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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한훤당선생기념사업회 추계학술대회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道學 · 師友 · 追崇樣相에 관한 연구*
일시 : 2014년 11월15일 12:00(토요일)
장소 : 대구시 중구 장관동 담수회관 3층
⚫주제1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道學의 實相과 그 意味
발표자 : 권오영 학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주제2
한훤당 김굉필선생에 대한 評價와 追崇樣相
발표자 : 황위주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주제3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師友關係와 時代精神
발표자 : 정출헌 점필재연구소장,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정출헌鄭出憲 점필재연구소장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1. 서 론
유교문명을 국시로 세운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그 목표를 하나하나 일궈나갔다.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뒤, 경복궁의 배치라든가 도성의 건축물마다 유교이념을 담아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지방의 관아, 객관, 역원 등을 재건. 창건하면서 국가 통치제제를 갖추어 가는 한편 수시로 명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온힘을 기울였다.
성종 때 완성을 본 『經國大典』은 그런 노력의 최종 결실이다. 하지만 명실상부한 유교문명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그것을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의 구축이 절실했다. 국가체제를 운영하는 인간 개개인을 유교적 이념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성종대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은 그런 작업의 선두에 섰던 인물이다. 지역 인재의 육성이라든가 지역 사족을 통한 유교문명을 확산시키고자 했던 것은 그 같은 노력의 일환이다. 그 결과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지역의 제자를 길러내는 전범典範을 수립했고, 그들은 학문. 도학. 정치 등 여러 방면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기 시작했다.
성종을 유교국가로서의 면모를 완성시킨 군주로 평가하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성종대는 ‘태평의 시대’로 회자되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긴장의 시대’처럼 읽힌다. 태평시절이었다는 기억은 뒷날 폭군 연산군과 대비되어 강조되고, 중종에게 걸었던 이상적 수사修辭에 가까운 듯 보이는 것이다.
세조 이래 장기간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훈구대신에게는 태평시절이었을지 그들의 전횡에 맞서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신진사류들은 동의하기 어려운 시대인식이었다. 물론 君主를 정점에 두고 늙은 대신大臣과 젊은 대간臺諫 사이의 균형을 맞춘 시기로 평가할 수 있겠지만, 새로운 문명의식과 시대정신을 버려가던 신진사류들은 그런 외형적인 평가에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단종2, 1454~연산군10, 1504]은 유교문명의 이념을 개개인의 차원에서 실천하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심화하여 국가적 차원으로까지 확대시키는 것을 평생의 임무로 삼았던 인물이다. 도학을 창도했다는 평가는 그런 맥락에서 충분히 인정된다. 하지만 김굉필을 비롯한 성종대 신진사류는 그 같은 분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구체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이상을 제대로 실현하기도 전에 정치적 사화士禍로 좌절된 까닭도 있겠지만, 그런 수난을 겪는 와중에 많은 기록들이 폐기되어버린 안타까운 사연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을 터다. 그리하여 김굉필과 그의 벗들이 걸었던 자취는 뒷사람들의 흐릿한 기억과 단편적 전문傳聞으로 엿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김굉필의 본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서라면, 그런 불완전한 기록들은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 유념하며 꼼꼼하게 되짚어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때,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남긴 증언은 너무나 소중하다. 남효온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六臣傳>을 짓고, 태평성대의 구질구질한 이면을 드러내기 위해 <秋江冷話>를 짓고, 역사에서 잊혀질 지도 모를 벗들을 기억하기 위해 <師友名行錄>을 지었던 인물이다. 『景賢錄』에 실려있는 김굉필과 관련된 기록의 상당수도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이와 함께 김굉필이 주변 인물들과 주고받은 시문도 적극 발굴하여 활용할 필요가 있다. 기억과 전문에 의해 재구된 후대의 기록보다 당대의 기록이 무엇보다 중시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과거의 인물을 오늘의 인물로 되살리기 위해서는 평가의 잣대를 새롭게 마련할 필요가 있다. 성리학의 시대를 열어가던 조선 전기의 최고 덕목은 그가 당대의 시대정신인 도학道學을 얼마나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는가에 좌우될 것이다. 하지만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조선시대 최고의 지성으로 평가되는 까닭은, 성리학적 이념에 대한 깊은 이해뿐만 아니라 온유돈후한 시적 정감을 풍부하게 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학적 실천에 충실한 인물이 지닌 미덕이야 말할 것 없이 존경스러운 것이지만, 그런 이념을 정감어린 감성으로 풀어내는 것 또한 소중하다. 김종직에 대한 ‘문장을 통해 도학으로 들어갔다[沿文溯道]’라는 이황의 평가가 당대에는 뭔가 미흡한 것처럼 보였지만, ‘시 읊는 도학자’라고도 말할 이런 모습이야말로 우리시대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소중한 하나의 이상일 수 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道學을 창도한 김굉필이 詩學도 깊이 사랑했다는 기록은 그래서 더 없이 반갑다.
사제관계師弟關係와 사우관계師友關係를 통해서 김굉필의 시대정신時代精神[*註1]을 다시 생각해 보려는 오늘의 발표는 당대인의 기록을 통해 삶의 국면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재구하고, 그런 발자취를 당대의 시대적 맥락 위에서 정밀하게 평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 과정에서 지금 전해지고 있는 기억이라든지 믿음과는 다른 김굉필의 모습들을 만나기도 할 터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道學의 이미지에 갇혀 있는 김굉필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그런 모습이 지금의 우리들에게 더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가를 확인하는 과정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註1 : 時代精神(Zeitgeist)이라는 말은 독일의 철학자 J.G.헤르더가 1769년에 처음 사용했다고 하는데, 사전적 의미로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정신자세라든가 태도”를 말한다. 여기서는 김굉필이 15세기 후반 추구했던 새로운 시대적 지향, 곧 도학의 실천과 그 사회적 확산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
2. 남효온이 그린 한훤당의 초상
생육신으로 알려진 추강 남효온은 매월당 김시습과 함께 방외인으로도 일컬어진다. 여타의 생육신이 세조의 불법을 용납할 수 없어 은둔의 방식으로 시대를 비판했던 데 반해, 이들은 전국 방랑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험난한 행로를 걸으면서 모순에 찬 현실을 외면하고 있지 않았다. 누구보다 고독하면서도 치열하게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고, 그 부끄러운 면모를 통렬하게 드러내 역사의 심판에 넘기려고 죽음도 불사했다.
누구도 발설하지 못하고 수쉬하던 소릉昭陵복위의 당위성을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건의했다가 ‘미친 서생[抂生]’으로 취급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그러진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六臣傳>과 <秋江冷話>를 지었다. 뿐만 아니다. 새로운 시대를 꿈꾸던 벗들의 이름이 민멸泯滅되지 않도록 그들의 꿈과 실천을 한 명 한 명 적어나갔다. <師友名行錄>이 그것이다. 죽기 2년 전까지 써내려간 거기에는 총 63명의 벗들이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약전略傳 형식으로 거두어진 이들 가운데 마지막 9명은 이름만 기재되어 있을 뿐 행적은 비어있다. 이들의 명행을 기록하기 전에 죽음이 덜컥 다가왔던 까닭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사우명행록>은 가슴 먹먹한 미완의 기록인 셈이다.
그런 가운데 남효온은 벗들의 명행을 꼽으면서 김굉필을 맨 첫 자리에 두었다. 행적도 다른 벗들에 비해 풍부하다. 남효온이 김굉필을 얼마나 마음으로 존중한 벗이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실제로 남효온은 <사우명행록> 외에도 <추강냉화>를 비롯한 다른 시문에서 틈이 날 때마다 김굉필을 떠올리고 있다. 금강산 송라암松蘿庵에서, 개경 현화사玄化寺에서, 지리산 천왕봉天王峰에서 그의 이름과 발자취를 빠뜨리지 않고 기록[*註2]하고 있는 것이다.
*註2 : 남효온, <遊金剛山記> 경진일(29일) “도로 내려와서 송라암에 이르러서는 벽 위에 있는 친구 大猷의 名字 및 絶句 한 수를 보았다”; <松京錄> 신유일(13일) “탑[영취산 현화사]에는 친구 大猷와 德優의 이름이 있었다.”; <智異山日課> 병인일(30일) “사당[천왕봉 마야부인] 안에는 禦侮將軍 鄭義門의 현판 기문이 있고, 내 벗 金大猷 등의 이름이 현판위에 적혀있었다.”
그런 만큼 <사우명행록>에 그려진 김굉필의 모습은 실제 행적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실의 기록’으로 존중할 필요가 있다. 다소 길지만, 중요한 기록이니만큼 <사우명행록>에 실려 있는 ‘김굉필’의 전문을 들어본다.
[제1단락]
김굉필金宏弼은 字가 대유大猷이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에게 수업하였고, 경자년(1480, 성종11)에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하였다. 나와 나이가 같으나 생일이 나보다 늦다. 현풍에 살았다. 고상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어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었고, 본부인 외에는 일찍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제2단락]
손에서 『소학』을 놓지 않았으며, 인정人定이 된 뒤라야 잠자리에 들고 닭이 울면 일어났다. 사람들이 국가의 일을 물으면, 반드시 말하기를 “『소학』을 읽는 아이가 어찌 큰 의리를 알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짓기를,
業文猶未識天機 학문에 종사해도 천기를 알지 못했지만
小學書中悟昨非 『소학』의 글 속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닫노라
점필재 선생이 평하기를 “이것은 곧 성인이 되는 근본 터전이니, 노재魯齋 이후에 어찌 그러한 사람이 없다고 하겠는가.” 하였으니, 그를 추중함이 이와 같았다.
[제3단락]
나이 30이 된 뒤에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고, 후진을 가르치는 데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현손李賢孫, 이장길李長吉, 이적李勣, 최충성崔忠成, 박한공朴漢恭, 윤신尹信과 같은 사람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으니, 그 무성한 재질과 독실한 행실이 그 스승과 같았다. 나이가 들수록 도가 더욱 높아졌기에 세상이 만회될 수 없고 도가 행해질 수 없음을 익히 알아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겼다. 그러나 사람들이 또한 이러한 것을 알아주었다.
[제4단락]
점필재 선생이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또한 국사를 건의하는 일이 없자, 대유가 시를 지어 올렸다.
