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梁 芳秀(양 방수)越南前線에 參戰하다
월남 전투에서 필자 ①
월남 전투에서 필자 ②
필자는 10대와 20대 때 두차례나 軍을 지원했으나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가 1967년 북한군 김 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기습하는 바람에 위기에 처한 국가가 군에 입대하지 못한 장정들에게 무조건 입대 통지서를 내어 40세가 넘는 고령자들과 같이 논산 제2훈련소 제29연대에서 훈련을 받고, 파병을 지원했으나 그 뜻을 이루어지 못했다.
훈련소에서 IQ검사를 마친 결과 대전 통신학교, 전신타자반에서 9주 코스로 入所(입소)하여, 제 164기 기장으로 졸업후, 최전방 25사단에서 18개월 근무 후, 윤 봉준 사단장의 후임으로 김 용휴 주월 부사단장이 부임하는 틈새에 72연대 주임상사, 노상사의 후원으로 死地로 몰리는 주특기라는 무전 통신병으로,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병과를 바꾸어 가까스로 파병을 자원하여 강원도 오음리에서 훈련을 마치고, 백마 29진으로 출국하였다.
1969년 월남 전투에서 ③
3.8선 DMZ 최전방 수색중대에서 필자
주특기를 무전 통신병으로 병마 29진으로 지원 하다 ④
1969년 월남 전투에서 양방수 ⑤
파병용사들의 모습
파병용사들의 모습
떠나는 날 부산 부두에 전송나온 인파로 가족의 얼굴를 보기가 힘들었다.
월남전의 모든 자료는 아래를 크릭 하세요
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필자의 월남 참전 휘장
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외교통일 > 해외 파병 - 국가기록원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 훈터 :: 국군 첫 파월부대, 비둘기 ...
주월 한국 비둘기부대가 만든 大韓橋(대한교)에서 필자
내가 참전한 월남전의 한국군
http://www.youtube.com/watch?v=878Xi23Ko8U&feature=related
베트남戰 실제영상 공개... 참혹함 그 자체...
http://www.youtube.com/watch?v=SQp5MBXkZXg
그래서 우리나라의 파병에 대한 역사를 잠시 회고 해본다.
우리나라 史書(사서)에 기록하기를 세력이 비대해진 청나라(1616-1911)태조 누루하치와 명나라는 瀋陽(심양) 동남쪽 深河(심하)에서 存亡의 대 결전을 치르고자 대군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①이때 명나라는 우리 조정에다가 援兵(원병)을 요구하였고,임진왜란의은공도 갚을겸해서 해외파병을 하게된다. 參判(참판) 姜 弘立(강 홍립)을 都元帥(도원수)로 하여 병력 2만명을 거느리고 이 深河(심하)의 결전에 참전 했다.
史書(사서)에 보면 작전이 개시되자 진한 모래 바람이 적측에서 불어닥쳐 한치 앞도 분간 못하였다고 했으며 조선군 三營(삼영) 가운데 주력인 中營(중영)을 맡고 있던 都元帥(도원수) 姜弘立(강 홍립)이 적에게 투항하고, 오로지 左營(좌영)을 지휘하던 宣川(선천) 郡守(군수) 金 應河(김 응하)장군만이 壯烈(장렬)하게 戰死(전사)하고 말았다.
부산 제 3부두에 파월 장병들을 수송하였던 LST, 합대 앞에 세워진 “자유의 십자군” 懸垂塔(현수탑) 아래에선 筆者(필자)
한 버드나무 밑둥을 방패삼아 끝까지 싸우다가 더불어 전사한 永柔(영유) 縣監(현감) 李 有吉(이 유길)을 찢어 ⟦五月五日死⟧ 다섯자를 써 자신의 말 갈기에 매었더니, 이 말이 坡州(파주)에 있는 이 유길(李 有吉)의 집에 찾아와서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글씨로 무덤아래 이 忠馬(충마)도 더불어 묻어 주었으며, 그 무덤이 파주 광탄에 말 무덤이란 지명으로 남아있다.
①첫 해외 파병은 忠將(충장), 한 사람과 충마(忠馬) 한 마리 탄생시키는 悲劇(비극)으로 끝나고 있다.
