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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치체제의 이해: 수령제와 권력세습의 내재논리 북한노동당
2005/01/10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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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치체제의 이해: 수령제와 권력세습의 내재논리
원제
鐸木昌之, {北朝鮮: 社會主義と 傳統の 共鳴} (東京大學出版會: 1992)
번역
스즈키 마사유키(鐸木昌之) 저. 유영구(兪映九) 역. {김정일과 수령제 사회주의』. 서울: 중앙일보사. 1994.
I. 책의 의의: 실증적 연구
이 책의 원제목은 {북조선: 사회주의와 전통의 공명}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책의 의의로 북한의 수령제와 후계자 구축의 상관관계를 1차 자료에 근거하여 실증적으로 설명하려 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수령제 형성과정과 김정일 후계자체제 성립과정을 이러한 체제가 성립하게 된 체제 내부적 논리를 중심으로 설명하였다는 관점에서 북한정치 내부를 독해해 내는데 중요한 기여를 한다는 점 또한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은 북한정권이 어떻게 김일성 후계체제를 준비 해왔는가, 즉 북한이 아버지에서 아들로의 이행을 위하여 어느 정치체제 보다 치밀하게 준비해왔음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분야의 독보적인 연구성과이다.
이 책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저작집, 로동신문, 근로자, 조선로동당 등에서 발행한 거의 모든 서적과 믿을 만한 2차 자료를 근거로 한다. 북한연구에서 국내의 2차 자료에 근거한 재생산적 논문이 주도하는 학계의 현실에서 원사료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실증주의 학문정신은 과소평가 될 수 없다. 시기적으로 김일성이 죽기 전인 1992년 6월에 출간된 이 책은 당시의 이데올로기에 휩쓸리지 않고 북한정치체제를 바로 이해하려고 시도한 몇 권 안 되는 책의 하나로서 그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북한연구는 난해한 퍼즐풀기이다. 북한은 우리와 같은 민족으로 동일한 역사적 배경과 언어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사실로는 가장 이해하기 힘든 나라가 되어 있다. 북한에 대한 연구가 많은 이유도 어떠한 해석도 사실로 검증하기 힘든 북한의 폐쇄성 때문이다. 거기에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라는 창을 가지고 북한에 접근했기 때문에 북한은 이해하기 힘든 상대였다.
이에 반하여 책의 저자인 스즈키 마사유키는 이데올로기의 선입관에서 벗어나 북한의 입장에서 북한을 바라볼 필요성을 지적한다. 송두율이 "내재적 접근"이라는 방식으로 북한을 독해해 내려고 했다면, 이종석은 "내재적-비판적 접근방법"을 고수하여 왔다. 이 책은 두 접근법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연구대상의 현황보다는 현상의 내재적 논리를 연구하는 것을 그 목표로 했다. 거기에 역사적 실증주의 접근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론적 접근으로 저자는 김일성의 후계체제 준비와 김정일의 후계자 지위 확보를 위한 노력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마치 김일성과 김정일은 "한 배를 탄" 긴밀한 상호의존의 관계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우리가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권력이양을 비난하며, 권력승계 과정에서 김정일의 역할을 수동적으로만 파악한 것은 어떻게 보면 북한권력 승계에 관한 "전문적 연구업적"을 찾기 힘들었다는 의미에서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제까지 남한에서는 북한 내부정치를 "북한 내부의 창(논리)"이 아니라 "남한이라는 외부의 창(논리)"을 통해 바라보기 때문이다. {김정일과 수령제 사회주의}는 이 부분에 대한 국내학계의 공백을 메워주고 있다.
II. 책의 내용과 쟁점
1. 주체사상과 유일지도체제
스즈키 마사유키는 스스로도 이 책이 "북한정치"와 "북한의 정치체제"를 이해하려는 시도로 쓰여졌음을 밝히고 있다. 독재적 지도자의 존재, 단일 이데올로기, 일당지배, 대중동원, 계획경제로 특징 지울 수 있는 북한 체제의 기원을 찾기 위하여 해방 후 소련군 점령 하에서 스탈린 체제가 도입된 시기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스즈키는 기존의 북한연구처럼 해방전후사에서 그치지 않고 김일성을 거쳐 김정일에 이르는 북한체제 전체를 이해하려 한다. 따라서 현재 김정일 체제의 핵심은 김정일이 아직 자신의 목소리로 북한을 통치하지 않는 이상 주체사상과 유일체제, 수령제, 혁명의 계승이며 이 용어들은 `북한적 현상'(이종석: 52)을 이해하는 키워드(keywords)이기도 하다. 스즈키는 이러한 용어들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캐고있다.
