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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래시조 2018년 봄호]
금속성의 단말마가 아닌 목제 소네트 시조의 미학
이제 나는 이 사랑의 토대를 알리러 이 세기를 당신한테 넘긴다.
당신이 생명을 줄 때에만 살아나는 ‘목제(木製) 소네트’를.
-파블로 네루다『100편의 사랑 소네트』의 머리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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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에 날개를 단 ‘나래시조’. 아마존 숲의 나비의 날갯짓이 중국 대륙에 폭풍우를 일으키듯 나래 효과를 겨냥한 바 도전적이다. 그렇듯 반도와 대륙을 거쳐 세계로 날아갈 채비를 한 그 앞에 섰다. 마당은 열렸고, 붉은 장막을 걷는 걸로 청중(독자)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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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평단에선 시인의 공(功)에 대해서 적극적이지만, 작품 비평은 가급적 피해가는 경향이 짙다. 논의의 시간과 지면의 부족을 떠나 평판(評板)이 ‘매부 좋고 누이 좋다’는 상조식(相助式) 체면을 넘지 못한다. 무슨 의도인지, 원로 작품과 마주하면 두루뭉술 그의 세계로 그만 안착해 버린다. 작품을 재단하는 일 보다 경력 소개 같은 마무리를 하는 수도 다반사다. 자기도 선생의 발표 작품을 읽었다는 눈도장 찍기 같은 평을 하기도 한다. 평필이 치우쳐 짐을 잘못 지고 가도 그대로 두는 게 평판의 능사는 아니다. 문단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곳곳은 ‘대충’과 ‘체면’이란 처세가 본질을 압도하며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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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있다. 시조 세미나 같은 데서 듣기 싫은 게 하이쿠에 관한 일변도의 칭찬이다. 일본의 하이쿠는 ‘어떤 데’라는 상좌를 운위하며, 천년 역사를 거쳤다는 ‘시조’에의 위상 제고를 서두르자는 중압감으로 우리 어깨를 무겁게 할 때다. 자괴감이 인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앞뒤 논리의 서정도 없이 다짜고짜 몇 단어 불쑥 내미는 무사적(武士的) 언어라 할 하이쿠를 본떠 그 보급책을 따르자는 건 우리 정서에 반할 뿐만 아니라 논리도 맞지 않다. 심지어 하이쿠를 본떠 짓는 모종의 ‘시조’투도 버젓이 장르 행세를 한다. 시조의 정서와 사유체계는 초·중·종장 6구의 자연과 인간에 대한 정서적 절차를 중시하는 음보임을 잊어버린 데서 오는, 예컨대 상대적(하이쿠적) 초조감이 아닐까 짚어보기도 한다. 선비 격의 논리성 시조와 거두절미한 무사격(武士格)의 하이쿠는 태생부터 다르고 보급책 또한 같을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그 부분은 간단하지만 이미지가 유연한 소네트나 자연 사고 중시의 한시 전개와 닮았다고 본다면 혹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조는 고대가요, 향가, 고려가요, 가사, 옛시조 등을 거쳐 고유 맥락으로 발전되고 진화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시조의 세계화 보급에도 우선 내공 역량과 번역과 연구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그런 징후를 나는 뒤늦게 파블로 네루다(P. Neruda, 1904~1973)의 소네트를 읽으며 무릎을 치게 되었다. 서문엔 이런 글귀가 있다.
나는 소네트라는 것이 고상한 식별력을 지닌 모든 시대 시인들이 은이나 크리스털 또는 대포소리가 나도록 운을 맞춘 것이라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겸손하게도 이 소네트들이 나무에서 만들어냈음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이 당신 귀에 닿도록 했다. 숲속이나 해변, 숨겨진 호수 지대를 걸으며, 당신과 나는 나무껍질을 주웠고, 물의 흐름이나 기후에 따라 나무토막들을 주웠다. 나는 이 사랑의 토대를 알리고자 이 세기를 당신한테 넘긴다. 당신이 생명을 줄 때에만 살아나는 목제(木製) 소네트를.
