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명창조 주식회사’ 사장님
귀농 후 농촌지도소의 권유로 4-H 활동을 시작했 다. 4-H 활동을 통해 농업에 대한 나의 신념이 확 고해졌고 일생을 땅을 일구며 살겠다는 다짐을 하 게 되었다. 4-H 활동을 하면서 나는 특히 새로운 종자, 새로운 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남들보다 앞 서가는 기술로 농사를 지으려는 욕 심 때문이었다. 농촌지도소의 자문 도 많이 받았고 시범포 재배도 숱하 게 해봤다.
그것은 때때로 부모님과의 마찰 을 일으켰다. 나이 드신 부모님은 기존에 사용하 던 종자와 기술을 고집하시는 것이었다. 내 의견 대로 밀고 나가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부지런한 사람이 재래 종 돼지로 100근 만들기는 어렵지만, 게으른 사람 이 좋은 씨의 돼지로 100근 만들기는 쉽다’는 사 실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종자를 사용 하면서 소득이 높아지자 부모님도 나를 인정해주 시게 되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나는 새로운 마 늘, 참깨, 고추 종자 등을 주위 농가? 보급시켰다.
남들이 떠나온 농촌으로 돌아가 1985년 11월에는 농협 직원분과 함께 4-H 회장 자격 으로 제 46기 농협지도자교육에 입소하게 되었다.
교육 중에‘ 흙에 살리라’라는 연극이 있었는데, 내 가 주인공이었다. 내용은 도시의 유혹을 뿌리치고 농촌에 정착해 열심히 산다는, 어쩌면 나의 인생과 비슷한 것이었다. 연극이 끝나고 원장님이“ 여러분 은 이제부터 생명창조 주식회사 사장님 이고 배우자는 부사장”이라며 직함을 붙 여주셨는데, 씨앗을 싹 틔우며 농사를 짓 는 우리들의 순수한 마음에 큰 희망을 넣 어주기 위해 이렇게 표현한 것 같았다.
생명창조 주식회사! 어찌 보면 좀 우습 기도 했지만, 농사를 짓고 있는 우리들을 생명을 만들어내는 소중한 존재로 여긴 다는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 래서 난 결심했다. 이제부터 생명이라는 두 글자를 마음에 깊이 간직한 채 자부심을 가지고 농사를 짓기로 말이다.
촛불 의식 행사에서는‘ 스스로를 태워 주변을 밝 히는 촛불처럼 여러분의 헌신적인 노력이 지역 사 회를 밝히고 나아가 나라 전체를 밝힌다’는 말에 크 게 감명을 받았고, 그것이 내 인생의 지표가 되었다.
모르는 것은 물어보고 필요한 것은 스크랩 4-H 활동을 열성적으로 한 나는 1984년 축산후계자 로 선정되어 600만원의 자금을 지원 받아 한우와 홀스타인 숫송아지 7두를 구입했다. 나는 복합 영 농을 했는데, 경지면적이 작아 축산에 비중을 두고 한우 번식우와 홀스타인 비육우를 반반씩 구입한 것이다. 그런데 홀스타인 초유떼기를 구입해서 기 르다보니 경험부족으로 실패와 고생을 많이 했다.
특히 어미 젖에서 대용유로 너무 갑자기 바꾸면서 송아지들이 배탈 증세를 보이며 죽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똑같은 실패를 두 번 다시 하지 않기 위해 기 록을 자세하게 하면서 모르는 것은 편지로 축산 시험 장이나 관계 기관에 물어 보기도 하고 신문에서 필요 한 것들은 스크랩을 해서 과제장을 만들었다.
하나 하나 기록하며 자료를 모으다보니 어느덧 질병 예방과 치료에 자신감이 생겼고 주위에 내 이 름이 제법 알려지게 됐다.
현 무안몽탄농협 조합장님 께서 심한 바이러스 설사 로 인해 치료해도 잘 낫지 않는 송아지 네 마리를 치 료해 보라며 주셨다. 겨울철이라 온돌방에 불을 지 피고 수액주사를 여러 번 맞혔건만 세 마리는 죽고 한 마리만 살아남았다. 마음은 아팠지만 많은 경험 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농가에서 소가 죽으면 가져다가 해부를 해보는 습관도 생겼다. 내 기억으로 약 50마리 정도는 했던 것 같다. 해부를 하면서 죽은 원인을 분석해 보니, 우사 주위에 있는 보온 덮개나 비닐 등이 위에 걸려 있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그래서 송아지나 소를 더 욱 세심하게 돌보게 되었다.