그러면 주체사상과 유일지도체제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김정일은 주체사상을 "김일성 동지의 사상, 리론, 방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김정일이 김일성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한 김정일주의는 곧 주체사상인 것이다(이종석: 53). 주체사상의 원리로는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에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도가 필요하며 이에 따라 "유일지도체계"가 탄생하게 된다. "유일지도체계는 조선로동당을 비롯한 전체 북한사회를 관통하는 지도체계로서 오늘날 북한사회 조직운용의 기본구조"를 이루고 있다(이종석: 63). 하지만 사실은 "주체사상의 담론으로서의 유일체제가 아니라 유일체제의 담론으로서 주체사상이 선행되었다"(이종석: 63)는 이종석의 지적은 스즈키 마사유키가 빠뜨린 중요한 관찰이라고 하겠다.
2. 수령제 사회주의
최근 김일성 사후 김정일의 권력계승 이후에도 다른 공산주의 국가와는 달리 -대다수의 예상과도 달리- 4년이 지나도록 북한체제는 큰 변동이 없다. 아니 사실은 어느 국가의 정치체제와 비교해도 북한은 해방 이후 내정변동의 진폭이 거의 없었다. 특히 1960년대 후반에 지도층 내의 대규모 노선대립과 권력투쟁이 끝나고 김일성체제가 완성된 이후 북한체제는 대단히 안정(?)되었다. 그 이유를 스즈키 마사유키는 사회의 고도화된 조직화와 "주체사상"이라는 체제 이데올로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조직화되어 있는 북한의 경우 거의 모든 인민이 어느 조직에든 반드시 가입하며 직장, 지역조직, 학교조직, 여성조직 등으로 복합적, 중층적으로 조직화되어 있는 것을 지적한다. 당원의 수도 전인구 약 2천 2백만 명 가운데 3백만 명 정도가 당원으로 관측되므로, 적어도 주민 7명에 1명은 당원이며 성인인구를 기준으로 하면 그 비율은 더욱 높아지는 진다는 것이다. "주체사상"이라는 체제 이데올로기는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색채를 매우 짙게 나타낸다. 구체적으로 보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 사상에서 주체라는 원칙은 북한의 대내외적인 정책에 충실히 반영되고 있다.
스즈키는 이 책에서 북한체제의 최대의 특징으로 최고지도자의 존재와 그 역할을 지적하고 있다. 최고지도자인 김일성의 경우 처음에는 2차 세계대전 직후의 동유럽나라들의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스탈린의 권위를 배경으로 삼은 지도자에 불과하였으나, 소련에서 진행된 스탈린 비판 이후에 반대파의 숙청에 성공하고 진정한 독재자이자 조선혁명의 최고지도자로서 위치를 굳혔다고 평가한다(p.18). 이러한 최고지도자는 "수령"으로 불리게 되고, 수령은 "인민대중의 운명을 개척하는 령도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수령은 "당의 최고령도자이며 당의 령도는 곧 수령의 령도"이다. 한마디로 수령은 "뇌수가 인간활동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스즈키는 지적한다. 수령제의 핵심인 "수령을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유일중심으로 보는" `사회정치적 생명체' 개념에 주목한다.
