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모건스탠리 회장, 한국경제 취약성 경고
제2의 글로벌 경제 위기가 한국에 던지는 위험은?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의 아시아 지역 회장이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경제학자인 스티븐 로치가 코리아타임스 경제섹션 비즈니스 포커스에 보낸 특별 기고문을 통해 한국경제와 세계경제가 ‘더블딥’ 위기에 처해있다고 경고한다. 편집자 주
험난한 글로벌 경기회복과 한국경제의 도전
모건스탠리 아시아 회장 스티븐 로치
불과 2년 만에, 세계경제는 다시 침체의 안갯속을 헤매고 있다. 이젠 받아들여야 한다. 금융위기가 남긴 심각하고 오래가는 부작용에는 한국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한국처럼 수출에 의존하는 나라는 원래 전세계 경기의 변동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 의존성은 지난 몇 년간 더욱 심해졌다. 2011년 1분기에 수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50퍼센트나 되었다. 2007년에 36퍼센트였던 것을 생각하면 드라마틱한 증가라고 볼 수 있다.
세계경제가 일반적인 침체와 회복의 사이클을 타고 있었다면, 한국은 지금쯤 세계 경제와 무역량의 회복에 힘입어 순풍에 돛을 올린 배처럼 힘차게 전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시나리오에는 보통 침체의 골이 깊을수록 회복도 빠르고 힘차다. 또 V자 회복기간에는 작은 충격 정도는 버텨낼 수 있는 회복력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금융위기라는 엄청난 충격에 따르는 회복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일반적인, 온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기 사이클과는 다르다. 카르멘 레인하르트와 케네스 로고프가 2009년에 쓴 에서 말했듯이,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이런 심각한 위기 후에 오는 경기와 일자리수의 회복은 느리고 더디다.
이러한 약한 회복은 일반적인 V자 회복과는 달리 외부 충격에 약하다. 연간 3퍼센트 정도로 성장하는 약한 세계경제에 날카로운 충격이 강해지면 이것은 쉽사리 그 무시무시한 ‘더블딥’ 불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위험에 노출된 허약한 경기회복, 이것이 수출에 의존하는 한국경제가 현재 처해있는 상황이다.
현재의 글로벌 경기회복세가 평균 이하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물론 숫자상으로는 좋아 보일 수도 있다. IMF에 따르면 2010년 전세계GDP는 5.1퍼센트 성장했고 올해도 4.3퍼센트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2008년부터 2009년 사이의 경기 대 침체기로 인한 상대적인 효과일 뿐이다. 일반적인 V자 회복과는 거리가 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전세계 경제는 연평균 약 3.7퍼센트씩 성장해왔다. 그런데 지난번 경제위기 때문에 경기가 IMF의 예측치에 맞게 성장한다고 하더라도 2012말 기준 연평균 3.7퍼센트 성장에 2.2포인트나 모자라게 될 것이다. 2012년 이후로 경제가 계속 4.3퍼센트라는 고성장을 유지한다고 가정했을 때에도 (내 생각에는 굉장히 과감한 가정이다) 2015년까지는 장기 성장률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GDP 갭 (잠재성장률과 실제성장률의 차이)는 오늘날의 세계 경제가 위기에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몇 달의 상황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유럽의 국가채무 위기와 일본 대지진, 그리고 국제유가의 상승과 미국 부동산 가격의 재하락 등이 모두 그러한 불안요인이다.
이러한 충격들이 아직까지는 세계 경기회복을 완전히 망가뜨리지는 못했으나 이런 현상들이 한꺼번에 벌어질 경우의 파급력은 우려할 만 하다.