道在冬裘夏飮水 도란 겨울에 갖옷 입고 여름에 얼음 마심에 있거늘
霽行潦止豈全能 비 개면 가고 비 오면 멈춤이 어찌 전능한 일일까
蘭如從俗終當變 난초도 만약 세속을 따른다면 마침내 변할 것이니
誰信牛耕馬可乘 소는 밭 갈고 말은 탄다는 이치를 누가 믿으리까
선생이 화답했다.
分外官聯到伐氷 분에 넘치게 관직이 경대부에 이르렀으나
匡君救俗我何能 임금 바로잡고 세속 구제함을 내 어찌 능히 하랴
從敎後輩嘲迂拙 이로써 후배로 하여금 오졸함을 비웃게 했으니
勢利區區不足乘 구구한 권세의 벼슬길에는 나설 것이 못 되누나
이로부터 점필재와 사이가 나빠졌다.
[제5단락]
정미년(1487, 성종18)에 부친상을 당해서는 죽만 마시고 슬피 곡읍하여 혼절했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참조 : 남효온 박대현 역 추강집(한국고전번역원2007) 229-230면]
남효온이 기억하는 김굉필의 삶은 ‘생애 사실과 행실’, ‘『소학』에 전념하던 태도’, ‘후진 양성에 열심이던 모습’, ‘스승 김종직과 논란’, ‘극진하게 치르던 부친상’ 등 총 5개의 단락으로 구성된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사실들이지만, 거의 모두가 남효온의 이 기록에 원천을 두고 있다는 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남효온의 기록이 없었다면, 김굉필의 생애는 지금 적막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또한 위의 행적들은 연대순으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 서른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고 후진 양성에 열심이었다는 [제3단락]은 매우 중요하다. 남효온은 <추강냉화>에서도 그런 면모를 재차 소개할 만큼, 김굉필의 가장 인상적인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유大猷가 『小學』으로 몸을 다스리고 옛 성인을 표준으로 삼아 후학을 불러 차근차근 잘 이끌어가니, 쇄소灑掃의 예禮를 행하고 육예六藝의 학문을 닦는 사람이 앞뒤로 가득하였다. 그를 비방하는 논의가 장차 비등하려 하자, 자욱이 그만두도록 권하였으나 대유가 듣지 않았다. 일찍이 남에게 말하기를 “승려 육행陸行이 선교禪敎를 펼치니, 수업하는 제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 벗이 그만두라면서 말하기를 ‘화가 생길까 두렵다.’ 하니 육행이 말하기를 ‘먼저 안 사람으로 하여금 뒤늦게 안 사람을 깨우치게 하고, 먼저 깨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뒤늦게 깨달은 사람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니. 내가 아는 것을 남에게 알릴뿐이다. 화복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내가 어찌 관여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육행은 중이라서 취할 것이 없지만, 그의 말은 지극히 공정하다.” 하였다.
여기에서 후진을 양성했다는 사실과 함께 성인聖人을 표준삼아 후학後學을 가르치고 있는 바람직한 행동에 대해 비방하는 소리가 들끓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화를 당할지 모르니 그만 두라는 정여창鄭汝昌의 만류를 들어야 할 정도였다.
왜, 그러했던 것일까? 돌이켜 보면 스승 김종직과 제자들도 ‘영남선배당嶺南先輩黨’이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실제로 그런 우려는 현실로 들이닥쳤다. 연산군 4년 김종직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은 단지 김종직의 문도門徒라는 이유로 능지처사陵遲處死 되거나 유배流配를 가는 참극을 겪어야 했다. 그게, 그들이 살았던 시대였다. 김굉필의 삶을 시대적 맥락과 연관 지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면밀하게 읽어내야 하는 까닭이다.
3. 師弟-師友의 만남과 학문세계의 모색
가. 스승과의 만남, 문장공부와 마음공부의 두 길
김굉필은 단종 2년(1454) 5월 25일 서울 貞陵洞(현 貞洞) 사제私第에서 출생했다. 그리고 무척 활달하고 호방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기대승은 그 시절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어렸을 때 성격이 호방하여 아무 거리낌 없이 시가市街를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채찍으로 때리니 사람들이 선생이 오는 것을 보면 문득 피하여 숨었다. 장성해서는 분발하여 글을 배워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증조부 김중곤金中坤은 예조참의와 관찰사를 지냈고, 조모가 개국공신 조반趙胖의 따님인 명문가문의 자제였던 만큼, 유년시절의 거리낄 것 없고 호방한 행동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게다가 부친과 장인이 모두 무과武科로 출신하였으니, 무인武人으로서의 강직한 기질도 이어받았던 듯하다. 하지만 위의 행장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커서는 분발하여 공부에 전념했다는 사실이다. 유년기에서 청년기로 접어들며 삶의 큰 전회轉回를 도모했던 것이다.[*註3]
*註3 : 김굉필은 아들 넷의 이름을 彦塾, 彦庠, 彦序[早卒], 彦學으로 지었는데 여기에서 그의 학문에 대한 열 정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 그런 정황을 짐작할 수 있는 구체적 사례로 김굉필의 21세 늦은 봄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날, 인근 고을인 함양의 군수로 내려와 있던 김종직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곽승화郭承華와 함께 찾아온 김굉필과의 첫 만남은 김종직에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의 만남을 두 수의 시로 남기고 있는 것이다.
窮荒何幸遇斯人 궁벽한 곳에서 어떻게 이런 사람을 만났던가
珠具携來爛熳陳 진주 보배 가져와 찬란하게 펼쳐놓았구나.
好去更尋韓吏部 좋이 가서 다시 韓吏部[한유韓愈]를 찾아보게나
愧余衰朽未傾囷 노쇠한 나는 곳집 기울이지 못함이 부끄러우니.
看君詩語玉生煙 그대의 시어는 옥에서 안개가 피어나는 듯하니
陳榻從今不要懸 이제부턴 진번陳蕃의 걸상을 걸어둘 일 없겠네.
莫把殷盤窮詰屈 반경盤庚을 가지고 까다로운 문장 궁리하지 말고
湏知方寸淡天淵 모름지기 마음을 천연天淵처럼 맑게 해야 하리라.
궁벽한 시골인 경상도 함양에서 만난 두 젊은이는 예사롭지 않았다. 진주 보배를 펼쳐놓고 옥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듯 화려하고 영롱한 시적성취는 여느 시골 서생의 작품과 판연히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탁월한 재주를 자랑하며 한유와 같은 문장을 배우고자 했던 그들은, 따끔한 학문적 충고가 필요한 젊은이들이기도 했다.
김종직은 그 점을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지적해 주었다. 기발하게 보이는 문장 쓰는 데 힘을 쓰지 말고, 마음공부로 마음부터 맑게 해야 한다고. 이렇게 맺은 사제의 인연이 어떻게 진전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자료는 별로 없다. 하지만 진번陳蕃의 고사를 인용하며 자주 찾아오라 당부하고 있고, 이듬해 김종직이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김굉필을 ‘오당吾黨’으로 일컫는 점[*註4]으로 미루어볼 때 김종직과의 잦은 만남을 통해 학문의 깊이를 더해갔으리라는 점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실제로 김굉필은 24세 되던 여름, 성종 8년(1477) 8월에 열릴 과거를 앞두고, 이승언.원개.이철균.곽승화.주윤창 등과 함께 선산부사로 있던 김종직을 찾아가 수개월 공부했던 사실이 확인된다.[*註5]
*註4 : 김종직, 『점필재집』 <贈無比師與克己同賦> 지리산을 등반할 때, 김종직은 김대유·신정지를 ‘吾黨’으 로 지칭하고 있다.
*註5 : 김종직, 『점필재집』 <李生員承彦.元參奉槪.李生員鐵均.郭進士承華.周秀才允昌.金秀才宏弼, 會府之鄕 敎, 討論墳典. 時與病夫問辨數月矣. 文八月中主上, 將視學取士. 治任자辭, 送之以時>
김종직은 과거를 보러 떠나는 그들에게 “吾黨에 기특한 선비 많음을 좋아하노니, 눈을 씻고 장차 급제자 명단을 보련다.[自多吾黨多奇士, 洗眼行看淡墨題]”고 한껏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김굉필은 그때의 과거에서 실패하고 만다.
그 이듬해, 김굉필은 고향에서 또 다른 선생을 만나게 된다. 마침 그해 5월 8일, 김맹성金孟性이 인근 고을 고령高靈으로 유배되어 내려왔던 것이다. 김굉필은 곧바로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그 무렵 김맹성과 주고 받은 시들이 제법 전한다. “戊戌冬作. 時年二十五”이라는 주석이 있어 창작한 시기가 김굉필 25세 겨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그 작품의 첫 수를 보자.
斜界山村歲月深 사계 산마을에 세월이 깊은데
肅條索莫少知音 적막하기 그지없어 내 마음 아는 이 없네.
徙隣欲向高陽地 이웃을 옮겨 고양 땅으로 가서
詩炳時時得細鍼 시 좋아하는 병 때때로 가르침 받고자하네.
눈 내린 겨울밤도 마다않고 김굉필은 고령을 오고가며 김맹성에게 시 공부를 했다. 사흘 밤을 함께 지내기도 했다. 자기 스스로 ‘詩病’이있다.고 고백하고 있을 만큼, 그 시절 김굉필은 문장 공부에 흠뻑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김맹성에게 반년 가까운 시간 동안 가르침을 받다가 26세 되던 성종10년(1479) 초봄, 서울로 올라갔다. 이듬해 봄에 열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 김굉필에게 스승 김맹성은 다음과 같은 격려의 시를 부쳐 보냈다.
洒落胸中物外春 깨끗한 마음속은 세상 밖의 봄이요
凌雲逸翮逈離塵 구름 뚫고 날아가 아득히 속세를 떠났구나.
爲問當時題柱客 묻노라 그 당시에 기둥에 이름 쓴 나그네
誰知他日棄繧人 뒷날 비단 버린 사람일 줄 누가 알리요.
