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여행기가 스위스 오스트리아 동유럽 부부 렌터카 여행(상, 하 2권) 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어 판매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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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일 2006, 05, 26 금 Bad Ischl-22Km-Hallstatt 총22Km, (실 운행거리 40Km) (보행 8.6Km, 12,300보)
바트이슐은 트라운(Traun)과 이슐(Ischl) 두 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고도 468m의 잘츠카머구트 중심 도시로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ph)황제의 여름저택을 비롯하여 왕후 귀족의 별장이 많이 있는 유명한 온천 휴양지다. 19세기 들어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브루크너 등 작곡가가 즐겨 찾아 음악의 중심지로도 각광을 받았으며 오페라 메리 위도우(Merry Widow)로 유명한 프란츠 레하르(Franz Leh?r)가 만년을 보낸 집도 레하르 빌라라는 기념관으로 남아있다. 07시 눈을 뜨니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식사는 여덟 시 부터 시작이라 그 전에 옆에 있는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가 본다. 올라가는 곳은 1450m의 카트린(Katrin)산으로 매시 정각에 출발한다는 운행표가 붙어있다. 상황이 맞으면 잠깐 정상에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손님은커녕 직원도 한사람 보이지 않고 중턱부터 구름에 가린 산봉에서는 빗줄기만 처량하게 떨어져 생각을 접고 돌아 나온다. 2층 식당에서 직접 식사를 준비해 준 할아버지는 허풍스런 몸짓으로 우리 보고 밀리온에어 (millionaire)냐고 묻는다.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왔으니 그렇게 생각한 모양인데 여전히 장난 끼가 가득하다. 하가야 한국 돈으로 치면 백만 원 정도는 가지고 있으니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09시30분, 펜션을 체크아웃하고 할아버지의 따듯한 축복을 받으며 시가 중심인 철도역 부근의 아우뵈크광장(Aub?ckplatz)으로 향한다. 잘츠카머구트에서는 제일 크다지만 인구가 14,000명(2004년)뿐인 이 작은 도시에는 옛날부터 왕가와 귀족의 사랑을 받아 온 거리답게 세월을 느끼게 하는 역사적인 건물이 많이 보인다. 광장 정면에는 노란 색깔의 우편국(Postamt) 건물이 서 있는데 기차나 자동차가 없던 시절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우편마차의 정거장으로 숙박시설도 겸했던 모양이다.
그 옆, 둥근 열주의 오래된 건물이 ‘물 마시는 홀’이라는 뜻을 가진 트링크할레 (Trinkhalle)로 1831년부터 먹는 광천수를 펌프로 끌어 올렸다는 장소다. 이른바 약수를 먹어 볼 생각으로 안으로 들어가 양편에 달린 넓은 홀을 다 찾아 봤는데 물 마실 만한 장소가 아무데도 없다. 직원으로 보이는 아가씨에게 물어 봤더니 예전에 있었던 시설인데 없어진지 오래고 지금은 음악 연주회나 독서하는 장소로 사용된다며 크게 웃는다. 이 시대에 여기 와서 물 찾는 사람이 있다니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멋쩍은 김에 건물 이마에 붙어있는 ‘트링크할레’라는 이름이 무슨 뜻이냐고 시침 떼고 농을 걸어 본다. 광장 북쪽 큰 네거리 모퉁이에 있는 성 니콜라스 교구성당을 찾아간다. 1780년 고딕 양식으로 세워진 이 성당은 저명한 음악가 요제프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가 한때 수석 오르간 주자로 있으면서 교향곡과 미사곡을 작곡했고 1890년에는 황제 딸의 결혼식을 축하하여 오르간을 연주했다는 곳이다. 내부는 별로 넓지 않은데 위엄 있는 천정화와 전면 주 제단에 모셔놓은 큰 왕관이 인상에 남는다. 이층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은 1910년 개비한 것이라니 브루크너가 연주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어딘가에 그의 얼굴부조가 있다고 들었던지라 필여사가 마리아상에 촛불을 올리고 기도드리는 동안 비오는 뜰을 한 바퀴 돌아 성당 입구 외벽에 붙어 있는 브루크너의 명판을 찾아내 구경한다.
