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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적 27 _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심
마가복음 7:31-37
에바다 - 열리라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요 20:30)라고 하였고 또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라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많은 이적들을 행하셨지만 복음서에 다 기록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일부 기록된 이적들조차도 항상 같은 방법으로 행하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복음서를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다.
이적이란 인간이 할 수 없는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복음서에 선별하여 기록된 모든 이적은 표적이다. 표적이라는 말은 이정표, 사인(sign)이라는 의미로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고 그 본질이 따로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표적은 일차적으로 인간이 할 수 없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그 한계가 인간의 죄라는 뜻이다. 그리고 표적을 행하심으로 죄의 한계를 넘어 의를 이루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표적이란 인간의 죄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신 계시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적을 추구하며 하나님께서 지금도 동일하게 이적을 나타내주신다는 해석은 표면적인 것에 매여 갇힌 해석이다. 이적을 표적으로 보고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의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신 본 이적도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표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치시는 방법이다. 왜 침을 뱉아 치료하셨을까? 침을 뱉아 고치신 이적은 이 본문 외에도 ‘벳새다의 맹인을 고치신 이적’(막 8:22-26)과 ‘나면서 맹인 된 자를 고치신 이적’(요 9:1-12)에서도 나타난다. 말씀으로만 하셔도 되는데 굳이 침을 뱉아 고치셨다는 것은 침에 어떤 효능이 있고 역사적인 방법 속에서 찾아야 할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인간의 죄성과 십자가를 어떻게 드러내시는가를 보아야 할 것이다.
본 이적은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었지만 독립적인 사건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문맥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우선 대략적으로 보자면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1)라고 선언하면서 마가복음을 시작한다. 예수님의 세례와 시험을 아주 간략하게 기록한 후 ‘회당에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이적’(1:21-28)을 필두로 많은 이적을 기록한다.
그리고 7:1 이하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와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은 부정한 상태에서 떡 먹는 것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예수님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입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공경한다고 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데 이는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이사야 선지서를 인용하여 그들의 죄성을 폭로하신 후(7:6-9) 제자들에게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다(7:14-23).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신다.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자가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을 고쳐주시기를 구할 때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7:27)라고 하면서 고쳐주셨다.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을 더러운 귀신에게서 놓임을 받게 하신 것은 스스로 깨끗하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 여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그리고 계속 이방 땅을 순회하신다.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31절)라고 하였다.
5:20에 보면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심으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데가볼리에 전파되었다고 하였다. ‘데가볼리’란 열 개의 도시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께서 질병을 치유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능력이 있다는 소문이 이방 땅에 퍼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32절)라고 하면서 예수님께 왔다. “귀먹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코포스’인데 ‘귀먹고 말하지 못하는 자’를 의미한다. “말 더듬는 자”란 헬라어로 ‘모길랄로스’인데 ‘모기스’(간신히, 어렵게)와 ‘랄레오’(말하다)의 합성어이다. 들을 수 없기에 말하지 못하는 자이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은 혼자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 어디든 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데리고 나왔다고 하였다. 마가복음에서 ‘무리, 사람들’이라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관심 없는 존재로 나타낸다. 즉 무리, 사람들의 관심사는 병 고침을 받는 것에 있었고 그 신기한 기적을 경험하기 원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그저 예수님이 손을 얹어 병 고치는 능력을 나타내는 자로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마가는 단순히 귀먹고 말 더듬는 자만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를 데리고 나온 모든 자들이 다 귀먹고 말하지 못하는 자라고 폭로하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였다.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6)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가 오시면 하나님 왕국이 이루어지는데 그 하나님 왕국의 상태를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며 말하지 못하는 자의 혀가 노래할 것이라고 하였다. 성경은 하나님 왕국을 이렇게 나타낸 반면 우상은 어떤 상태인지 이렇게 말씀한다.
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19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합 2:18-19)
말하는 못하는 우상은 겉으로만 금과 은으로 치장하였지 실제는 생기가 없는 죽은 존재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성경에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말하지 못하는 것을 죽은 상태로 말씀한다. 즉 하나님의 진리를 보지 못하며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상태는 죽은 것이다. 이것이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병자를 무리와 분리시켜 고치신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33-34절). 양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어 그 혀에 손을 대시는 방법으로 고치셨다. “손가락”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한다. “에바다”라는 말은 아람어로 “열리라”라는 뜻인데 헬라어 음역의 ‘엡파다’는 명령형으로 과거 수동태로 쓰였다. 번역하자면 ‘열려졌다’라는 뜻이다. “탄식”이란 다른 말로 ‘신음’이라는 뜻인데 죄 가운데서 고통받는 죄인들을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하나님께 호소하신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마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당하신 고난을 이렇게 기록한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막 14:65)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막 15:19)
예수님은 죄의 권세 아래에서 신음하는 자들(롬 8:23)의 신음을 대신하여 십자가로 향하셨고 침 뱉음의 수치와 고난을 당하심으로 대속을 이루셨다. 즉 수치와 심판을 당하심으로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신 것이 십자가이다. 결국 마가는 침 뱉음을 통해 이 이적이 단순히 말 더듬는 자를 위한 치료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35절)라고 하였다. 귀가 먼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이 분명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맺힌 것”이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 ‘데스모스’인데 ‘올가미, 착고, 사슬, 감금, 투옥’이라는 뜻이고, “풀려”라는 말의 ‘뤼오’는 ‘해방하다, 석방하다, 풀어놓다’라는 뜻으로 과거 수동태로 쓰였으니까 ‘풀려났다, 해방되었다’라는 의미이다. 단순히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듣게 되었고 말하게 되었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귀가 열려 해방되었다는 것은 죄의 권세에 매여 있던 것으로 해방된 것을 암시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귀가 열렸다는 그 의미 이전에 하늘이 열린 것이다.
26 만일 그들이 주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닫히고 비가 내리지 않는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 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들의 죄에서 떠나거든 27 주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시오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대하 6:26-27)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늘이 닫힌 상태를 죄 가운데 있는 상태로 하늘이 열린 상태를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진 상태로 나타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51)
실로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은 하늘이 열린 것이다.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죄 문제를 해결할 은혜가 주어졌다는 뜻이다. 즉 하늘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죄 문제가 해결되는 은혜가 임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귀먹은 자의 귀를 열리게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열려 죄의 권세에 매인 상태를 해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나타내는 말씀이 “에바다”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미 열려졌고 그것은 하늘에서 여신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36-37절). 죄인은 진리를 말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기에 예수님은 경고하시며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지만 경고할수록 진리를 말한다고 전하는 것이 죄인들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듣지 못하는 귀먹은 자, 진리를 말할 수 없는 자, 곧 죽은 자가 진리를 안다고 전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행위이다. 이것이 우리의 죄성이다. 율법으로 스스로를 깨끗하다고 여기는 자들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자이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자에게 진리를 듣게 하시고 말하게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을 열어 친히 십자가로 찾아오신 은혜에 의한 것이다.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8-10)
(2022101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첫댓글 방송이 잘 못되어서 음성 파일로만 편집해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