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 조광조 선생님께서 기묘 사화때 귀양을 왔다가 사약을 받은 능주면 남정리
조선8대 임금인 성종 때에 이르러서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폐비 윤씨 사건의 불씨는 연산군에 이르러 무오, 갑자사화로 이어집니다.
연산군의 폭정에 불반을 품은 박원종과 성희안은 1506년 9월, 궁궐로 들어가 반정에 반대했던 연산군 부인의 오빠인 신수근과 간신 임사홍 등을 살해하고 연산군을 왕위에서 끌어 내립니다.
그리고 등장한 중종은 두 차례의 사화로 세력이 약화된 사람들을 다시 관리로 불러들여 중종 반정을 성공시킨 후 큰 힘을 누리던 훈구 세력을 견재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개혁 정치를 뒷받침해주려는 사람을 찾던 중 중종에게 뽑힌 사람이 '조광조' 였습니다.
사림들은 현량과라는 관리 선발제도를 실시하는 등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조광조가 건의한 관리 선발제도로, 중추부, 홍문관과 지방에서 천거한 사람 120명을 대상으로 시험을 봐서 관리를 뽑는 것인데 실제로 이 제도로 사림들이 정계에 진출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조광조의 개혁을 밀어주던 중종이 사림을 멀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광조의 개혁이 너무 앞서나갔기 때문이지요.
조광조는 자신들이 공부한 성리학이라는 유학의 가르침을 조선에서 실현하려고 했습니다. 이른바 도학정치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인 중종도 여러 가지 도리를 지ㅣ면서 왕으로서의 의무를 지켜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로 인해, 중종의 마음은 사림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이를 눈치챈 훈구 세력은 走肖爲王(조씨가 왕이 된다.)이라는 글씨를 구실로 조광조를 잡아옥에 가둡니다.
기묘사화이지요.
능성적중시 (綾城謫中詩) 조광조 (1482-1519)
누가 활 맞은 새와 같다고 가련히 여기는 가
내 마음은 말 잃은 마부 같다고 쓴 웃음을 짓네.
벗이 된 원숭이와 학이 돌아가라 재잘거려도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
독 안에 들어 있어 빠져 나오기 어려운 줄을 어찌 누가 알리오.
誰憐身以傷弓鳥
自笑心同失馬翁
猿鶴定嗔吾不返
豈知難出覆盆中
수련신이상궁조 / 자소심동실마옹 / 원학정진오불반 / 개지난출복분중
화순군 능주면에 가면 정암 조광조(1482-1519)의 적려유허지가 있다. 1519년 (중종 14년) 11월 사림파의 거목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인하여 이곳 능성현(지금의 능주)으로 유배를 오게 된다. 이 때 쓴 시가 능성적중시이다.
자신의 처지를 활 맞은 한 마리 새로 비유하고 , 마음은 말 잃은 마부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조광조는 다시 임금이 자기를 부를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는 하고 있지만 지금은 독 안에 들어 있어 빠져 나오기 어렵다는 체념과 자조를 하고 있다.
실패한 개혁주의자 조광조는 유배 온 지 한 달도 채 안되어 사약을 마시고 죽는다. 그리고 절명시를 쓴다.
조광조<絶命詩(절명시) >
선조가 즉위하기 48년 전인 1519년(기묘년) 중종 14년 12월 20일 의금부 도사 ‘유엄’이 ‘조광조’의 유배지에 들이닥쳤다. 유배지로 의금부 도사가 직접 왔다는 것은 십중팔구 사사(賜死)의 명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조광조’의 유배지는 전라도 능주,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의 외진 곳이었다.
이곳으로 유배 온 지 한 달 여, 그때까지도 ‘조광조’는 중종의 진의를 헤아리지 못한 채 뭔가 오해가 발생해 자신이 곤경에 빠진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마당에 꿇어앉아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전교를 받들던 ‘조광조’는 여전히 중종에 미련을 갖고 ‘유엄’에게 묻는다. “사사의 명만 있고 사사의 글은 없소이까?” ‘유엄’이 글을 적은 작은 쪽지를 내보이자 ‘조광조’는 “내가 명색이 대부의 반열에 있다가 죽게 되었는데 쪽지 한 장이 무엇인가?” 라며 ‘유엄’을 쳐다보았다. 이러한 상황을 실록은 “‘조광조’가 그렇게 한 뜻은 임금은 모르는 일인데 자신을 미워하는 이들이 중간에서 마음대로 만든 일이 아닌가 의심했기 때문”이라고 친절하게 해설하고 있다.
‘조광조’는 다시 “조정에서는 누가 새롭게 정승이 되었으며 특히 ‘심정’(沈貞)은 지금 어느 벼슬에 있는가?”라고 묻는다. ‘유엄’은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중종이 ‘조광조’에게 사사의 명을 내린 다음날인 12월17일, 그를 지키려고 했던 영의정 ‘정광필’은 중추부 영사로 좌천당했고 그와 대립했던 ‘남곤’이 좌의정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특히 그가 죽음의 순간에도 그 거취를 궁금해 했던 ‘심정’은 이조판서에 올랐고 그가 미워했던 사람, 그를 미워했던 사람들이 요직을 차지했다는 것을 알게 된 ‘조광조’는 “그렇다면 내 죽음은 틀림없소이다!”라며 마지막 미련을 버렸다.
‘조광조’는 ‘유엄’에게 최후의 부탁을 한다. “오늘 안으로만 죽으면 되지 않겠소? 내가 집에 보내야 할 글도 있고 몇 가지 조처해야 할 것도 있으니 잠깐 방에 들어가도 좋겠소?” ‘유엄’의 허락이 떨어지자 ‘조광조’는 방안에 들어와 붓을 들었다.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고 지난 4년 간 격렬했던 정치활동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갔을 것이다. 가족들에게 당부의 편지를 끝낸 ‘조광조’는 시 한 수에 자신의 피 끓는 심정을 담아냈다.
정암 선생의 <절명시>이다.
愛君如愛父 (애군여애부)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憂國如憂家 (우국여우가) 나라 걱정하기를 집안 근심처럼 하였다.
白日臨下土 (백일임하토) 밝은 해 아래 세상을 굽어보사
昭昭照丹衷 (소소조단충) 내 단심과 충정 밝디 밝게 비춰주소서.
간략하면서도 억울함이 짙게 배어든 절명시(絶命詩). 그 현장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 갈 때마다 붓을 쥔 손은 전율하듯 떨렸을 것이며 눈시울은 한스러움과 원망으로 뜨거워졌을 것이다. 그의 타는 가슴이야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남몰래 자신의 시중을 들어주던 사람에게는 “먼 길 가기 어려우니 내 관은 얇게 만들라”고 당부했다. 이어 독을 탄 술을 마시고 ‘조광조’는 세상을 떠났다. 아직 꿈을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한 38세였다. 그러나 훗날 그의 죽음이 조선 역사에 몰고 올 파고가 얼마나 높고 거셀지는 ‘조광조’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이한우’의 ‘선조’에서 발췌한 글.)
능주에서 30여분 가면 도착하는 운주사 와불
첫댓글 박용수 선생님
좋은 자료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