안톤 브루크너는 19세기 후반의 낭만파로서 브람스에 버금가는 교향곡과 종교 음악의 대가다. 다소 생소한 느낌을 받는 브루크너는 생김새나 성격, 옷차림, 생활신조 등 모든 면에서 음악가 보다는 수도사에 더 가까웠다고 한다. 브람스처럼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그는 나이가 들어도 어린 아이처럼 욕심 없이 소박하고 천진난만했다. 그의 교향곡은 어느 것이나 바탕에 금욕적, 명상적인 깊은 울림이 깔려있는데 그 장대하고도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이끌리는 사람이 적지 않은 듯하다. 구스타프 말러에 이어 브루크너의 곡을 연주하는 교향악단이 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에 흐르고 있는 새로운 추세를 느끼게 된다. 성당 동쪽에 있는 건물이 바트이슐에서 제일 큰 온천호텔인 카이저테르메(Kaiser Therme)다. 그 동안 준비해간 자료를 읽고 있던 필여사가 온천이 좋은 모양인데 눈앞에 두고 지나갈 수야 없지 않느냐며 잠깐이라도 들러 가자고 제안한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다. 지금이 11시, 카트린산 케이블카 탄 셈치고 12시까지 염수 탕을 즐겨보기로 한다. 건물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짐에서 수영복을 꺼낸다. 현관에 들어서서 홀에 있는 안내에게 물어보고 나선계단을 한층 밑으로 내려가 욕장 앞에서 입장료를 낸다. 탕 값은 한 사람에 10유로인데 펜션에서 받은 우대권을 제시하면 9.9유로로 할인된다. 목욕료에다 옷장 열쇠 값 10유로를 합쳐 두 사람 분 29.8유로를 내고 탈의실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는다. 10유로는 열쇠를 반납하면 돌려받는 예치요금이다. 온천은 동네의 실내수영장만한 네모진 큰 풀장으로 남녀가 같이 사용한다. 우리나라 같이 따끈하지는 않지만 몸을 담그는 욕탕 외에 물도 마실 수 있게 돼 있는 온천이다. 벽에 붙은 설명서에는 수온 30도에 염분이 아드리아 해와 같은 3%의 물이라고 적혀있다. 쉽게 말해서 따뜻한 바다 속에 들어가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인 것이다. 뒤쪽 2층, 넓은 공간에는 눕는 의자가 많이 놓여있으며 수영하고 나와 쉬는 사람이 여기 저기 잠들어있는 것이 노인들 소일하기에 더 이상 좋은 장소가 없을 듯하다. 실내의 큰 수영장은 뒤뜰에 있는 원형의 노천 풀과 연결돼 있으며 경계에 설치된 비닐 수직 블라인드를 통해 물길로 직접 왕래할 수 있다. 노천온천은 중앙에 작은 동심원으로 수중걸상을 만들어 놓았고 거기 물은 좀 더 따듯하다. 걸상에 앉아 다리를 뻗으면 몸이 둥둥 떠오르는데 목까지 잠겨 하늘을 쳐다보니 낮은 구름에서 가는 비가 떨어져 얼굴을 시원하게 적신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젖은 몸, 억수로 퍼부어도 별것 아니다. 노천탕의 비가 이렇게 편안하고 좋은 것인지 미처 몰랐다. 천하태평, 노래가 나올 듯 기분이 최상급이다.