김맹성이 마지막 두 구절에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와 종군終軍의 고사를 써서 금의환향하리라는 기대했던 것처럼, 김굉필은 과연 2월 24일에 치러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다. 김굉필의 나이 27세였다. 남효온도 그 날의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김굉필과 同年의 인연을 맺게 된다. 남효온은 <사우명행록>에서 ‘현풍인玄風人’으로 기록하고 있고 <사마방목>에도 “본관 서흥瑞興, 거주지 현풍”이라 밝히고 있듯, 김굉필이 그때까지 주로 현풍에서 공부하며 지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절은 두 스승 김종직.김맹성으로부터 마음공부과 문장공부 두 길을 배워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김굉필의 행적에서 가장 중요한 국면, 곧 “손에서 『소학』을 놓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국가의 일을 물으면 “『소학』을 읽는 아이가 어찌 큰 의리를 알겠는가.”라고 대답했다는 것은 어느 때 있었던 일일까?
또한 “학문에 종사해도 천기를 알지 못했지만, 『소학』의 글 속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닫노라
[業文猶未識天機, 小學書中悟作非]”라는 시에 대해 김종직이 “이것은 성인이 되는 근본 터전이니, 盧齋 이후에 어찌 그러한 사람이 없다고 하겠는가.”라고 추증했다는 것은 어느 때 있었던 일일까?
그동안 전념했던 ‘業文’이란 과거를 위한 공부를 지칭하는 것일 터, 김굉필의 술회시述懷詩와 그에 대한 김종직의 高評[높은평가]은 생원시에 합격한 27세 이후의 어느 때로 보인다. 물론 김종직은 학문에서 엽등獵等하지 말아야 한다는 부친 김숙자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소학』은 다른 공부보다 우선해야 할 과정으로 여겼던 것이다. 자기 아들 수군獸君이 10세때 『소학』 공부를 시작한 것을 두고 자신보다 학업의 진도가 늦다고 나무랄 정도였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 화려한 문장에 빠져있던 김굉필과 곽승화에게 마음공부로 마음을 맑게 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소학』만을 일컬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註6]
*註6 : <점필재연보>에는 김종직의 함양군수 시절, 첫 만남 즈음에 주고받은 일로 기록하고 있다.
“一蠹 鄭汝昌과 寒暄 金宏弼은 서로 친구 사이로서 함께 선생의 門下에 와서 배우기를 청하니,
선생은 古人이 학문한 차례를 따라 가르쳐서, 먼저 『小學』. 『大學』을 읽히고 마침내 『論語』.
『孟子』를 읽게 하였다. 그들은 날로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서, 이윽고 綱領과 旨趣를 알고 나서는
도의를 연구하였다.”
김굉필에게 『소학』은 단지 ‘독서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실천 규범’이었던바, 그런 급격한 전회轉回는 20대 후반 서울에서 맞닥뜨린 학문적 충격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 벗들과의 만남, 소학계小學契와 죽림우사竹林羽士의 두 길
김굉필은 20대 중반까지 처가인 합천과 고향인 현풍, 김종직이 수령으로 있던 함양과 선산, 그리고 김맹성이 유배 내려와 있던 고령 등에서 수학의 시절을 보냈다. 남효온이 현풍 사람이라고 기억했던 것도 뚜렷한 증거이다. 그러던 김굉필은 26세 초봄, 과거를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 성균관을 드나들며 새로운 벗들을 만나게 된다.
그 가운데 생원시에 급제한 뒤, 성종 11년(1480) 6월 6일 진사 최부[崔溥 본관 탐진, 거주지 미상], 생원 송석충[宋碩忠 본관 합천 야로], 진사 박담손[朴聃孫본관 고령], 생원 신희연[申希演동년, 본관 고령, 거주지 서울]과 함께 호현방好賢坊 집에서 “우리들은 나이가 서로 비슷하고 도가 서로 같고 정과 뜻이 서로 맞는다.”며 맺은 ‘정지교부계情志交孚契’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들은 비슷한 나이에 비슷하게 급제한 뜻이 맞는, 서울과 고향의 벗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당시 성균관 유생들은 모임을 만들어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동류의식을 도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소학계小學契’는 가장 주목받는 모임이었다. 모임의 구성과 활동은 이러했다.
[姜應貞] 젊은 날 태학에서 유학할 때에 서울의 준수한 선비들과 더불어 朱文公의 고사에 의거하여 향약을 만들고 혹 매달 초하루에 『소학』을 강론하였다. 그때 뽑힌 사람은 모두 당시의 명사들로 金用石.申從濩.朴演.孫孝祖.鄭敬祖.權柱.丁碩享.姜伯珍.金允濟였는데, 이들은 그중에 뛰어난 사람이고 나머지는 이후 기록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혹은 ‘小學契’라 지목하였고, 孔子.四聖.十哲이라는 기록도 있었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 성균관 유생들이 맺고 있던 ‘소학계’에서는 『소학』을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생활 실천의 규범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훈구대신들은 그들의 그런 활동을 격려하기는커녕 비난과 조롱의 태도로 일관했다. 이런 소학계의 활동이 역사전면에 떠올라 문제가 된 것은 성종 9년(1478) 4월15일, 남효온이 소릉복위昭陵復位 등 여덟 항목으로 이루어진 시폐時弊를 건의 하는 상소를 올렸을 때였다.
도승지 임사홍, 영사 정창손.한명회 등은 곧바로 젊은 부류들이 이런 당돌한 상소를 올린 것은 결교結交하여 붕당朋黨을 이루었기 때문이니 잡아들여 국문해야 한다며 소학계를 지목했던 것이다. 성종의 무마로 겨우 처벌은 면했지만, 남효온은 그 사건으로 인해 훈구대신들로부터 ‘미친 서생[狂生]’ 취급을 받으며 정치현실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그런 비난을 들은 사람은 남효온만이 아니었다. 고순高淳 역시 상소를 올렸다가 ‘망령된 서생’이란 비난을 들었고, 그런 비난을 듣고 흔쾌하게 자신의 호를 ‘망인妄人’으로 정했다. 또한 면천 출신 유승탄兪承坦도 당대의 병폐를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그의 벗 박생朴生과 함께 ‘兪淸風’,‘朴明月’[*註7] 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註7 : 남횽온 <추강냉화> “건의하는 내용이 모두 조정의 병폐에 들어맞았으나 사람들이 모여 소리 내며 비웃었다. 兪生은 일찍이 자신의 정자를 ‘淸風’이라 이름 하였고, 그의 벗 朴生은 자신의 서재를 ‘明月’이라 편액하였다. 고관들 사이에 웃을 만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兪淸風, 朴明月’ 이라고 하여 비웃고 헐뜯었다.
당시 젊은 유생들의 날선 비판이 받아들이기는커녕 훈구대신들에게는 단지 철없는 행동으로 치부되던 사례들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국가의 일을 물으면 “『소학』을 읽는 아이가 어찌 큰 의리를 알겠는가.”라며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처했던 김굉필의 경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소학동자’라는 말은 『소학』에 대해 전일한 마음가짐을 가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과 함께 훈구대신들의 어이없는 조롱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역설적 대꾸이기도 했던 것이다. [참조 : 정경주, 「한훤당 김굉필 도학의 전승 양상」, 『영남학』 제22호(2012) 21면] 물론 이들에 대한 조롱과 멸시를 보인사람은 훈구대신들만이 아니었다. 젊은 유생들도 그런 태도를 보이곤 했다. 남효온의 <사우명행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권경유權景裕가 그런 경우이다. 그도 처음에는 소학계를 이끌어가는 강응정姜應貞의 행동이 인정에 가깝지 않다고 미워했다. 하지만 점차 그의 실제 행동을 보고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소학』을 삶의 규범으로 실천하는 것을 그만큼 낯설고 새로웠던 것이다. 여기에서 강응정이란 인물은 보다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효온과 함께 성종 9년에 세조대의 훈구대신을 등용하지 말라는 상소를 올렸던 이심원李深源이 강응정. 정여창을 효렴孝廉으로 추천했을 정도로, 그는 동료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던 충청도 은진 출신 유생이었다. 그런 시골 유생이 서울의 준수한 선비들을 이끌고 『소학』을 학문 대상으로부터 삶의 실천적 규범으로 전환시켜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성품이 단아하고 중후하였다.
술을 마시지 않았고,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았고, 쇠고기와 말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정여창이라든가 “고상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어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었고, 본부인 외에는 일찍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김굉필도 강응정과 비슷한 국면이 많아 보인다. 그런 바른 행실로 인해 서울 출신 유생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였고, 그런 까닭에 성균관 유생들에게 모범이 되며 『소학』의 새로운 기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註8]
*註8 : 이와 유사한 인물로 안우安愚가 있다. 그가 鄕試에 뽑혀 서울로 가서 會試의 試場에 들어가려 할 때, 四館의 연소한 자들이 나이 든 지방 유생에게 교만하게 대하며 때리려 했다. 그러자 “어찌 부모께서 물려준 몸을 죄 없이 스스로 손상시켜서 명리를 구한단 말인가.” 하고는 홀연 낙향해 버렸다. 남효온은 그를 두고 “그 절조가 東漢의 선비에 견줄 만하다.”고 칭찬한다.
하지만 김굉필이 서울에 올라가 생원과에 급제하고 대과를 준비할 무렵, 새로운 시대를 꿈꾸고 있던 성균관의 신진사류들은 훈구대신들의 강력한 질시와 배척으로 빈번한 좌절을 겪어야 했다. 거기에는 김굉필도 포함되어 있다. 성종 11년(1480) 6월 16일 김굉필은 혹세무민하고 있는 원각사 승려의 처형을 강력히 건의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註9]
*註9 : 성종 11년 5월 25일 장령 이인석이 처음으로 원각사 승려의 처벌을 제기한 이후 성균관 유생들의 격렬한 상소가 지속적으로 올라왔고, 마지막으로 김굉필이 상소를 올렸지만 이들의 시도는 끝내 좌 절되고 만다.
세조의 시대가 끝나고, 성종의 시대가 되었지만 상황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답답한 현실을 경험하면서 신진사류들은 깊은 절망에 빠져들기도 했다. 어떤 벗들은 시세에 영합하여 벼슬길로 나서기도 하고, 어떤 벗들은 시주時酒에 빠져 비분강개의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이즈음 결성된 이른바 ‘竹林羽士’라는 모임은 후자의 극단적 사례이다. 성종 13년(1482) 봄 남효온을 비롯한 홍유손. 이정은. 이총. 우선언. 조자디. 한경기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뒤, 이현손. 노섭. 유방 등이 합류하기도 했다. 무오사화 때 홍유손洪裕孫이 공초供招한 모임 실상이다.