파블로 네루다의 『100편의 사랑 소네트』의 머리말을 요약했다. 물론 현저히 다르지만 시조는 바로 자연 동화적(同化的) ‘목제 소네트’로 비유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무사들이 쓰는 칼의 하이쿠로 비견될 시조는 아무래도 아니다. 시조는 생태를 표방하는 목제이거나 나무의 생명 자체이다. 네루다가 말하는 소네트도, 순간적 일발의 무기로 공격하는 금속제(金屬製) 노래(예, 하이쿠)가 아니다. 당신이 생명을 줄 때에만 살아나는 유연한 목제(木製)의 노래가 예컨대 시조이다. 그런데 조건을 건다. ‘당신이 생명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 때’라는 전제를. 시조도 누천년 동안 자연과 목제의 노래로 번성되고, 시인들 스스로가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후대에 전달되도록 역필했다. 그래, 선조들은 숲속이나 호숫가에서 나무토막과 껍질을 주워 시의 움막과 정자를 짓고, 가난 속에서도 여유로운 음률로 파동을 돋우기 위해 먹을 갈고 붓을 쥐었다. 하므로, 시조 운율과 음보는 곧 살아있는 나무의 떨림, 생명의 맥박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의 정서와 흡사한 그의 소네트를 읽는 겨울밤은 내내 은은한 전율로 춥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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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가락을 반추한 ‘목제 소네트’의 시선으로 《나래시조》 2017년 겨울호에 실린 작품들을 눈여겨보는 건 즐거웠다. 즐거웠다는 건 읽히는 작품이 꽤 여러 줌 된다는 뜻이다. 아시겠지만, 시인이 모처럼 꼬까옷을 입혀 시조단에 인사시키는 아이들(작품)을 보고 ‘잘 입혔나’ 하며 갑론을박 평설을 한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 모독이 될 수도 있다. 사람에게 ‘인격권’이 있듯 시인이 생산해 낸 작품에도 ‘작품권(作品權)’이란 게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랜 동안 평단에서 일해 오면서 작품도 하나의 존엄한 객체라는 사실을 잊을 때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단이란 옥석과 잡석을 가려내어 평판의 저울대 위에 올려놓는 일 자체를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결국 작품에 근종을 달고 가격을 매긴 다음 독자에게 안내하는 일은 곧 형평의 저울대를 의식하는 일이다. 비평 논리보다는 인간 정서가 앞서는 ‘주례사평’을 지양하고자 하면서도 결국은 스스로가 끌림을 당하고 마는 경험을 여러 번 겪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선 누구나 인정 논리를 피하기는 어렵다. 결국 이 계간 평단도 사람의 세상에서만 존재하며, 나아가 시조시인이라는 동도(同道)를 걷는 엽관주의(獵官主義, spoil system)적 배경에 또 갇히게 된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가능한 한 객관적인 안목으로 분석함으로서 독자가 유추적으로 평가하도록 드잡이하련다.
그렇다. 본 마당이 열렸다. 털고 털어 다음 여섯 편을, 요령(妖靈)을 흔들던 무당이 새파란 총각 앞에서 힘주어 들고 있는 심지를 뽑듯 자랑스럽게 ‘옥(玉)’이라고 쥐었다. 하면, 이제 굿을 할 차례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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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의지의 산물’(poetry of the will)임을 주장하고 실천한 사람들은 놀랍게도 초현실주의자들이다. 흔히 이들을 자동기술법으로 난해 시를 생산한다고만 알고 있는데 오해이다. 미국의 신비평가 앨런 테이트(Allen Tate, 1899~1979)는 ‘실천적 의지를 시의 원동력’으로 삼은 데서 그의 의지론을 피력한다. 의지는 숨지만 미학은 외부 갈채를 받는다. 의지가 곧 미학임을 표출한 시가 더 있다. 멀리는 이육사의 「절정」, 유치환의 「바위」, 그리고 가깝게는 이영광의 「빙폭 1,2,3」 등이다. 상징한 바를 넓게 읽는다면 창작하는 자세를 표현한 이른바 ‘메타시(metapoetry)’나 ‘메타시조’ 같은 것(예, 권갑하 「나의 시」, 손영자·김소해 「나의 시작」, 전연희 「시를 쓰다」, 박기섭 「서녘의 책」, 백윤석 「문장부호, 느루 찍다 2」 등)일 수도 있겠다.
