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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영의 재실인 지선당-숭모사 인근에 있다 박지영의 재실인 지선당-숭모사 인근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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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 ❏배향인물: 박 힐(朴 詰) 박희권(朴希權) 박 린(朴 麟) 박지영(朴之英) ❏창건연도: 1812년(순조 12) ❏향 사 일: (음력) 3월 15일 |
숭모사(崇慕祠)는 원래는 1812년(순조 12) 무주 오도산 아래에 창건되어 도산사(道山祠)라 칭하고 박힐(朴詰)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박희권(朴希權), 박린(朴麟)을 배향했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훼철 당하자 현재의 위치로 몰래 이봉 하였다가 1959년 7월에 사우를 지어 숭모사라 개칭하고 박지영(朴之英)을 추배하였다. 직장공파 의 집성촌인 충남 금산에도 승모사가 있다.
1)주벽-박힐(朴詰)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자는 원직(元直). 호는 도소재(逃召齋)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 하였으나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고려가 망하자 세속을 떠나 은둔생화을 하니 임금은 사방으로 찾아 그의 가대(家垈)를 재용감(濟用監)으로 내려 주었으나 받지 않고 그의 가옥(家屋)을 도소재(逃召齋)라 불렀다. 목은 이색의 문인이며, 고려가 망함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며 은거한 고려말의 수절신이다.
박공 도소제의 휘는 힐(詰)이니 호장공 응주는 그 6세조이시고 사온 직장공 상경(尙褧)은 그의 아버지 이시고
반남선생 상충(尙衷)은 그백부로서 훌륭한 벼슬과 높은 도덕이 이나라의 이름난 가문일러라.
공은 일찍이 급제하시고 문장과 도덕이 세상에 높이 쓰임직하되 은거하시어 뜻을 구하시고 시대가 좋아지기를 기다리시다가
고려가 망하매 공의 의를 고려 옛나라에 바치시고
새나라에는 절대로 따르지 않으려 하시니.
그시대 사람들이 중국의 충신 백이나 노중년 같으신 충신이라고 칭송이 자자했고.
태종이 등극하시기 전에 서로 친교가 있어 수차부르시고 또 제용감 벼슬을 제수 하기소 주택을 내리시되 아무도 몰래 훌쩍 남으로 달아나시어 금산두메에 사시니 또한 엄자룡 같으신 충신이라 하더라.
그충의는 삼은(의 충의와 같으시나 세상에 쓰이지 않고 소원해져서 세상 드러냄에 더욱 어려웠더라. 충효미풍을 세우시어 후백세 강상이 일월과 같이 밝건ㄴ늘 오늘날 친신이나 세신된 자들이 임금을 배반하고 이나라을 팔아먹고 못할 일이 없이 저희ㅣ 마음대로 하는 자들아 너희들만은 무슨 마음보들이냐, - 삼세충의(三世忠義) 비명(碑銘)에서
2)박린(朴麟)
힐의 증손이다. 1455년 초산 군수로 재임하던 중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금산 장평에 은거하였다.
그종손 인(麟)은 호는 의율제로 선대의 미풍을 이어받아서 충의 치킴을 일과로 하시고 노시기를 남추강과 원관란과 같이 하시어 도의로 사귀고 일찍이 벼슬에 오르시어 여러 골을 역임하시니 가시는곳 마다 치적이 높으시어 칭송이 자자했고
단종초에 명을 받아 진산에 계시다가 을해후에 인끈을 던지시고 장차 영월로 가시려 하시니 아들 임회선생이 같이 가시려고 하다가 모친이 늙으시고 또 병으로 위독하시어 그 길로 자취를 감추시고 고기잡이와 나무하기로 일을 삼으시고 달 밝고 바람 맑을때마다 문득 어제 자규시를 읊의며 북망통곡하시고 죽으려고까지 하시고 후원에 단을 모으시고 매년 10월 24일 슬피 우시며 세사 하시니 그 충의는 육시의 충의와 같으시나 그처지가 같지않으시고 만나은 바가 다르셨으나 그 충절을 지키신 의도는 차별할수 없더라. 후세에 인사들이 팽택형 도연명이 벼슬을 버리고 율리에 돌아와서 슴어 살던 절개와 비긴다는 뜻에서 그 충절읠 세상에 들어내고자 의율이라고 사사이 시호를 드린 것은 대중 공론이 세월이 흘러가면 갈수록 더욱 깊어감을 볼 수 있더라. - 삼세충의(三世忠義) 비명(碑銘)에서