지난 壬寅年(성종 13년, 1482) 봄에 趙自知의 집에 갔었는데, 南孝溫.李貞恩.韓景琦.禹善言.李摠도 또한 모였으므로, 나[홍유손]는 남효온에게 말하기를 “현재 세상이 벼슬하기에는 부당하니 우리들이 竹林七賢이라 호를 하고 방랑한 놀이나 할 뿐이다.” 하니, 남효온이 “그러자.” 하여 각기 소요건逍遼巾을 준비하고 술과 안주를 싸가지고 동대문 밖에 모이기를 약속하여 성 밑 죽림 속에서 그 두건을 쓴 다음 남효온이 우두머리가 되고 내가 차석이 되어 이정은. 이총. 우선언. 조자지. 한경기와 칠현七賢이 되었는데, 李賢孫.盧燮.柳房이 뒤늦게 와서 서로 대해 몇 순배를 마시고,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는 예에 의해서 젊은 자에서 윗사람까지 스스로 노래하고 스스로 춤추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파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대목은 홍유손. 남효온을 비롯한 많은 신진사류들이 태평성대라고 일컬어지는 성종의 시대를 벼슬하기에 부당한 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중국의 죽림칠현을 본받아 詩酒와 淸談의 행로를 밟았던 까닭이다. 이러한 시대인식은 김굉필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김굉필은 이들과 같은 퇴행적 방식으로 시대의 모순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길은 지금까지 이어온 도학道學의 세계로 보다 깊이 침잠하는 것이었다. 그런 김굉필의 면모를 절친한 벗 신영희辛永禧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김대유金大猷는 성리학에 연원을 가지고 근면 독실하여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성묘조 때에 덕행으로 처음 등용되었다가 여러 번 천거되어 형조 좌랑에 추천되었다. 과거 수십 년 전에 나[신영희]를 책망하기를, “군과 이미 절교를 하고자 하였으나 인정상 차마 그러지 못하노라.” 하였다. 내가 그 이유를 물으니 말하기를 “군이 결단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다시 추궁하여 물은즉 “남효온· 이총· 이정은· 허반[許磐 *註10] 은 모두 진풍晉風이 있으니, 진나라는 청담淸談이 누가 되어 10년이 가지 않아서 화가 이들에게 있었느니라.” 하였다. 나도 그로부터 맹세하고 다시는 이들과 왕래하지 아니하였더니 후에 모두 화를 면하지 못했다.
*註10 : 許磐은 “계묘년(1483)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성리학에 뜻을 두어 출세에는 마음이 담담하였다. 모든 일에 옛것을 본받으려 하였고, 대유를 師友로 삼으니 대유가 그 천성에서 나온 단아함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신영희는 김굉필이 남효온이 주도하고 있는 죽림우사와 거리를 멀리 한 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성리학적 삶을 살아간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절교까지도 불사할 정도였다. 이처럼 한때 소학계를 결성하여 도학적 규범을 실천하고자 했던 많은 신진사류들은 여러 방식으로 분화되어 나갔다. 훈구대신의 품안으로 굴복하든지 아니면 비분강개로 세월을 탓하든지, 아니면 도학의 길로 더 깊이 파고들든지. 희망과 절망으로 뒤얽힌 성종 시대의 한 풍속도이다. 하지만 김굉필은 초심을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소학』의 가르침을 극한 지점까지 추구해 들어갔다. 어쩌면 우리가 김굉필을 소학동자로 기억하는 까닭은 그 많은 벗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난 뒤에도 결연하게 자신의 초심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었던 견결한 모습 때문일 것이다.
4. 시대인식의 심화와 師弟-師友 관계
가. 시대인식을 둘러싼 師弟 사이의 이견
남효온은 <사우명행록>에서 김굉필이 서른 살이 된 뒤,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고 후진을 가르치는 데 열심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세상이 만회될 수 없고 도가 행해질 수 없음을 알고서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겼다고도 했다. 서른 살이 되던 성종 14년(1483)을 김굉필 삶의 극적 전환기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앞서 살펴본 것처럼 1년 전, 남효온. 홍유손 등도 벼슬하기 적절하지 않은 세상으로 여겨 시주詩酒와 청담淸談의 세계로 빠져들었었다. 김굉필이 비록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성종 13년 봄부터 성종 14년 봄에 이르기까지 성균관 유생들에게 너무나 사건들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성종 13년 늦봄의 일이다. 당시 성균관에 다니던 유생들은 교수들의 무능과 횡포를 견딜 수 없어 단체 행동에 들어갔다.
성균관 교수의 무능과 비리를 조롱, 풍자하는 시를 지어 성균관 직방直房의 벽에 내붙였던 것이다. 학생이 스승을 공공연히 비난한다는 것,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풍파를 몰고 왔다. 봄날 발견하고도 가을까지 쉬쉬했던 성균관 벽시壁詩는 그해 윤8월 20일 마침내 성종에게 알려진다. 적힌 내용은 참으로 통렬했다.
誰云芹館是賢關 누가 성균관을 현관이라고 말하였던가?
陳腐庸流尸厥官 썩고 용렬한 무리들이 그 벼슬을 차지하였도다.
擧酒擬唇掀輔頰 술을 들어 입술에 대어 양 볼만 벌름거리고
叱儒張口肆兇頑 입을 벌려 유생들을 꾸짖으며 흉악한 성질만 부리네.
洪同已逝林同在 洪同은 이미 죽고 林同만이 남았으며
李學纔歸趙學還 李學이 돌아가자 趙學이 다시 왔네.
老漢只應忙置散 늘은 놈은 어서 바삐 散官에 두어 마땅하고
蟲餘端合早投閑 蟲餘는 하루 속히 閑職에 던져야 적합하이.
南生疏奏心應悸 南生의 疏奏에 심장이 두근거릴 것이며
李子詩章膽亦寒 李子의 詩章에 간담이 또한 서늘하리라.
훈구대신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사류를 은근 옹호 육성해온 성종이었지만, 그때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성균관 유사들은 추문推問하는 동안에는 과거를 중단시켜 풍속을 바로 잡아라. 그리고 사장師長 비방하는 시를 지어 기롱하고 모욕한 것에 대해, 성균관 유사들을 끝까지 조사하여 아뢰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성균관 유생 수십 명을 의금부에 가둔 채 주범을 색출하고자 했다. 하지만 끝내 밝혀내지 못한 채 결국 9월 27일 모두 방면한다. [*註11] 한 달이 넘는 가혹한 국문에도 불구하고 주범을 밝혀내지 못했던 데서 성균관 유생들의 불만과 단결의 강도를 가늠할 수 있다.
*註11 : 성균관 벽서시 사건은 성현도『용재총화』에서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다만 “성균관이 비록 예법 을 배우는 곳이라 하나 유생이 모두 名家子弟들이어서 제어함을 받지 않았다.”고 사건을 진단하 면서 그 결과를 “조정에서 국문하니 일이 三館 및 諸生에게 연루하여 수십 인이 갇혀서 혹 고문 을 받은 사람도 있었으나 마침내 그 情狀을 얻지 못하여 모두 放免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구지균 역,『국역 破閑集, 慵齋叢話』(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1964) 222-23면.
성균관 유생들이 교수를 비판하는 시를 내걸었던 성종 14년(1483) 봄, 김굉필은 서울을 등지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때는 김종직이 모친상을 당해 밀양에서 삼년상을 치르고 뒤이어 曺氏 부인도 죽어 비탄에 잠겨있을 때였다. 금산金山에 경렴당景濂堂을 지어 놓고 은거하려는 뜻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후진교육의 길은 멈추지 않았다. 김종직은 이때 자신을 찾아 천리 길을 걸어온 홍유손. 양준과 같은 ‘서울의 젊은이’는 물론 김기손 김일손 형제와 같은 ‘지역의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낙향한 김굉필도 자주 찾아뵈며 배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정황은 김굉필이 29세 되던, 성종 13년(1482) 4월 다섯 수나 되는 시를 김종직에게 지어 바친 것에서 확인된다.
현재 김굉필이 보낸 시는 전하지 않고, 김종직이 화답한 시만 남아 있다.
그런 까닭에 어떤 내용을 적어 보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조정의 부름을 받아 벼슬길로 나아가려는 스승 김종직을 간곡하게 만류했던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김종직이 화답한 다섯 편 가운데 첫 번째 시이다.
白首叨蒙一札頒 백발에 외람되이 조정의 한 서찰을 받았으니
幽居空寄讓廉間 은거지는 讓水와 廉泉 사이에 부쳐두게 되었네.
君言醫國太早計 그대는 나라 다스림을 성급한 계책이라 하지만
吾道從來骫骳難 우리의 도는 예로부터 굴곡이 심했다네.
제1.2구는 조정의 부름으로 은거하고자 했던 뜻이 어그러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김굉필이 했던 말을 인용하고 있는 제3구이다.
조정에 들어가 벼슬살이하는 것을 ‘의국醫國’이라 표현할 정도로 김굉필은 당대 정국이 병들어 있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곪을 대로 곪아 터져 수습해 볼 도리가 없는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지금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여겼지만 김종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벼슬에 나아가는 일을 ‘우리의 도[吾道]’가 감당해야 할 운명으로 여겼던 것이다. 나라 고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알고 있지만,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보아야 한다는 믿음을 버릴 수 없었다. 성종 13년 즈음, 10여 년간 지방을 전전한 스승 김종직과 서울의 정치현실을 뼈저리게 경험한 제자 김굉필은 당대에 대한 시대인식과 그 대처 방식이 이처럼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김종직은 다섯 번째 시 마지막 구절에서 “어전에서 임금의 고문에 장차 대비하자면, 의당 그대의 시 다섯 장을 가져다 외우리[細氈顧問如將備, 要取君詩誦五章]”라는 시를 남기고 서울로 올라갔다. 만류하던 제자이나 뿌리치던 스승 모두 그런 현실에 가슴 아팠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김종직은 홍문과, 승정원 등 핵심 요직에 근무하며 성종을 지근의 거리에서 보필하게 된다. 마침내 도승지를 거쳐 성종 15년(1484) 10월 26일 이조참판에 올랐다. 서울에 올라온 지 불과 2년 반만의 빠른 승진이었다. 김종직으로는 이때가 아마 인생에서 가장 득의한 시절이었지만, 가장 가슴 아픈 시기이도 했다. 김굉필. 홍유손과 같은 제자들로부터 크나큰 실망과 혹독한 비난의 소리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32세의 제자 김굉필이 보낸 시는 이러했다.