참고자료 : 당시 만주 지방에 살던 유목 민족인 만주족은 여진족이라 불리는 종족으로 이웃 국가인 명나라나 조선에서는 오랑캐라 천대받으며 무시받던 종족이었고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만주족은 16세기 말 명나라의 쇠퇴를 틈타 성장하게 된다. 1588년 여진족 지도자 누르하치가 건주 여진을 통일하고 명나라는 1590년 여진족을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뒤이어 1592년 임진왜란 3차에 걸쳐 22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무리하게 파병하는 바람에 국고가 바닥났다. 또 당시 명나라 황제였던 만력제는 매우 부패한 황제였다.
명나라 황제로부터 벼슬을 하사 받은 金應河김응하
1580선조13년-1619광해군11년 자는 景義경의 시호는 忠武 본관은 安東 領議政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고려의 명장 方慶의 후손으로 14살에 부모를 여의고도, 그의 아우 應海응해와 友愛가 지극하여 향리에서 친찬이 자자하였다고 전한다. 김응하는 키가 8척이요 외모가 휜칠하며 體軀체구가 거대한 것과 같이 술 한말을 마시고도 조금도 취하는 기색이 없을 정도라고 전한다.
25세때에 무과에 급제하니 병조판서 박승종에게 선발되어 선전관이 되었고, 뒤에 박승종이 호남지방 관찰사로 갈 때 裨將(비장)으로 따라가 근엄하게 행하였다고 전한다. 李恒福(이항복)이 김응하를 한번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서열을 건너 뛰어 선천군수(宣川郡守)를 시켰다고 한다.
무전통신병으로 주특기를 바꾸어 병마 29진으로 지원한 양 방수의 그때 그 시절 그 모습
부임하자 한사람 한사람에게 일을 맡겼는데 그 사람에게 꼭 맞는 직책을 주니, 모두가 자기 일을 잘해 내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김응하의 명령이라면 죽음을 무릅쓰고 행하니 선천군(宣川郡)은 하루 아침에 부유한 고을이 되었다고 한다. 이 때에 만주의 여진족이 後金후금을 세우고 명나라의 동북지방을 위협하자 명나라에서는 우리 조정에 원군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姜弘立강홍립을 都元帥도원수로 하여 3만여명의 후금 징벌군을 보내게 되었는데 이 때 김응하는 左營將좌영장으로 삼아 출전 시켰다. 우리나라에서는 명나라를 도우려고 군대를 파견하기는 하였으나 처음부터 이 싸움에는 승산이 없었다고 한다.
이 당시 후금이 떠오르는 해와 같다면 명나라는 임진왜란으로 국고의 지출이 많아 나라 형편이 매우 어려웠고, 게다가 나라 안 여러곳에서 내란이 일어나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이때까지 여러 차례 후금과 충돌을 했으나 번번히 실패만 거듭하고 있던 중이였다.
光海君(광해군)은 누구 보다도 동아시아의 급변하는 정세를 잘알고 있었다. 그러나 明의 구원병 요청을 거절하자니 지난날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 되고, 후금과 대결하자니 國家가 위태하게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지경에 처해 고민하고 있었다. 마침내 결단을 내린 광해군은 일단 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군사를 출발시키기 전에 도원수 姜弘立(강홍립)을 비밀리에 불러 사태를 보아 우리군대의 희생이 없도록 잘 조처하라는 밀령을 내렸다.
우리 조정에서 생각했던 데로 명나라 군사가 대패하자 姜弘立은 항복하고, 김응하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다가 힘이 다하자 나무에 기댄체 전사하고 말았다. 명나라 황제는 김응하의 장렬한 전사 소식을 듣고 遼東伯요동백이라는 벼슬을 추증하고 처자에게 白金(백금)을 내려 주었으며, 조정에서도 領議政(영의정)을 추증하였다는 교훈이 될만한 역사이기에 적어 남긴다.
많은 이야기 꺼리를 남기고 간 光海君(광해군)은 父王(부왕)인 宣祖(선조)의 繼妃(계비) 仁穆大妃(인목대비)를 幽閉(유폐)하여 人倫(인륜)에 어긋나는 죄를 지었다. 그리고 친형인 임해군을 죽인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어 영창대군을 죽이는 씻을수 없는 잘못을 저질러 마침내 仁祖反正(인조반정)의 명분을 세워 주었고, 왕위에서 쫓겨난 불행한 임금이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임진왜란이란 국난을 딛고 내치와 외교에 뛰어난 공적을 세우기도 했다.
