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이언림(李彦林)은 고려 의종 때에 병부상서(兵府尙書), 공부성서(工部尙書),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등 요직을 역임했다. 그 후 흥양에 낙향하여 살면서 후손들이 본관을 흥양으로 하였다. 그의 7세손 이 길은 고려 충혜왕 때 통례문부사를 지내고 흥양군에 봉해진다.
고려시대에 이중성(李仲成)은 장령(掌令)을 지냈고, 이근(李斤)은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이배근(李培根)은 판서(判書)를 역임했다. 이언(李堰)은 부사를 지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조선시대의 이준(李埈)은 159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싸웠으며, 후에 경상도 도사를 지냈다. 이때 중국 역대 왕들의 덕행과 신하들의 정사를 밝힌‘중앙전감(中央典鑑)’을 지었다. 지평(持平)을 거쳐 예조정랑, 단양군수 등을 역임하고, 정묘호란에 공을 세워 첨지중추부사와 부제학에 올랐다. 경북 상주에 있는 옥성서원에 제향되었다.
이 전은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여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고, 1603년 사마시에 합격, 세마(洗馬), 지례(知禮)현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평생을 학문에 바쳤다. 이원경(李元卿)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심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수물자를 모아 싸움터에 보내는 등 공을 세웠다. 뒤에 효행으로 천거를 받아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를 지냈다. 그의 마을 앞에 효자리(孝子里)라고 새긴 표석(表石)이 세워졌다.
흥양이씨는 무주파를 비롯 10개 파로 나뉜다. 무주파는 관향조인 이길의 큰 아들 이서원의 후손 곧 중판사공 이계참 계이다. 이계참은 통훈대부 봉상판사를 지냈는데 그의 아들 이맹훤이 조선 성종 때 선전병마절도사로 함북 회령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불만을 품고 벼슬을 버리고 무주 무풍현에 낙향, 정착하고 말았다.
18세손인 좌윤공 이장춘(호는 두천.斗川)은 좌윤에 증직되었고 판서공 이만경은 호를 두촌(斗村)이라 했는데 효성이 남달랐고 학문이 깊었다. 이만경은 영조 4년 정희량 등을 토평하는 데 형 두천공과 함께 참전, 공을 세워 두천공에게는 통정대부 병조참의, 두촌공에게는 가선대부에 증직되었다.
특히 두촌공의 효성은 뛰어나 투치소(投雉所)라는 유적지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가 죽자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지중추부사에 추중되고 고종조에 충의와 효행으로 정려되었다.
의성파는 이희점의 후손이다. 10개 파 중 가장 작은 파라고 할 수 있다. 이희점은 세종조에 문과에 올라 소윤을 지낸 이균의 셋째 아들이다. 이희점도 문과에 올라 현감을 지냈다. 수원파는 9세손인 부사공 이치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찬성공 이서원의 셋째 아들이다.
담양파는 파조인 이효공이 계유정란 때 담양에 은든함으로써 파를 이루게 되었다. 그는 세종 5년에 문과에 올라 사헌부 집의와 남원부사를 역임했다.
담양파의 17세조 만송당 이인경은 용력이 뛰어나고 충의의 기개가 있어 임진왜란 때는 김덕령 장군과 더불어 많은 전공을 세웠다.
흥양파의 통정대부 이수생은 11손이며 흥양군 이길의 6세손이다. 아버지는 사헌부집의 남원진병마절제사와 전주부윤을 지낸 이언(李堰)이다. 군위파의 11세손 영천공 이수붕은 흥해와 영천군수를 지냈다.
상주파는 중종조 때 그곳에 터를 잡은 판관공 이조년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파조는 집의공 이수천이다. 그런데 상주파뿐 아니라 흥양이씨의 중조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이준(李埈), 문간공 이전(李琠)이 모두 상주파 출신으로 이들은 모두 이수천의 현손이다. 단밀파는 만호공 이수몽이 파조이다. 아우 이수창은 선략장군으로 역시 만호를 지냈다. 이들이 모두 단밀에 낙향한 것은 연산조의 난세를 피한데 있었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후손들이 번성하게 됨으로써 단밀이씨(丹密李氏)라 별칭되기도 했다.
개령파는 파조가 찬성공 이서원의 둘째 아들 상서공 이선이다. 장령공 이중성은 그의 아들이고 영해부사를 지낸 이승은 이중성의 큰 아들로 그 후손만 개령파가 된다. 합천파는 10개 파 중에서 가장 뒤인 계파(季派)이다. 현감공 이운(李運)이 파조이다. 그는 이중성의 둘째 아들로서 벼슬은 봉훈랑으로 고성현령 겸 병마절제도위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자손 상호군 이우량 이하 3대가 독자로 이어져 크게 번창하지는 못했다.