풀 밖에는 음료수 꼭지가 마련돼 있으며 덜 먹으면 손해라는 기분에 몇 번이고 올라가 소금 녹은 물로 배를 채운다. 애써 찾던 ‘트링크할레’는 여기 있었던 것이다. 물이 뜨겁지 않다는 것과 사우나 시설이 별도라는 사실이 아쉬울 뿐 흡족한 시간이다. 남녀 공용이라 사진은 엄두도 못 내고 카메라를 탈의실에 두고 왔는데 가만히 보니 여러 사람이 사진을 찍고 있다.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가 있나? 탈의실에서 카메라를 가져와 당당히 셔터를 누른다. 그래도 젊은 아가씨 쪽으로 좀체 렌즈를 돌리지 못하는 것은 예의지국의 염치가 건재하다는 증좌일 것이다. 12시에 탕을 나와 10유로를 돌려받으며 주차비를 물어보니 카드에 펀치를 해주며 무료로 나갈 수 있다고 한다. 아우뵈크광장에서 남쪽으로 트라운천을 건너면 프란츠 레하르가 살던 레하르 빌라가 있다. 1910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나는 1948년까지 여름마다 찾아왔다는 별장이 기념관으로 돼 있는데 할슈타트에서의 오후 계획이 늦어질까 염려스러워 생략하고 또 하나의 명소,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여름별궁 카이저 빌라(Kaiservilla)로 차를 돌린다. 구시가의 도로는 거의 일방통행 아니면 보행자 전용이다. 지도상으로 이슐천을 북쪽으로 넘으면 간단하게 찾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리를 건널 때마다 마을 밖으로 빠져 나가 쉽게 접근할 수가 없다. 지나가는 차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젊은 아저씨가 앞서가며 가까운 주차장까지 인도하고 다음 길을 친절히 일려준다. 12시30분 주차장을 나와 우산을 받쳐 들고 숲 사이로 난 언덕을 걸어 올라간다. 문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면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넓고 산뜻한 잔디 정원에 들어선다. 둥근 기둥 네 개가 받쳐주는 박공벽에 하얀 사슴 부조가 새겨진 노란색 빌라는 황제 별궁치고는 뜻밖에 작은 희랍 신전풍의 건물이다. 전면 화단에는 애들 돌 조각으로 꾸민 분수에서 물이 가늘게 흘러내리고 그 건너 잔디밭 끝에 엽총을 겨드랑이에 끼고 사냥개를 거느린 청년황제의 청동상이 반들반들 검은 빛을 반사하며 서있다.
카이저 빌라는 1853년 황제의 어머니 소피(Sophie)가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그의 신부 엘리자베스의 결혼을 축하해 선물로 사준 것이라며 현재 건물은 다음 해에 황제 스스로 사랑하는 황후를 위해 엘리자베스를 뜻하는 E자 평면으로 개축한 것이다. 황제는 이곳을 ‘지상의 천국’이라 칭하며 60년간 매년 여름에 찾아와 사냥으로 소일했다고 한다. 즉위 초에는 별 특색 없이 서류에 도장만 찍던 그였지만 후기로 가면서 국제정세에 적응하여 개혁적, 민주적으로 돌아서 국민의 긍정적 평가를 받게 된다. 프란츠 요제프는 평생 변하지 않고 황후를 사랑했다는데 정작 유럽 제일의 미모로 소문이 자자했던 엘리자베스는 시시(Sissie)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번거로운 궁정의 속박을 피하여 자유로운 생활과 여행을 즐겼다고 한다. 실질적으로 합스부르크왕가 최후의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68년의 긴 재위기간 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자로서 상당한 공적을 인정받았으나 가족적으로는 비극이 되풀이되는 불우한 숙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멕시코 황제로 간 동생 막시밀리안(Maximilian)이 공화군에 체포돼 1867년 총살을 당했으며 왕위 계승권이 있었던 아들 루돌프는 허락받지 못한 결혼을 비관하여 1889년 애인과 동반 자살한다. 1898년에는 가장 사랑하는 황후가 여행지 제네바에서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에게 살해되는 변을 당해 쓰라린 아픔을 겪어야했다. 1914년에는 정치적 알력이 심했던 왕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Ferdinand)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돼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다. 1914년 8월1일 프란츠 요제프가 세르비아에 대한 전쟁선포에 서명하여 1차 대전이 시작된 장소가 바로 이곳 카이저 빌라의 한 사냥파티 장이었다고 한다. 황제가 생애를 걸고 지키려 했던 합스부르크 제국, 그 650년의 역사가 막을 내리는 종말로 운명의 수레는 서서히 굴러갔던 것이다. 백 년이 돼오는 과거, 역사의 소용돌이 한 구석을 차지했던 그 현장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도 어쩔 수 없었던 인간의 숙명을 생각하며 착잡한 감개에 잠긴다.
