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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서울사나이
고려의 시대상황
고려(高麗)의 6대 황제인 성종(成宗)이 38세의 나이로 서거하고 997년에 18세의 어린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조정의 모든 권력은 성종의 아내이자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獻哀皇后)가 차지하게 되었다. 유난히 정권욕이 강했던 그녀는 김치양(金致陽)과 간통하여 아들을 낳고 이를 제위(帝位)의 후계자로 삼으려는 속셈을 꾸미기 시작했다.
섭정을 시작한 천추태후와 버젓이 부부행세를 하면서 조정의 실권을 거머쥔 김치양은 우복야 겸 삼사사에 올라 인사권을 장악하여 백관의 임명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러자 전국에서 벼슬을 원하는 자들이 몰려들어 김치양에게 뇌물을 바쳤으며, 그는 거둬들인 재물로 3백여 칸이나 되는 집을 짓고 밤낮으로 천추태후와 놀아났다.
김치양의 권력독점으로 조정이 기능을 상실하게 되자 목종은 황제로서의 권위와 모든 실권을 잃고 절망에 빠져 유행간(柳幸肝)이란 자와 동성애에 빠지게 된다.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 유행간은 곧 합문사인의 벼슬에 올라 목종의 곁에서 정사를 농단하기 시작했다. 목종은 정사에 관한 한 유행간에게 묻지 않는 것이 없었고, 이에 따라 유행간은 마음먹은 일이면 언제든지 황제를 조정하여 이룰 수 있었다.
당시 태조(太祖)의 유일한 혈통으로 목종의 당숙(堂叔)인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은 황실의 유일한 후계자로 지목된 사람이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대량원군을 제거하면 자신들이 사통하여 낳은 아이를 제위에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어린 대량원군을 강제로 승려로 만들어 절로 보낸 뒤 자주 자객을 보내어 그를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병을 얻은 목종은 제위를 안전하게 대량원군에게 물려주기 위해 서경 도순검사 강조(康兆)를 불러들여 대량원군의 호위를 맡겼다. 병사 5천여명을 거느리고 개경에 도착한 강조는 반란을 일으켜 황궁을 점령하고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조정의 실세인 간신 7명을 죽이고 천추태후의 친속 이주정(李周定) 등 30여명을 귀양 보냈다. 그리고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제위에 앉히니 그가 곧 고려의 8대 황제인 현종(顯宗)이다. 목종은 법왕사로 몸을 피했으나 뒷일을 염려한 강조가 보낸 무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요나라의 1, 2차 침입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는 1004년 송(宋)나라 정벌 때 현재의 하북성을 휩쓸고, 단주(湍州)에서 황하를 사이에 두고 송군과 대치하였는데 송에게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에 이르는 엄청난 양의 세폐를 받기로 하고 철수했다. 거란의 주변국 침입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993년 8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를 침공하여 거란군과 고려군은 서북지방에서 일승일패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고려의 서희(徐熙)가 펼친 노련한 외교술에 말려 강동 6주를 내주고 물러났다. 이것이 거란의 1차 침입이었다.
여진족의 고변으로 목종 폐립의 내막을 알게 된 요나라는 1010년 7월 대장군 나율륜(羅栗倫)을 파견하여 목종 살해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이에 따라 사신을 보내 목종 폐립의 양해를 구했으나 요나라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해 10월, 요나라 성종(聖宗)은 목종 폐립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직접 지휘하여 압록강을 건너왔다. 거란의 고려에 대한 두 번째 군사적 침공이 감행된 것이었다.
요나라 군사들은 먼저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고 도순검사 양규(楊規)에게 항복을 종용하면서 목종을 죽인 강조를 넘겨주면 회군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이를 거부하자 양군 사이에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다.
거란 40만 대군 중 20만은 인주 남쪽 무로대(無老代)에 주둔하고 나머지 20만이 통주로 밀려들었다. 행영도통사가 된 강조는 군사를 거느리고 거란군을 맞아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사로잡혀 죽음을 당했다. 요군은 그 여세를 몰아 남하하면서 곽주와 서경을 함락시켰다. 이때 정성(鄭星), 이수화(李修華) 등과 더불어 흥화진을 사수하고 있던 양규는 결사대 7백여명을 거느리고 통주로 가서 흩어진 패잔병 1천여명을 모아 곽주에 머무르고 있던 거란 군사 6천여명을 전멸시키고 양민 7천여명을 구해 통주로 퇴각했다.
