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의 꿈 / 강에리
긴 잠을 잤다
꿈속에서는 종일 비가 내렸다
빗속에서 화창한 날과 폭풍우 치는 날과
기쁘고 즐겁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폭풍이 부는 거리를 지나 처음 도착한 시간이
비에 쓸려가고 있었다
꺼꾸로 비친 네온사인은 일그러진 또다른 세상을 그렸다
해가 뜨면 사그라질 밤의 위력은 컸다
긴 꿈을 꾸고 있었다
꿈인 줄 아는 꿈, 깨지기 쉬운 꿈
꿈에서조차 무의식을 통제하는 의식은 불가사의(不可思議)했다
꿈속의 꿈이란 것을 안 후에
메마른 꿈도 달콤한 꿈도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격렬했던 모든 감정이 빛바래 가는 시간
꿈 없는 긴 잠에 빠져들었다
화가와 노가리* / 강에리
박제가 된 눈으로
무엇을 연민하는지 모르겠지만
쟁반 위에 가지런히 누워
불에 올려질 순서를 기다리네
방안 가득 향불 같은 연기 차오르면
내 눈물을 탄 소주 한 잔 받고
이승에 미련 그만 내려놓으시게
불에 그을린 자네 업보를
쓰디쓴 간장에 찍어
내 슬픔과 함께 안고 가려 하네
내일은 푸른 바다를 그리워하던
그대의 초상화를 화실에 걸겠소
박제가 된 내 꿈이 서러워 우는 날
그대의 영정에 술 한잔 올리려네
*노가리: 25cm 내외의 작은 명태, 혹은 그것을 말린 것. 식재료로 사용할 때에는 주로 말려서 안주로 먹으며, 칼슘이 풍부하여 뼈 건강에 효능이 있음.
따듯한 이야기 / 강에리
냉소적인 나는
다정한 이들로부터 늘 도망쳤다
딱딱한 껍질을 열면
거품같은 내면이 풀어 흩어질 것같아
따듯하고 보드라운 것으로 부터
기를 쓰고 멀어졌다
폭설이 세상을 덮은 십이월
포근한 눈에 혼이 팔려
마음까지 얼어버린 나는
차갑고 딱딱한 시간에 갇혔다
어릴적 나를 감싸던 품은 따듯하고 가벼워
몽글거림 속에 압사할 것만 같았다
그곳에는 언제나 나를 다독이는 손길과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꿈결에 따듯한 손을 잡았다
엄마의 손가락 힘주어 잡는 아기처럼.
차가운 세상에서 잠이 깬 나는
생생한 감각이 사라지기 전에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따듯한 이야기 하나 쓰고 싶었다.
강에리 소설가, 작사가, 시인
국제펜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한국국보문인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시집 "단 하나의 꿈" SF소설 '루시 이야기' 단편소설 '돌아 오지 않는 강' 외 다수. 톡소설 '마음 도둑' 동화 '내 이름은 장고' 외 다수. 가곡작시 '빗물의 연서' 외 다수
첫댓글 비온 후 물에 비친 밤 거리의 모습을 표현한 거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