따라서 북한체제는 "수령제" 사회주의라고 불릴만하다고 스즈키 마사유키는 수령제 가설을 내세운다. 그는 북한의 "수령제란 수령의 영도를 대를 이어 계속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체제"라고 정의한다(p.20). 이후로 스즈키는 수령제의 제도화와 김정일 지도체제의 형성과정을 설명한다. 그리고 4장과 5장에서는 수령제를 정당화하는 북한의 논리를 설명하고 이것이 정치적 신화(神話)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정치신화라는 "허위"도 북한 "현실의 한 주요한 측면"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3. 항일민족해방투쟁과 체제수립
스즈키 마사유키는 김일성체제 정통성의 근원을 북한이 주장하는 데로 항일민족해방투쟁으로 보고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충실히 서술하며 체제 성립과 유지를 밑받침해 온 항일 빨치산들의 활동도 함께 설명하고 있다. 김일성은 1935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2독립사 제1단 제3지대장으로 문헌에 이름이 처음 등장하며, 이후 김일성은 양정우 산하의 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 사장, 제2방면군 군장으로 활약하였다. 김일성의 활동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보천보 전투로서 1937년 6월 김일성 부대가 국경지대인 함경남도 보천보의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고 도주 도중에 혜산에서 경찰부대와 교전한 사건이다. 하지만 1938년 후반 이후 일본·만주군의 가혹한 토벌작전으로 동북항일연군은 실질적으로 만주에서 유격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주보중, 장수전, 김일성, 김책 등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1940년 12월에서 이듬해 1월 사이에 부대를 이끌고 소만국경을 넘었다고 스즈키는 설명한다. 이 부분에 관하여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의 저자 서대숙은 회의참석이 아니라 일본군경의 토벌작전을 피해간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서대숙: 44). 상황적으로 평가할 때 스즈키 마사유키는 북한의 1차자료를 대체적으로 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질적으로 회의 참가보다 토벌작전을 피해 국경을 넘어 도피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소련으로 국경을 넘은 빨치산들은 일부는 우스리스크 부근에서 야영을 건설하고 소련극동군의 지도하에 정치군사훈련을 받았으며, 1942년 7월 소련은 훈련 중인 항일연군을 교도여단으로 개편하고 소련극동방면군 보병 제88특별교도여단 (다른 이름으로 동북항일연군교도여단)으로 재편하였다. 여단장에 주보중, 참모장에 최용건, 정치위원 강건, 제1교도영 영장에 김일성 등이 임명되었다. 이로부터 김일성이 살아 남은 항일빨치산 가운데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3번째 서열에 올라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즈키는 1945년 9월 19일 김일성이 소련군점령하의 북한으로 돌아왔다고 주장함으로써 가짜 김일성 논쟁(서대숙: 49)이나 귀국일자에 대한 논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 스즈키는 김일성과 빨치산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하고 있다. 즉 김일성 등 만주에서 유격활동을 한 공산주의자들은 한국공산주의운동의 "전통"과는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대신 이들은 다른 조선공산주의자와는 달리 소련극동군과 관계가 강하였다. 이 점 때문에 해방 당시 소련군점령하의 북한에서 다른 공산주의자들에 비해 크게 유리한 입장에 섰다. 또 이들은 일본/만주군경과 오랫동안 유격전을 전개했기 때문에 결집력이 다른 조선민족해방 그룹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했다. 더욱이 그들은 소련극동군의 정치군사훈련을 받아 민족해방운동 세력 가운데 유일하게 근대적, 조직적 교육을 받은 집단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김일성은 만주에서 항일유격투쟁을 지도한 여러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가 조선인 항일유격투쟁가들 중에서 최고의 지위에 있었던 것도 아니며 혁명운동의 경력이 가장 긴 것도 아니었다. 다시 말하여 김일성이 당시 최고의 공산주의 지도자로 당연히 해방된 조선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북한의 주장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지위 상으로 김일성보다 위에 있었던 인물은 최용건이다.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가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지만 지금까지도 제1차 사료에 의해 실증된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소련군정 당국, 최종적으로는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때 소련의 선택은 어쩔 수 없었기도 하고 여러 대안들 가운데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여기서 스즈키는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즉 북한 김일성 주체사상의 사상적 기원을 -북한의 공식적인 입장과 같이- 항일투쟁의 경험에 두는 입장이다. 만주에서 항일유격 활동을 하던 시기 소련 및 중국공산당과의 사이에서 이들이 "소수민족"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고, 중국인과의 상호불신, 소련극동군과의 지도관계를 둘러싼 대립은 자신들의 투쟁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김일성 등에게는 굴욕감을 안겨줬고, 그들의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했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북한이 주장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항일투쟁시기에 주체사상이 창시된 것은 아니지만 주체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은 항일투쟁의 경험에 있다고 하는 견해이다. 이와는 달리 서대숙은 한국전에서의 경험, 즉 연합군의 북진으로 오갈 곳이 없던 북한을 도와준 것은 소련이 아니라 중국이었다는 북한의 역사적 경험에 기초한 "반소 및 친중적 노선"에서 발전된 것으로 이해한다. 주체의식이란 "외국의 지배 밑에서 겪었던 희생에 대한 반응"이라고 평가하고 이후의 주체사상의 확립을 외부환경의 변화에 대응하는 전략으로 본 것과는 다른 해석이다. 스즈키의 논지를 받아들인다면 서대숙의 의문, 즉 "왜 주체 지향의 조선의 수령이 해방된 한국의 점령군에 의한 5년 동안의 신탁통치에 복종하는가?"(서대숙: 271) 그리고 해방 직후에 5년 동안 한국의 신탁통치를 찬성했던 것처럼 김일성의 주체적이지 못한 수많은 사례들을 설명하기 힘들다.