허옇게 피를 쏟는 날들이 길어졌다
차디찬 속울음은 갈수록 깊어지고
덧쌓인 눈물기둥만 목 가득 차올랐다
푸른 탄성 안고 내리꽂히기만 하던
수직 벼랑에 핀 꽃 같은 시절이여
바일을 찍으면 쩡쩡 산도 따라 운다
순간 얼어붙어버린 정신의 일획인양
또 하루 가야할 길을 허공에 걸어놓고
자꾸만 흘러내리는 나를 곧추 세운다
- 권갑하 「빙폭을 오르며」 전문
보기에 사람의 의지가 굳다는 건 “수직 벼랑에 핀 꽃”처럼 아름답게 비친다. 그러나 당사자는 순간 사력을 다한다. 피겨스케이트의 춤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빙판 무대에 선 사람은 그간 수없는 고초와 피멍으로 이루어낸 결과이다. 화자는 이면에서 “차디찬 속울음”과 “눈물 기둥”을 맞아야 한다. 뜻을 이루기 위해 수없는 “바일을 찍”어대며 “허공에 걸어놓”은 단애(斷崖)를 오른다. 화자가 기획하듯 종내 오르고야 말리라는 엔터테인먼트로써 의지가 가차 없이 빛난다. 그간 “허옇게 피를 쏟는 날들”을 “길”게도 보냈지만 웬걸 끝은 없으렷다. 알피니스트들이 즐겨 쓰듯 ‘도전만이 존재케 한다’는 완력도 있다. 셋째 수 종장 “흘러내리는 나”를 자촉(刺促)하는 화자는 더 치열해진다. 삶이란 “빙폭”을 찍고 가는 날카로운 전각(篆刻)과 같은 것. 그러므로 이 작품은 긴장되는, 아니 긴장을 주문하는 ‘얼음시학’일 듯도 싶다. 하나의 메타시법으로도 읽혀져 치열한 시 정신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로 끝을 낼까
이젠 무대 그만 설까
노래를 부르지만
인기 없는 무명가수
아니다
잠들지 않는
음악은 빛 뿜는 것
외딴 집 닮은 동네
리듬 없던 골목 어귀
유명악단 리모델링
무대를 꾸미더니
환하게
노래를 한다
낮과 밤이 따로 없다
-변현상 「24시 편의점」 전문
90년대 후반 무렵 우리 사회는 편의점 시대였다. 이후 도시 도로변, 골목, 루핑 판자집촌 등 가릴 곳 없이 있을만한 곳은 대개 편의점이 들어섰다. 처음 도입될 땐 장사가 꽤 되었지만, 이젠 달동네에까지 침투한 대형마트의 등쌀에 밀려나 손님이 뜸하다. 더구나 최근 뉴스에서 보도되듯이 ‘편의점 강도’라는 신조어처럼 범죄자들의 밥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작품에서 편의점은 “무명가수”로 대체된다. 그의 노래를 들어줄 손님이 없기에 “이대로 끝을 낼까” 또는 “이젠 무대”에 “그만 설까”를 고민한다. 아직 “잠들지 않”고 있다는 듯이 “음악”이라도 “뿜는” 어색한 시늉을 다 해 본다. 이 작품은 “인기 없는 무명가수”(편의점)가 “무대”를 다시 꾸며 눈물겨운 “노래”(24시)를 하는 것에 관계적 비유를 설정한다. 역설적이게도 “편의점”을 닫고 싶지만 “24시”라는 간판 때문에 묶여버린 현실이지 않는가. 불경기의 형상화를, 겉(간판)으로는 “24시”와 “편의점”의 친밀한 사이이지만 사실(내부)상의 불협화를 인출해 낸다. 시조를 읽고 눈을 다시 감았다 떠 보자. 결국 이 작품에는 사회체제와 규정은 밀착되게는 보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인간적 정서와 배려는 괴리된다는 현상을 읽을 수 있겠다.