정문 현관을 지나 넓은 홀로 들어간다. 입구에서 2층으로 통하는 벽면에 황제가 사냥한 사슴뿔이 질서정연하게 걸려있다. 목까지 달린 큰 사슴의 뿔도 있고 천정 쪽에 날아오르는 독수리의 박제도 보인다. 이 별장 안에 2000마리 정도의 곰, 멧돼지, 사슴머리 등이 전시돼 있다고 한다. 벽면을 보고 있자니 대단하다는 느낌보다는 이 같은 잔인한 행위가 어떻게 취미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으로 심기가 불편해진다. 우주에 가득한 생명의 신비, 그에 대한 모독이 프란츠 요제프 일가의 비극적 운명과 전혀 무관치 않으리라는 자연의 이치를 믿고 싶다. 내부는 가이드에 인솔된 투어만 가능하고 13시에 시작해 40분이 걸린다고 한다. 시간에 여유가 없어 구경을 단념하고 발길을 돌린다. 주차비가 1유로다. 13시, 예상보다 알찬 시간을 보낸 바트이슐을 뒤로하고 국도 B145에 들어서서 할슈타트로 향한다. 한참을 달리다 대시보드에 달아놓은 나침반을 보니 남쪽으로 가야할 차가 서쪽을 향하고 있다. 바트이슐을 벗어나는 교차로에서 B158로 잘못 진입한 모양이다. 즉시 차를 돌려 바트고이전(Bad Goisern)쪽, 166으로 진로를 잡는다. 소형 나침반은 정말 쓸모가 있다. 방향이 조금씩 굴곡 될 때도 참고가 되지만 오늘 같이 반대로 가는 치명적인 경우는 즉각 잘못을 깨닫게 해주는 도구가 된다. 출국 전 장만한 준비물 중에서 가장 요긴하게 쓰이는 장비가 나침반으로 자동차 여행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라는 생각을 거듭 갖게 된다. 트라운천을 따라 남쪽으로 10Km를 내려가, 바트고이전을 지나고 2.5Km 더 간 스탐바흐(Stambach) 분기점에서 B145와 갈라서서 오른쪽 B166으로 들어간다. 할슈타트 표지가 나타나기 시작한 길로 다시 2Km를 남하, 스테크(Steeg)에서 할슈퇴터제(할슈타트 호수)북단을 만나 트라운 천으로 흘러나가는 하구 위를 건넌다.
좁고 긴 호수가 숲 속으로 들락날락, 길을 따라 오더니 그 앞쪽 멀리 교회의 뾰족탑과 산비탈 마을이 그림같이 모습을 드러낸다. 유달리 보고 싶던 할슈타트를 앞에 두고 산수 경취가 점점 무르익어간다. 산 그림자를 가득 담은 녹색 호반, 마음에 꼭 드는 지점을 골라 차를 세우고 점심 식사를 마련한다. 샐러드 빵과 따끈한 커피, 조촐하지만 유네스코가 세계에 보증한 소풍자리다. 맛과 경치가 일품이다. 할슈퇴터제의 서남부 에메랄드 호숫가, 알프스 산자락에 기대어 잘츠카머구트의 진주 할슈타트가 있다. 비 오는 오후의 그 모습은 한없이 조용하고 신비하다. 켈트어로 hal은 소금을 뜻하고 Statt는 장소라는 독일 말이다. BC 3,000년부터 소금을 캐기 시작하여 BC 1,000년경 산업으로 발전하였고 2000여 곳 남아있다는 암염광산의 흔적에서는 소금 녹은 온천이 흘러나온다. 1734년에는 ‘소금인간’(Man in Salt)이라는 이름의 잘 보전된 선사시대 시신이 암염 갱에서 발견돼 독특한 매장 문화가 알려졌다. BC800-BC400년 사이의 철기가 발굴돼 ‘할슈타트기’ (Hallstatt Period)라는 이름의 초기 철기문명이 드러나기도 한 고대 유럽의 터전이 묻혀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이곳이 각광받게 된 주된 사연은 호수와 산과 마을이 어울려 만들어낸 뛰어난 자연경관에 있다. 