道在冬裘夏飮氷 도란 겨울에 갖옷 입고 여름에 얼음 마시는 것과 같거늘
霽行潦止豈全能 비 개면 가고 비 오면 멈추려 해도 어찌 잘 할 수 있겠습니까.
蘭如從俗終當變 난초도 만약 세속을 따른다면 마침내 변할 것이니
誰信牛耕馬可乘 소는 밭 갈고 말은 탄다는 이치를 누가 믿겠습니까.
김종직은 이에 대해 자신이 처한 현실과 앞으로의 다짐을 적어 화답했다.
分外官聯到伐빙 분에 넘치게 관직이 경대부에 이르렀으나
匡君救俗我何能 임금 바로잡고 세속 구제하는 일이야 어찌능히 할 수 있으랴
從敎後輩嘲迂拙 이로써 후배에게 우졸하다는 비웃음을 받았지만
勢利區區不足乘 구구하게 이익을 노리며 출세 도모하는 일은 나도 하지 않겠네.
김종직과 김굉필의 사제관계를 이야기할 때, 으레 거론되는 민감한 사안이다. 남효온은 이런 시가 오고간 것을 “점필재 선생이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국사를 건의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사우명행록>의 다른 곳에서 제자 홍유손의 비판도 소개하고 있다. 그런 비난을 받고 김종직은 김굉필과 ‘갈라지게[貳]’ 되었고, 홍유손은 간사한 꾀를 부리는 자라며 ‘미워할[惡]’ 정도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홍유손은 “둥글게 행하고 모남을 싫어하는 것이 老子이고, 홀로만 행하고 남을 돌보지 않는 것이 부처”라며 노골적인 비판을 퍼부었던 것이다. 사제간에 왜 이런 날선 공방이 오고갔던 것일까?
『경현록』을 편찬한 李楨도 그 실상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때문에 사제의 명분과 의리가 엄중하니 갈라졌다는 남효온의 <사우명행록> 기록에 의심을 품기도 했다. [*註12] 그리하여 고봉 기대승에게도 묻고, 퇴계 이황에게도 물었다. 하지만 이황조차도 “한훤공寒暄公의 시는 나도 잘 알지 못하는 곳이 있다.” 고 고백할 정도로 확신할 수 없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황은 자신의 견해를 조심스럽게 개진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거의 정론正論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註12 : 『경현록』, 35면. “楨이 삼가 상고하건대 스승과 제자 사이는 명분과 의리가 심히 엄하고 또 중하다. 추강이 기록한 중에 ‘서로 갈라졌다’는 말은 의심할 만하다. 학자들이 마땅히 상고해 보아야 할 것이나 달리 考訂할 데가 없으므로 삼기 여기에 기록하여 선생, 장자에게 질정을 받으려 한다.“
『나는 생각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드러니게 서로 배척하여야만 갈라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스승과 제자 사이라 할지라도 지향하는 목표가 조금이라도 다른 점이 있다면 또한 갈라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점필재 선생에 대하여 후학이 감히 경솔하게 평할 수는 없으나 그 문집 속의 시문의 유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뜻이 항상 문장을 위주로 하였으며 학문을 강구하는 면에 종사한 것은 별로 볼 수 없고, 한훤당은 비록 역시 학문에 관한 것은 징거될 만한 것이 없으나 그가 마음을 오로지하여 옛 사람의 의리를 힘써 행한 것은 속일 수 없었으니, 그 지향하는 바가 이렇게 같지 아니한즉, 비록 스승과 제자의 명분은 정해져 있다 할지라도 어찌 다소 점이 전혀 없을 수야 있으랴. 』
이황의 판단처럼, 사제의 명분이 중하기는 하지만 지향하는 바가 같지 않으면 서로 길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 경우를 과거의 사례에서 여럿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김종직과 김굉필의 경우, 남효온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때 공방을 벌인 사안은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 보여준 김종직의 정치 태도, 곧 ‘건백建白’과 ‘시사時事’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황처럼 ‘문장의 길’과 ‘도학의 길’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적철치 않은 면이 있다. [*註13] 젊은 제자들이 한껏 기대했던 스승에 대한 실망과 불안으로 한정하여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김종직이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의 정치적 상황과 구체적 사안이 무엇이었는지 꼼꼼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註13 : 奇大升, 『高峰集』 「논사록」 상권, 선조 즉위년(1567) 10월 23일. “金宏弼이라는 분이 있었으니, 이 는 김종직의 제자입니다. 김종직은 대개 문장을 숭상한 반면 김굉피은 실행에 힘쓴 사람입니다.
나. 시대인식을 둘러싼 師友 사이의 논란
김종직이 성종의 절대적인 지우知遇에 힘입어 인사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조참판까지 올라가긴 했지만, 훈구대신들이 조정에서 가진 위세는 여전히 강력했다. 그리고 그만큼 김종직이 운신할 수 있는 여지는 좁았다. 실제로 실록을 살펴볼 때, 김종직이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외척 윤호尹濠의 친척인 윤은노尹殷老 천거를 저지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김종직은 먼저 정론을 내고도 뜻이 확고하지 않아서 권세에 아부하는 꼴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평소의 명망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혹독한 사평을 받아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훈구대신 유자광柳子光의 서용敍用도 찬성을 하고 있다. 그런 반면 신진사류에게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던 이심원의 서용은 끝내 관철시키지 못했다. 뭔가 바꿔볼 수 있으리라 한껏 기대했던 제자들이 스승의 처사에 실망하기 충분한 대목이다. 그러다가 결국 한명회의 사람인 김지金漬를 등용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결국 이조참판에서 물러나기에 이르렀다. 성종 16년(1485) 7월 17일, 김종직은 다음과 같이 사퇴를 자청한다.
『김종직은 이승원과 함께 입궐하여 아뢰기를, “신은 오랫동안 외직을 지내어 조신朝臣의 현부賢否를 다 잘 알지 못하여서 거조擧措가 타당함을 잃어 사람들의 의논에 부끄럽습니다. 또 신은 이극기李克基를 대신하여 성균관동지成均館同知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이극기는 여러 유생을 교회하여 자못 훌륭한 공적이 있었는데, 신은 오로지 교회를 일삼지 못하고 있느니 청컨대 본직을 해임시키고 항상 성균관에 근무하게 하소서.”하여 윤허를 받았다.』
사퇴의 이유가 절절하다. 사실, 김종직은 탁월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함양군수, 선산부사와 같은 목민관으로 10년 가까이 영남 지방을 전진해야했다. 성종이 뒤늦게 능력을 인정하여 이조참판으로 발탁했지만, 미미한 가문의 지역 출신인 김종직으로서 얽히고설킨 훈구대신들의 은밀하고도 강고한 인적 네트워크를 속속들이 알기 어려웠을 터다. 설사 알고 있었다 해도 제자들의 바람대로 과감하게 처단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나라 고치려는 일은 너무 빠른 계책이라며 만류했던 제자 김굉필의 시대인식은 잘못된 판단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종직은 상황이 불리하다고 해서 물러나 때를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라고 여기지 않았다.
하나의 일화가 있다. 안우安遇는 처음에는 김종직을 좇아 공부했다. 하지만 점차 벼슬할 마음이 없어져서 서로 사이가 나빠졌다고 한다. 안우 역시 김굉필처럼 당대현실이 벼슬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일 터다. 그로 인해 김종직과는 길이 갈렸던 것이다. 이처럼 김종직은 입신출세하여 세상에 기여하는 것이 유자儒者의 마땅한 도리로 여기고 있었다. 김굉필 홍유손과 같은 제자는 이런 시대인식과 출처관을 비판하고 나섰지만, 스승의 길을 지지하는 제자 또한 있었다. 남효온와 김일손이 그들이다.
德優杖下無完肉 덕우는 곤장 맞아 온전한 살점 없고
孝伯糧化身命危 효백은 양식 떨어져 목숨이 위태롭네.
佔畢先生雖得志 점필 선생은 비록 뜻 얻었다고 하지만
自從參判到僉知 참판에서 첨지 벼슬에 이르렀을 뿐이네.
柳下聖人隱下僚 유하혜 같은 성인은 하급 관료로 몸 숨기고
油油烏帽立明朝 기분 좋게 관복 입고서 밝은 조정에 섰었네.
群兒疑是同塵汚 더러운 세상과 어울렸다고 사람들 의심하니
雜識東周意未消 동주로 만들 뜻 가졌음을 그 누가 알겠는가.
남효온이 성종 16년(1485) 겨울, 한 해 동안 겪었던 가슴 쓰라린 일들을 적어나간 <自詠 15수> 가운데 두 수이다. 첫 번째 시는 김종직이 현재 조정에서 어떤 위치에 처했는가를 새롭게 환기시켜 주고 있다. 제자들이 겪고 있는 모진 고문과 극한 궁핍을 제대로 거두어주지 못한다고 불만을 터뜨릴 수 있겠지만, 남효온은 훈구대신의 견제로 자기 자리조차 보존하지 못하고 있는 김종직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종직이 벼슬길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 태도를 변호하기 위해 유하혜柳下惠의 고사를 끌어들이고 있다. 유하혜가 더러운 세상에 나갔던 이유가 동주東周로 만들려는 뜻을 벌릴 수 없었던 것처럼, 김종직이 훈구대신들이 득실거리는 조정에 나아간 것도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이듬해 김일손은 스승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김굉필이에게 무려 여섯 수를 지어 보낸다.
첫 수 첫 구절을 “여름 하루살이가 어찌 찬 얼음을 말하랴, 대성인은 오히려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다 겸손하셨네.[大聖猶謙一未能, 夏蟲那可語寒氷]”라고 시작하는데, 여기서는 두 수만 읽어본다.
