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센트럴 파크 아침에 부술비가 뽀오얀 안개처럼 내리고 있다. 내 어릴때 전쟁이 끝나고 먹을것 없어서 동네 중국집에 취직한 날에도 이렇게 구진비가 내렸는데...나는 너무 배가 고파서 동네 중국집 주인인 하얀머리의 작고 깡마른 채구의 할아버지 밑에 들어가 시키는 짜장면 배달을 하였는데 중국인 할아버지의 서툰 발음이 귀에 익숙하지 않아 잘 알아듣지를 못하는 내게 "한국싸람 한국말 몰라해?" 하며 꾸짖곤 하셨지만 일이끝나는 저녘 시간에는 넓고 움푹 들어간 둥근 솥뚜껑 처럼 생긴 뜨거운 철판에 기름을 듬뿍 부어 조기를 튀기고 밥을 양념과 함께 맛있게 뽁아서 배불리 싫컨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내 작은키에 비해 유난히 크고 무겁던 배달통이 힘에 버거워 삼일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 두어야 갰다고하는 내 작은손에 할아버지가 쥐어준 구겨진 돈! 나는 밥 맘껏 얻어 먹은것도 고맙고 미안한데 할아버지는 삼일간 일한 급료를 다 계산해 내 생에 첫 급여를 주신것이다. 그리고 다시 금붕어 장사를 시작했는데 서울 장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외각 마을 내가 사는 장위동은 버스도 다니지 않았고 마을 앞 논에는 시꺼먼 웅덩이 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안에는 똥을 먹이로 섞어 키우는 빨강 노랑 하얀 금붕어들이 바글바글 자라고 있었다. 빨강 금붕어 속에 더러는 새까만 몸에 눈이 뚝 불거진 데미킹 이란 비싼 놈 도 있다. 나도 우리 동네 친구들 틈에 끼어 두번째 사업인 금붕어 장사를 시작 했었다. 큰 대나무 사각 소쿠리에 둥근 유리어항 몇개와 아침에 받은 금붕어를 물을 채운 어항에 담아서 한쪽 손에들고 빈 유리 어항은 깨지지 않도록 짚으로 싸서 소쿠리에 포개서 넣고는어깨에 둘러메고 시내로 팔러 나간다. 종암동을 지나 종로를 거처 인왕산 밑에 있는 청운동 (당시 고모님이 사시던)에 들려서 점심을 얻어먹고 다시 장위동까지 걸어서 걸어서 밤이되서야 집으로 돌아 온다.
친구들은 잘도 파는데 나는 종일을 다녀도 별로 다 장사에 습기가 없어 골목마다 크게 외쳐대야 할 "금붕어 사려 금붕어" 소리도 크게 제대로 외치지 못하고 어쩌다 만난 아주머니의 흥정에 깍아서 팔지도 못 하였으니 완판은 커녕 종일 몇 마라도 못 팔곤 하였다. 그저 미련한 끈기와 뚝심으로 버티고 있었으니...
이런 내게 우리 동네 교회의 청년들 몇명이 빈 양계장을 빌려 야간 중학 교육을 시작하였고 내가 그렇게 가고 싶었던 중학공부를 가르쳐준 선생님 문인귀 선생님! 바로 그 선생님이 이곳 미국에 오래전 이민을 오셔서 살고 계신 것이다
'투르르 투르르' 핸드폰 벨이 가는데 응답이 없다 한국을 떠나오기전 받아온 번호를 다시 확인하고 잠시후 핸드폰을 누른다. 신호 음이 한참을 울린뒤에 찰칵 수화기 받는 소리가 났다.
"여보세요" 하고 말하자 저쪽에서 어디를 찾느냐는듯 싶은 여자의 낮은 영어 음성이 들려온다 내가 약간 당황하며 멈칫하고 내가 다시 말을 하였으나 전화는 이미 끊겼다. 서툰 외국 전화라 잘못 걸었나 싶어 다시 번호를 확인하고 핸폰으로 또박 또박 눌러 "문선생님 댁입니까" 하고 말하자 잠시후 나의 은사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 저 덕용이 에요 선생님 선생님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 드렸어요. 건강하세요" "어 그래 덕용이 반갑구나"
선생님의 격앙된 반가운 목소리가 귀에 안겨온다.
"그래 잘들 있냐 어떻게 지내냐 너 몸이 아푸다 던데 괜찮냐 ?" 선생님은 내가 한국에서 연락하는둘 아시며 내 안부 부터 물으신다.
"네 괜찮아요. 선생님 제가 지금 선생님 계신 땅에 가장 가까이 왔기 때문에 선생님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 지금은 센트럴파크 둘러보는 중이고요" 라고 말씀 두리자. 위외 라는듯 깜짝 놀라 시며 웃음 거둑 담은 큰 목소리로
"오 그래 ! 이게 어디냐 같은 땅을 밟고 있다는 게 , 그래 네 몸은 어떠냐 몸이 않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
" 네 저는 위암수술 잘 돼서 지금 쌩쌩해요"
"구래 다행이구나 잘됐다" 하시고
"내가 너희들 만나본자가 벌써 몇년 전이냐 서울에가서 네 사업장에서 너희들 만나본 그때가 너희들 본지 마지막 인것같다. 노래도 두곡 불러주고 , 그때 너희들이 맞춰준 영복도 아직 입고있다"
"아니예요 부끄럽죠" 십여년전 오셨던 때를 회상하며 우리들의 안부를 물으신다. 그리고
"너희들 일회생들 홈피가 있다는데 알려 주고 서로 소식 올리고 나누자 " 고 하시는 지금의 선생님의 다감한 모습이 마음속 가득 벅찬 감동으로 꽉 차 오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하겠고 눈물이 올라오는 것을 숨기고
"선생님 너무 보고 싶어요 선생님 저 며칠전에이곳 뉴욕 첼시가에 있는 갤러리에서 홍대 미술교육원 화우들과 함께와서 그림전시 오푼 중이에요." 말씀 드리자 선생님은
"오 그래?" 깜짝 놀라 시면서 축하해 주셨다.