시조를 읽는 재미는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대목에 있다. 종장의 비약과 건너뜀에서 감동의 손뼉은 맞추어 울게 된다. 힘을 겨루다가 마지막 ‘안다리 걸기’나 ‘뒤집기’의 순발력을 구사하므로 시조의 종장은 어쩜 씨름판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작품이 그런 사례로 본다.
음주단속 교통경찰 완장 차고 닦달하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채찍처럼 휘두르는
뭐든지 더 갖고 싶어 버릇처럼 되뇌는 말
-손증호 「더, 더, 더」 전문
음주단속 현장이 리얼하게 묘사된다. 특히 종장 일상적 욕심의 변환 코드가 익숙하지만 새롭게도 읽힌다. 초장과 중장을 거친 종장의 맥락이 떨어져 더욱 시조다운 맛도 있다. 초·중장에서 “닦달하는”, “휘두르는”의 어미가 기다리는 지점은 “더, 더, 더”라는 종착으로 유도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을 제목으로 둔갑시킬 만큼 여유롭기까지 하다. 관형어적 패턴이 초·중장에 나란히 놓였다. 헌데, 그 순간에 하필 교통경찰은 “더, 더, 더”라고, 화자가 어린 시절부터 “뭐든지 더 갖고 싶어 버릇처럼 되뇌는” 욕심의 그 “말”을 흉내낸다. 그래, 좋다. 경찰 앞에 걸리든 말든 잠재된 “더, 더, 더”를 행하고 만다. 이를 화자가 시조에다 옮겨 놓기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진술은 아니다. 이는 ‘목제의 눈’으로 시조를 빚는, 이른바 데리다(J. Derrida,1930~2004)가 말한 ‘차연성(差延性)’이란 게 그걸 가능케 한다. 일상과 시조의 병행점 찾기의 시법이기도 하다. 시조가 생활에서 떠나지 않고 읽히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면 바로 이런 경우일 터이다.
이력서 쓰는 손 주눅들어 달달 떨고
기죽은 어깨 너머로 마누라 달달 복고
다달이 독촉 고지서 속절없이 쌓이고
아무리 달달 외워도 번번이 낭패하고
폐지 실은 손수레 달달대며 숨이 찬데
때마다 달달한 입맛 죽순처럼 번지다
-김선호 「달달」 전문
원래 ‘언어적 유희’(linguistic fun)는 현대시에서 독자가 견디는 긴장감에서 무장해제할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젠 대부분 문학작품에 즐겨 다루는 보편적인 기법이 됐다. 한 예로 최근 5년간 신춘문예 응모작품과 당선작들을 분석해 보니 해마다 이 ‘펀(fun)’을 적용하는 예가 대략 80%의 작품에 등장, 증가하는 추세이다. 시, 시조, 동시에서는 물론이고 소설과 희곡 등의 대사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표어나 광고 문안엔 이미 고전이 됐고, 가요가사, 공공단체나 정부기관에서도 내는 공익성 광고에도 빠짐이 없을 정도이다. 2018년도엔 이른바 점잔빼는 평론이란 장르에서도 등장했다. 비평이란 원래 객관적 논증 같은 게 무기겠으나 상징과 은유의 ‘펀’, 심지어 비평문의 제목부터 그것을 닮는 글투를 작정하고 드러낸 일도 있다. 전엔 비어나 은어로 금기시했던 말들이 이젠 벽을 허문지 꽤 됐다. 각론하고 ‘언어적 펀’은 이제 유행이 아닌 하나의 언어문화로 자리했음이 분명하다.