이때 경기도 광주에 머물러 있던 현종은 거란군의 진격을 피해 장곡과 인의를 거쳐 남해안의 나주로 몽진하였다. 이때 귀주(龜州)의 별장 김숙흥(金叔興)은 중랑장 보량과 함께 적군을 기습하여 1만여명을 사살했으며 양규는 적의 주둔지인 무로대를 습격하여 적군 2천여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그 후에는 이수에서 적군 2천 5백명을 무찔렀으며 여리첨에서도 1천여명을 참살했다.
이후 양규와 김숙흥은 병력을 합쳐 거란군의 선봉부대를 애전(艾田)에서 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개경에서 회군하던 요나라 황제 성종은 이 소식을 듣고 대군을 몰아 고려군을 총공격하였다. 양규와 김숙흥은 이 전투에서 앞장서서 환도(環刀)를 들고 적병들을 참살하면서 분전하다가 수십대의 화살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성종은 군량이 떨어지고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1011년 정월에 모든 군사를 철수시켜 본국으로 퇴각을 시작했다. 이때 정성이 이끄는 고려군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뒤쫓아 압록강에서 8천명의 적병을 사살하고 강동 6주를 회복했다.
요나라의 3차 침입
요나라 성종은 두 차례에 걸친 고려 원정이 실패하자 실추된 위신을 회복하기 위하여 재차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이 3차 침입 때에는 다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차출할 수 있는 병력의 수가 예전만큼 많지 않았다. 요는 1차 침입 때 80만, 2차 침입 때에는 40만 대군을 동원하였다.
그 와중에도 1004년에는 송, 서하(西夏) 등과 전쟁을 벌였고, 1017년에는 지금의 신강성 서쪽 끝인 카쉬가르까지 원정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고려에 보낼 수 있는 정예병의 수가 적었고, 병력의 상당수를 한인으로 채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수도 동경의 승려까지 징집해야 할 정도였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도 1018년 12월 겨울, 요나라는 성종의 사위인 소배압(蕭排押) 이 이끄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했다. 소배압은 고려가 2차 원정 때와 같이 요새를 중심으로 방어를 하며 공격을 하는 전술을 택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소배압은 이러한 요새들을 무시하고 개경까지 진격하여 고려의 왕을 사로잡는 속전속결 전략을 택했다.
고려 조정은 20만 대군을 조성하여 평장사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각각 임명하여 지휘권을 일임했다. 강감찬은 소배압이 승부를 서두르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20만 8천 3백여 명에 이르는 대군을 모아 정면대결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은 수공이 아니었다. 수공이 이루어진 곳은 귀주가 아니라 흥화진이다. 강감찬은 강민첨에게 1만 3천의 병력을 주어 흥화진 근처의 산골에 매복시킨 다음, 20만 대군을 이끌고 영주로 나갔다.
거란군은 세 개의 대열로 나누어 전진했다. 앞에는 척후병인 원탐난자군을 포함한 경무장의 기병과 보병이 있었고, 그 뒤에는 적지에서 군량과 마초를 약탈하고, 적의 패잔병 소탕을 담당하는 타초곡기가 뒤따랐다. 그리고 후위에는 정예 중갑기병인 오르도가 예비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강감찬은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하자 일단 선봉부대를 그대로 통과시켰다. 그런 다음 상류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대에 명령을 내려 강을 막고 있던 소가죽 둑을 터트렸다. 거란의 부대가 반쯤 강을 건넜을 때 갑자기 수위가 높아지면서 도강은 어려워졌고, 거란군의 선봉부대와 후미부대는 분리되었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던 강민첨의 부대는 선봉부대를 급습하여 완파했다. 빠른 기습작전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아 강민첨의 부대는 경기병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살수대첩에서도 그랬듯이 역사상 널리 알려진 수공은 해일과 같은 급류가 적의 군대를 휩쓸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수위를 높이고 물살을 빨라지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수공은 물을 이용해 적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적군의 대형을 토막내기 위한 전술인 것이다.
