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구세군 성지 "일월산아래 오리동 노루모기마을"
경북의 영산 일월산 골짝중 가장 골이 깊고,넓은 마을 경북 영양군일월면
오리동 노루모기마을,영양군 영양읍에서 수비면 방면의 국도31번 도로를
따라 가다가 좌측도로 일월산관광농원이 있는 곳으로 가서 오리동마을
버스정류장까지 간후, 골짝 초입부터 비포장 길로 30여분 거리의 심산
유곡 노루모기마을이 있다.
이 일대는 일제가 우리민족 탄압에 극성을 부리던 시기에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구세군 교도들의 민족학교와 분영을 만들어 운영하던 곳
이다. 일제군하의 민족혼을 다잡고 함양하던 구세군 성지이다.
현재 허물어가는 산막은 다름 아닌 한국구세군역사를 빛낸 김해득
(金海得,1818~1980) 14대 한국사령관이 태어난 생가이다.
흙벽 일자(一字)형태 스레이트 지붕(당시는 초가)을 얹은 방 두개의
오두막 집이다.
용도나 행색으로 보아 막다른 생을 살던 여느 초라한 화전민의 집이나
다름 없지만,김사령관의 생가로 또 다른 항일 민족정신이 태동한 모처
가 되었던 곳이라는 사실에 그냥 지나쳐 볼 수는 없는 곳이다.
1908년10월1일 영국인인 '허기두'사관과 가족들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낯선 땅 한국에 발을 디뎠다.한말 국운이 사그라들던 시점에서 구세군은
가난 구제와 자선사업,사회사업 등 선교활동을 본격화하고 속속 등장한
한국인 사관들이 주축이 돼,민족정신을 지탱하는 종교단체로 자리잡게
된다.
일제 조선총독부 강압이 극에 달하던 1925년경 일월산 오리동 노루모기
골자기 마을에는 구세군 영양분영이 설립된다.
배경은 미리 설립된 영덕분영을 중심으로 영양지역으로의 세확장을 추진
하면서 구세군 사관학교 정규과목으로 다루던 지맥과 수맥을 이용해 일월산
일대를 살핀 결과 오리동 노루모기가 가장 좋은 명당으로 판단됐기 때문이
라 한다.
또 한편으로 오리동 골짜기가 일월면 소재지에서 30여리가 넘는 거리에
위치해 있고,상대적으로 골이 깊어 일본인들의 감시가 소홀해 신앙활동과
교육활동에 자유로웠다는 지리적 요인도 작용한 것으로 전해 진다.
경북영양군 일월면 오리동 529-2번지 50평의 분영터,해방직후인 1946년경
까지 20여년간 분영과 학교가 운영됐다.노루모기 마을에서 태어난 손창대
(동국대 교수,한국화엄학회장,삼일정신문화원장)박사는 "1925년경부터
구세군 분영의 간이학교에서 조선어 한글을 익혔다"고 밝힌다.
이 학교는 당시 1~4학년 과정의 비인가 간이학교로 운영되면서 '조선어독본'을
이용한 우리말과 우리글,우리역사를 가르쳤다고 한다.
50여평의 목조건물 2동으로 만들어진 분영학교,이 곳과 700여M 떨어진 운동장,
교실과 학교마당에는 수십여명의 아이들이 2명의 한국인 구세군 교사들과 함께
한글을 깨우쳤다고 한다.안타깝게도 목조건물이 허물어진 상태로 고추밭으로
변해 있고,아이들이 뛰어 놀던 운동장은 논으로 변해있다.덩쿨과 잡초무덤에 반
쯤 묻혀있는 생가는 수십년 풍상에도 불구하고 흙벽 그대로 남아 있다.
일제의 폭압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왔던 오리동 노루모기 마을 구세군분영과 학교,
한국인 교사들,이 곳에서 민족정신을 배운 김해득 사령관,이들 모두는 일제의
탄압과 신사참배 강요로 이어지는 총독부의 종교탄압 등의 수난에서 민족교육
이라는 정신으로 저항했으리라 짐작된다.
60여년이 흘러 최근 들어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이곳 민족정신
교육장에 대한 문화복원과 성역화,생가복원사업 추진이 조심스레 싹트고 있다.
구세군 대한분영과 영양군을 비롯,김해득사령관 후손들은 지난해 가을 이곳을
답사해 성지화와 관련 기념사업을 추진하기로 뜻을 모으고 빠른 시일내 실행에
옮긴다는 방침을 세웠다고 한다.
나라 잃은 산촌민들의 희망없는 삶에 한줄기 빛으로 다가왔던 구세군분영과
민족학교,지금도 이 곳 오리동 산촌 주민들은 가슴과 뇌리에는 그들의
'자유존중과 평등사상'이 끈끈하게 남아있다.
*참고문헌:매일신문사취재기사 '접신의 땅 일월산' 2001.2.28.
-edited by 문화관광해설사 박원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