「달달」은 언어적 펀을 쉽게 들었지만 그것을 장면에 시의적절 사용함으로써 단숨에 읽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달달” 떠는 주체가 [손-가장-집-시험-손수레-입맛]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달달” 떨게 하는 객체는 [실업자-마누라-공과금-낭패-폐지 줍는 노인-끼니]로 연몌된다. 주체와 객체는 보완적이지만 상대적이기도 하다. 시조는 2수이지만 연 가름을 하지 않은 걸로 봐서 2수의 끝 종장에 힘을 둔듯하다. 이 ‘펀’과 관련하여 차후 ‘랩’이나 ‘랙’의 기법, 나아가 ‘게임’ 기법으로 시조를 써도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음각의 얼굴들을 손끝에 새겨요
나는 한 번도 내 얼굴 본 적 없지만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도
말하는 법을 알아요
-김보람 「새김눈」 전문
시조는 순간에 오른 이미지의 포착으로 자형화(字型化)된다. 뷰파인더 안으로 들어온 대상이 일치되었다고 보는 시간, 인화를 목전에 둔 셔터가 그린 인상이다. 그러니까 시조 자형이란 피사체가 아니고 찍힌 모형이다. 시인은 자형화를 통해 시조에 다가가는 게 아니라 음각의 얼굴로 손끝에 만져지는 의미를 포착한다. 결국 작품이 탄생될 시점, 그러니까 시조의 동인(動因)이 (1)빚어지는가, (2)만들어지는가, (3)찾아오는가에 대한 관건이다. 나는 오랫동안 많은 시조 작품을 읽어왔다. 그렇다 보니 나름 구별하는 법도 생겼다. 그런 규칙대로 보자면 이 작품은 (3)의 경우이다. 시각장애의 아이가 손으로 돋을 새김한 글자를 촉지해 가는 장면은 누구나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글자 대신 “새김눈”으로 말하는 장면을 반추하는 일은 비약하기, 즉 상식을 뒤집는 가역적 기법이다. 음각의 얼굴들을 손끝에 새기는(알아가는) 것은, 음각된 글자들을 손으로 짚어 알아가는 것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의 눈은 그래서 필요하고 동기는 그럴 때 요긴하다.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도 말하는 법”을 알게 되는 데에 이른 “새김눈”은 이 시인만의 특허이다. 이의 이치를 거론하자면, 책상에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는 사람을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책상의 입장에서 보면 같잖은 일이지 않는가. 그 사람의 노력은 불공평하다. 책상에게는 쉬는 시간도 주지 않고 자기를 팔꿈치 힘으로 짓누르는 잔인한 행동을 하는 자일 뿐이다. 책상도 존엄한 존재권을 지닌 생명체이다. 책상의 입장에서, 인간의 잔인한 이기주의를 추출하는 시학, 이런 눈이 바로 시의 눈이자 자연물에 생명력을 복원해 주는 ‘목제의 시조시학’일 터이다.
천둥소리 듣고서야 비가 옴을 깨닫는다
창가에 서기 전엔 비 오는 줄 모르듯이 이웃이 이웃인지 모르고 살아간다. 옆집에 들어오는 이삿짐 보고서야 그간 비어있음을 알게 되는 휴일 오후 새로 온 이웃은 무엇하는 사람일까 잠시잠깐 불붙다가 이내 꺼버리는 관심, 요 몇 년 새 슬그머니 풍습이 바뀐 건지 이사떡 돌린다며 인사 받은 적이 없고 담장 대신 온통 막혀 눈길 줄 데 없는 벽면 다들 어찌 사는지 궁금증을 끊어 준다 주민들은 누구하나 문패를 달지 않고 306호, 1204호 수인번호 같은 호수 신분처럼 밝힐 뿐 익명을 고수하고 좁은 엘리베이터 안 간혹 나눈 눈인사로 이웃사촌 사귀기란 맨 땅에 박치기라 위아래 중간소음 싸움이 크게 번져 원수로 지내는 일 종종 듣는 이야기다 꽤 오래 안 보이던 점잖으신 할아버지 구급차에 실려 가는 광경을 목격한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파트는 조용했다
이웃이 하늘로 가는 이사
배웅하던 빗소리
-이광 「우리 동네」 전문
제목이 “우리 동네”, 그러니까 “빗소리”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래, 독자는 제목대로 “우리 동네”의 소통을 자랑 삼아 이야기하리라 기대할 법했다. 그러나 화자는 반대로 아파트 삶의 비정한 현장을 보고하듯 한다. 기승전결이 분명하고 복선도 용의주도하다. 아파트 특징을 “다들 어찌 사는지 궁금증을 끊어” 주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 예로 “수인번호 같은 호수”를 “신분처럼” 달고 사람들은 벽에 갇혀 “익명”으로 살아간다. 이후, “안 보이시던 할아버지”가 어느 날 “구급차에 실려” 가고 그의 죽음이 전해진다. 그건 할아버지가 “하늘로 이사”가는 날 “빗소리”가 마지막 “배웅”을 한다는 상징적 집약으로 대신한다. 초장의 복선과 동네 이야기가 어떤 상관이 있는가 하는 의문은 사설시조 중장 끝 부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파트는 조용했다”에서 계산한 셈이다. “천둥소리”를 “듣고서야” 빗소리를 깨닫는 귀납은 결국 생을 마친 할아버지를 통하여 확인된다. “이사”에 따른 “배웅”과 “빗소리”의 연결이 스토리텔링으로 연결된 작품이다. 가히 비유를 배우는 학습자에게 텍스트로도 활용할만하다.
