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택스님
-경북고, 연세대 정외과.
-1972년 성철스님의 문하로 출가
-성철 큰스님의 상좌
-부산 고심정사 주지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장
2018.9 김정은 국무위원장 방북 평양 옥류관 오찬
-저서 <성철스님 시봉이야기>
성철큰스님 20년모신 원택스님 출가사연
1971년 봄날 스물일곱 살의 청년이 우연히 해인사 백련암(경남 합천)에 가게 됐다. ‘중이 된 대학동기 만나러 가는데 같이 가자’는 좁쌀친구의 청 때문이었다. 청년은 당시 백련암에 있던 큰스님을 만난 김에 좌우명 하나를 달라고 청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로 유명한 성철(性徹) 스님(1912~93년), 그리고 입적 당시까지 성철 스님을 20년 넘게 시봉(侍奉)한 원택(圓澤·67) 스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출가 이후 40년째 백련암에 머물고 있는 원택 스님을 j가 만났다.
제가 성철 스님께 출가한 시절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출가하기 전 처음으로 성철스님을 뵈었을 때 스님께 평생 제가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좌우명을 요청 드렸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절 돈 3천원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 3천 배를 하라는 말씀입니다.힘들게 절 3천 배를 마치니 스님께서는 달랑 “속이지 마라”는 한 마디만 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 주시는 좌우명이라면 평생 실행하려고 해도 힘든 굉장한 말씀일 줄 알고 기대했는데 기껏 “속이지 마라”고 하시니 말 그대로 스님께 속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큰스님께서 주신 “속이지 마라”는 좌우명에 실망한 것은 큰스님이 아닌 누구로부터도 그 말을 귀 따갑게 들었던 흔한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해인사 백련암 다녀온 석 달 후, 하루는 문득 큰스님께서 하신 “속이지 마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렇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남을 속이고 산 일은 없지만 내가 나를 속이고 산 날이 너무도 많지 않은가! ’남을 속이지 마라‘가 아닌 ’자기 스스로를 속이지 마라‘ 이렇게 좌우명을 주셨더라면 정말 내가 평생 지키지 못할 좌우명이 아닌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큰스님을 다시 찾아뵙고 싶은 충동이 일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출가하게 된 것입니다.
출가한 첫 날, 큰스님은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매일 3천 배 기도를 해라. 새벽 예불 후 천 배, 아침 공양 후 천 배, 점심 공양 후 천 배 이렇게 매일 3천 배 기도를 일주일하고 나서 보자”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속으로 ‘절에 들어와서 머리 깎으면 그만이지. 또 무슨 절인가’하고 생각했습니다. 절의 살림살이를 책임진 원주스님이 객실로 안내하면서 “일주일 3천 배 기도를 잘 마쳐야 삭발합니다. 삭발해야만 행자로 받아들여집니다”하고 일러주었습니다. 1월 중순. 음력으로는 정월이라 날씨가 몹시 추웠습니다. 새벽 3시경 일어나 차관(茶罐)에 물을 담아 영자당(影子堂)에 들어가 다기(부처님 앞에 놓인, 청정수를 담는 그릇)에 물을 올리고, 절을 했습니다. 어찌나 추운지 절을 시작한지 얼마 안돼 물이 얼고 이내 얼음이 부풀어 올라 쩍 갈라질 정도였습니다.
그런 추운 날씨에 이른 새벽 일어나 절을 하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한 3일 동안 매일 3천 배를 부지런히 했는데, 그날 저녁에 ‘아이고, 백련암으로 출가했다간 평생 절만 하라면 어쩌나. 이렇게 힘든 절을 자꾸 시키면 신세 망치는데….’ 하는 못된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리지 않는 곳이 없이 온 몸이 쑤시고 아팠습니다.
'앞으로 백련암에서는 당분간 절만 시킬 모양이다. 절만 하다가는 사람 죽어 나가겠다. 이렇게 힘든 절을 하느니 차라리 세상에 나가서 열심히 살지….’ 하는 생각 등 별의별 상념이 다 떠올랐습니다. 안 하던 절을 갑자기 하니 옴 몸이 어찌나 아파 오는지, 마음까지 약해져 이런 저런 망상이 끊임없이 일었습니다. “출가하라”고 하신 성철 큰스님은, 절을 시킨 뒤 다리가 풀려 마당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있는 저를 보고도 “네 놈 언제 보았나” 하고 눈길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에잇! 내일 아침 도망가 버리자.’고 결심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잠 속에 갑자기 눈썹이 허연 노스님들이 “나는 누구다, 나는 누구다” 하시는데, 하나같이 선종(禪宗)의 역사에서 쟁쟁한 선사들이었습니다. 그 노스님들이 하나같이 “내일 도망가지 말고, 일주일 기도 회향 잘해서 스님노릇 잘 해라.” 당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화들짝 놀라 잠을 깼습니다. ‘그것 참 이상한 꿈이다. 내일 아침 도망갈 생각을 하니 이상한 꿈도 다 꾼다.’ 생각하고, 또 잠이 들었습니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아침 공양도 마쳤습니다. ‘도망가더라도 그동안 기거하던 큰 방 청소나 하고 떠나야지.’ 하는 생각으로 물걸레를 들고 방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 마침 성철 큰스님이 방문 열고 들어오시면서 “니 임마! 도망가야지. 왜 아직 도망가지 않고 있어!”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갑자기 당황스럽고 무안스러웠습니다.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무척이나 부끄러웠습니다. “스님! 정말 절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도망가려고 짐을 싸 두었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이렇게 도망가는 것을 훤히 알고 계시니, 도망갈 생각을 접고 열심히 절하겠습니다.” 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 “절하는 사람 다 힘들지. 힘들지 않는 사람 있나. 열심히 절해서 기도를 마쳐라.” 하십니다. 다시 영자당에 올라 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힘들게 7일간 3천 배 기도를 마쳤습니다. 얼마나 추웠는지 손 발 귀 등 온 몸이 근질근질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7일 기도를 마치고 정식으로 머리를 깎았습니다. 그리고 벌써 30년이 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때 7일 기도를 마치지 못했으면 지금 이렇게 살고 있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 3천 배가 제 인생을 결정지은 최대의 기로였을 것입니다. 흔히 무언가 힘든 일이 있을 때 포기하는 것은, ‘이 정도면 충분해’ 하며 스스로 만족하거나 ‘내 주제에 해 봐야 얼마나 하겠어’ 하며 스스로를 깔보는 마음 때문입니다. 성철 큰스님이 제게 주신 “속이지 마라”는 말씀에 비춰보면 모두 “자기를 속이고 사는 것”입니다.
