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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36
창세기 9:18-29
셈의 하나님 여호와
본문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된다. 노아의 아들들로 백인, 황인종, 흑인으로 퍼졌는가? 함의 잘못으로 인해 가나안에게 저주가 내려지는가? 함이 아비 하체를 보았다는 것이 과연 본다는 것에만 국한된 문제일까? 그렇다면 셈과 야벳이 뒷걸음으로 아비의 하체를 덮었다고 하였는데 과연 보지 않고 그것이 가능한가? 노아는 자신이 실수하고서 함을 저주한다는 것이 예언인가? 노아가 950세까지 살았다고 하였으니까 방주에서 나온 후 약 350년 동안의 대표적인 기록이 술 취해서 추태를 보인 사건을 계시로 주시는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사실 이런 의문의 기저에는 노아가 술에 취해 술주정으로 추태를 보인 나쁜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본문에 대해 좋은 의미로 해석한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특히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들어올 때 선교적 차원에서 금지한 술 문제로 인해 노아의 잘못된 행위를 본받지 말자는 식의 교훈을 전한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한가? 예수님의 첫 표적이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었고(요 2:1-11)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돌아가셨다(요 19:30).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하였는데(마 11:19) 여기서 ‘오이노포테스’라는 말은 ‘포도주에 빠진 자, 술고래’라는 뜻이다. 그래서 혹자는 포도주와 포도즙으로 구분하여 예수님은 포도즙을 드셨다는 식으로 이해하고자 하나 성경은 포도주와 포도즙으로 구분해서 말씀하지 않는다. 본문도 하나님께서 꼭 알려주셔야 할 복음이라면 우리가 주변의 것에 관심을 빼앗기지 말고 복음을 알려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파악하는 것이어야 한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18-19절). “퍼지니라”라는 말의 히브리어 ‘나파츠’는 ‘산산히 부수다, 깨뜨리다, 흩뜨리다, 흩뿌리다’라는 뜻이다. 사사기에 보면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백 명이 이경 초에 진영 근처에 이른즉 바로 파수꾼들을 교대한 때라 그들이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나파츠)”(삿 7:19)라고 하였고,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나파츠) 하시도다”(시 2:9)라고 말씀하였는데 한 덩어리, 온전히 하나였던 것이 깨져 산산조각이 났다는 뜻이다. ‘노아의 세 아들들, 이들에게서 온 땅이 깨졌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노아의 아들들을 통해 백인, 황인종, 흑인이 나왔다는 말이 아니라 노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하나 되지 못하고 깨어져 산산조각났다는 의미로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하나여야 되었지만 죄의 권세에 매인 인간들은 방주 이후에도 여전히 죄 가운데서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나누어져 살 수밖에 없는 상태로 죄의 심각성을 다시 보여주신 것이다. 구체적인 것은 11:1-9에서 바벨탑과 성의 사건으로 드러난다.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20절)라는 말씀에서 히브리어 성경에는 “농사”라는 말은 없고 “심었더니”라는 말은 ‘나타’인데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셨다고 할 때 그 단어이다. 또 우리 성경에 “포도나무”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 ‘케렘’은 ‘포도원’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포도나무는 ‘케펜’이다(창 40:9). 정선한(상품) 포도나무는 ‘소레크’라고 한다(사 5:2.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케펜)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소레크)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창 49:11). 즉 ‘노아가 그 땅의 사람으로 포도원을 세웠다’는 말이다. 아모스와 이사야 선지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파종하는 자가 곡식 추수하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1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케렘)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15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9:13-15)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3)
같은 단어를 아모스 선지서에는 “포도원들을 가꾸고”라고 표현하였다. 따라서 단순히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말이 아니라 노아가 세운 포도원은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포도원지기가 되신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에덴동산을 통해 복음을 나타내고자 하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노아를 통해 복음을 말씀하고자 하신다. 즉 하나님께서 포도원을 세워 포도주를 주심으로 포도원 안에서 즐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나타내고 있다. 활로서 하나님 자신의 죽음을 보여주신 언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시는 말씀이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21절). 여기서 “취하여”라는 말의 히브리어 ‘샤카르’는 무엇인가를 먹고 그것에 의해 충분히 만족한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요셉과 형제들이 만났을 때를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샤카르)”(창 43:34)라고 말씀한다. 즉 즐거움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벌거벗은지라”의 히브리어 ‘갈라’는 ‘덮개를 벗기다, 폭로하다, 옮기다’라는 뜻이다. 