戰亂(전란)후 페허가 된 仁慶宮(인경궁), 慶德宮(경덕궁)등 많은 宮闕(궁궐)을 재건했고, 난리에 불탄 역대의 실록과 新東國輿地勝覽(신동국여지승람)을 다시 펴냈고, 동양 한의서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東醫寶鑑(동의보감)등 서적을 편찬하는등 외교에서도 능한 재주꾼이라는 임금이였지만 인조반정으로 쫓겨나고 仁祖(인조)가 즉위하자 왜교정책이 친명 배금주의로 바뀌였다. 그래서 여진족의 친입은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인조가 즉위한 뒤 불과 14년동안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란 두 차례의 씻을수 없는 나라의 수치를 당한 것이다.
②두 번째 해외 파병은 1654년 孝宗 5년 러시아군이 흑룡강(黑龍江) 하류에 진출하자 청나라에서 출병을 요청하므로써 이루어지고 있다. 함경도 병마사인 변급(邊岌)을 파병 부대장으로 삼아 명포수 152명으로 정예 부대를 만들어 派兵(파병)하고 있다. 이 조선 부대는 러시아의 대선 13척, 소선 26척, 병력 400명과 맞싸워 많은 살상자를 내고 격퇴시키고 있다.
1654년(효종5) 2월 초에 청나라는 사신 韓巨源(한거원)을 보내 원병을 청하여 영의정 鄭太和(정태화)의 건의에 따라 함경도 兵馬虞候(병마우후) 邊岌(변급)으로 하여금 원병을 인솔하게 하였다. 1854년은 갑오년, 順治(순치11년)이다. 이때 청나라 러시아 정벌(征伐)에 우리나라 조총병(鳥銃兵)을 징발하여 3월 兵馬虞候(병마우후) 변급(邊岌)은 寧告塔(지금의 길림성(吉林城)으로 출전한다.
이것이 제 1차 징벌로써 邊岌(변급)은 잘 훈련된 150여명을 거느리고, 동년 3월 26일에 장도에 올라 두만강을 건너 寧古塔[영고탑=吉林(길림)]에서 청군과 합류하여 厚通江[(후통강=混同江(혼동강)]에 이르러 러시아군을 만나 이를 추격하여 好通(호통)에서 크게 무찌른 후 5월 6일 土城(토성)을 쌓고, 7월에 돌아 왔다. 제 2차는 1658년(효종9) 3월에 청나라 요청에 따라 조총군의 정예 200명을 선발하여, 兵馬虞候(병마우후) 申瀏(신유)를 隊長(대장)으로 삼아 청나라 군사와 정벌에 나서서 6월 10일 黑龍江(흑룡강)을 가운데 두고, 격전을 벌여, 적의 배 10척을 불에 태우니, 겨우 한척만 남아 도망쳤다. 승리를 거둔 申瀏(신유)는 松花江(송화강)에 철수했다가 조정의 명으로 돌아왔다.
이 2차에 걸친 러시아 정벌은 1636년(인조14)병자호란 후 마음속 깊이 간직했던 효종의 北伐(북벌) 계획을 간접적으로 실현했던 결과로서 이 때 비록 적은 수의 군사를 보냈으나, 큰 전과를 올리게 된 것은 당시의 사격술과 전술이 우수했음을 보여 준그 후 러시아와 별 다른 관계는 없었다.[효종실록]에서 발췌
邊岌(변급)은 이조 효종때의 무관 으로 1654년 효종 5년 함경도 兵馬虞候(병마우후)로 있으면서 왕명을 받들어 鳥銃軍(조총군)의 징병 100여명을 인솔하고, 청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러시아 군을 黑龍江(흑룡강)에서 크게 무찔러 우리나라의 국위를 중국당에 떨치고 개선했다. 그 이듬에 임금이 石峴(석현)에서 禁軍(금군)의 군사를 검열할때에 다른 장군 보다도 진세가 우수하고, 정돈 되었으므로, 임금으로부터 활과 화살을 상으로 받았다. 그후 1656년 전라도 水使(수사)가 되고, 1960년 顯宗(현종) 즉위초에 충홍도 水使(수사)로 전임되었다.羅禪征伐(나선정벌)
참고: 邊岌(변급)은 조선 효종 때 나선정벌(羅禪征伐, 러시아 정벌)에 참여했던 무관으로 1654년(효종 5) 함경도 병마우후로 있다가 청나라 군사를 도와 나선정벌에 출전하였다.
당시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맞아 청·러 간에는 여러 차례의 충돌이 있었는데 러시아군과의 대결에서 순구식의 청군만으로는 승산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청나라 태종은 효종에게 총수대(銃手隊)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이후로 조총을 사용하는 부대를 양성하여왔는데, 북벌의 기회를 노리던 효종에게는 청군의 허실을 알아볼 수도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출병을 허락하였다.
