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기념물은 나라가 보호하는 살아 있는 문화재다. 짧게는 수백 년 길게는 천 년을 훌쩍 넘는 역사를 나이테에 묻어두고 오늘도 변함없이 푸름을 자랑한다. 고작 백 년도 넘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부럽고 또 부러울 따름이다. 나라로부터 천연기념물이라는 ‘성은’을 입으면 주민등록번호처럼 부여받은 번호가 생긴다. 가지 하나라도 잘랐다가는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크게 경을 친다. 천연기념물로 선택된다는 것은 나무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다. 당연히 갖가지 사연을 가진 나무가 선택되기 마련이다. 온 나라가 부동산 투기 열풍으로 휘청거리는 지금, 넓은 자기 땅 갖고 당당히 세금도 내면서 ‘땅땅’거리고 사는 나무나라 제일의 땅 부자 나무를 만나러 가본다.
안동에서 예천, 상주를 거쳐 김천으로 이어지는 북부 경북의 대동맥 34호 고속화도로를 탄다. 예천을 조금 지난 곳에 별주부전에 나오는 용궁(龍宮)과 꼭같은 이름의 용궁읍과 마주친다. 여러 번 찾아가는 곳이지만 필자는 갈 때마다 조심스럽다. 유난히도 생선을 좋아하는 탓에 혹시라도 용왕님이 노여움을 살까봐서다. 승용차 속도도 늦추고 주위를 살살 둘러보면서 조심조심 읍내로 들어간다.
나무는 용궁읍의 앞을 가로지르는 경북선 철로의 건너편, 경지정리가 잘 된 들 한가운데의 금원마을 앞에 널찍한 터를 잡고 자란다. 나이는 약 5백 년, 높이는 18m, 줄기의 둘레는 네 아름에 둥그스름하게 잘 발달된 수관을 갖고 있다. 나무 종류는 팽나무다. 주로 바닷가의 당산나무로 팽나무를 만나는 경우는 많다. 그래서 경상도 해안 지방에서는 포구(浦口)나무라고 부른다. 이렇게 내륙지방에 아름드리로 자라는 일은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다.
이 나무는 팽나무란 이름보다 황목근이란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금원마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풍년제를 지내기 위하여 쌀을 모아 공동의 재산을 마련하였다. 근대화가 되어 토지의 소유권에 대한 법적인 조치가 필요하자 공동재산을 등기부에 올려야만 하였다. 뒷날 혹시라도 재산다툼으로 아옹다옹할 수 있는 공동명의를 피하는 방법을 찾았다. 기발하게도 마을 앞 당산나무 앞으로 등기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오랫동안 논란 끝에 드디어 1939년 이 팽나무 앞으로 등기이전을 결정하게 된다. 팽나무라는 보통명사로는 등기가 되지 않으니 고유의 이름이 필요했다. 그래서 정해진 이름이 황목근(黃木根)이다. 팽나무가 5월에 황색 꽃을 피운다는 뜻에서 황이란 성을 따오고, 나무의 근본이란 뜻으로 목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황목근은 현재 약 2,800평의 자기 땅을 가지고 있는 알짜 땅 부자다. 토지관리 대장에 엄연한 고유번호도 가지고 있고 매년 세금도 꼬박꼬박 낸다. 지난해에는 1만330원의 종합토지세를 냈으며, 매년 틀림없이 자진 납부하는 모범 납세목(納稅木)이라고 한다. 땅을 빌려주고 받는 소작료는 한 푼도 쓰지 않는다. 나무의 모든 몸 관리를 국가에서 해주는 탓이다. 자고나면 재산이 불어나는 행복한 나무다. 같은 예천군에 있는 석송령(石松靈)과 함께 자기 앞으로 등기된 땅을 가진 희한한 나무라서 사람들이 흥미로워한다.
황목근은 금원마을을 지켜주는 수호목이자 당산나무로 매년 정월 대보름 자정에 제사를 올리고, 다음날 온 마을 주민이 함께 모여 잔치를 벌여 왔다. 또 7월 백중날에도 마을 잔치를 열어 농사일로 지친 심신의 피로를 풀고 나무를 보살피는 행사가 이어진다. 황목근은 나무나라의 평범한 백성으로 태어났을 터이지만 이제는 재력가로서 인간세계에까지 이름을 떨치니, 나무고 사람이고 모두가 부러워할 만하다.
< 박상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