스즈키는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역사를 파벌투쟁의 역사로 이해한다. 한국전쟁은 김일성에게로의 권력집중을 야기했으며 빨치산그룹이 권력의 핵심을 독점한 이래, 역사의 새로운 `창조'와 이데올로기에서의 `독자성' 추구는 불가피 했다고 한다. 이는 김일성 개인숭배, 나아가 신격화로 이어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1967년 5월 4일부터 8일까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15차 전원회의를 비밀리에 개최하고 연설에서 김일성은 "수령"이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 주체사상이 `수령'론으로 변화되는데 그것은 혁명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수령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 결과 수령의 유일사상인 주체사상은 당의 지도사상이 되었고 그 무렵부터 김일성뿐만 아니라 가족에 대한 숭배가 공식적으로 개시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유일사상체계 확립에서 가장 중시된 것은 혁명전통 교양이었고 김일성의 초기 혁명활동과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이데올로기 확립과 혁명유자녀에 대한 중시 정책이 시작되었다고 스즈키는 지적한다. 이후 김정일은 이 혁명유자녀들을 자신의 친위전사로 흡수하게 된다.
4. 권력계승과 김정일
김일성의 후계 문제에 대한 스즈키의 서술은 상당히 독창적이고 자세하다. 저자에 따르면 북한은 상당 기간 동안 후계자 문제를 고민해왔으며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의 예에서 교훈을 받았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임표의 교훈이 중요했다고 한다.
누가 수령의 위업을 계승하는가의 문제는 어떤 인물이 계승하는가 하는 인물의 문제였으며, 북한의 입장에서 후계자는 "상당기간 수령을 몸 가까이 모시고 보좌하고 수령의 의사를 받들어 당과 국가의 전반 사업과 혁명 및 건설의 모든 분야에서 수령의 령도를 확고히 실현하는 유일한 지도자"여야 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김정일 체제는 김일성의 후광도 있었지만 김정일 자신의 투쟁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입장이다.
스즈키는 김정일 지도체제가 후계자 지명, 후계체제의 형성, 그리고 후계체제의 공개화라는 3단계를 거쳐 형성되었다고 설명한다. 제1기는 1964년 김정일이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 1974년 2월 당비서 겸 정치위원으로 선출되고 당내에서 후계자로 지명되기까지이다. 제2기는 1980년 10월 10일 제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 당비서, 정치국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공식석상에 등장하게된 시기이고, 제3기는 1990년까지로 공개화된 후계체제 시기이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김일성 사후가 제4기로 분류될 수 있겠다.
김정일은 혁명 제1세대와는 달리 북한의 정규 교육세대이며 정규교육 세대의 선발주자이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주체사상과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앞장섬으로서 아버지와 체제유지를 위한 상호의존의 관계를 확립하게 된다. 물론 김일성 역시 스스로 앞장서서 김정일 지도체제의 확립에 노력한다. 김정일을 지지하도록 당조직을 재편성하고 김정일이 이데올로기 해석을 독점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김정일의 당내권력 확립을 위하여 김일성과 김정일이 같은 의사를 가짐을 선전하였다. 즉 수령 김일성과 후계자 김정일의 의사 일체화가 도모되었다. 또한 당원증 재발행과 전당원 심사를 통하여 김정일과 동세대 혹은 젊은 세대로 '신진대사'를 꾀하게 도와주었다. 중요한 것은 스즈키 마사유키의 지적과 같이 젊은 세대들이 주체사상 이외의 다른 사상을 모르며 순수하게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충성이 강했다는 것이다.