수심 125m, 할슈퇴터 호수는 다흐슈타인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깎아지른 산영을 검게 비치고 가파른 비탈에 아슬아슬 터를 잡은 집들은 꿈속에 잠든 동화의 마을이다. 해발 511m 인구는 1000명 정도, 한줌밖에 안 되는 작은 존재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명성이 자자한 공간이다. 마을 입구에는 주차장이 마련돼 있고 그곳을 지나 동네로 내려가는 좁은 길이 있는데 주민 차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도록 차단기가 설치돼있다. 할슈타트를 지나가는 자동차는 1966년에 개통된 뒷산으로 우회하는 상 하행 두개 터널로 바이패스 한다. 마을을 찾아오는 차량은 터널 안에 있는 큰 두 개의 주차장에 주차하고 방문객은 중앙광장까지 뮐바흐(M?hlbach)폭포 옆으로 난 급한 계단을 걸어 내려온다. 마을에서 잠자리를 결정하면 해당 숙소에서 주는 게스트 카드를 받아 차를 가지고 들어올 수 있으며 부락 내 어느 곳이나 무료로 주차할 수 있다. 이 카드로 관광명소의 할인도 받을 수 있는데 협소한 부락에서 주차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해낸 특수제도라 할 수 있다. 기차로 방문하는 여행객은 호수 건너에 있는 철도역에서 내려 10분 정도 배를 타고 건너오게 된다. 할슈타트는 작은 고장이지만 숙박업소가 많은 곳이라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펜션을 골라 묵을 생각으로 예약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출발 임박해서 란(Lahn) 이라는 유스호스텔의 요금이 워낙 싸기에 참고삼아 빈 방이 있는지 문의를 했더니 덜컥 예약이 됐다는 답신이 온 것이다. 취소를 해도 되겠지만 숙박비도 유리하거니와 출입하는 길 안내까지 자세히 해준 성의가 고마워 호수가 보이지는 않지만 하루를 지내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13시50분, 뒷산으로 난 터널을 통과하여 란거리(Lahnstrasse)로 내려선다. 우리는 호스텔로 직행하기 때문에 터널 안 주차장을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 주유소 앞에서 우회전하고 재차 오른쪽으로 돌아 소금광산 매표소로 가는 길 왼편에 위치한 자그마한 2층 건물인 유스호스텔에 도착한다. 체크인 시간이 안됐는지 문이 잠겨있고 빈집같이 조용하다. 뜰에 차를 세워놓고 시간이 넉넉지 않으니 우선 소금광산부터 구경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Salzwelten(소금광산) 표시를 따라가니 곧 광산으로 올라가는 푸니쿨라 발착 장이 나타나고 급한 비탈을 직선으로 뻗어 올라간 철길이 숲 사이로 숨 가쁘게 쳐다보인다. 표고차가 325m에 거리가 548m이니 59.3%의 매우 가파른 경사도다. 매표소에서 광산 투어까지 포함된 콤비네이션 티켓을 구입한다. 유스호스텔에 체크인을 못해 할슈타트의 게스트 카드는 아직 없는데 바트이슐 펜션에서 받은 우대권이 있어 제시해 본다. 잘츠카머구트 내에서는 다 통용이 되는지 할인이 가능하다고 하더니 덧붙여 옆에서 필여사가 물어본 시니어 할인도 오케이라고 한다. 원래 1인당 21유로인 표 두 장 값, 42유로를 37.8유로에 사고 나니 득의만면한 필여사의 표정이 볼만하다.