많은 숫자의 선봉부대를 잃은 거란군은 더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겨울 추위 때문에 수공을 당한 병사들이 추위와 동상으로 죽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거란군의 피해는 선봉부대에 집중되어 있을 뿐, 후속부대는 계속하여 전진하고 있었다. 강감찬은 강민첨에게 추격전을 명함과 동시에 후방에 남겨진 부대로 하여금 거란군의 후속부대와 싸우게 했다. 북방의 경계에서 수도 개경까지의 공격 축선 곳곳을 지키는 종심방어전략을 취한 것이다. 이로써 속전속결로 개경을 함락하고자 했던 소배압의 계획은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거란군으로서는 척후와 전방경계를 담당해야 하는 선봉부대가 흥화진에서 떼죽음을 당한 것이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거란군은 정찰을 담당할 병력이 부족하여 자주 기습을 당했다. 거란군은 개경까지 진군하는 도중 곳곳에서 복병을 만나 참패했다. 자주(慈州)에서는 강민첨의 추격부대에 크게 당했고, 서경 근처의 마탄(馬灘)에서는 시랑 조원(趙元)이 이끄는 습격군에게 참패했다. 또 개경 근처의 위연주에서는 강감찬이 직접 이끄는 병력을 맞아 5백의 군사를 잃었다.
마지막 결전과 귀주대첩
천신만고 끝에 개경에 도달한 거란군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곳곳에서 공격하는 고려군에게 시달리면서도 최대한 빠른 속도로 진격 해왔기 때문에 개경의 방비는 허술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개경에는 북쪽에서 달려온 김종현(金宗鉉)의 기마부대가 성벽 앞에 버티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2차 원정 때는 보지도 못했던 외성이 개경을 둘러싸고 있었다. 고려 현종은 피난을 가지도 않고 성안으로 소개(疏開)시킨 백성들과 함께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이미 흥화진, 자주, 마탄, 위연주에서 연이은 패배로 3만의 병력을 잃은 거란군은 김종현 부대와 결전을 벌이며 개경을 공략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속전속결의 전략 때문에 군량도 충분하지 않았다. 거란군에게는 후퇴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개경 함락과 고려왕 체포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거란군으로서는 더 이상 고려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강감찬은 거란군을 고이 돌려보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고려는 거란군을 철저히 물리쳐 향후의 침략의도를 완전히 꺾어버리고자 하였다. 강감찬은 곳곳에 흩어져 있던 병력을 불러 모아 마지막 결전을 준비했다.
선발대로부터 고려군이 전력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소배압은 결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소배압은 마지막 한 번의 대승을 통해 그동안의 실패를 만회하기를 바랐다. 거란군은 지칠대로 지쳐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아직 오르도를 비롯한 정예 병력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기에 전투를 피할 이유가 없었다.
양군은 귀주의 벌판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귀주의 지형은 구릉지역으로 주위에 광할한 벌판이 없었다. 마탄에서 고려군의 활 공격에 크게 당한 소배압은 바람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 진을 배치했다. 양군이 격돌한 개활지는 폭이 4킬로미터에 불과해 대규모 기마 기동전이 어려웠다. 다시 말해 이곳에서는 기마군에 의한 양익포위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양군은 모두 진을 옆으로 펼치지 않고, 전후 종심이 깊은 대형을 취했다. 소배압은 어차피 양익포위가 안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유목민의 전통적인 기사를 통하여 고려군의 대형을 허물고 중기병을 돌진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강감찬은 소배압의 의도를 간파하고 양쪽에 경기병들을 포진시켜두었다. 거란 경기병이 옆으로 돌면서 사격을 시작하자, 고려의 경기병이 출동하여 이들을 저지했다. 사격기회를 잡을 때마다 고려의 경기병들이 들이 닥쳐 칼을 휘둘러대니 거란군으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소배압은 변칙작전을 전개했다. 일단 경기병들을 후퇴시킨 다음 중기병들을 고려군의 전면에 배치했다. 그리고 이들을 고려군과 평행으로 달리게 하면서 뒤에서 화살을 발사했다.