邊岌(변급)은 총군 100여명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영고탑(寧古塔)에서 청군과 합류, 흑룡강에 이르러 러시아군을 맞아 큰 전과를 올리고 개선하였다.나선정벌에서 혁혁한 공을 인정받아 1656년 전라도수군절도사가 되고 현종이 즉위하자 충홍도수군절도사에 올랐다.
단기 서기 청나라 李朝(이조) 干支(간지)
3987 1654 永明8 孝宗(효종5) 甲午(갑오) - 順治(순치)11년. 2월 청나라 러시아 정벌에 우리나라 鳥銃兵(조총병)을 徵發(징발) 3월 兵馬虞候(병마우후) 邊岌(변급)은 鳥銃兵(조총병)을 거느리고, 寧古塔(영고탑) 지금의 吉林(길림)으로 出征(출정)하다. 羅禪征伐(나선정벌) - 이조 효종때 청나라를 도와 러시아를 친 싸움. 나선(羅禪)은 러시아의 音譯(음역), 러시아는 17세기에 이르러 청나라땅인 黑龍江(흑룡강) 유역 일대를 자주 침범하니, 1650년 군사를 동원하여, 알바진성(雅克蕯城(아극륭성)을 쌓고, 남침을 꾀하자, 청나라와 충돌이 잦았다.
1654년(효종5) 2월 초에 청나라는 사신 韓巨源(한거원)을 보내 원병을 청하여 영의정 鄭太和(정태화)의 건의에 따라 함경도 兵馬虞候(병마우후) 邊岌(변급)으로 하여금 원병을 인솔하게 하였다. 이것이 제 1차 징벌로써 邊岌(변급)은 잘 훈련된 150여명을 거느리고, 동년 3월 26일에 장도에 올라 두만강을 건너 寧古塔[영고탑=吉林(길림)]에서 청군과 합류하여 厚通江[(후통강=混同江(혼동강)]에 이르러 러시아군을 만나 이를 추격하여 好通(호통)에서 크게 무찌른 후 5월 6일 土城(토성)을 쌓고, 7월에 돌아 왔다.
제 2차는 1658년(효종9) 3월에 청나라 요청에 따라 조총군의 정예 200명을 선발하여, 兵馬虞候(병마우후) 申瀏(신유)를 隊長(대장)으로 삼아 청나라 군사와 정벌에 나서서 6월 10일 黑龍江(흑룡강)을 가운데 두고, 격전을 벌여, 적의 배 10척을 불에 태우니, 겨우 한척만 남아 도망쳤다. 승리를 거둔 申瀏(신유)는 松花江(송화강)에 철수했다가 조정의 명으로 돌아왔다. 이 2차에 걸친 러시아 정벌은 1636년(인조14)병자호란 후 마음속 깊이 간직했던 효종의 北伐(북벌) 계획을 간접적으로 실현했던 결과로서 이 때 비록 적은 수의 군사를 보냈으나, 큰 전과를 올리게 된 것은 당시의 사격술과 전술이 우수했음을 보여 준그 후 러시아와 별 다른 관계는 없었다.[효종실록]에서 발췌
邊岌(변급:이조 효종때의 무관)은 1654년 효종 5년 함경도 兵馬虞候(병마우후)로 있으면서 왕명을 받들어 鳥銃軍(조총군)의 징병 100여명을 인솔하고, 청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러시아 군을 黑龍江(흑룡강)에서 크게 무찔러 우리나라의 국위를 중국당에 떨치고 개선했다. 그 이듬에 임금이 石峴(석현)에서 禁軍(금군)의 군사를 검열할때에 다른 장군 보다도 진세가 우수하고, 정돈 되었으므로, 임금으로부터 활과 화살을 상으로 받았다. 그후 1656년 전라도 水使(수사)가 되고, 1960년 顯宗(현종) 즉위초에 충홍도 水使(수사)로 전임되었다. 羅禪征伐(나선정벌)
③그 4년 후인 역시 함경도 兵馬使(병마사)인 신류(申瀏)를 부대장으로 한 265명의 명사수들을 흑룡강에서 러시아 함대 11척 병력 500명을 맞아 대첩을 거두었다는 통쾌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전투의 러시아 기록을 보면 [대장 스테파노프와 코자크병 270명이 전사하고, 황제에게 바칠 담비 가죽 3천 80장, 대포 6문, 화약, 군기. 식량을 실은 배들이 대파되었으며, 겨우 그리스도 성상(聖像)을 실은 배 한척만이 95명의 병사를 태우고 탈출했을 따름이다.] 신류(申瀏) 장군의 북정일기(北征日記)의 같은 날 기록도 러시아 측 기록과 거의 맞먹고 있다. 잦았던 러시아의 남하는 조선의 해외파병군과 청군의 연합군에 의해 저지되었음을 알수가 있다.