한편 후손들은 지난 1966년 전남 고흥군 고흥읍 남계리에서 득본 시조공의 유허(遺墟)를 기리는 비의 제막을 보았다. 노산 이은상이 비문을 쓰고 김홍련의 글씨로 된 비가 우뚝, 흥양이씨의 세거지에 서 있다.
뿐만 아니라 시조공 재궁(齋宮)인 추보재(追報齋)의 건립에 종중이 뜻을 모아 그 실현을 보았는데 1982년 3월의 일이다. 유허비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맑은 샘물이여, 내외 강이 길게 흐르고 깊은 뿌리여, 가지꽃잎 활짝 피도다. 저 집안 이 겨레 함께 끝없이 복을 누리소서-”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이운준(李云俊) : 문과(文科) 세종11년(1429)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이영(1765 乙酉生) : 문과(文科) 정조13년(1789) 식년시 병과(丙科), 이원규(李元圭, 1597 丁酉生) : 문과(文科) 인조17년(1639) 별시 병과(丙科), 이증록(李增祿, 1674 甲寅生) : 문과(文科) 숙종34년(1708) 식년시 병과(丙科), 이준(李埈, 1560 庚申生) : 문과(文科) 선조24년(1591) 별시 병과(丙科), 이운봉(李芸奉, 1560 庚申生) : 문과(文科) 단종1년(1453) 증광시 정과(丁科), 이재용(李在容, 1595 乙未生) : 문과(文科) 현종1년(1660) 식년시 병과(丙科), 이재정(李在定, 1595 乙未生)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별시 병과(丙科), 이재중(李在中, 1595 乙未生)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별시 병과(丙科), 이준(李埈, 1560 庚申生) : 사마시(司馬試) 선조15년(1582) 식년시 삼등(三等) 등 모두 26명이 있다. 문과 7명, 무과 2명, 사마시 16명, 의과 1명이다.
주요파는 ▲무주파 ▲수원파 ▲의성파 ▲흥양파 ▲군위파 ▲상주파 ▲단밀파 ▲개령파 ▲합천파 ▲담양파 등이다.
본관 흥양(興陽)은 전라남도 고흥군 일원의 옛 지명이다. 고려 초에는 고이부곡(高伊部曲) 또는 묘부곡(猫部曲)이라 하였다가, 1285년(충렬왕 12)에 고흥현(高興縣)으로 승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보성군 조양현(兆陽縣)에 합속되었다가, 1397년에 진(鎭)을 설치하고 병마사(兵馬使)로 현감(縣監)을 겸임하게 하였다. 1441년(세종 23)에는 장흥부(長興府) 두원현(豆原縣)으로 이관하였고, 보성군의 남양현(南陽縣) 등을 분할 편입하여 흥양현(興陽縣)으로 개편되었다. 1896년(고종 33) 전라남도 흥양군이 되었고,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흥양군의 일부와 돌산군의 일부를 고흥군으로 통합하였다. 1979년 고흥면이 고흥읍으로 승격하였다.
흥양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는 흥양송씨(興陽宋氏), 흥양오씨(興陽吳氏), 흥양유씨(興陽柳氏), 흥양이씨(興陽李氏), 흥양장씨(興陽張氏), 흥양조씨(興陽趙氏) 등 6개 성씨가 있다. 집성촌은 전북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전남 고흥군 풍양면 보천리, 경북 군위군 부계면 창평리, 경북 군위군 부계면 춘산리 등이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흥양이씨는 1985년에는 총 3,450가구 13,829명, 2000년에는 총 5,305가구 16,977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1천8백여 가구, 2천여 명이 늘어났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3,299명, 부산 737명, 대구 1,483명, 인천 332명, 경기 1,319명, 강원 159명, 충북 266명, 충남 377명, 전북 527명, 전남 3,192명, 경북 1,660명, 경남 452명, 제주 26명이다. 서울과 전남 지역에 가장 많이 살고 있었다. 그 다음 경북과 대구 지역에도 많았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3,708명, 부산 892명, 대구 1,808명, 인천 709명, 광주 1,221명, 대전 364명, 울산 297명, 경기 3,110명, 강원 196명, 충북 320명, 충남 261명, 전북 452명, 전남 1,575명, 경북 1,581명, 경남 437명, 제주 46명이다. 서울, 경기, 대구, 경북, 전남, 광주 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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