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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에 대한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믿음을 알고 싶다면 히 11장을 읽으라고 할 만큼 이 장에는 믿음으로 살았던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믿음이 무엇이냐? 이론적인 정의를 가르쳐 주는 말씀이 아니라, 믿음은 현실적으로 어떤 모습이냐?를 가르쳐 주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그 자체로서는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현실적인 삶을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8절에서는 먼저 믿음의 기원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현대어 성경으로 보면,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조차도 여러분의 자발적인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에베소서 2:8) 이 말씀에서 이야기해 주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에게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에는 믿는 것보다도 믿음의 대상과 내용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그 말 자체는 신뢰한다, 믿는다, 의지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무엇을 믿느냐? 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을 믿는 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갈멜산 위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은 하루 종일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그것도 모자라서 피가 흐르도록 자기들 몸에 상처를 내고 기원했지만 바알의 응답이 없었습니다. 우상은 믿을만한 대상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기도는 불의 응답을 받았고,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갈멜산의 제단에 임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믿을 만한 배상, 믿을 수 있는 분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상을 믿는 것처럼 하나님이 있어 주시기를 믿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자기의 신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맺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사람이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신뢰가 바탕이 된 인격적인 관계가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인격적인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중보의 역할을 해 주신 분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적인 사역을 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몸을 희생의 제물로 드려서 단 한 번의 유일하고 완전한 제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이 제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무너뜨리고,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는 대제사장이 되어서 중보의 역할을 해 주신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들의 믿음은 현실적인 믿음이 됩니다. 믿음이 살아가는데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믿음이 어떻게 현실이 되는지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믿음은 실상이 됩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첫 번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1절) 믿음은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인데, 믿음을 가지면 바라는 것이 실상이 되어서 나타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란다는 것은 내가 원하고, 내가 상상하고, 내가 소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돌덩이를 가져다 놓고 금덩이가 디는 것을 믿으면 금덩이로 변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대개 우리는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잘못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나에게서 비롯된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바라면 바라는 것이 실제로 나타나고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면 자기가 바라고 원하는 것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원하게 됩니다. 그것만이 실상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미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자기의 욕구,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최고요 최선의 삶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하면, 우리의 고난이나 아픔 슬픔까지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데 사용되기를 바라게 하며, 우리의 불행에서조차도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를 거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뜻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우리는 바라는 것이 실상이 될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 있는 영원한 것들이 오늘 현재에 있는 것처럼 경험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임하여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미국에서 흑인들에게 대한 인종차별이 가장 심할 때에 흑인 인권운동가였던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이런 믿음을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이 자명한 진리가 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옛 노예의 후손들과 옛 주인의 후손들이 사랑으로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저의 네 명의 어린 자식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설교를 맺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마침내 자유로워졌나이다” 그는 믿음으로 아직 이루어지지도 않은 일을 실상이 되었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가난한 사람이 부요해진 것을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아픈 사람이 나은 것을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고난 받는 사람이 구원을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사람들은 시간의 제한에 구속을 받지 않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미래를 앞당겨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맹인이 안내자를 신뢰하고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은 볼 수 없지만, 볼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자신의 안내자는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졌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래서 자신의 손을 안내자에게 맡기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서 걷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들의 안내자 역할을 합니다. 믿음은 우리들을 바라는 것의 실상으로 안내합니다. 믿음이 이러한 현실이 되어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2) 믿음은 증거가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2절) 두 번째로 믿음은 그 자체가 증거이므로, 믿음을 위해서 다른 증거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은 무조건 믿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다른 증거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선행하는 증거들이 수도 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 컵에 든 물을 맨 앞에 앉은 사람이 마시고 짜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 사람이 마시고 짜다고 합니다. 또 그 다음 사람이 마시고 짜다고 합니다. 한 열 명이 마시고 짜다고 합니다. 이 물은 짠물일까요? 단물일까요? 안 마셔봤는데 어떻게 압니까? 앞에서 마신 모든 사람들이 짜다고 말하는 선행하는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증거를 필요로 하는 단계를 넘어서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믿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대답하겠지요? 그런데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을 봤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못 보았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못 보았다면서 어떻게 믿습니까?”라고 물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들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히 12장에는 무엇보다도 믿음으로 살아간 많은 조상들이 그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히브리서 12:1)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은 망망한 바다에 나가서 오랜 시간 동안 항해를 하지 않습니까? 바다에는 신호등도 없고, 차선도 그려져 있지 않은데 길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목적지를 찾아서 항해하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선원들에게 항해에 대한 경험이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경험이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쌓여 있는 증거를 따라서 하나님의 세계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앞서 간 믿음의 사람들이 누적된 증거가 되어서, 예수님을 믿고 우리 삶의 전부를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믿음은 그 자체가 증거입니다. 날이 밝은 것은 하늘에 해가 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처럼, 믿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은 수 많은 증거들을 통해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농부가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은 귀중한 씨앗들을 그냥 허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싹이 나고 열매가 달릴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미 농사를 짓는 동안 수십 번 추수를 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쌓여 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믿음을 가진다면, 이 믿음이 우리들에게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자체로서 증거가 되는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 믿음은 지식이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믿음은 지식이 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3절) 이 말씀과 같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본문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과학적인 탐구의 세계를 뛰어넘어서 우주의 기원에 관해서도 지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표현이 나타나고 있는데 “믿음으로 안다”라는 말씀입니다. 과학적인 지식은 알고 난 후에 믿음을 가지는 것이지만, 신앙의 지식은 믿음을 가진 후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세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0절에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한복음 11:40) 믿으면 보게 되고 믿으면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음으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 이 세상은 철저하게도 사람의 힘과 노력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곳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하신 모든 것의 질서를 세우시고 배치하고, 장식하고, 완성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아기를 낳고 끝난 것이 아니라, 부모들은 그 아이를 양육하고, 키우고 보살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것을 관리하시고, 지배하시고, 성실하게 보호하신다는 의미까지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믿음으로 알고, 믿음으로 확신하고, 믿음으로 증거하고, 믿음으로 이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전혀 없을지라도 이 고난의 세상을 용기와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주님 오실 때까지 걸어갈 수 있는 그 앎과 지식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대단히 현실적인 삶을 살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질 때 현실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바라는 것이 실상이 되고, 보이지 않는 것이 증거가 되며, 이전에 모르던 세계가 새롭게 발견되는 놀라운 능력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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