슨하고, 형식에 집착하지 않는 소탈한 성격임을 드러내 주는 치밀한 디테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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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고전주의>
기존의 왕족과 귀족 중심의 바로크, 로코코 미술에 대한 반발로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적 예술로부터 영감을 받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프랑스 미술사조.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면서 신 고전주의 미술가들은 정권을 미화하는 예술작품을 생산하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년 자크 루이 다비드作 캔버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자크 루이 다비드
(1748~1825프랑스) 대표적인 신 고전주의 화가
<암살당한 마라> 1793년 자크 루이 다비드作 캔버스에 유채 브리셀 벨기에 왕립박물관
프랑스 대혁명의 혁명가들은 자신들이 영웅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들 당대의 사건들이 그리스와 로마 역사의 여러 일화들과 마찬가지로 화가의 주목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대혁명의 지도자 중 한사람인 마라(Marat)가 광신적인 반혁명파의 젊은 여자에 의해 목욕탕에서 피살되었을 때 혁명정부가 내세우는 ‘공식화가’였던 다비드는 그를 대의명분을 위해 죽은 순교자의 모습으로 그렸다.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1801년 다비드作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박물관
<나폴레옹1세의 대관식>1805~1807년 다비드作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예식중 나폴레옹은 교황이 머리에 왕관을 씌우려는 순간 잽싸게 그것을 빼앗아 자기머리에 썼다. 지켜본 참석자들이 망연자실한 사이 자기 아내인 죠세핀의 왕관을 자기가 씌우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교황에게서 뺏은 왕관은 월계수로 만들어진 로마 황제의 왕관인데 이것은 자기 위치가 과거 로마제국의 황제와 같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죠세핀에게 왕관을 씌우는 것은 자기가 무너뜨린 부르봉 왕가의 권한을 자기가 이어받았다는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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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형식을 중시하고 이상화된 미를 표현하고자 한 고전주의에 반하여 형식을 탈피하고 개인의 자유로운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낭만주의 화가들은 유럽의 이곳 저곳에서 각자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다양한 그림, 개인적 신비체험, 무의식, 미지의 세계등을 채택하여 그렸다. 고전주의는 형식적이고 균형적이지만 낭만주의는 감성과 개성을 중시한다. 또한 고전주의가 국가의 위대함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낭만주의는 개인적인 감정과 꿈을 보여준다.
<먼지중의 티끌> 1779년 프란시스코 고야作 동판화
열등아가 반성할 때 쓰는 종이 모자를 쓴 노파가 이단 심문 판결문의 낭독을 듣고 있다. 주석은 다음과 같다. ‘이것이 뭐란 말인가. 당신들의 수발을 들며 당신들의 치다꺼리를 도맡았던 이 갸륵한 여인이 이렇게 취급받다니 대체 이것이 뭐란 말인가’ 당시 종교재판소의 횡포를 고발하고 있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나타난다> 1779년 고야作 동판화
잠들어 있는 사람은 고야 자신이다. 주석은 다음과 같다. ‘이성에 버림받은 상상력은 불가사이한 괴물을 낳는다. 이성과 하나로 합쳐지면 상상력은 모든 예술의 어머니가 되고 경이의 원천이 된다’
<재단사가 할 수 있는 것> 1779년 고야作 동판화
사람의 손철럼 뻗어있는 나무에 성직자의 옷을 입혀 설교자가 손을 치켜든 모습으로 형상화 하였다. 그 앞에 홀린 듯한 여인과 분별없는 군중을 배치하였다. 성직자들이 그들의 신앙심보다는 복장에 의해 존경받는다는 사실을 꼬집고, 대중들의 어리석음과 성직자들의 위선을 고발하고 있다.
위 작품들은 판화집《카프리초스》의 일부분으로 1779년에 간행된 80점의 판화로 이루어진 판화집《카프리초스》는 당시 스페인 사회의 구태의연한 악폐와 인습, 위선자, 어리석은 남녀관계, 매춘부, 수도회의 타락, 이단 심문, 무능한 정치가, 비참한 민중의 모습을 계몽과 자유, 이성의 시각에서 묘사한 것이다. 그림 80점은 아무런 연결없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다. 이는 고야가 당시의 종교재판소를 의식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판화집은 카툰의 시초로 평가받기도 한다.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파괴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대담한 붓터치 등은 후세의 화가들, 특히 마네와 피카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
1800년~1801년 고야作 캔버스에 유채 프라도 미술관 소장.
위 그림은 카를로스 4세가 궁정화가인 프란치스코 고야에게 그리도록 명령한 그림이다. 혁명의 불길 속에서도 부르봉 왕가는 건재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는데 고야는 훈장에서부터 의상까지 색과 빛의 마술을 그려내는 듯한 아름다움을 낳았다.그러나 왕은 중심부에서 물러나 있고 왕비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왕비의 모습은 전반적으로 천박하게 그려진 반면에 왕은 무기력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기울고 붕괴되어 가는 운명에 아무런 저항의 힘도 보이지 않는 왕족의 연약성이 모두의 얼굴에 역력히 나타나 있어, 그 묘사는 자칫 가혹하리만큼 날카롭다. 가장 왼쪽 그늘에 있는 남자는 고야 자신이다.