이렇게 현장에서 열심히 공부하다보니 군에서 열리는 4-H 경진대회나 후계자 대회 때 발표도 자 신 있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군 대회 축산분야에서 수년동안 매번 입상하다보니 4-H 도 경진대회에도 출전하게 됐고 전라남도 기술기능경진에 출전해 2 년 연속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 후 전주에서 열리는 4-H 중앙경진대회에 전 라남도를 대표해 출전했다. 축산기술기능경진 분 야에서 전국 1등을 차지하는 영광을 안았다. 마침 그 날이 결혼 후 처음 맞는 아내 생일날이라 큰 선 물을 한 것 같아 무척 기뻤다.
그러나 이렇게 잘 나가던 시절도 오래 가지는 못 했다. 결혼 1년 후 소값이 폭락한 것이었다. 남은 것은 밀린 사료값과 각종 빚이었다. 결국 남아 있던 홀스타인 비육우 17두를 데리고 그 동안 정들었던 고향(무안군 몽탄)을 떠나 이곳(영암군 미암)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마음 고생이 무척 심했고, 물질적으로도 너무 부족했다. 하지만 내 가족들이 있기에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소값 폭락으로 빚더미에 앉기도 이사한 후 4-H와 농어민 후계자, 마을문고, 농민운 동 등 사회 활동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농사일에만 전념하 기로 결심했다. 비닐 하우스를 한 동 한 동 손수 지 어가면서 고추 육묘며 고추 터널 재배, 알타리 하우 스 재배, 담배, 수박 등 복합 영농므 하다보니 살림 에 적지 않은 보탬이 됐고, 수확의 기쁨까지 만끽했 다. 일은 힘들어도 보람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겨울에는 시금치를 캐다 가까운 시장에 팔곤 했는데. 1관에 1,000원도 안되는 가격에다 추운날 고생한 생각에 애들 요구르트나 새우깡 한 봉지 마 음 편히 못 사줬고, 하우스에서 재배한 열무를 우 는 애 달래가며 장에 내다 파는 아내를 볼 때면 마 음이 매우 아팠다.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한 덕분에 생활이 서서히 안정되기 시작했다. 하우스 500평을 짓고 고추 반 촉성 재배도 했다. 가격도 좋고 품질과 작황이 좋아 고소득으로 재미를 볼 수 있었다. 퇴비를 많이 넣고 재배했더니 작황이 좋아 사람 키보다 훨씬 큰 고추 나무에서 엄청난 다수확을 했다.
그러나 또 다른 시련이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 었다. 그 해 가을 태풍 올가 때문에 하우스가 모두 뽑 혀 망가진 것이었다. 육묘 비닐 하우스와 우사 개폐 식 지붕도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태풍‘ 올가’는 많은 재산 피해를 입히고 지나갔다. 인근 주민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복구하는 데는 한 달 이상 걸렸다.
태풍 피해로 하우스 농사는 더 이상 할 생각이 없어졌고, 대신 한우 번식우 마릿수를 늘려 나갔다.
두수가 늘어나다보니 인공수정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농한기를 이용해 인공수정 교육을 받았고 그 해 가을 가축 인공수정사 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직접 인공수정을 하다보니 새로운 생명을 만든다 는 생각에 재미도 있었고 우수한 혈통의 송아지를 얻을 수 있어 좋았다.
나는 지금도 인공수정을 할 때면 맨 처음 인공 수정 시킬 때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간다. 종 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새끼 잘 들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번식을 시작한 초기에는 새끼 한 배 낳고 무조건 비육시켜 고깃소로 팔았다. 그것이 소득면에서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그 러다보니 개량 측면에서 명색이 인공수정 사인 내 소나 다른 농가의 소나 다 를 바가 없었다. 안되겠다 싶어 개 량을 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마침 우리 농장에 910㎏ 나가는 황소가 있었는데, 이 소의 혈통을 계속 이 어가리라 결심했다. 또한 번식능력 이 우수하다고 판단되는 암소들은 비육하지 않고 계속 번식우로 길러 개량을 했고, 유량과 성격이 좋은 소를 골라 우리 농장 소를 상대로 수정란 이식을 했다. 2002년도에는 수정란 이식으 ? 어미소 4두에서 송아지 7두가 태어났고 2003년 에도 6두가 태어나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한우경진대회에서 챔피언 수상 이렇게 개량에 관심이 많아지다 보니 한우경진대 회에도 나가게 되었다. 2001년 11월 9일 전남한우 경진대회에 우리 집에서 기른 황소를 출품해 최고 영광인 챔피언을 차지했다. 더구나 이날이 아내 생 일이라 그 기쁨은 더했다. 그동안 변변한 선물 한 번 해주지 못한 나로서는 이 영광을 온전히 아내에 게 돌리고 싶었다. 그리고 작년에는 다시 번식우 2 마리를 출품했다. 챔피언을 뽑기 위해 많은 소 ?운 데 최종적으로 7두가 결선에 올랐는데, 그 중 우리 소 2마리 모두 결선에 올랐다. 비록 챔피언은 다른 농장 소에게 돌아갔지만, 그래도 우리 소가 최우수 상을 받는 영광을 안았다.