3)박희권(朴希權)
린의 아들이다. 사헌부 감찰로 있던 중 단종이 폐위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임희공(希權)은 일찍이 가훈을 이어 받아서 배움에 근본이 있고 성리학을 연구하시었으며, 충의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본받았고 을해년에 아버지를 따라서 진산에 계시더니 영월의 비보를 들으시고 아버지의 퇴관 결심을 찬성하시고 아버지를 모시고 영월로 기시려 했으나 대개 그 부자분의 사람은 두분이시고 결의는 하나이더라. 병공이 특히 별록을 써 말하시기를 대개 옳지 못한 일을 하면서 그 비중을 무겁게하고 이름을 도용해서 세상을 속이고 이 누를 남에게 전가하려고 하였으니 그런간계를 어찌 은페하겠는가 하시였으매. 대개 그의를 보심이 이와같이 밝으시므로 양녕대군을 변명하심이 이와 같음이라
문절공 유미암선생이 그행장을 기록하시어 말씀하시기를 충과 효가 세상에서 뛰어나시고 그배움에는 근본이 있으므로 부모섬기기를 지극히 효도하시고 우애가 지극했으며 아버지 병환에 손가락 피로 그명을 연장시키시고 상을 당하매 tkassus동안 미음만 마시고 제자들과 그만 배우고 외우시니 산골 풍속이 크게 달라져서 산촌 서당에 글 외오는 소리와 풍악소리가 들리고 고을에는 예양의 미풍이 높아지니 고을 사람들이 계시는 집을 선생님댁이라고 그 마을을 효자동이라고 했으니 그 마음은 육신에 비하여 아무 부끄러울 것이 없다 하시고 문헌공 이초려 선생이 그 사적을 기록하시되간단히 말쓰마시기를 남기신 문학이나 끼치신 미풍이 넉넉히 후백세를 권면했으니 남측강이나 원관란과 같으신분이라 하시고 박정승 종악이 그남기신 유적을 쓰시며 말씀하시기를 그배움은 정심과 수심으로 근본을 삼고 그 글은 성현의 글을 귀하게 여기시니 흉년에 도둑이 사방에서 일어나되 서로 경계하여 그동리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군자동이라고 하였다 하시고, 순조대왕 임신년에 사림이 무주도산에 사당을 세워 제주공 송금곡선새이 이에 기록하시기를 그아버지 진산공이 장릉말에 벼슬을 버리시고 금산으로 달아나시매 공이 아버지의 뜻을 받아 벼슬을 않기로 단념하시고 숨어사시면서 학문에만 전념하시어 깨끗이 살으셨으니 그 마음은 육신에 부끄러움이 없다하시고 문경공 임전재 선새이 지덕지를 쓰시되 간추려 말씀하시기를 박고은 단묘 충신이시라 하시고 또 그 책 근안주에 임회는 처사 박공의 당호로 남추강이나 김매월과 같은 충신이라 하시고 증공 노송지년과 김공 평재감이 찬송하시어 전후의 공평이 이와같으니 그공적이 더욱 빛나더라. 금산 유림이 본손들과 뜻을 같이하여 비를 세우려 하며 이르기를 금산고을은 옛 현인의 비가 많이 서서 빛나는데 이제 박씨의 삼세는 인륜 가르치심에 공이 많으시고 그 누가 옳지 않다고 말할 자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비를 세우기로 하여 여러 선비들이 나에게 비문을 청탁하는데 우만은 늙고 병들어 글을 놓은지가 이미 오래지만 생가하니 오늘의 이일만은 하늘이 나에게 그옳음을 가르치시므로 국가를 위하여 대단히 기쁜소식이니 찬축함을 견디지 못하여 힘을 다하여 이 비문을 씀이로다. - 삼세충의(三世忠義) 비명(碑銘)
증 사헌부 감찰공 휘 희권 사적 (족보 세적편 215쪽)
자는 천경이요 호는 임회당이니 초산군수 호 의율제 휘 린의 子라 단종端宗 손위遜位때에는 의율공이 마침 진산군수로 있으므로 부자가 서로 울며 말하되 우리부자가 영월로 같이가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함이 의리에 당연하다하고 곧 가려다가 문득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북으로 영월을 향해 통곡하고 아버지를 모시고, 금산 장평으로 물러와 집뒤에 단을 묻고 어제자규시를 읊으며 살기를 원치 않고 일직 죽지못한것만 한탄하더라.