7일 기도를 포기하고 절을 도망가려는 제 마음을 읽고 붙잡아 주신 것은 성철 큰스님의 지혜의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누군가는 지혜의 눈을 밝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철스님과 원택스님 이야기
성철 스님이 늘 강조하는 말 중의 하나가 세속과의 인연끊기다.
"사람이 한번 결심해서 출가를 했으면 앞으로만 봐야지 뒤돌아 보면 못쓰는 거라.
그러니 출가한 후에도 속가집에 들락날락하는 것은 꼴 보기 싫기 이전에 그라믄 안되는 거라.
이왕 출가했으면 가족들 인연은 끊고 살아야제."
성철 스님의 말씀이 그러니 겁이 바짝 들어 있는 나는
행자시절이나 초년병 시절 집 생각일랑 해볼 수도 없었다.
대신 어머니가 가끔 찾아와 만나곤 했다.
처음에는 나를 데리러 왔다가 실패하고 돌아간 어머니인데
그나마 가끔씩 찾아와도 성철 스님한테 꾸중을 듣긴 마찬가지였다.
"자식 출가했으믄 그만이지 뭘 자꾸 찾아와!"
결국 어머니는 나를 찾아와도 백련암으로 오지는 못하고
그 밑 사하촌에서 몰래 전화해서는 "나 왔데이"하고는 끊었다.
그럴 땐 모른 척하고 산을 내려가 얼굴만 보고 돌아오곤 했다.
그나마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도 띄엄띄엄 줄어져갔다.
한번은 내가 성철 스님 몰래 집으로 아버지를 찾아간 적도 있다.
보통 불교신도들은 남의 자식이 스님된다면 "좋은 일"이라고 말하지만
막상 자기 자식이 출가한다고 하면 한 길이나 펄쩍 뛰기 마련이다.
출가한 뒤에 어머니는 찾아오기라도 하지만
아버지는 섭섭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찾아오지 않는다.
한번은 나의 아버지가 "중 된 미운 자식이라 나는 보러 가기도 싫다.
그렇지만 아들인 지는 한번이라도 왔다가야지,
지 애비하고 무신 원수졌다고 한 번도 안 오나"고 섭섭해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또 "중이 매몰스럽기는 매몰스럽운 거라"면서
하도 서운해 한다기에 어쩔 수 없이 집으로 찾아가 인사했다.
이후에도 누구는 어머니 환갑을 어떻게 했네,
아버지 칠순을 어떻게 했네 하는 소문들이 들려오곤 할 때마다 부모님께 죄송한 생각이 없지 않았다.
1982년 12월 큰스님 심부름으로 서울 왔다가 바쁘게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백련암에서 날 찾는다는 전화가 왔다기에 수화기를 들었다.
시자(侍者.큰스님 시중 드는 스님) 스님이 "큰스님께서 직접 통화하시고 싶어 한다"고 한다.
그런 일은 처음이라 해인사에 무슨 큰일이 생겼나보다고 생각하던 중 큰스님 목소리가 들여왔다.
"원택이가. 너거 아배 죽었다칸다.
백련암으로 오지말고 대구 가서 초상 치고 들어오이라.
내가 직접 전화 안하면 니 안갈 꺼 같으니께 내가 전화한 기라.
니, 내 말 알겠제.
꼭 대구 가거라.
어-잉. 내 말 들어라."
그 순간 몹시 불효한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 길로 바로 대구로 내려가 형님댁을 찾아드니 형님은 중동에 가고 없고 집안이 썰렁했다.
갑자기 당한 일이고 형색이 스님이니
동창들에게 알린다는 것도 쑥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가족끼리만 장례를 치렀다.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거적대기에 둘둘 말아 장사지낸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라 더욱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시 그로부터 4년 뒤,
그때까지도 날 찾아오면 늘 "니 언제 장가 갈라카노"하는 원망이자 당부를 잊지않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그때는 신도들도 알고 찾아와 문상해주고,
해인사 스님들도 문상을 해주어 아버지 출상때보다는 훨씬 마음이 덜 무거웠다.
그래도 나는 성철 스님과 비교하면 호강한 셈이다.
큰스님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별세했을 때 장례에 가지 않았다.
대신 시자를 보내 문상을 했을뿐 평생 고향(경남 산청군) 을 찾지 않았다.
하도 궁금해 "고향을 찾지 않으신 이유가 있십니꺼" 물은 적이 있다.
성철 스님이 힐껏 쳐다보며 툭 내뱉었다.
"아따, 니 고향은 어지간히 대단한 모양이제.
이놈아, 중이 돼 떠났으면 머무는 곳이 고향이지
중한테 갈 고향이 따로 어데 있단 말이고."
성철 스님은 그런 분이었다.
본인은 부모의 상을 당하고도 문상조차 않는 삶을 살면서도
제자인 나에게는 직접 전화를 걸어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라고 신신 당부까지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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