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명의 시인의 귀에는 빗소리도 천 가지로 들려야 한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장마
이애자
주륵 툭,
주륵 툭,
밑실 끊어지는 소리
빗줄기 가만가만 실눈에 꿰어
그리움 한 겹 덧대는
축축한 날
축축한 속
피복이 벗겨져나간 빗줄기가 닿으면
섬뜩,
감전될 것 같은 저 물창살
자발적 가택연금에도
바깥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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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그리움에 수많은 독자가 ‘감전’됐을 것이다. 그리움의 전염성이 이토록 강하고 내성마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지독히 그리워해 본 적 없는 사람은 모른다. 단지, 가벼운 통증 정도로 짐작할 것이다.
‘주륵’이면 ‘주륵’, 아니면 ‘주륵주륵’으로 장마빗소리가 들릴 텐데 ‘툭’이라는 다소 의외의 의성어로 그 빗소리를 끌어들이는 것은 시인의 몫이다. 툭 툭 끊어지는 소리에 숨이 막힐 것 같지만 오히려 뻥 뚫리는 기분이다. 그러니까 ‘밑실 끊어지는 소리’를 가늠할 수 있는 치열한 감수성으로 지루하고 축축한 나날을 차라리 스스로 덧대며 카타르시스를 시인은 즐기고 있다. 그 최후의 병기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이라는 창은 어떤 방패로도 막을 수 없는 ‘모순’이 없는 완벽한 결정체다. 그리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그리움밖에 없다.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면, 그리고 ‘빗줄기’를 열 겹, 백 겹, 천 겹으로 덧대면, ‘툭’ 끊기는 ‘그리움’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된다. 장맛비가 내리는 날, 밖으로 나가지 못한 시인의 시선은 ‘피복이 벗겨져나간 빗줄기’가 ‘감전’ 시킬 것 같은 ‘물창살’에 아프게 가 있다. 창살은 구속이요 빗물은 그리움을 가둔 창살을 여는 열쇠다. 살다 보면 자꾸만 그 피복이 벗겨져나간다. 피복이 벗겨지면 녹이 슬고 뭉개진다. 그러면 끝내 그리움은 풀리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거기다가 ‘자발적 가택연금’이라는 가장 낮은 형벌로 그리워한 죄를 씻어내려는 시인의 전략은 역시 의도적 실책이다. 바깥을 그리워하는 “비자발적 종신형”으로 그리움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천 명의 시인의 귀에는 빗소리도 천 가지로 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