14시30분 출발한 푸니쿨라는 톱니궤도를 타고 빠른 속도로 올라간다. 급속도로 작아지는 아래 마을을 보고 있는 중간쯤에서 내려가는 차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더니 이내 838m의 정상 역에 도착한다. 역 건물을 나오면 앞산으로 나있는 길을 10분 정도 걸어 올라간다. 좀 가파른 산길에는 로마시대 묘지의 유적이라는 비석, 광산에서 출토된 인골모형, 광부들의 수호성인 성 바바라(St, Barbara)를 모신 정자 등이 차례로 나타난다. 길 오른쪽에는 선사시대의 켈트유적 표시도 있다. 켈트인들은 로마사람들이 오기 훨씬 전인 기원전 800년경 이곳에 정착했으며 부근에는 4천 이상의 철기시대 묘지가 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됐다는 7,000년의 역사를 가진 할슈타트 소금광산 투어의 출발지점은 광부피난처(Miners’ refuge)로 사용되던 베이지색 2층의 방문객 센터다. 티켓을 보이고 팀 배정을 받아 일정 간격을 두고 들여보내는 우리 차례를 기다린다. 시간이 되면 옆방으로 들어가 짐을 맡긴 후 지급되는 아래 위의 덧옷을 껴입는다.
바지는 갱내에서 타게 되는 미끄럼에 대비하여 궁둥이 부분을 2중으로 덧댄 특수 작업복이다. 준비를 끝낸 다음 15시에 줄을 지어 출발, 뒷마당의 야외 계단을 걸어 내려가 표고 928m에 있는 크리스티나(Christina)라는 터널 입구를 통해 1719년에 개통됐다는 궤도 깔린 좁은 굴로 진입한다. 갱도차를 타는 줄 생각했는데 소금결정이 반짝이는 갱도 안으로 상당한 거리를 걸어간다. 내부는 자연환기에 의해서 일 년 중 섭씨 8도, 습도 65%로 유지된다고 한다. 전시된 굴착공구 등을 구경하며 300m나 걸었을까 오른쪽으로 꺾이자 눈 아래로 기다란 나무 미끄럼틀이 나타난다. 길이는 27m, 옛날 광부들이 이동하며 사용했던 것과 같은 형식이라고 한다. 다리를 벌리고 몸을 뒤로 뉘어 미끄러지되 끝부분 수평거리가 충분하니 손이나 발로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 것이 좋다는 요령을 일러준 다음 가이드는 앞에 걸린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뀔 때 마다 앉은 사람의 등을 쳐서 출발시킨다. 반들반들 길이 든 나무 위에 걸터앉은 일행은 궁둥이가 든든한 2중 바지 덕에 마음 놓고 동심으로 돌아간다. 무서워서 못하는 사람은 옆에 있는 계단으로 걸어 내려가면 된다. 다음 공간은 소금 층에 있는 크리스털의 방이다. 암염을 뚫고 밝힌 색등이 있어 불빛 받은 소금 덩어리가 어둠 속에 보석처럼 반짝여 환상적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벽에 액자를 만들어 조명한 암염도 보인다.
이어 갱도에 걸린 사진을 구경하며 걸어가다 삐걱대는 나무계단을 내려가니 먼저보다 훨씬 긴 두 번째 나무 미끄럼틀이 나타난다. 유럽 최장이라는 42m 길이의 미끄럼으로 이곳 소금광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소라고 한다. 방문객은 혼자 또는 짝을 지어 차례로 한 레벨 깊숙한 땅속으로 빨리듯 내려간다. 우리는 일행 중에서 간격을 두고 기다린다. 한발 먼저 내려가 카메라를 준비한 후 뜸 들여 내려오는 필여사를 찍으리라 작전을 세운 것인데 기도와는 달리 결과는 완전한 실패였다. 어두운 공간에서 움직임이 너무 빨라 셔터의 시간지체(Time lag)가 심한 디지털 카메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할 수없이 정지된 상태에서 한 장 찍고 만족한다. 이곳에서는 광산에서 사진을 대신 찍어준다. 레이더로 동조되는 카메라 플래시가 매번 정확히 작동하여 움직임을 잡을 뿐 아니라 그때의 속도가 시속으로 사진에 표시되는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과속 차량 단속하는 카메라와 같은 기능이다. 한편 위에 설치된 모니터에도 매번 내려오는 모습과 함께 속도가 나타나 경쟁이 붙고 신기록이 나올 때마다 환성이 터진다. 잠깐의 여흥이지만 한동안 시간을 잊고 초등학교 운동회 같은 순박한 분위기에 잠겨본다. 다음 공간은 들어가는 순간 가이드가 불을 꺼서 완전한 어둠을 만든다. 잠시 후 서서히 켜지는 조명아래 갱도 깊게 조성된 검은 호수와 바위섬의 모습이 신비롭게 떠오른다. 이어 건너편 바위에 켈트인의 소금 캐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광산의 변천하는 과정을 해설한 영상이 비쳐진다. 충분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단순히 소금 덩어리만 캐던 초기의 채굴 방법이 차차 물로 녹여 빨아내는 방식으로 발전했는데 그 과정에서 이 호수가 생성된 모양이다. 투어는 다음으로도 광부 복을 입은 인형이 1734년 발굴된 ‘소금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채굴 모형을 보여주기도 하며 끝을 맺는다.