人於處世戒淵氷 사람이 세상에 처함에 연못에 얼음 위 걷듯 경계해야 하니
用舍行藏久鮮能 쓰이고 버리고 나아가고 숨는 것 길이 잘한 이 드물다네.
縱使幽蘭蓬艾混 그윽한 난초를 다북쑥과 섞어놓는다고 한들
芳香肯被臭蕕乘 그 아름다운 향기 어찌 나쁜 냄새에 빠질 수 있으랴
藍出其靑水出氷 쪽빛은 푸른색에서 나왔고 물은 얼음에서 나왔거니
立言休道覓吹能 말은 냄에 다른 사람 흠을 찾는데 능하다 말하지 말라.
淸夷和惠俱先覺 맑은 백이와 화합한 유하혜는 모두 먼저 깨달은 이들이니
進退中間時各乘 나아가고 물러나는 중간에서 때에 따라 각기 선택해야 하리라.
물론 남효온. 김일손이 김굉필의 처사를 나무라는 것에 대해 논란을 벌였고, 뒷날 김굉필과 남효온은 절교하기에 이른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註14] 물론, 그들 사이에 서먹한 기류가 흐르기도 했을 터다. 하지만 남효온은 앞서 살펴보았듯, 김굉필을 여전히 가장 존중하는 사우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듬해 이심원과 함께 세상에 거리를 두고 후배들과 강학 활동을 하고 있던 김굉필을 방문하고 있다. 그런 미더움에도 불구하고 임종을 앞에 두고도 돌아누웠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까닭은 평생 전국을 떠돌아다니던 남효온의 절대적 외로움이 그런 행동으로 표현되었을 따름이다. 실제로 직설적인 표현의 시를 주고받았던 김일손의 경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김굉필과 함께 가야산을 유람하는 등 그들의 동류의식은 여전했다.[*註15]
*註14 : 신영희, 『사우언행록』 “남효온의 병이 위독하여 김굉필이 가서 문병하였으나 남효온이 거절하고 보지 않으므로 김굉필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남효온은 벽을 향해 누워서 말 한 마디 없이 영원히 결별하였으니, 이는 김굉필과 절교하는 것이다.”
*註15 : 金馹孫, <釣賢堂記> “올해[성종21, 1490] 봄에 金大猷가 冶城에서 오산鼇山으로 나를 찾아와 가야산에 놀러 가기로 약속하였다. 두어 달 있다가 신발을 매만지고 대유를 만나러 가는데 수재 李洄가 동행하여 함께 다리로 武陵洞을 건어서 紅流洞으로 들어가 致遠臺를 지나 해인사에 도착하였다.”
어쩌면 이렇듯 제자가 스승에게 숨김없는 마음을 담아 비판의 시를 올릴 수 있다든가 제자 그룹에서 서로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성종대 젊은 신진사류의 생동하는 사제-사우관계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건강한 사제-사우관계의 한 모습이기도 했다.
5. 삶의 轉回와 師友-門人 간의 同類意識
가. 도학과 강학의 삶과 師友의 존중
성균관 유생들이 스승을 풍자 조롱하는 시를 지어 조정이 발칵 뒤집히고 난 이듬해, 성종 14년(1483) 3월 식년시가 열렸다. 김굉필의 나이 서른이 되던 해였다. 김굉필이 성균관 벽서시璧書時 사건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렀는지, 그리고 이듬해 치러진 과거시험에 응시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남효온이 “나이 30이 된 뒤에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고, 후진을 가르치는 데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했던 증언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김굉필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 났던 시기가 바로 그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김굉필과 절친하게 지내던 벗 남효온과 김시습도 삶의 전회轉回를 모색하고 있었다.
우선, 남효온은 정창손을 비롯한 훈구대신의 농간으로 과거에 실패한 뒤 압도鴨島로 들어가 전원생활을 시작한다. 물론 농사짓고 물고기 잡는 한적한 생활을 즐기기도 했지만, 자신의 서재를 ‘敬止齋’라 이름하고 거기에서 <心論>.<性論>.<鬼神論>.<命論> 등 성리학 관련 논설을 활발하게 집필한다. 문장공부와 마음공부 사이에서 겪던 심각한 방황을 접고, 학문의 세계로 침착해 들어갔던 것이다. 남효온 뿐만 아니다. 성종의 즉위에 기대를 걸고 환속하여 현실복귀를 도모하며 12년간 서울에 머물러 있던 김시습도 과거시험을 불과 열흘 정도 남기고 돌연 육경六經과 자사子史를 수레에 가득 싣고 관동으로 떠나간다.
흔히 남효온과 김시습을 현실과 거리를 둔 방외인方外人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이들은 15세기 후반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성리학적 논의를 깊이 있게 펼쳤던 몇 안 되는 선구자들이었다. 남효온이 <심론>과 <성론>에서 정여창鄭汝昌의 견해에 강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듯, 그들의 성리학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 수준은 당대 최고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굉필이 서른이 된 이후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다고 하는 것은 『소학』에 대한 실천적 차원에서 성리학에 대한 본격적인 심화의 과정으로 부가 아니라 그것을 후진양성의 실천과 병행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성종 14년(1483) 서른 살이 된 김굉필을 비롯한 김시습 남효온과 같은 동류들은 현실에 절망한 뒤, 도학의 세계로 침잠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김굉필과 김시습의 관계는 거리가 먼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그들 둘은 절친한 사우師友였다. <회구懷舊>라는 김시습의 시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김시습은 서울을 떠나 관동에 머문지 1년 뒤, “사해에 교유가 적긴 하지만, 내 마음 알아주는 이들 저 고개구름 아래 있다오[四海遊, 知心有嶺雲]”로 시작하는 제1수와 “매번시와 술자리 갖춰 불러 모아서, 오순도순 담소하며 느긋이 술잔 주고받겠지[每因時酒喚, 軟語緩飛觴]”로 끝맺는 제7수 사이에서 남율, 남효온, 이심원, 김굉필, 이정은을 추억하는 시를 한편씩 짓고 있다.
이들 다섯 명 가운데 김굉필과 이심원이 꼽히고 있는 것은 의외이다. 남효온의 <사우명행록>에서조차 김시습과 이들 둘 사이의 관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남효온이 자주 증언하고 있듯, 김시습과 마음이 가장 절친했던 친구는 남효온.안응세.이정은.홍유손.우선언이었다. 그럼에도 홍유손 우선언이 아닌 김굉필과 이심원을 추억하고 있는 이유가 궁금하다. 그때, 김시습이 六經과 子史의 서책을 가득 싣고 춘천으로 떠났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독실한 학문의 길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성리학 세계를 깊이 탐색하던 김시습이 많은 사우 가운데 그런 길의 동반자로 남효온 이심원과 함께 김굉필을 그리워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김시습은 제5수에서 김굉필을 이렇게 추억하고 있다.
誰家金氏子 누구의 집 金氏 아들인가
家住古松橋 집은 古松橋 곁에 있었다네.
不輟寒喧問 한훤을 묻는 걸 그치지 않고
多周錢穀饒 도와주던 전곡은 넉넉했었네.
東來音更斷 동쪽으로 오고 보니 소식 다시 끊기어
西望首重搔 서쪽 바로 보며 머리 거듭 긁어대네.
迢遞楊州路 아득히 먼 양주로 가는 길
孤魂肯見招 외로운 혼이 기꺼이 부름 받을까? [*註16]
*註16 : 김시습, 『매월당집』 「關東日錄」 <懷舊> 古松橋에 살던 金氏의 자제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실증적 보완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심원에게 주는 시에서 그의 호 '醒狂'을 활용해 시구를 만들고 있듯, 여기서도 '寒暄'을 활용하고 있는 점을 볼 대 김굉필에 틀림없다.
성종 15년(1484) 3월 무렵에 지은 시이다. 남효온은 “문장 짓는데 신속함이 많았었고, 정치한 도리는 깊숙한 데 들어갔다오(綴文多迅速, 精義入幽深)”으로 추억하고, 이심원은 “함께 임금 사랑함이 간절한 것은, 모두가 나라 근심이 깊어서라네(同是愛君切, 皆因憂國深)”으로 추억하고 있다. 그리고 김굉필은 궁핍한 자신을 자주 찾아 도와주던 정으로 추억하고 있다. 김굉필은 김시습이 서울에 머물러 있는 동안 많이 도와주었던 것이다. 승려의 행색으로 미치광이 행동을 서슴지 않았건만, 김시습의 진정과 학식을 알고 있었기에 김굉필은 그렇게 대접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시습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생애 사실 하나는 그 무렵 김굉필은 양주에 은거하며 지내고 있었다는 것이다.[*註17] 세상이 만회될 수 없고 도가 행해질 수 없음을 익히 알아 자취를 숨겼지만, 그곳은 다름 아닌 먼 곳이 아니라 서울에서 가까운 양주였던 것이다. 많은 사우들은 김굉필이 서울을 떠나 후진들과 강학에 전념하고 있는 양주를 자주 찾았다. 그 가운데 김굉필이 은거한 지 1년 뒤, 김굉필과 동갑이자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이심원과 남효온은 성종 15년(1484) 9월22일~10월15일 사이에 그곳을 방문했다. 역시, 김굉필은 두세 명의 동자들과 독서를 하고 있었다.
*註17 : 『경현록』 215-6면, “迷原別墅는 양근군(현 양주시)에서 30리 떨어진 거리인 서종면 수유리에 있다. 계곡이 깊숙하고 골이 틔어 진실로 은자가 소요하기에 적합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洪上舍 龜孫과 成上舍 某와 더불어 군의 水鍾寺에서 글을 읽을 적에 그곳을 찾아 함께 그곳에 살기를 약속하여 각기 노력을 머물러 두고 또한 장차 집을 지으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무오년의 화가 닥쳐왔다. 지금 옛터가 아직 남아 있다. 전 군수 龜祥은 홍의 종손인데, 자기가 어릴 때에 한훤당 선생 집의 종이 그곳ㅇ 살고 있음을 보았다 하였다. 지금도 그곳에 사는 사람이 鄭成의 텃밭이라고 전하니, 혹시 정성이 한훤당 선생의 종의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世路自多歧 세상길은 본래 갈래가 많거늘
後進爭長往 후진들은 다투어 먼 길 떠났네.