부룩스와 워렌(Brooks & Warren)은 ‘시는 극적 구성을 요하는 작은 희곡’이라고 한 바 있다. 이 시조도 극적 구성을 보여준 작품이다. 근래 고독사(孤獨死)의 사회문제를 다룬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며, 치밀한 구성미학마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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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 늦잠에서 놀라 깨어보니 아, 해가 중천이다. 아침 준비로 버벅대다 새삼 노트북을 보니, 엊저녁 골라 쥔 게 여기까지였다. 하지만 썼다가 지운 평도 있다. 페이지를 젖혀 나오는 작품마다 읽을 맛이 좋은데, 쩝쩝, 허나 값비싼 지면을 독차지하지 않기로 한다. 입맛을 거들어준 작품은, 리강룡의 「묵묘 앞을 지나며」, 박옥위의 「흙피리」, 백이윤의 「별을 향해 기도하다」, 백점례의 「귀공자 세탁소」, 최성아의 「(신)상형문자」 등이다.
사실 2017년 겨울호에는 신작과 특집을 망라하여 모두 80편(학생시조 제외)이 넘는다. 이런 가운데 시조 작품을 계간평 단에 모셔오는 일은 하늘의 별들 중에 내 별을 찾는 일만큼 자주 눈을 씻어야 한다. 하지만 ‘칵테일파티 효과’를 적용한, 즉 여러 잘나 있는 아이들 중에 나만의 기준에서 비롯한 결과임을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그럼에도 거론하지 못한 작품들을 위해, 해당 시조를 암송하는 벌을 내가 받기로 약속한다면 용서를 받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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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가히 문학의 세상이다. 한국엔 대저 1만여 명(시, 시조, 동시 등 운문 장르)이 넘는 시인이 시를 쏟아내고 있다. 가히 ‘시인 공화국’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필자가 조사한 바로, 오프라인 상의 문예지(일간, 월간, 계간, 반년간, 년간, 무크지 등)는 대저 460여 종이다. 이 가운데 시조 관련 문예지는 동인지 포함 60여 종이고, 100여개의 시 전문지, 아동문학 전문지, 종합 문예지에도 시조가 실린다. 시조시인 1,200여 명(한국문협, 작가회, 한국시조협, 오늘의시조회, 지역시조협, 시조동인회 등 포함)이 월간, 계간, 반년간, 무크지, 동인지, 카페, 포털, 페이스북 등에 작품을 발표한다. 《나래시조》에 실린 작품 수가 앞서 말한 80여 편이다. 주요 시조 전문지와 동인지 50여 종에 발표되는 것을 포함하면 평균 3,000여 편, 그리고 종합 문예지 당 평균 10여 편이 실린 걸 감안한다면 한 계절에 대충 3,500여 편의 시조가 발표된다는 계산이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라지만 시인들은 다들 충분히 먹고 살고 있고(시인이 굶어 죽었다는 보도는 없으니), 발표 지면 또한 빈약하지 않은 셈이다. 국제 문인 지표에 의하면 OECD국가 중에서 한국의 문학인 수, 특히 시인 수는 압도적이다. 그래, 고료와 인세가 문제이긴 하지만, 암튼 이쯤에 대한민국 시조문학의 장구한 ‘목제화’를 위해 건배해도 좋을 듯하다^^.
노 창 수
(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