격리됐던 시간과 공간, 그리고 180m 깊은 땅굴에서의 탈출은 대기하고 있는 갱도차를 타고 의외로 손쉽게 이루어진다. 굴이 좁은 탓인지 갱도차는 긴 나무판자에 바퀴를 단 간단한 구조로 각자가 말을 타듯 한 줄로 길게 걸터앉는다. 벽과 천장이 닿을 듯 스쳐가는 아슬아슬한 기분을 견디고 있노라면 짧지 않은 거리를 달려 방문객 센터 밑을 지나는 마리아테레지아(Maria Theresia)터널을 통해 관명의 세계로 귀환하게 된다. 지붕 달린 회랑, 급한 계단을 걸어올라 방문객 센터에 돌아온 시간은 16시30분, 한 시간 반이 걸렸다. 겹쳐 입은 작업복을 반납하고 짐을 찾다보니 미끄럼틀에서 찍힌 속도 들어간 사진이 벽에 나란히 붙어있다. 한 장에 5유로. 돈을 아끼려면 부부나 가족이 함께 타고 내려와 한 장에 찍히는 것이 경제적이다. 옆에 있는 매점을 대강 구경하고 귀로에 든다. 푸니쿨라 정거장까지 걸어오는 길에 다시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밑으로 내려가기 전 할슈퇴터의 조용한 호수와 란거리에 터를 잡은 평화로운 마을을 전망하며 오늘 일정을 마친 홀가분한 시간을 즐긴다. 17시, 유스호스텔에 들어서니 배낭여행하는 한국 남녀학생 여섯 명이 와있어 저녁식사 준비에 한창 바쁘다. 취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주방과 넓은 식당이 있고 우리나라 사람뿐이라 자유롭고 편안하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같은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금방 가족과 같은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메일을 주고받은 사비네 (Sabine)씨는 보이지 않고 젊은 아주머니가 2층에 방을 지정해 준다. 침구는 깨끗하고 공동 사용하는 화장실과 샤워가 복도에 마련돼 있다. 대강 짐을 풀고 동네 슈퍼마켓을 찾아 오늘 내일 장을 보러 나간다. 돌아와 보니 학생들이 친절하게도 우리 먹을 스파게티를 만들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필여사의 수고도 덜었겠다, 반가운 김에 소주를 꺼내 활기 넘치는 젊은이들과 축배를 든다. 창밖에 세게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소주 팩, 세 개를 비워가며 피차 흥겨운 대화를 계속한다. 오래간만에 말벗이 생긴 필여사가 알프스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얼큰해지는 기분에 정다운 시간이 저물어간다. 내일 아침식사를 아주머니가 물어와 07시30분으로 약속한다.
숙소: Jugendherberg Lahn Salzbergstrasse 50, A4830 Hallstatt T: (+43) 6134 8279 더블 룸, 공동화장실, 취사가능, 아침식사포함, Euro32/일, http://www.jh-hallstatt.at.tf biene1005@aon.at |
출처: 스위스 동유럽 북유럽 남미 부부 자유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skks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