"선생님 소식은 제가 인터넷 검색으로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지난번 문학상 타신것, 시집 3권 내신것도, 그동안 미주 한인 문인협회 회장으로 2번씩 일하시는것과 지난번 한국 소설 '신춘문학 공모전 소설 부분에 입상하셔서 시인이며 소설가로 등단하신 소식도 뒤 늦게 알고 염광학원 초대 동문회 케페에 올려 알리고 모두 기뻐하며 선생님 뵙고싶어들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나는 선생님께
" 오늘 저희들이 이렇게 잘 살고 좋은 삶을 누리게 키워 주신것이 모두 선생님의 사랑의 선물 큰 은혜인것을 잘 느끼고 살고 있습니다" 하고 내 속의 고마움을 처음 입으로 고백 드리자 잠시 후 선생님위 부드럽고 작은 목소리로
"아니다 다 하나님 은혜다" 하사며
언제 가느냐 동문 홈피 주소 알려 주고 글로 소식 알리고 서로 만나며 살자고 하신다 .
일행은 모두 잠시 비가 멈춘 아침의 센트럴파크 멋진 숲길 사이로 사라졌고 텅빈 버스 안에는 박박머리의 외국인 드라이버와 조수한명이 조용히 대기하고 있는 빈 차안에서 나와 문선생님과의 통화는 몇 십년을 뛰어 넘어 중학생 어린 시절로 달려가고 있다
나는 지금 만나고 있는 일회생 모임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선생님께 알려드리고 저희들 두달에 한번씩 만나는 날이면 잊지못할 학창추억 보물상자 열어 이야기 하다보면 선생님을 몹씨 뵙고싶고 그리워 한다고 말씀 드렸다
공원에서 아직 안 돌아온 몇명의 화우들을 기다리던 도로위 버스가 뒷차에 밀려 조금씩 앞으로 자리를 이동하는 차안에서도 선생님의 정겨운 음성은 끊이지 않는다.
선생님은 그 당시에도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위치인 동화백화점에서 미술작품전을 하셨는데 오픈식 날에 우리들이 화분에 싶어 만든 축하 화분을 들고 선생님의 미술전시회장 우로 들고거며 재잘대던 생각이 생생하다 선생님은 화가로 문학가로 성가대 지휘자로 음악에도 성악가 버금가는 목소리의 다재 다능 하셨던 문인귀 선생님 이시었다.
선생님이 군입대전 내 손에 쥐어준 모나미 그림물감과 뒤에 남겨진 선생님의 수채붓 한개. 선생님의 손때 묻어 달아서 짧아진 붓은 물을 흡뻑 머금고 길고 부드럽게 술술이 색을 토해내 주는 붓끝이 아주 부드러웠던 그 붓털은 아마도 지금도 곳가로만 살수있는 귀한 담비털 붓이 아니였을까 싶다. 나는 그 붓으로 애지중지 아끼며 몇년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 봤는데 그 붓은 언제 서 부터 어디론가 내 곁에 사라지고 잊었다.
고단한 삶에 허둥대던 사이에 문선생님의 소중한 그 붓을 구만 잃어버렸고 그림도 그리지 못하고 결혼하고 다섯 딸아이 내가 못한 공부를 다 하도록 대학보내며 허둥허둥 살았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물감과 몽당 붓은 내 머릿속에 또렸이 남아있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전에서 특선을 받은후 생업을 위해 미술이 아닌 사진을 전공했고 사진작가로 강남역에서 덕스갤러리 사진 스튜디오를 하며 살던 중에 몇년전 뜻하지 못한위암수술 후 다행히 회복 중에 있어 서둘러 그동안 하고 싶었던 유화를 서둘러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출품한 강남마술대전에서 '휘나래'로 특선은 나를 어리둥절 하게 했고, 이듬해에 출품작'아버지'로 다시 특선을 받았다. 그리고 마음만 젊은 철부지 소년 내 나이 일흔 두살에 홍대 미술교육원 분당아카데미 회원들과 뉴욕 첼시가 갤러리에서 대한민국 명창의 축하 공연속에 열리는 뉴욕 미술전시회에 함께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니 모두가 문인귀 선생님 그분의 깁고 넓은 은혜인 것을 .....갚을 수 없이 큰 사랑 선생님 오래 오래 건강하게 잘 살아 계셔야 헤요. 마음속으로 간구합니다.
"어 ~ 그래 나 아주 건강하다."
-문인귀 선생님을 그리며-
선생님은 장석교회 임마누앨 성가대 초대 지휘자/대장 이셨고 문옥자 권사님의 오라버님 이시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