가축 개량을 하다보니 사료에 많은 신경을 쓴 다. 누가 봐도 욕심 나는 소를 만들기 위해 IMF 이 후에는 주위 논과 밭에 농작물 대신 사료작물을 심 어 육성우와 번식우에 청초와 건초로 급여하고 있 다. 또한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폐사율을 줄이 고 있으며 질병치료 보다는 예방에 역점을 두고 사 양관리를 하고 있다.
미네랄 블록을 먹이통에 매달아 언제든지 핥을 수 있게 했으며, 송아지부터 큰 소까지 단계별로 사 료를 급여하고 있다. 송아지 설사 예방을 위해 백신 은 꼭 사용하고, 배꼽 소독은 강옥도로 하고 있다.
젖꼭지는 깨끗이 닦아주며 송아지 설사 치료 시에 는 깔짚을 깨끗이 해주고 송아지를 따뜻하게 한 다 음 따뜻한 물에 전해질 제제와 생균제를 섞어 먹이 면서 항생제와 같이 치료하고, 모든 관심과 애정을 쏟는다. 앞으로의 목표는 송아지 1년 1두 생산이며, 폐사율은 0% 다.
생명에 흥미를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다 보니, 비록 큰 돈은 못 벌었지만 남보다는 조금은 앞서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가축개량을 담당한 한 사람으로서 보다 더 우수한 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그것이 좁 게는 나에게 이익이 되고 넓게는 우리 한우산업이 발전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또한 우리 농장의 자질이 우수한 암소를 이용해 체내 수정란 이식을 확대해 가고자 한다. 그리고 드 넓은 간척지를 이용해 사료작물 재배로 경영비를 최대한 줄이고 조사료 위주로 사양관리를 해 번식 연령을 늘려야겠다
그것은 때때로 부모님과의 마찰 을 일으켰다. 나이 드신 부모님은 기존에 사용하 던 종자와 기술을 고집하시는 것이었다. 내 의견 대로 밀고 나가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부지런한 사람이 재래 종 돼지로 100근 만들기는 어렵지만, 게으른 사람 이 좋은 씨의 돼지로 100근 만들기는 쉽다’는 사 실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종자를 사용 하면서 소득이 높아지자 부모님도 나를 인정해주 시게 되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나는 새로운 마 늘, 참깨, 고추 종자 등을 주위 농가? 보급시켰다.
남들이 떠나온 농촌으로 돌아가 1985년 11월에는 농협 직원분과 함께 4-H 회장 자격 으로 제 46기 농협지도자교육에 입소하게 되었다.
교육 중에‘ 흙에 살리라’라는 연극이 있었는데, 내 가 주인공이었다. 내용은 도시의 유혹을 뿌리치고 농촌에 정착해 열심히 산다는, 어쩌면 나의 인생과 비슷한 것이었다. 연극이 끝나고 원장님이“ 여러분 은 이제부터 생명창조 주식회사 사장님 이고 배우자는 부사장”이라며 직함을 붙 여주셨는데, 씨앗을 싹 틔우며 농사를 짓 는 우리들의 순수한 마음에 큰 희망을 넣 어주기 위해 이렇게 표현한 것 같았다.
생명창조 주식회사! 어찌 보면 좀 우습 기도 했지만, 농사를 짓고 있는 우리들을 생명을 만들어내는 소중한 존재로 여긴 다는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 래서 난 결심했다. 이제부터 생명이라는 두 글자를 마음에 깊이 간직한 채 자부심을 가지고 농사를 짓기로 말이다.
촛불 의식 행사에서는‘ 스스로를 태워 주변을 밝 히는 촛불처럼 여러분의 헌신적인 노력이 지역 사 회를 밝히고 나아가 나라 전체를 밝힌다’는 말에 크 게 감명을 받았고, 그것이 내 인생의 지표가 되었다.