마하 연작(캔버스에 유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은 고야의 널리 알려진 그림들 가운데 하나이다. 1800년에 <옷벗은 마하>를 그렸고 1803년에 <옷입은 마하>를 그렸다. <옷벗은 마하>는 서양 예술 최초로 등신대 여성 누드로 평가받는데, <옷을 벗은 마하>는 신이 아닌 인간을, 그리고 누구인지 모르는 인간(정확히는 성경이나 신화에 등장하지 않는 인간)의 누드를 적나라하게 그렸다는 점, 심지어 모델이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점 때문에 종교 재판에도 회부되어 그림에 옷을 입히라는 압력을 받았다. 이에 고야는 그림에 옷을 입히는 것을 거절하고 <옷입은 마하>를 새로 그렸다.
<1808년 5월 3일> 1814년 고야作 캔버스에 유채 프라도 미술관
1808년에서 1814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간에 반도 전쟁이 일어났다. 고야는 프랑스 대혁명을 지지하였지만 자신의 조국 스페인을 침략한 프랑스군의 만행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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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이후 그림의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하는 새로운 분위기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입었던 분야는 풍경화였다. 그때까지 풍경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 왔었다. 특히 시골의 집이나 공원, 또는 멋진 경치를 그려 생계를 꾸려왔던 화가들은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18세기 말엽 낭만주의 정신을 통해 다소 바뀌었으며 위대한 화가들은 풍경화를 새로운 권위로 끌어 올리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디도> 1815년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作 캔버스에 유채 런던국립미술관
윌리엄 터너(1775~1851영국)는 여러 곳의 풍습과 풍경을 주로 그렸으며, 특히 빛의 묘사에 획기적인 표현을 낳은 화가이다. 후에 문학가 러스킨이 격찬하여 명성이 높아졌으며, 일생 동안 풍경화를 계속 그린 화가로서 17세기 프랑스의 클로드 로랭을 능가하는 것이 그의 생애의 염원이었다.
<전함 테메레르호> 1839년 윌리엄 터너作 캔버스에 유채 런던국립미술관
전함 테메레르는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 함대를 물리쳐 영국의 시대를 열게 된 유명한 전함이다. 1838년 퇴역하게 된 테메레르가 검은 굴뚝에서 연기를 뿜어내는 증기선에 이끌려 해체장으로 가는 장면이다. 불 타는 듯한 석양에 옛 영화를 상징하는 거대한 전함이 증기선에 끌려가는 모습에서 과거의 명성이 저문다는 향수와 상실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증기선은 새로운 근대 문명의 도래를 상징하고, 색체를 통해 애뜻한 감정이 전달된다. 이와 같이 터너의 작품은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따뜻한 인간애가 느껴진다.
<눈보라 속의 증기선> 1842년 윌리엄 터너作 캔버스에 유채, 런던 테이트 갤러리
윌리엄 터너(1775~1851영국)의 작품은 빛으로 가득차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닌 환상 세계를 그렸지만 그것은 정적인 세계가 아니라 동적인 세계였으며 단순한 조화의 세계가 아니라 현란하고 화려한 세계였다. 터너의 작품 중에서 가장 대담한 것의 하나로서 눈보라 속의 증기선을 그린 것이다. 이 소용돌이 치는 구도를 아래그림 블리헤르의 바다 풍경과 비교해 보면 터너의 접근 방식이 얼마나 대담한지 알 수 있다.
해풍에 흔들리는 네델란드 군함과 수많은 범선> 1640~1645년경 지몬 데 블리헤르作 런던 국립미술관
<건초 마차> 1821년 존 컨스터블作 캔버스에 유채 런던국립미술관
윌리엄 터너와 함께 영국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칭송받는 존 컨스터블(1776~
1837), 소박한 시골 풍경을 정감있고 아름답게 그려낸 화가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성서나 신화의 이상화되고 엄숙한 풍경들이 추앙받았기 때문에 그의 시골 풍경그림들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평범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서른 아홉이전 까지 단 한점의 그림도 팔 수 없었다.
그의 작품들은 오히려 후대에 와 칭송받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그의 풍경화는 그리고자 하는 장소에 직접 나가 관찰한대로 그렸기 때문에 순간적인 빛과 자연현상이 섬세하게 나타나있는 것을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상상한 것을 방안에서 그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참신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후에 이런 그의 작품은 바르비종파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스톤헨지> 1836년 존 컨스터블作 수채화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
컨스터블(1766~1837영국)은 틀에 박힌 수법들을 경멸했다. 실제의 자연보다 더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묘사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그가 원한 것은 가식적인 포즈나 허세가 전혀 없는 진실, 그저 자신의 눈에 충실하려는 것뿐이었다.
* 막간에 김상용이
제공한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