繁聲更啁啾 번잡한 소리에 또 조잘조잘
異說紛擾攘 이상한 말 분분하게 섞였네.
龍門餘韻絶 용문의 거문고 여운이 끊어졌으니
我懷誰滌盪 나의 회포 누가 씻어줄끼.
吾子固囂囂 그대는 진실로 욕심이 없어
瑤琴性所賞 거문고는 본디 좋아하던 바였네.
三月解忘味 석 달 동안 고기 맛 잊을 줄 알아
暗音徒像想 순 임금의 음악을 한갓 상상하였네.
爾容何慺慺 그대의 자세는 어찌 그리 정성스럽고
爾心何蕩蕩 그대의 마음은 어찌 그리 크고 넓은가.
聽者日以多 듣는 자는 나날이 많아지고
我地日以廣 우리의 터는 날마다 넓어지네.
金聲與玉振 금성으로 시작하여 옥성으로 마무리함은
也應在吾黨 응당 우리 무리에게 달려 있다네.
小子本狂簡 나의 본성은 狅簡하여
摳衣來函丈 옷자락 걷어잡고 스승에게 왔네.
要聞履霜操 이상조 듣기를 요청했더니
爲我歌慨慷 나를 위해 강개함을 노래하네.
이심원은 뜻을 같이 했던 사우들이 많은 길로 갈라지게 된 현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분분하게 일던 뭇사람의 비방을 개탄하는 것으로 작품을 시작하고 있다. 그 많던 벗들이 제각기 갈 길을 떠나고, 이제 남은 세 사람간의 동지적 우정. 그리고 여전히 들끓고 있는 훈구대신의 온갖 비방과 잡소리들. 그들 셋은 그렇게 미더운 동류의식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정성스럽고 원대한 마음을 품고 새로운 시대를 기획 실천하고 있는, 그리하여 따르는 제자들이 점점 많아지며 자신들이 추가하는 도를 넓혀가고 있는 김굉필의 실천에 대해 더없는 존중의 마음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김굉필이 은거하며 강학활동을 하던 곳을 찾았던 양희지楊熙止도 그러했다.
瀟灑占居僻 정갈하고 궁벽진 곳에 거처를 정하였으니
幽潛道味眞 그윽이 침잠하여 도의 참됨을 맛보겠네.
畢齋門下士 점필재 문하의 선비로서
小學卷中人 『소학』 중의 사람이로다.
暇日來尋地 한가로운 날 은거하는 곳 찾아오니
薰風坐襲春 훈풍이 불어 온몸에 봄이 스미네.
慇懃荷警發 은근하게 연꽃 향기 풍겨나니
愧我尙迷津 아직도 헤매고 있는 내가 부끄럽네.
자신의 갈 길을 명확하게 정하고 참된 도를 맛보며 침잠해 있는 김굉필의 태도와 갈팡질팡하며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태도가 여실하게 대비되고 있다. 김굉필은 허둥대고 지내는 많은 師友들에게 이렇듯, 존중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만드는 진정한 사우로 우뚝하였던 것이다.
남효온은 <사우명행록>에서 “李賢孫, 李長吉, 李勣, 崔忠成, 朴漢恭, 尹信 등이 김굉필의 문하에서 나왔으니, 무성한 재질과 독실한 행실이 그 스승과 같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 가운데 이적은 뒷날 스승 김굉필의 행장을 썼을 정도로 각별한 사제의 관계를 맺고 있다. 끝까지 스승의 길을 따르고 있던 많은 제자들. 양희지는 김굉필이 후배들에게 우뚝한 스승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문득 자신들을 가르치던 스승 김종직의 모습을 떠올렸다. “점필재 문하의 선비이자 『소학』중의 사람”인 김굉필은 지금 스승 김종직이 그러했던 것처럼, 새로운 시대의 스승으로서 道學의 맥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 스승에게 바친 제자의 경외
김종직의 사후, 奉常寺 奉事 李黿이 ‘文忠’이란 시호를 올리면서 “김종직은 비로소 마음을 바르게 하는 학문[正心之學]을 제창하여 후진들을 인도하여서 도와주어 바른 마음을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사도斯道를 자기 임무로 삼고 사문斯文 흥기를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으니, 그 공로는 탁월한 공명功名사업을 이룬 자보다 도리어 뛰어남이 있습니다.”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그건 허울 좋은 찬사가 아니다. 김종직은 자신들에게 도학의 길을 열어준 스승이었고, 이제 그 길을 김굉필이 이어가고 있다고 여겼던 것은 그때의 공론이었다. 뒷날, 양주에서 은거하며 강학하던 시절은 접고 낙향하는 스승 김굉필을 안타깝게 전송하며 제자 이현손李賢孫은 그런 공론을 다음과 같이 길게 토로하기도 했다.
靑丘文獻邦 청구는 문헌의 나라
古來多文士 옛날로부터 문사가 많았네.
雕蟲競自售 글 다듬는 재주를 다투어 팔았지만
未有尋至理 지극한 이치를 찾는 이 없었네.
大道終不泯 대도가 끝내 민몰치 않아
夫子生南紀 夫子[김종직*註18]께서 남방에 나셨네
龍門倡道學 용문에서 도학을 창도하매
從者相繼起 쫓는 자 서로 이어 일어났으나
中間各分散 중간에 각기 흩어져서
利欲甘自毁 이욕에 빠져 스스로 헐기가 일쑤였다네.
小子最鹵莾 소자는 그 중에도 가장 거친 자질이어
俯仰多所恥 위 아래로 둘러보아도 부끄러운바 많네.
泰山高崒嵂 태산처럼 높고 우뚝하게 솟았더니
仰者失所企 이제 우러러보는 자 의지할 곳 잃었네.
歲月忽蹉跎 세월이 문득 덧없이 흘러
荏苒流光駃 그럭저럭 몇 해나 지내 왔다네.
醒狂老丘壑 醒狂[이심원]은 골짜기에서 늙어가고 있고
秋江長已矣 秋江[남효온]은 이미 죽은 지 오래라네.
先生今又去 이제 다시 先生[김굉필]마저 가고 마시니
小子竟何倚 소자가 끝내 누구를 의지하리까.
蒼茫琵瑟山 멀고 아득한 비슬산은
相去幾千里 여기에서 거리가 그 몇 천리던가
臨離復何言 이별을 앞두고 다시 무슨 말씀 드릴까
泪下不能止 눈물이 흘러내려 멈출 수가 없네.
*註18 : 발표자는 夫子가 경현록의 번역문['夫子生南紀-선생께서 남쪽에서 출생하셨다' 국역경현록 78쪽]의 夫子가 한훤당이 아니라 점필재라며 ‘夫子[김종직]’이라는 주석을 학술자료에 첨기했다. 반면 사림열전의 저자 이종범 교수는 「夫子生南紀」의 구절을 「선생께서 남녘에서 실마리를 잡으셨다」 라고 해석하고 있다.[편집자]
위의 시는 적어도 김종직과 남효온이 죽은 성종 22년(1492) 이후에 지어진 것이 분명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시기를 좁혀 보자면, 성종25년(1494) 5월 경상감사 이극균이 유일遺逸의 선비로 생원 김굉필을 천거[*註19]하여 南部參奉에 제수되었다가 연산군 1년(1495) 2월 초 이전 낙향할 때 지어준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때 김굉필의 나이 42세였다. 그때의 상황을 전해주는 한 편의 기록이 전한다.
* 註19 : 성종25년91494) 5월20일 慶尙道觀察使 李克均은 "생원 金宏弼은 性理學에만 專一하게 마음을 집중하며 조행[操履]이 방정하여 기용되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라고 隱逸의 선비로 천거하였다.
『이목李穆의 집을 수색하여 임희재任熙載가 이목에게 준 편지를 발견했는데, 그 편지는 다음과 같았다. “나는 우생友生이 없어 빈집에 홀로 누워 세상의 허다한 일만 보고 있네. ... 지금 물론物論[물의物議]이 심히 극성스러워 착한 사람이 모두 가버리니, 누가 능히 그대를 구원하겠는가? 부디 시를 짓지 말고 사람을 방문하지 마오. 지금 세상에 성명性命을 보전하기가 어렵다네. 근일에 정석견鄭錫堅은 동지성균同知成均에서 파직되었고, 강혼姜渾은 사직장을 올려 하동河東의 원이 되었고, 강백진姜佰珍은 사직장을 올려 의령宜寧의 원이 되었다네. 권오복權五福도 장차 사직을 올려 수령이나 도사都事가 될 모양이며, 김굉필金宏弼도 이미 사직장을 내고 시골로 떠났으니, 그밖에도 많지만 다 헤아릴수가 없다오.”』
새로운 시대로 바뀔 것이라 믿어 추천으로 세상에 나와 참봉의 벼슬을 하게 되었지만, 나름 기대를 걸었던 ‘젊은’ 연산군 초년의 실망스런 상황을 목도한 뒤, 김굉필은 홀연 낙향의 길을 택했다. 제자 이현손은 그런 스승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송해야 했다. 김종직이 열어준 道學의 길이 이제 끊나버릴지 모른다는 상실감 때문이었다. 이심원은 성종9년에 올린 상소로 인해 오랜 유배생활에도 불구하고 끝내 서용되지 못하고 있고, 남효온은 스승 김종직과 같은 해에 이미 죽었고, 이제 하나 남았던 김굉필마저 떠나버리는 현실에서 이현손은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남효온은 일찍이 김종직과 김굉필이 길이 나뉘었다고 기록한바 있지만, 적어도 이현손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김종직은 영원히 자신들에게 도학의 길을 열어준 시대의 스승이었고, 그리하여 시의 전반부를 김종직에게 길게 할애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김종직은 김굉필의 만류와 실망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나아가 무언가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병든 늙은 몸을 이끌고 고향 밀양으로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렇게 낙향했지만, 김종직은 평안한 만년을 보낼 수 없었다. 병든 스승이 쓸쓸하게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어 가마를 내주었던 제자 김일손金馹孫은 탄핵을 받아 좌천이 되고, 다시 복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계속 녹봉을 지급해주던 성종은 집요한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김종직이 그런 시비에 휘말리고 있을 때, 제자 남효온은 병든 스승을 찾아 내려와 밀양 영남루에서 마지막 작별의 만남을 가졌다. 그때, 남효온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바쳤다.