④이어 4차 파병이 45년전 30만에 이르는 월남 파병이다.[베트남 전쟁(越南戰爭)은 1955년 11월 1일에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시작된 전쟁이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공산군에 의해 함락됨으로써 종전되었다.]
참고자료 아래
백마부대 1진 월남전 출정
파월군가 - 달려라 백마
백마 29진은 야밤에 승선하였는데 장병 한명이 기록에도 없는 병사가 승선하여 월남에 도착하여 말이 많았었다.
파월 장병들이 질서정연하게 LST함대에 승선할때의 광경이다
아래는 백마부대가 크릭 하세요
http://www.youtube.com/watch?v=uxsRvdp75lk
아래는 맹호부대가 크릭 하세요
http://www.youtube.com/watch?v=878Xi23Ko8U&feature=related
아래는 월남전 싸이트 크릭 하세요
http://www.vietvet.co.kr/main.htm
⑤5차가 걸프전때의 의료부대의 파병이며(걸프 전쟁 :1990년 8월 2일 - 1991년 2월 28일, 문화어: 페르샤만 전쟁)은 사담 후세인이 통치하던 이라크가 쿠웨이트는 과거 이라크의 영토였다며 침략하자, 미국, 영국, 프랑스, 사우디아라비아, 소련 등 30여개 나라가 국제 연합의 결의와 미국의 주도 하에 다국적군을 결성해 쿠웨이트를 지원함으로써 벌어진 전쟁이다.)
⑥6번째의 해외 파병은 몇 년전 PKO공병부대의 소말리아 파병이 되는 셈이다.
▶아프리카 동쪽 소말리아 앞바다는 홍해와 인도양을 잇는 원유 수송루트로, 소말리아가 내전에 시달리면서 해적 소굴이 돼버렸다. 1000명 넘는 해적들이 출몰하며 각국 선박을 납치해 작년에만 인질 몸값으로 3000만 달러를 벌었다고 한다. 이 돈으로 쾌속정을 사들이고 위성전화, 위성추적장비에 기관총, 대전차로켓포까지 갖췄다. 올해에도 납치한 선박이 30척을 넘어섰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2006년 한국인 선원 8명이 탄 동원호가 납치돼 117일 만에 풀려났었다. 작년 5월과 10월에도 우리 선원들이 탄 선박이 납치됐다. 작년엔 북한 화물선이 총격전까지 벌인 끝에 탈출하기도 했다. 보다 못한 프랑스·캐나다·말레이시아는 군함을 보내 이 해역을 지나는 자기 나라 선박을 호위하고 있다. 프랑스 GIGN은 지난 15일에도 요트 항해 중 납치된 프랑스인 부부를 작전 개시 10여 분 만에 구출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국군의 월남 파병 1964-1973년
미국은 월남전에 깊이 개입하면서 많은 병력이 소요되자 월남에 자유세계 군사 원조단(Free World Military Assistance Force)을 창설하는 한편, 한국을 포함한 자유우방 25개국에 대하여 월남정부 지원을 요청하였다.
미국으로부터 월남파병 요청을 받은 우리 정부는 국가안보에 대한 보다 확고한 미국의 보장과 국군의 월남파병을 조건으로 그 동안 감소되었던 대한 군사원조의 증액 및 군사원조 이관의 중지를 요구하였다. 국방부는 1964년 5월 21일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심의와 국회의 동의를 거쳐 아시아의 평화와 자유수호 및 자유 월남에 대한 공산침략의 저지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자유우방국들이 우리를 도와 준 데 대해 보답한다는 목적을 갖고 국군의 월남 파병을 결정하였다.
제1차 파월부대는 1964년 9월 11일 우리 해군 LST편으로 출국하여 동월 22일 월남 사이공 동쪽 붕타우(Vung Tau)에 도착하였고, 그중 제1이동외과병원은 월남 육군정양원에서, 태권도 교관단은 월남 육군보병학교, 육군사관학교, 해군사관학교에 각각 분산 배치되어 임무를 개시하였다. 제1차 파병국은 월맹을 협상 테이블에 끌어 들이기 위해 가일층 북폭을 강화하는 한편, 지상전에서도 확전을 단행하고 한국 정부에 전투병력의증파를 재요청하였다.