창세기 35장에서 사용된 같은 단어를 우리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갈라)(창 35:7)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내셔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야곱이 “엘벧엘”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의 집으로 나타내신 경험하였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성전이신 하나님으로 드러내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노아가 벌거벗고 추태를 보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것이 “그 장막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한다. 히브리어로 ‘타웨크(~가운데서, ~으로 말미암아) 오헬(장막, 성막)’인데 일차독자의 입장에서는 ‘성막’으로 익숙한 단어이다. 그렇다면 이 본문은 노아가 장막 안에서 술에 취해 추태를 보인 것이 아니라 성막의 제사장 위치에서 하나님께서 활로 자기 죽음을 나타내신 언약에 의해 하나님의 집에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상징된 하늘의 생명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보자.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눅 13:6-9)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원지기로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상태, 이 때가 회개의 기회로 주어져 있다는 의미로 말씀하셨다. 구약에서 포도원지기라고 말씀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열매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신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열매만 인정하고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 왕국이라는 뜻이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22절). “보고”라는 말은 히브리어 ‘라아’인데 레위기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16 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 하여 교합하면 너는 여자와 짐승을 죽이되 그들을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 17 누구든지 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그의 어머니의 딸을 데려다가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 그들의 민족 앞에서 그들이 끊어질지니 그가 자기의 자매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그가 그의 죄를 담당하리라 18 누구든지 월경 중의 여인과 동침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면 남자는 그 여인의 근원을 드러냈고 여인은 자기의 피 근원을 드러내었음인즉 둘 다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레 20:16-18)
하체를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범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함의 행위는 아버지의 하체를 범한 것이고 언약의 대표자요 제사장과 같은 노아의 하체를 범한 음행은 하나님의 집, 성전을 더럽혔다는 의미이다. 신약 식으로 말하자면 세상과 합한 음행으로 성막이요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모독하였다는 뜻이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23절).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아버지의 하체를 덮는데 안 보고 덮을 수 있는가? 그러므로 단순히 보았다 안 보았다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여 하나님의 집을 더럽혀 하나님을 거부한 함과 달리 셈과 야벳은 그것을 덮어 언약을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기 죽음에 대한 은혜성을 인정하였다는 뜻이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24-27절).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18절), “가나안의 아버지 함”(22절)이라고 두 번씩이나 강조한 것은 일차독자의 입장에서 함의 아들 가나안으로 시작된 ‘가나안 족속’으로 이해하였기에 지금 가나안 땅의 진입을 앞두고 왜 가나안 족속이 그 땅에서 쫓겨나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원인 제공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노아는 함이 행한 어떤 행동으로 인해 함의 아들을 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노아의 말은 가나안을 통하여 함으로부터 생겨날 가나안 족속을 지칭하였다. 이에 가나안은 그 형제들의 종들의 종(극단적인 히브리적 표현)이 된다.
그리고 우리 성경에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번역하였는데 사실 주어가 누구인가를 문장 속에서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야벳을 창대하게 하시는데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는 것자체가 덮어줌의 은혜를 나타낸 셈과 야벳에 대한 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주어를 야벳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보아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하신다는 의미이다. 거한다는 말의 ‘샤칸’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샤칸)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스케노오:장막을 치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하나님의 자기 죽음을 담은 노아 언약의 성취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을 이루셨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라고 하신 이유는 예수님 자신의 몸이 성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큰 이”(마 12:6)로 오셨기에 이 땅에 율법을 고수하며 제사하는 율법적인 인간의 모든 행위로 상징된 성전은 무너져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나 성전,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진 자들이 교회요 성도이다(고전 3:16, 엡 2:21-22)(2023040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