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가 말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차마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註]을 가지고 있다.
선왕들에게는 차마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으므로, 차마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정치[不忍人之政]를 하였다. 차마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차마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정치를 실행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것 같이 쉬울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차마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이다. 만약 지금 어떤 사람이 문득 어린아이가 우물 속으로 빠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면, 누구나 깜짝 놀라며,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되는 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기 위해서가 아니고, 마을 사람과 친구들로부터 어린아이를 구했다는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그 아이를 구하여 주지 않았다는 나쁜 평판이 싫어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고, 올바름에서 벗어난 것을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할 줄 아는 마음[辭讓之心]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是非之心]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仁의 실마리이고,
바름에서 벗어난 것을 미워하는 마음[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義의 실마리요,
사양하는 마음[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禮의 실마리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智의 실마리이다.
사람이 이 네 가지 단[四端]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가 사지四肢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이 네 가지 단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인의仁義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해치는 자이고, 또 자기 군주가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
무릇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 이 네 가지 단서를 다 넓혀서 채울 줄 안다면, 마치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고, 샘물이 처음 솟아오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진실로 이것을 채울 수 있다면 천하라도 보존할 수 있고, 만일 채우지 못한다면 부모조차도 부양할 수 없다."
孟子曰 人皆有不忍人之心
先王有不忍人之心, 斯有不忍人之政矣. 以不忍人之心, 行不忍人之政, 治天下可運之掌上. 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 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 皆有怵惕惻隱之心. 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 非惡其聲而然也. 由是觀之,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 自賊者也, 謂其君不能者, 賊其君者也. 凡有四端於我者, 知皆擴而充之矣, 若火之始然, 泉之始達. 苟能充之, 足以保四海, 苟不充之, 不足以事父母.
첫댓글 *註 :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 - 사람에게는 모두 다른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 불인不忍은 불안不安과 같은 의미이다. 공자는 불안을 가지고 인仁을 얘기하였고, 맹자는 불인에 입각해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말하였지만 그 뜻은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이 고통받거나 위기에 처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모두 불인·불안한 마음을 드러내게 된다. 이 불인·불안한 마음은 곧 인심仁心이며, 또한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선한 본성이다. 맹자는 구체적으로 "지금 어린아이가 우물로 들어가려는 것을 언뜻 보기만 해도 누구나 깜짝 놀라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는 비유를 들고 있다. [계속]
맹자는 이 비유를 통해 사람에게는 모두 인심仁心·선성善性이 있음을 예증하였다. 불인인지심은 어떤 의도나 고의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본심의 직접적 표현이며 진심의 자연적 발로인 것이다. 맹자가 말한 인정仁政은 불인인지심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왕도王道의 실천은 인간의 본성과 멀리 떨어져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불인인지심이 성왕에 의해서 전개된 직접적 결과인 것이다. 공자는 이 원리를 개인의 자기수양에 적용하는 데만 국한한 반면, 맹자는 이것을 정치에까지 확대하였다. 공자에게서는 그것이 내성內聖의 원리였지만, 맹자에 의해서 외왕外王의 원리가 된 것이다.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