광묘조병술명제록에 왈“ 성담수(=생육신) 정지년 박희권이 적소(귀양사는 곳)에 있는 정분鄭苯과 같이 문답하여 서로 눈물을 흘렸으니 이는 의사로서 어찌아름답지 아니하리요(광묘실록) 그행적을 말한다면 비록 육신과 같지 못할지언정 그 마음을 말하면 서로 같다.(문절공 유견암 찬) 유풍여목이 가히 백세 까지 풍화시킬 수 있고 또한 추강秋江, 관란제觀瀾諸(=고회高晦)선생에 비해 막상막하라 (문헌공 이초로 집) 점필제(=김종직)연원淵源이요 성리정학이라 (권수암=권회맹 ? 集) 충효가 세상에 뛰언나며 벼슬길에 뜻두지 않고 계산을 즐기더라(종인 충헌공 창암 宗人 忠憲公 蒼岩=박종악朴宗岳 찬撰) 충성스럽다. 이사람이 효성스럽다. 이사람이여(정노송 記) 순조 임신년에 공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하되 도산사(道山祠)라 이름하다(문경공 종금곡 記) 지덕지에 임회별록 臨淮別錄으로써 양녕대군의 의를 소상하게 밝히고 또 이르기를 임회는 단묘충신이라 (문경공사전제지덕지서) 충효로 근본을 삼고 글로사니 선생의 로廬는 공문孔門의 안자락顔子樂이라(기송사찬비문) 결신으로 자정하니 마음은 사륙신과 같고 행적은 생육신과 같은자 많으니 임회부자도 그중의 하나이다(송약제 撰) 고종 무진에 증동몽교관 하며 계유에 증 사헌부감찰하다. 배향配享 숙묘전무肅墓殿廡 향享 무주도산서원茂朱道山書院 금산진안숭모사錦山鎭安崇慕祠
4)박지영(朴之英)
희권의 6대 손이다. 원래는 금산에 세거하였으나 임진란을 피해 현재의 동향면 능금리 내금마을로 들어와 후손들의 교육에 힘쓴 반남 박씨의 입동향조(入銅鄕祖)이다. 박지영(朴之英)의 호((號)는 덕음당(德陰堂)이며 1532년(중종27 壬辰)출생이고.. 배(配)는 청주한씨(淸州韓氏) 대인(大仁)의 딸이다. 묘(墓)는 전북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에 있다.
지선당(止善堂)은 입동향조(入銅鄕祖)인 지영(之英)의 뜻을 기리고 문중의 자제들과 이 지방의 후학들을교육시키기 위해 지영(之英)의 후손들이 창건하였으나 그 창건년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당내에 걸려있는 박상탁(朴相卓)의 지선당기가 숭정 3 임진(崇禎三壬辰)에 쓰여졌던 것으로보아 1772년(영조 48)에 건립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지선당에서 1816년(순조 16) 문과에 급제한 후 사간, 동부승지, 우•좌승지를 거쳐 공조참판에 이른 정재영(丁載榮) 그리고 1840년(현종 6) 진사시에 합격한 박제대(朴齊大)를 비롯하여 5진사가 배출되었다고 하나 나머지 4진사의 인명은 확인할 수 없다.
지선당은 2000년 6월 23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여 금산에서 능금리 내금(안쇠실) 마을에 들어와 살던 박지영(朴之英 반남박씨 16世)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고 이 지방 후학들의 교육을 위하여 그의 후손들이 세운 사당이다. 건립 연대는 1772년(영조 48)으로 추정된다. 이후 순조 때 사간(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 좌·우승지를 거쳐 공조참판에 오른 정재영(丁載榮)을 비롯하여 1840년(헌종 6) 진사시에 합격한 박제대(朴齊大) 등 4명의 진사를 배출하였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기와로 된 팔작지붕 건물로, 앞에 툇간을 두고 가운데 2칸 규모의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방을 하나씩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이다. 당내에는 박상탁(朴相卓)이 쓴 지선당기(止善堂記)와 방명록 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박순서가 소유하고, 박찬용이 관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양철로 된 맞배지붕 건물로 매년 음력 3월 15일에 박씨 문중이 중심이 되어 향사(享祀)하고 있다.
참고-반남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