1965년 8월 13일 국회가 전투부대의 월남파병을 동의하자 국방부는 파월부대로 수도사단의 2개 연대, 해병 제2여단, 군수지원사령부 및 주월 한국군 사령부를 편성하였다. 이들 부대 중 수도사단은 10월 26일 월남 중부 퀴논에 상륙하여 1,200㎢에 달하는 전술책임지역을 인수하고, 해병 제2여단은 월남 중부 해안인 캄란에, 주월 한국군 사령부는 사이공에서 1965년 10월 20일 지휘소를 개설하고 작전을 개시하였다.
1964년 12월 18일 미국 정부는 우리 정부에 국군 추가파병을 요청하였으며, 월남 정부도 1965년 1월 2일 국군의 증원을 우리 정부에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1965년 1월 28일 육군 제101경비대대, 제127공병대대, 제801수송 자동차중대 및 해병 제1공병중대로 편성된 주월 한국 군사원조단을 창설하는 한편, 해상수송 업무를 지원하기 위하여 해군 LST 812함과 813함을 파견하였다. 주월 한국군 군사지원단은 1965년 3월 16일 디안(Di An)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기파견된 제1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 교관단을 배속받아 지휘하였다.
제2차 파병
제3차 파병1964~1973
제4차 파병을 요청받은 우리정부는 국가안보의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미측과 긴밀한 협의를 거쳐‘브라운 각서’를 체결하고 월남에 증파될 부대로 제9사단(백마부대)과 수도사단(맹호부대) 보충연대인 제26연대(혜산진부대)를 선발하였으며, 혜산진부대가 1966년 4월 16일 퀴논항에 도착함으로써 맹호부대는 완전 편성된 전투사단이 되고, 백마부대는 마지막 제대가 10월 8일 월남 캄란에 도착함으로써 주월 한국군의 병력은 총 4만 8천여 명에 달했으며, 주월 한국군 사령부는 예하에 야전사령부와 군수지원사령부를 거느린 군단 편제 규모로 증강되었다.
제4차 파병
국방력 강화 촉진 ~ 국군의 월남전 파병을 계기로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으로 미국의 한국방위에 대한 보장이 보다 확고하게 되었으며, 증액된 군사경제 원조액을 바탕으로 방위산업 육성과 군 현대화 계획을 꾸준히 추진하여 국방력 강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국가발전에 기여 월남참전을 계기로 우리 군은 대미 의존으로부터 벗어나 미국의 지지를 받는 동반자적 위치로 지위가 상승되었으며, 월남으로의 노동력 진출은 당시 총 해외취업자의 70%를 차지하여 고용증대 효과뿐만 아니라 이를 통한 기술축적과 경험은 1970년대 중동 진출로 이어져 국가경제,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전투경험의 축적 한국전쟁의 전투경험자가 거의 군을 떠난 시점에서 312,853명이란 많은 인원이 M-16 자동소총, APC 장갑차, 81미리 박격포 신형 무전기 등 57 개 품목에 대한 각종 현대장비의 조작 능력과 함께 풍부한 탄약으로 실전경험을 축적하고, 돌아옴으로써 산악전과 게릴라전에 대한 전투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국위선양 ~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해외에 파병된 주월 한국군은 농경지원, 교량 및 학교건설, 도로건설 등의 대민지원활동을 그들에게 삶의 의욕과 희망을주는 평화의 십자군으로서 국위를 선양하였다.
미군 및 연합군의 월남서의 철수 방침에 따라 주월 한국군은 제1단계로 1971년 12월 4일 해병 제2여단의 철수를 시작으로 제100군수 사령부등 10,000명을 철수시켰다.
또한, 1973년 1월 27일 미국
◆월맹 간의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자 제2단계로 1973년 1월 30일 선발대 125명의 항공편 철수를 시작으로 11개제대로 편성된 본대가 2월 3일부터 3월 14일까지, 후발대 118명이 3월 23일 철수함으로써 병력철수가 완료되었다.
◆장비는 한미 합의에 따라 미군 및 월남군에게 인계하였으며 일부는 본국으로 해상 수송 되었다. 월남 사이공의 주월 한국군사령부 청사(1965. 9. 25) 원안은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중장 채명신
◆현지에서 직접 지시하는 지휘부
1968년 6월 1일 야전사령부가 월남 나트랑시에서 창설되었다.
