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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울산 박정관 편집장 국민일보 문서선교사 언론인홀리클럽 회원 중구뉴스 기자 |
계획없던 갑작스런 일정으로 제주도를 향하다.
제주도는 난생처음 방문하는 것이라 꼭 외국에 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당연히 울산공항에서 직항으로 쉽게 도착할 줄 알았는데 한 주에 3일만 운항하는 것도 새로 알게 됐다. 다소 갑작스런 스케줄이어서 김해공항에서 다음 날 떠나는 비행기를 예약한터라 부산에서 일박하기로 했다. 그래서 남는 시간을 할애해 감천문화마을에서 벽화마을 구경을 실컷 하게 됐다.
그리고 인근의 자갈치시장에서 곰장어를 먹으러 가는 길에 차량통제를 하고 정체가 심해 알아보니 미국 마블스튜디오의 ‘블랙 팬서’를 촬영하느라 부산했던 거였다. 그리고 을숙도생태공원 인근의 숙소에서 머물며 부산바닷가의 멋진 야경을 눈에 넣을 수 있었다. 날이 밝고 드디어 김해공항에서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를 타며 저 아래 까마득한 거가대교를 봤다. 물살 가르며 다니는 배들이 장난감 같이 작은데 한순간 비행기는 구름 위로 떠올라 비행하더니 채 한 시간이 안돼서 제주공항에 착륙했다.
공항 앞의 렌트카 업체에서 차를 빌려 나서니 입자 고운 모래의 이호테우 해변이 나타났고, 거기서 아침으로 성게미역국을 먹었다. 그리고 애월해변 길로 향했더니 우아하고, 멋있고, 색다른 이국적인 정취의 건축물들이 이어졌다. 가게와 식당들과 리조트 호텔 등 숙박시설들이 연이어졌고, 무엇보다 커피숍들이 대부분이었다. 울산바다와 느낌이 다른 푸른 제주바다빛깔을 맘껏 구경하며 해변 길을 드라이브했다.
또 우리 일행은 제주중문단지로 넘어가 세계자동차제주박물관에서 전 세계의 희귀한 자동차를 휘둥그레 쳐다보며 신나게 감상할 수 있었다. 100년 전의 초기 자동차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라이프 스타일과 유행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명차들의 전시장은 ‘길 위의 인생에게 자동차는 무엇인가?’를 한 번쯤 되돌아보는 시간이 됐다.
노을이 빗기는 감천문화마을, 언덕진 미로같은 골목이 특징이다.
바다에 둘러싸인 제주에는 해산물 요리가 많다. 고등어를 메뉴로 하는 가게들도 많았다. 애월해안의 구엄마을 돌염전에 있는 고등어 조형물
세계자동차제주박물관, 1913년 영국 베테랑사가 제작한 베테랑 스위프트
이기풍선교기념관 전경
이기풍 목사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비
제주도 최초의 선교사 이기풍 목사 일대기와 선교기념관
다음날 날이 밝자 우리는 이기풍 목사 선교기념관을 찾아갔다. 이기풍 목사의 출생 시기는 약간 엇갈려 1865년인지 1868년 정확하지 않다. 그는 어릴 때 명민했고, 한학에 뛰어났지만 외세의 침략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기풍은 마펫(마포삼열, Samuel Austin Moffet) 선교사의 집에 몰래 불량배들을 끌고 가 돌덩이를 투척했다. 그러나 한 달 뒤 마펫 선교사가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하자 울분에 차서 돌을 쥐고 턱을 정통으로 가격하고 줄행랑쳤다.
이기풍은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원산으로 피난을 했다. 원산에서도 그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등 못된 짓을 골라했다. 그러던 차에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며 스왈렌 선교사를 통해 1894년 기독교에 입교했고, 후에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했다. 그 후 그는 마펫 선교사의 권유로 190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졸업하던 해에 독노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서경조,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방기창, 송린서 등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아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졸업 후 이기풍 목사는 총회선교회에서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이기풍 목사가 목숨을 걸고 들어간 당시의 제주도는 미신과 우상숭배가 가득한 복음의 불모지였지만 지역주민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열렬한 기도로 복음을 전했고, 그 헌신의 열매로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1908년부터 1917년까지 제주, 금성, 삼양, 성읍, 조춘, 모슬포, 한림, 용수, 세화 등 많은 지역에 교회를 개척했다.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록〉에 의하면, 당시 제주도의 교인은 410명, 예배당 3개, 기도회 처소가 5곳, 매주 모이는 남녀가 3백여 명에 이른다고 보고되어 있다. 이는 모두가 이기풍 목사의 헌신적인 사역의 결과였다. 그 후 1918년 광주 북문안교회(北門內敎會) 초대목사로 부임했고, 1920년 전라노회장, 장로회총회 부회장, 그 다음해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2년간의 병고로 휴양한 다음 1923년 전라남도 순천교회, 1924년 고흥교회, 1927년 다시 제주도 성내교회에서, 1934년에는 일흔의 나이에 여수의 남면 우학리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그의 말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체포되어 (1938년) 심한 고문을 당하고 보석되었으나 후유증으로 1942년 6월 20일 우학리교회에서 별세하였다. 1994년에는 제주 성안교회에 이기풍 목사 선교기념비가, 1998년 5월에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에 이기풍 목사 선교기념관이 세워졌다.
제주도는 거대한 섬으로 천혜의 자연적인 경치를 자랑한다. 용암분출로 새까만 현무암이 지천에 널려 있고, 바다를 끼고 있어 해녀들의 숨비소리를 들을 수 있고, 관광지로 개발돼 탁월한 여행지임에 틀림없다. 중국 사람들도 제주에 관심이 많아 땅을 많이 사들이고 관광객들도 즐겨 찾는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은 이런 눈이 아니라 제주도 최초의 선교사였던 이기풍 목사의 순교신앙과 기독교적 정체성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술꾼이 지나간 자리는 역한 술 냄새가 나지만 전도자가 지나간 자리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날리고 교회가 생긴다. 짧은 제주여행을 다녀오며 100년 전의 사람, 이기풍 목사를 존경하며 추념하는 글을 쓴다. 이기풍 선교기념관 Tel. 064)782-6969
굿뉴스울산 이금희 발행인, 박정관 편집장
굿뉴스울산 25號.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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