1972년부터는 김일성은 군내에서 김정일 지도체제의 형성에 착수하여 군대에서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고 김일성의 사상으로 일색화하여 군내에서 김정일 지도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후계체제 구축의 최종단계는 1990년부터 시작되었는데 1990년 김정일이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선출되어, 김일성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경우 김정일이 전 군사력을 장악하도록 한 것이었다.
5. 한국전통사상과 북한체제
스즈키의 또 하나의 흥미있는 해석은 1977년 수령론이 다시 강조된 이유이다. 이는 김정일 후계체제를 형성하는 단계에서 지도부 내에 균열이 발생했고 이에 대하여 `혁명적 의리'를 강조함으로써 이를 잠재웠다는 것이다. 여기서 스즈키는 북한이 유교적 특성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 수령관의 재해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혁명적 의리, 충성, 효성, 효자, 간신, 불효자 등 여기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한국의 전통적 사유체계에 기원한다는 것이다. 1950년대 혹은 1960년대 중반까지는 북한에서 반영되지 않았던 것이 유일사상체계의 확립 결과 수령에 대한 충성이라는 한국 전통사상이 도입되면서 강조되었다는 해석이다.
다시 말하여 "인간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주체사상이 전통적 사유와 조화되면서 전통적 인간관이 주체사상의 인간관에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김일성을 위한 체제신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별·태양·백두산, 혈맥·지맥·정기 등을 이용한 전통사상이 접맥되었다고 스즈키 마사유키가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김일성의 이름이 金一星에서 金日成으로 된 이유는 "조선 인민을 암운에서 해방의 여명의 길로 이끈다는 샛별(一星)"이 아니라 "조선의 밝은 태양이 된다는 염원에서" "일성(日成)'자를 사용해 김일성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김정일을 사실과는 달리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백두산이 한국인의 시조 단군이 내려온 장소이고 신(神)의 산이라는 한국전통의 도교적 신앙에 근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스즈키는 북한이 남한과의 경제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인민생활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으며, 한국전쟁 이후 달라진 인민의 요구를 맞추기 위하여 선택적 개방과 부분적 개혁으로 정책적 전환을 할 것을 예측하고 있다.
III. 미완의 과제
저자 스즈키 마사유키가 남긴 몇 가지 미완의 과제를 지적하면서 이 글을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북한의 1차 사료에 대한 비판적·분석적 접근이 미약했다. 북한 자료의 특징은 과장과 역사적 왜곡이 심하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철저한 고려 없이 북한의 공식 이데올로기를 여과 없이 수용했다. 둘째, 수령제와 후계체제 형성에 대한 연구가 미미한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일본·미국에서 되어진 기존연구들에 대한 문헌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비교고찰이나 비교분석이 될 수 없었다. 달리 말하면 책이 서술에 치중하고 분석적이 되지 못한 한계를 가지는 이유는 기존 문헌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지나치게 김일성과 김정일 체제수립 과정의 역사 서술에 치중하다 보니 당이나 공식적인 국가기관에 대한 분석을 소홀히 하였고 따라서 북한 정치와 정치체제를 분석·고찰하고자 하는 저자 본래의 의도가 달성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수령제의 형성을 유교적 전통을 포함한 한국의 전통사상과 접목시키는 시각이나 사회적 생명체론에 따른 김정일로의 후계체제 구축을 설명하는 탁월한 분석은 이 책의 가치를 여전히 높여준다.
참고문헌
서대숙. Kim Il Sung: The North Korean Leader.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8. 서주석 역.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청계연구소. 1989.
이종석. {현대 북한의 이해: 사상·체제·지도자}. 서울: 역사비평사. 1995.
최성. {북한학 개론: 김정일과 북한의 정치체제}. 서울: 풀빛. 1997.
http://www.hallym.ac.kr/~iykim/김인영22.hwp
[출처] [펌] 북한정치체제의 이해: 수령제와 권력세습의 내재논리|작성자 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