모르는 것은 물어보고 필요한 것은 스크랩 4-H 활동을 열성적으로 한 나는 1984년 축산후계자 로 선정되어 600만원의 자금을 지원 받아 한우와 홀스타인 숫송아지 7두를 구입했다. 나는 복합 영 농을 했는데, 경지면적이 작아 축산에 비중을 두고 한우 번식우와 홀스타인 비육우를 반반씩 구입한 것이다. 그런데 홀스타인 초유떼기를 구입해서 기 르다보니 경험부족으로 실패와 고생을 많이 했다.
특히 어미 젖에서 대용유로 너무 갑자기 바꾸면서 송아지들이 배탈 증세를 보이며 죽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똑같은 실패를 두 번 다시 하지 않기 위해 기 록을 자세하게 하면서 모르는 것은 편지로 축산 시험 장이나 관계 기관에 물어 보기도 하고 신문에서 필요 한 것들은 스크랩을 해서 과제장을 만들었다.
하나 하나 기록하며 자료를 모으다보니 어느덧 질병 예방과 치료에 자신감이 생겼고 주위에 내 이 름이 제법 알려지게 됐다.
현 무안몽탄농협 조합장님 께서 심한 바이러스 설사 로 인해 치료해도 잘 낫지 않는 송아지 네 마리를 치 료해 보라며 주셨다. 겨울철이라 온돌방에 불을 지 피고 수액주사를 여러 번 맞혔건만 세 마리는 죽고 한 마리만 살아남았다. 마음은 아팠지만 많은 경험 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농가에서 소가 죽으면 가져다가 해부를 해보는 습관도 생겼다. 내 기억으로 약 50마리 정도는 했던 것 같다. 해부를 하면서 죽은 원인을 분석해 보니, 우사 주위에 있는 보온 덮개나 비닐 등이 위에 걸려 있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그래서 송아지나 소를 더 욱 세심하게 돌보게 되었다.
이렇게 현장에서 열심히 공부하다보니 군에서 열리는 4-H 경진대회나 후계자 대회 때 발표도 자 신 있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군 대회 축산분야에서 수년동안 매번 입상하다보니 4-H 도 경진대회에도 출전하게 됐고 전라남도 기술기능경진에 출전해 2 년 연속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 후 전주에서 열리는 4-H 중앙경진대회에 전 라남도를 대표해 출전했다. 축산기술기능경진 분 야에서 전국 1등을 차지하는 영광을 안았다. 마침 그 날이 결혼 후 처음 맞는 아내 생일날이라 큰 선 물을 한 것 같아 무척 기뻤다.
그러나 이렇게 잘 나가던 시절도 오래 가지는 못 했다. 결혼 1년 후 소값이 폭락한 것이었다. 남은 것은 밀린 사료값과 각종 빚이었다. 결국 남아 있던 홀스타인 비육우 17두를 데리고 그 동안 정들었던 고향(무안군 몽탄)을 떠나 이곳(영암군 미암)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마음 고생이 무척 심했고, 물질적으로도 너무 부족했다. 하지만 내 가족들이 있기에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소값 폭락으로 빚더미에 앉기도 이사한 후 4-H와 농어민 후계자, 마을문고, 농민운 동 등 사회 활동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농사일에만 전념하 기로 결심했다. 비닐 하우스를 한 동 한 동 손수 지 어가면서 고추 육묘며 고추 터널 재배, 알타리 하우 스 재배, 담배, 수박 등 복합 영농므 하다보니 살림 에 적지 않은 보탬이 됐고, 수확의 기쁨까지 만끽했 다. 일은 힘들어도 보람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겨울에는 시금치를 캐다 가까운 시장에 팔곤 했는데. 1관에 1,000원도 안되는 가격에다 추운날 고생한 생각에 애들 요구르트나 새우깡 한 봉지 마 음 편히 못 사줬고, 하우스에서 재배한 열무를 우 는 애 달래가며 장에 내다 파는 아내를 볼 때면 마 음이 매우 아팠다.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한 덕분에 생활이 서서히 안정되기 시작했다. 하우스 500평을 짓고 고추 반 촉성 재배도 했다. 가격도 좋고 품질과 작황이 좋아 고소득으로 재미를 볼 수 있었다. 퇴비를 많이 넣고 재배했더니 작황이 좋아 사람 키보다 훨씬 큰 고추 나무에서 엄청난 다수확을 했다.