甑峰道士下靑午 시루봉 도사께서 푸른 소에서 내리시니
紫府仙曹冠佩稠 자부의 신선들 의관 갖추고 운집했네.
千戴一人金佔畢 천 년에 한 사람은 점필재 김 선생이요
百年勝地嶺南樓 백 년의 명승지로는 밀양의 영남루라네.
城根浪打寒潭秀 물결 부딪는 성 뿌리엔 찬 못이 수려하고
沙岸霜深栗葉秋 서리 깊은 모래언덕엔 밤 잎이 가을이네.
聾耳漸明歌管發 풍악 소리 울려서 먹은 귀가 밝아오지만
他鄕聽樂摠心愁 타향서 듣는 음악이라 근심만 가득하네.
제자 남효온과 스승 김종직은 그 이듬해인 성종 22년 (1492) 모두 죽었다. 그 무렵, 김굉필은 부친상을 당해 삼년상을 마치고 고향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밀양으로 내려와 지내고 있는 김종직을 뵈려 찾아왔을 것이다. 평생 벼슬살이로 병들고 지친 스승의 모습을 뵙는 마음이 안쓰럽기도 했고, 젊은 시절 함양에서 처음 가르침을 받았을 때의 마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모습에서 존경심도 우러났을 터다. 하지만 노스승을 뵙고 돌아가는 발걸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을 터, 문득 길가에 선 노송을 보며 김종직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시 한 수를 읊었다. 김굉필의 절창으로 널리 알려진 <노방송老徬彸>은 그렇게 지어졌던 작품으로 읽힌다.
一老蒼髥任路塵 한 그루 노송 길가의 먼지 뒤집어쓴 채
勞勞迎送往來賓 수고로이 오고가는 나그네 보내고 맞네.
歲寒與汝同心事 추운 계절이 될 때 너와 같은 심사를 가진 사람
經過人中見幾人 지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몇이나 보았는가.
퇴계이황은 이 작품에 대해 “이 시는 정말 의미가 있으며, 정말 덕 있는 사람의 말임에 틀림이 없다.”는 극찬을 했다. 그리고 노송은 흔히 김굉필 자신의 굳센 지조를 빗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제목 아래 달려있는 주석, “노송은 밀양에 있다[老松, 在密陽]”라는 구절[편집자 註 : 景賢錄(天)上-국역경현록 44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종직을 노송에 빗대어 읊은 작품이란 추정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길가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정정하게 서 있는 노송,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절개를 조금도 잃지 않고 있는 그 성성함. 하지만 끝내 뜻을 함께 하는 同志를 만날 수 없었다. 문득, 김굉필은 다북쑥 같은 정치판에 나갔다가는 난초의 향기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경계의 시를 지어 바쳤던 지난 젊은 시절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승의 현실이 더욱 안타까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송의 절개는 단지 스승 김종직만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지금 모습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때, 김종직이 “우리의 도는 본래 굴곡이 많다.”고 타이르던 말이 가슴 저리게 다가왔을 터다.
6. 맺 음 말
김굉필은 20대의 여정에서 김종직, 김맹성, 그리고 많은 젊은 벗들을 만났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새로운 시대의 희망에 한껏 부풀었고, 그만큼 깊은 좌절에 분노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학』과 성리학의 심연에 침잠하며, 새로운 도학의 시대를 제자들과 함께 열어갔다. 그러다가 늦은 나이에 험난한 벼슬길에 나서보기도 했다. 남부참봉이란 미관말직, 하지만 그를 알아주는 벗들의 추천으로 참봉, 주부에서 곧바로 형조좌랑으로 발탁되는 순간도 맛보았다. 어쩌면 젊은 연산군으로부터 늙고 노회한 훈구대신들을 뒤로 물러 앉히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희망을 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연산군은 그런 기대에 부응할 만한 군주가 아니었고, 포진하고 있던 훈구대신의 위세도 여전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니 김종직이 가장 아끼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김굉필을 죽음으로 몰려갔다. 그 장본인 유자광은 남효온이 예전에 지은 시 한 편을 들춰냈다.
安生已去知音斷 안생이 이미 죽어 지음이 끊어지고
洪子南歸吾道窮 홍자가 남으로 돌아가 우리 도가 궁해졌네.
縱有大猷趨向苦 대유가 있다지만 지향하는 바가 고달프니
胸懷說與隴西公 가슴속 품은 회포 농서공과 얘기하네.
스승 김종직이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 남효온이 사제師弟 사이의 이견을 지켜보면서 울울한 심사를 담아 지은 시였다. 홍유손과 김굉필이 김종직의 제자임을 밝혀내려던 유자광은 여기에서 ‘김굉필이 지향하는 바가 고달프다’를 과거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했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남효온은 김굉필이 자신을 밀폐된 공간에 가둬둔 채, 도학의 세계로만 침잠해 들어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효온은 “김굉필이 나이가 들수록 도가 더욱 높아졌기에 세상이 만회 될 수 없고 도가 행해질 수 없음을 익히 알아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겼다.”는 사실, “그러나 사람들이 또한 이러한 것을 알아주었다.”고 기록한바 있다. 비록 고달픈 길을 자신의 임무로 끌어안고 있는 김굉필의 행보가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은 그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겠다. 결국 김굉필은 무오사화때 유배형을 받았고, 갑자사화 때는 죽음을 당해야 했다. 남효온의 안타까움은 마치 시참詩讖처럼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널리 알려진 것처럼, 김굉필은 유배지에서 극적으로 자신이 추구했던 지향을 전해 듣고 찾아온 운명의 지기知己를 만났다. 바로, 조광조趙光祖였다.
『수재 趙君은 친구의 아들이다. 나이 아직 스물이 안 되었는데, 개연하게 道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김굉필이 학문에 깊은 연원이 있다는 말을 들고 漁川의 아버지 계신 곳에서 김굉필이 유배와 있는 熙川으로 달려가서 제자의 예를 갖춰 배우고자 내게 소개하는 편지 한 통을 요구했다. 나는 근래에 친구와 주고받은 편지[*註20]를 끊은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그의 뜻이 간절하여 외면할 수 없어 두 구절의 편지를 써서 주며, 가지고 가서 김굉필에게 보여주도록 했다.
*註20 : 大峯先生文集 贈趙秀才 光祖 幷小序
「秀才趙君。故人之子也。年未二十。慨然有求道之志。聞金大猷斯文學有淵源。自其魚川鯉庭。轉往大猷之煕川謫所。爲摳衣請益之地。要余一書紹介。余年來。斷絶親舊間往復久矣。第其懇意。不可孤。書贈二句俚語。俾以持示大猷。大猷其無以爲載禍相餉否乎。
수재인 조군은 내 친구의 아들이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었으나 특별히 도를 구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다가 김굉필(대유)이 우리 문학에 투철한 깊이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고향 어천(황해도 개평군 소재?)에서 어버이 곁을 떠나 귀양생활을 하는 김굉필에게 가서 공손한 마음을 가지고 글을 배우겠다고 하며 나에게 소개하는 편지를 써달라고 하였다. 나는 근래 친구들과의 사이에 왕복하는 일도 끊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그의 간곡한 부탁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속된 말로 두어 구절 글을 써서 주고 이것을 김굉필에게 주라고 하였다. 굉필이 입고 있는 화를 혹시라도 끼쳐주지나 않으려는지? 」
● 대봉大峯 양희지는楊熙止 훗날 조선 성리학의 큰 별이자 도학정치의 길을 연 조광조(趙光祖)를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 들게 한다. 연산군 4년(1498년)에 김일손(金馹孫)이 쓴 사초(史草)가 빌미가 돼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김굉필은 평안도 희천(熙川)에 유배됐다. 그 해 겨울 희천 유배지로 어천찰방(魚川察訪) 조원강(趙元綱)의 아들이 찾아왔다. 나이 열일곱의 조광조가 김굉필의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 온 것. 양희지의 소개장을 들고 왔다. '증조수재 광조(贈趙秀才 光祖)'라는 제목 아래 짧은 산문(幷小序), 즉 소개의 글과 시(詩)로 돼 있었다.[글 : 울산신문-울산땅 옛글의 향기 7. 大峯 楊熙止-편집자 註]
유자광은 집요하게 김종직으로부터 시작된 道學의 맥을 끊기 위해 김굉필을 죽음으로 몰아가고자 했고, 결국 그의 의도처럼 유배지에서 죽음으로써 도학의 맥이 끊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처럼 현실로부터 좌절을 겪던 시절, 어떤 사람은 유배지에서 고생하고 있는 김굉필을 잘 보살펴주라는 당부를 하고, 어떤 사람은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며 위로하기도 했다.[*註21] 하지만 유배지 순천에서 『周易』을 깊이 탐구하며 자신과 세상의 운명을 가다듬어가던 김굉필은 결국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조광조를 비롯한 중종대의 젊은 제자들은 김굉필에게 道學을 배워 조선을 새로운 문명국가로 만들어갔다. 광해군 때 ‘東方五賢’으로 문묘에 배향되고, 지금 우리가 조선의 도학을 唱導한 분으로 김굉필을 기억하는 까닭이다.■
*註21 : 大峯先生文集
귀양생활을 하고 있는 김굉필과 조위에게 보낸 대봉 양희지의 편지.
寄贈金大猷(宏弼),曺大虛(偉)謫中。
貞元朝士已無多。竹折蘭枯命也何。
萬事非由章子厚。三生自是蘇東坡。
易於靜處知加勉。詩到名區莫謾哦。
德必有隣天意在。暫時淪落不須嗟。
오래된 세신들은 이미 사라지고 많지 않은데 대 가 꺾이고 난초도 마른 게 운명임에 어쩌랴?
만사는 장자후처럼 여색에 빠져서는 안 되고 소동파가 설파한 삼생석에 새긴 인연 같다네.
주역은 조용한 곳에서 더욱 힘써 공부해야하고, 시는 명승지에 이르거든 뒤로 미루지 말고 읊게.
덕 있는 사람 이웃이 있음은 하느님의 뜻이니. 잠시 비운에 빠져 있다고 한탄할 필요는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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