한국군 최초의 파월부대 제1이동외과병원 환송식
◆한월 합동태권도 시범단의 사이공 시내 각 학교에서의 순회시범(1965. 3. 16)
◆대민 진료광경1964~1973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비둘기부대 출국 환송식(1965. 2. 9)
◆비둘기부대가 건설한 대한교(1965. 6. 24)
구정공세로 인하여 폐허가된 사이공시내 페더론스키 지역에서 이재민을 돕기 위해 건립하는 500여 동의 주택 (1968. 1. 29)
◆수중에서 교각을 세우는 공병들1964~1973
비둘기 용사에 의해 준공된 사이공시 환상도로 1965년 9월 20일 창설되어 한국군 전투부대 선봉으로 1965년 10월 3일 부산항을 출항하여 파월의 장도에 오른 청룡부대는 1965년 10월 9일 자유월남의 캄란만에 상륙한 이래 투이호아, 추라이, 호이안 등의 전장을 전전하며 여단급 작전에서 소대급 작전에 이르는 14만여 회의 대소 작전을 전개하여 다대한 전과를 올렸다.
◆월남 캄란만에 상륙한 청룡부대 지휘관들(1965. 10. 9)
◆청룡부대 결단식(1965. 9. 20) 화염방사기로 밀림지 탐색
◆밀림의 진격
◆용감하고 사기충천한 청룡용사들 1964~1973 짜빈동 대첩 노획품(1967. 2. 15)
◆고무보트로 육지를 왕래하면서 무기 인양(용두 1, 2호 작전)
◆태로이 매복전에서 청룡분대 매복조가 적 40여 명을 사살하였다.
◆늪지 탐색작전
◆전함에서 상륙군을 직접 수송하는 헬기(승룡 15호 작전) 베리아 반도 피란민 이송
◆수중 폭파장치
◆박격포 진지
◆작전중인 청룡부대 용사들 1964~1973 139 퀴논에 상륙한 맹호 1연대(1965. 10. 22)
◆보충부대 퀴논상륙(1966. 4. 22)
◆맹호부대의 상륙을 환영하는 퀴논 시민들 (1965. 10. 22) 비호 6호 작전중 밀림소탕
◆헬리콥터로 목표지역 투입(1966. 6. 4) 1964~1973 141 베트콩 마을을 향해 보병을 유도하며 진격하는 맹호 장갑중대 용사들
◆대창과 부비트랩으로 된 함정
◆철조망과 교통호 57미리 무반동총을 어깨에메고(1967. 3. 15)
◆벗이여 평화의 사자되라
◆포사격으로 민둥산이 된 안케-패스 격전지 638고지(1972. 4) 파월 장병의 권익과 처우 개선을?
파월장병의 공로와 희생을 국민에 알리고 처우를 개선하라.1960대후반 우리 국민소득은 100$시대였다.대통령 박정희가 영웅이 된것도 파월 장병들의 목슴과 피와 땀이다.지금까지 국민이 모르고 있는 파월당시 밝혀지지 않은 협정에 의해 박정희 정부가 아마어마한 파월 장병들의 급여와 부상자보상금 사망자 보상금을 착취하여 착복하고 경부고속도로? 여러곳의 공단을 조성하며 원자재? 설비자금을 수입해 국가발전에 초석이 되었다는것을 지금 국가도 인정 않으며 국민도 모르고 있다.
지금 30만의 파월장병 들은 60줄에 있다. 고엽제로 시달리고 헬기 날으는소리만 들어도 전쟁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지금 잘살고 있는 현실의 밑바닥에 누구의 목슴과 피가 있었다는것을 국가는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그리고 알것은 알아야 한다,
당시 한국정부와 미국대사인 브라운씨와의 협약에서(브라운각서)장병 1인당 350$씩받기로 하고 파월했고 우리병에게 지불한급여는 일병40$상병45$병장50$ (당시1$=원화220원) 장병1인당평균45$씩 지불했다兵(병)1人(인) 305$=12개월= 3660$ 거기다 부상자 보상금 사망자 보상금은 얼마를 착취 했는지 모른다. 위 것들를 파월장병 모두가 되돌려 받자는 취지는 아니다. 국가와 국민이 공로를 인정하고 처우개선을 요망할 뿐이다.
지금 이라크 파병들은 고스란이 장병들에게 지급되는것으로 알고 있고 6개월 동안 \1.500만원의 수당을 받는것으로 알고 있다. 정치적으로 정권차원에서 그럴수 있다고 국민들은 이야기 한다. 하지만 주위에서 위와같은 말를 들를때마다 울화통이터져 못살겠다는 파월 정병 용사가 2005년 8월26일에 청와대. 신문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시킨 파월 용사의 하소연에서 다음과 같은 하소연을 들을수가 있다.