그러나 또 다른 시련이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 었다. 그 해 가을 태풍 올가 때문에 하우스가 모두 뽑 혀 망가진 것이었다. 육묘 비닐 하우스와 우사 개폐 식 지붕도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태풍‘ 올가’는 많은 재산 피해를 입히고 지나갔다. 인근 주민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복구하는 데는 한 달 이상 걸렸다.
태풍 피해로 하우스 농사는 더 이상 할 생각이 없어졌고, 대신 한우 번식우 마릿수를 늘려 나갔다.
두수가 늘어나다보니 인공수정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농한기를 이용해 인공수정 교육을 받았고 그 해 가을 가축 인공수정사 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직접 인공수정을 하다보니 새로운 생명을 만든다 는 생각에 재미도 있었고 우수한 혈통의 송아지를 얻을 수 있어 좋았다.
나는 지금도 인공수정을 할 때면 맨 처음 인공 수정 시킬 때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간다. 종 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새끼 잘 들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번식을 시작한 초기에는 새끼 한 배 낳고 무조건 비육시켜 고깃소로 팔았다. 그것이 소득면에서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그 러다보니 개량 측면에서 명색이 인공수정 사인 내 소나 다른 농가의 소나 다 를 바가 없었다. 안되겠다 싶어 개 량을 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마침 우리 농장에 910㎏ 나가는 황소가 있었는데, 이 소의 혈통을 계속 이 어가리라 결심했다. 또한 번식능력 이 우수하다고 판단되는 암소들은 비육하지 않고 계속 번식우로 길러 개량을 했고, 유량과 성격이 좋은 소를 골라 우리 농장 소를 상대로 수정란 이식을 했다. 2002년도에는 수정란 이식으 ? 어미소 4두에서 송아지 7두가 태어났고 2003년 에도 6두가 태어나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한우경진대회에서 챔피언 수상 이렇게 개량에 관심이 많아지다 보니 한우경진대 회에도 나가게 되었다. 2001년 11월 9일 전남한우 경진대회에 우리 집에서 기른 황소를 출품해 최고 영광인 챔피언을 차지했다. 더구나 이날이 아내 생 일이라 그 기쁨은 더했다. 그동안 변변한 선물 한 번 해주지 못한 나로서는 이 영광을 온전히 아내에 게 돌리고 싶었다. 그리고 작년에는 다시 번식우 2 마리를 출품했다. 챔피언을 뽑기 위해 많은 소 ?운 데 최종적으로 7두가 결선에 올랐는데, 그 중 우리 소 2마리 모두 결선에 올랐다. 비록 챔피언은 다른 농장 소에게 돌아갔지만, 그래도 우리 소가 최우수 상을 받는 영광을 안았다.
가축 개량을 하다보니 사료에 많은 신경을 쓴 다. 누가 봐도 욕심 나는 소를 만들기 위해 IMF 이 후에는 주위 논과 밭에 농작물 대신 사료작물을 심 어 육성우와 번식우에 청초와 건초로 급여하고 있 다. 또한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폐사율을 줄이 고 있으며 질병치료 보다는 예방에 역점을 두고 사 양관리를 하고 있다.
미네랄 블록을 먹이통에 매달아 언제든지 핥을 수 있게 했으며, 송아지부터 큰 소까지 단계별로 사 료를 급여하고 있다. 송아지 설사 예방을 위해 백신 은 꼭 사용하고, 배꼽 소독은 강옥도로 하고 있다.
젖꼭지는 깨끗이 닦아주며 송아지 설사 치료 시에 는 깔짚을 깨끗이 해주고 송아지를 따뜻하게 한 다 음 따뜻한 물에 전해질 제제와 생균제를 섞어 먹이 면서 항생제와 같이 치료하고, 모든 관심과 애정을 쏟는다. 앞으로의 목표는 송아지 1년 1두 생산이며, 폐사율은 0% 다.
생명에 흥미를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다 보니, 비록 큰 돈은 못 벌었지만 남보다는 조금은 앞서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가축개량을 담당한 한 사람으로서 보다 더 우수한 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그것이 좁 게는 나에게 이익이 되고 넓게는 우리 한우산업이 발전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또한 우리 농장의 자질이 우수한 암소를 이용해 체내 수정란 이식을 확대해 가고자 한다. 그리고 드 넓은 간척지를 이용해 사료작물 재배로 경영비를 최대한 줄이고 조사료 위주로 사양관리를 해 번식 연령을 늘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