대부분의 소위 전문가들은 더블딥 침체의 가능성을 부인한다. 그들은 현재 상황을 소프트패치 (soft patch: 부드러운 땅, 일시적 어려움이란 뜻)라 부르며, 경기가 빠르게 회복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를 들어 일본의 지진은 복구사업에 들어가는 경제활동으로 인해 경기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며 지진으로 피해 입은 제조업체들의 공급망 역시 금새 복구될 것이라는 예측들이 난무한다. 또 최근 미국이 전략적으로 비축해둔 석유의 일부를 풀어 국제유가를 조정한 것도 마찬가지로 낙관론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최악의 금융위기와 불황을 겪으며 약해질 대로 약해진 세계 경제가, 스스로의 힘으로 경기회복을 할 수 있는 탈출속도에 다다른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저 부드러운 땅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질척질척한 늪에 빠진 것인지도 모른다. 빠르게 성장하는 아시아 일부 지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수출이 아시아 전체 GDP의 45퍼센트를 차지하는 마당에 아시아만 예외로 고성장을 계속할 수는 없다. 최근 중국 산업생산 증가율이 떨어진 것이 바로 이러한 위험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상황 아래서, 한국은 심각한 도전을 맡고 있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선진국 시장에의 의존성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2008-2009년 경제위기 동안 이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2007년 한국 수출품의 미국시장 의존도는 12퍼센트였으나 2011년에는 10퍼센트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유럽시장 의존도 역시 19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일본시장의 비율은 7.1퍼센트에서 6.8퍼센트로 줄었다.
동시에 한국의 수출산업은 점점 중국에게 기대고 있다. 2011년 초 기준 한국 수출액의 중국시장 비율은 23.9퍼센트이고 홍콩을 포함할 경우 29.1퍼센트에 달한다. 금융위기 전보다 2포인트 상승한 수치이다.
중국경제에 대한 한국의 의존성은 양쪽 모두에 위협이 될 수 있다. 단기적으로 보아 중국의 성장률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위험하게 된다. 선진국시장에로의 의존을 줄이면서 중국시장에 대한 의존을 높여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경제는 서방 소비자들로부터의 수요에 달려있다. 그러니 한국은 여전히 선진국 경기변동의 위험에 간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경제에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중국이 지난 32년간 추진해온 수출 위주의 경제모델에서 서서히 내수를 촉진하는 모델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 이러한 점에서 유리한 입지에 위치하고 있다. 전자제품, 자동차부품, 식음료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들이 필요로 하는 수많은 제품을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선진국 시장이 불안하게 남아있는 한 한국과 같은 수출주도 경제는 세계경제 침체의 위협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은 선진국 정부들이 상황파악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직도 경제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쓰였던 긴급처방에만 얽매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위기가 끝난 후 천천히 회복하기 위한 정책이라는 것을 외면한 채.
미국의 예를 보라. 미국연방은행이 썼던 양적완화정책 (QE: quantitative easing)은 처음에는 효험이 좋아서 위기탈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라운드 (QE2)는 고용과 같은 체감경기를 살리는 데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미국의 소비자들은 좀비와 같은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가계부를 알뜰하게 쓰는 법이다. 또 노동자들은 새로운 기술을 배워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유동성을 무제한 공급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럽국가들도 비슷한 착각 속에 빠져있다. 지불할 능력 자체가 없는데, 단지 유동성이 부족할 뿐이라고 믿고 계속 구제금융에 매달리고 있는 형편이다. 구제금융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그리스 같은 나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빚의 함정에서 빠져나가던가 아니면 사회적 합의를 통해 지출을 줄이는 수 밖에 없다. 둘 다 가능성이 희박한 시나리오다.
이러한 미국과 유럽의 상황을 보건대 향후 몇 년간 위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또 이러한 위험을 없앨 수 있는 새롭고 창의적인 재정, 통화 정책이 나올 것 같지도 않다. 정치인들은 짧은 선거 주기에 맞추어 행동하는 특성이 있으므로 언제나 빠른 해결책만을 원한다. 구제금융이나 유동성 추가와 같은 방법들이 선호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정부와 가계가 흑자로 돌아서지 않는 한, 그리고 유럽이 빚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러한 접근법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유동성 공급이나 구제금융은 딱 한가지 효과가 있다. 시간을 버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번다고 해서 구조적인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국가재정의 건전화, 금융투자산업의 건전성 강화, 노동시장의 구조조정 혹은 경쟁력 강화와 같은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있고, 또 시간을 좀 번다고 해서 다음 번에 닥칠 금융위기로부터 쿠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음 번 쇼크가 언제 닥칠지, 어떤 모습으로 닥칠 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이 쇼크라는 말의 정의이기도 하다. 하지만 날이 지면 밤이 찾아오듯이, 혼란을 피할 수는 없다. 정치인들이 구조적인 치유를 위한 정책을 외면하는 현재 상황을 볼 때 또 한번의 성장 위기, 혹은 그보다 더한 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경기회복에 실패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은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가 얼마나 취약해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도 이러한 위험에 예외가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