고려군도 이에 맞서 화살을 쏘았지만 뒤에 숨에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경기병들을 맞추는데 애를 먹었다. 이에 강감찬은 조준사격을 명했고, 양국 간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고려 궁병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대열이 흐트러지자 소배압은 뒤에 배치해 두었던 오르도 기병을 출격시켜 고려군의 본진을 짓밟고자 하였다. 고려군의 궁병이 평소보다 적어보이기는 했지만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감찬은 주변의 구릉을 엄폐물로 삼아 궁기병들을 우회시키고 있었다.
거란 중기병이 한창 돌격해가고 있을 때, 갑자기 후방이 소란스러워졌다. 수천의 고려 궁기병이 거란군 진영의 뒤편을 질주하면서 화살을 날렸던 것이다. 본진에 남아 있던 거란군들은 속절없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소배압은 경기병을 후방으로 철수시켜 막을 수 밖에 없었다.
한편 고려의 궁병들은 중기병의 돌격을 막아낼 수 없어 일단 검차부대의 뒤로 후퇴한 뒤 다시 대열을 편성하고 질사를 시작했다. 질사란 궁수의 대열을 셋으로 나누어 교대로 발하사는 방식이다. 한 대열이 방사를 하는 동안 다른 대열은 장전을 하고, 조준을 할 수 있어서 화살의 연사가 가능했다.
오르도 기병이 아무리 중무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근거리에서 연속으로 날아오는 상황속에서 검차로 거칠게 밀어붙이는 고려의 보병들을 공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갑자기 일단의 기병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개경으로 보냈던 김종현이 지휘하는 철기병들이었다. 김종현의 중기병군단은 우왕좌왕하는 오르도 기병의 대열을 단숨에 돌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그대로 거란군의 본진을 향하여 돌격했다. 고려의 검차병과 검병, 부병, 창병들이 일제히 가세하여 거란의 기병을 공격했다. 거란의 중기병은 돌파력을 잃고, 보병을 대상으로 난전을 벌이게 되어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도 없었다. 천하무적을 자랑하던 오르도 기병들은 난전 속에서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고려군의 중기병 출현에 놀란 소배압은 경기병을 다시 돌려 맞서게 했으나 경무장을 한 궁병들은 중무장 철기병들이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경기병들은 중기병들에게 몰살당했다. 고려의 궁병들은 동진하는 중기병의 뒤를 따르며 거란군의 본진에 화살을 날렸다. 앞뒤로 쏟아지는 화살공격에 이어 고려 철기병들의 돌격을 받자 마침내 거란의 본진은 붕괴됐다. 이후의 상황은 전투가 아니라 고려군에 의한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지휘관과 장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총사령관인 소배압까지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이때의 상황을 <요사(遼史)>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적이 양옆을 좁히고 화살을 쏘니 배압은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이에 거란 성종은) 그를 꿇어앉히고, 그의 벼슬을 빼앗았다.
고려군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낙오병들까지 척살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전투가 끝난 뒤에 거란군의 시체가 들에 널려 있었고, 생포한 포로와 노획한 말과 낙타를 비롯한 갑옷, 투구와 무기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0만의 거란침략군 중 생존자는 불과 수천 명에 불과했다.
강감찬은 누구인가?
강감찬은 본래 문관(文官)으로 관직에 진출했으면서도 국난을 당하자 상원수로 전쟁터에 나가 뛰어난 지휘력과 탁월한 용병술로 거란 침략군을 격퇴시킨 고려 초기의 명장이다. 귀주대첩으로 유명한 그의 빛나는 전공으로 인해 고려는 외환을 극복하고 왕조의 기틀을 단단히 다질 수 있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강감찬의 외모에 대해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어디 사람의 인격과 재능이 외모와 비례하겠는가. 그는 학문을 사랑하고 재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인품이 고매하고 처신이 신중하며 위엄이 있어 정적을 만들지 않았다. 또한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이면서도 검소한 생활을 즐겼으며, 관직에서는 청백리의 모범이었던 충신이자 영걸이었다.
깨어있는 푸른역사 삼태극 http://cafe.daum.net/mookto
- 삼태극 전문 학술위원 서울사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