어께 쭉지에 관통상을 입었고, 1967년 구정공세때 수발의 총탄을 맞았지만 1푼의 위로금도 없다고 한다. 국가는 파월장병 그들이 죽기 전에 공로를 하루속히 국민에게 알려 인정받고 특히 20.30.40세대들에게 잘먹고 잘사는 원천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바란다는 요지이다.
파월장병, 수당 2억3천만弗 수령 ‘경제개발에 썼다’는 의혹 풀려 베트남戰(전) 문서 2차공개 1960년대 말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대만과 일본 등을 포함하는 지역 방위기구 창설을 추진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국방부는 이 같은 내용들을 포함한 베트남전 관련 외교문서 총 17권 1700여쪽을 2일 공개했다. 여기엔 한·미 및 한·월(越) 간 군사실무 약정서, 파월 국회동의, 파월 장병 해외근무 수당, 한국의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 자료 등이 포함돼 있다.
이날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아국(我國)과 자유아세아의 안전보장 대책시안에 대한 대통령 각하 분부’를 통해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 등 공산세력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지역적 방위기구’ 창설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미측과 교섭할 것을 지시했다. 이문서는 1960년대 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당시 한국 정부는 베트남전 파병을 통해 최대한 군사적, 경제적 실리(實利)를 챙겼으며 이 때문에 미국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중 하나가 한국군 민사보상 책임 문제. 1965~66년 2년간 협상 끝에 파병 한국군 및 군속(軍屬)이 사상 사고를 낸 경우 조사 등 관할권은 한국군이 갖되 보상 책임은 미군이 지도록 합의했다.
총인구 대비 한국군 파병 규모가 미국과 똑같은 수준이었던 것도 흥미롭다. 1966년 10월 총 4만5000여명의 한국군이 파병돼 있었는데 이는 남한 인구 622분의 1 수준. 당시 미군은 31만명이 파병됐는데 이 역시 미 전체 인구 622분의 1 수준이었다.
▲ 베트남전 당시 김성은 국방장관이 파월 장변의 해외 근무 수당을 협의하기 위해 비치 주한 미군사령관에게 보낸 서한일부. 베트남전에 참전한 국군 장병들이 9년 동안(1965~73년) 미국으로부터 받은 해외근무 수당은 모두 2억3556만8400달러였으며, 이 중 82.8%에 달하는 1억9511만800달러가 국내로 송금됐던 것으로 밝혀진 것도 눈길을 끈다.
국방부는 특히 ‘김성은 국방장관과 비치 주한미군사령관 간 서신(1966.3.4)’과 ‘파월장병 처우개선(1969.4.28)’ 등의 문서를 공개, 해외근무수당이 한·미 정부가 합의한 금액대로 파월 장병들에게 정상적으로 지급됐으며 일각에서 제기한 ‘한·미 합의금액보다 현저히 적은 수당 지급’ ‘파병수당의 경제개발 전용’ 등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고 강조했다.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시도사건과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등 북한의 잇단 도발과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 등으로 인한 박정희(朴正熙) 정부의 안보 위기감이 이번 문서들에 잘 드러나 있는 것도 주목할 대목.
1968년 12월 26일자 ‘전후 대월(對越) 국방정책 문서’는 ?
한국방위에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한미 상호방위조약 개정 ?
미국의 지속적인 주둔과 불감축 보장 ?
중공(중국)의 핵공격에 대한 보장 ?
군 자주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한 한국군 증강 및 군원(軍援) 불감축 보장 등 미측에 대한 여러 요구조건을 포함하고 있다.
1960년대 말 대공(對共) 아시아 지역방위기구 창설을 시도할 무렵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메모한 문서.▲
077회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병장(2004.03.28).svi
아래를 크릭 하세요
http://www.youtube.com/watch?v=_GF2uhhnjR4
慶祝!월간조선/5대 포털이 선정한 "한국 100大 개인홈페이지"목록에
vietvet.co.kr 이 선정 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 - 1부.asf
https://www.youtube.com/watch?v=i7IVLqTPM0o
개골 ~개골~ 이글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다. 없는 사실이 아니다~ 개골 ~ 개골 ~
남원양씨 거제문중 병부공파 30세손 양 방 수 제공
(사)미주방송인협회/여의도클럽/USA : 총무국장 : 양 방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