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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마음이 부처' 편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 이 성품은 네가 미혹했을 때라도 결코 잃지 않으며,
▶ 선문에서는 원래 육조단경이 중요한데
▶ 육조단경에 오인돈수(悟人頓修)라는 말이 나옵니다.
▶ 깨달은 사람은 즉시 닦는다는 말인데
▶ 이 말이 저 몇백년 뒤에 규봉스님이 돈오돈수라는 말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 오늘날도 돈오돈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 사실 선의 원류를 찾으려면 육조단경을 봐야 하고
▶ 거기서 나온 말을 사용하여야 제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 규봉스님은 선적인 깨달음을 얻은 선사가 아니고
▶ 원각경을 보고 깨달은 스님이기 때문에
▶ 禪의 진수에 대하여
▶ 잘 모르는 스님입니다.
▶ 물론 중간에 약간 참선을 한 적이 있다고는 하나
▶ 깊이 들어가지는 못했어요. 나중에는 선보다는 經을 더 강의한 스님입니다.
▶ 그런 스님이 사용한 말이 돈오돈수인데
▶ 과연 그 말을 지금 굳이 사용해야하는지 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 어찌되었든
▶ 오인돈수는 깨달음 자체가 최후의 닦음이라는 의미입니다.
▶ 그래서 깨달으면 더이상 닦는 것은 없습니다.
▶ 바로 붓다의 행을 실천하면 되니까요.
▶ 그러니까 깨달음 뒤에도 부처의 행을 실천하는 습관을 들이고 노력하는 것은 있습니다.
▶ 그런데 이런 노력도 부처가 노력하는 것이지
▶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 그러니까 전통 선불교,
▶ 육조단경에서 육조스님이 말하였던 선불교는
▶ 원래 중생은 부처라는 데서 출발해요.
▶ 원래 부처이니까 자성을 보아 견성하면 바로 부처라고 하였어요.
▶ 그러니까 깨달음만 필요하지 부처가 되기 위하여 닦는 것은 없습니다.
▶ 굳이 닦는다면 부처행을 습관들인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 그것을 제가 여기서 보림이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 깨달으면 부처의 행을 닦는 것은 있어도
▶ 부처가 되기 위하여 닦는 것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 그런 의미로 육조스님도 오인돈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 깨달으면 더이상 닦는 것은 없다...
▶ 깨달음 자체가 최후의 닦음이다
▶ 라는 의미입니다.
▶ 그런데 당시 북쪽에 신수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 육조스님과는 사형사제 되는 관계입니다.
▶ 신수스님이 먼저 스님이 되어 육조스님보다는 10여년이 앞섰습니다.
▶ 그런데 신수스님도 홍인스님 문하에서 선을 배웠기 때문에
▶ 똑같이 선불교를 펼쳤는데 그 가르침의 방향이 달랐습니다.
▶ 즉, 6조스님은 중생이 원래 부처임을 철저히 믿고 그대로 실천하신 분이라면
▶ 신수스님은 중생이 부처인 것은 동감하지만
▶ 때묻은 부처라, 열심히 닦아서 眞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야 부처라면서
▶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아는 것은 하나의 識을 알 뿐이니 그렇게 안다고 부처의 행이 바로 되는 것이 아니니 열심히 수행해서
▶ 부처의 경지와 같아져야 한다고 부처가 되는 수행을 강조하였습니다.
▶ 이 신수스님은 당시대에는 육조스님보다 더 유명하여서
▶ 나라의 국사까지 할 정도로 유명한 스님이었습니다.
▶ 또한 따르는 제자도 엄청 많아서 남쪽은 혜능이고
▶ 북쪽은 신수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 그렇게 남쪽 선은 혜능, 북쪽선은 신수라는 말이 돌 정도로 유명한
▶ 두 스님이었으나
▶ 혜능스님의 법은 뒤로 더 유명해지고 번성해서
▶ 가히 중국 불교의 선불교를 대변하다시피 할 정도로 번창
▶ 하였으나 신수의 북방 선불교는 곧 대가 끊어지고 말아서
▶ 나중에 중국에서는 그 자취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 그러나 초창기 이 두 스님의 가르침이 전혀 달랐기 때문에
▶ 중국 선불교는 그 뒤로도 계속 수행해서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학파와
▶ 깨달으면 그만이지 부처가 되기 위하여 더 닦을 필요는 없다는 돈오를 주장하는 학파가 끊이지 않고 은근히 대립되었습니다.
▶ 그 영향으로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까지도 그런 대립되는 양상이 있습니다.
▶ 그런데 수행자가 이렇게 '닦는 것'과 '깨닫는 것' 이 두가지 법에서 헤매게 했던 주 인물이 바로 규봉스님이었습니다.
▶ 규봉스님은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말했는데
▶ 돈오돈수는 깨달으면서 닦음도 마친다는 의미는 같지만 여기에는 행도 일치된다는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었어요.
▶ 그러니까 돈오돈수에는 3가지가 있으니 선오후수(先悟後修)가 있고
무불
▶ 수오일시(修悟一時)가 있고
▶ 선수후오(先修後悟)가 있다고 하였어요.
▶ 이렇게 3가지입니다
▶ 본래 한가지 뜻만 있던 오인돈수를
▶ 3가지로 나누어놓았는데
▶ 이중에서 修悟一時가
▶ 육조스님의 뜻에 가까운 것 같으나
▶ 완전하게 같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 수오일시는 깨달으면서 닦음도 마치는 완전히 벗어난 초인을 말하는데
▶ 이런 사람은 전생에부터 닦은 공이 있어야 그리 된다고 하였어요.
▶ 그런데 육조스님의 뜻은
▶ 너는 원래 부처이니까 닦을 필요 없이 네가 부처라는 사실을 자각하면 그만이라 하였어요.
▶ 네가 부처라는 사실을 자각하면 너는 원래 부처이니까
▶ 네가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바로 부처인 것이지
▶ 따로 또 부처가 되기 위해서 닦는 것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 그러면서 네가 깨달았으면 이제 바로 부처의 행을 수행하라 하였어요.
▶ 수행불행(修行佛行)이라는 유명한 말입니다.
▶ 불행(佛行:부처행)을 수행하는 것
▶ 그러니까 육조스님은 중생은 원래 부처인 것을 철저히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 따라서 한번 깨달으면 바로 즉시 부처인 것이고
▶ 이것을 돈오(頓悟)라고 하였고
▶ 이렇게 돈오하면 더이상 닦는 것은 없다라는 말로 오인돈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 돈오가 최후의 깨달음이었고 이것이 정통 선불교의 가르침입니다.
▶ 이것을 여기 무불선원에서 그대로 이어서 전파하고 있는것인데
▶ 혹 사람들이 믿지 않을 까봐 선서를 일일히 들어가면서
▶ 증명하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규봉스님이 돈오돈수를 3가지로 해석하면서
▶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것(先悟後修)도 돈오돈수고
▶ 먼저 닦다가 뒤에 깨닫는 것(先修後悟)도 돈오돈수고
▶ 닦음과 깨달음이 동시(修悟一時)에 된 사람도 돈오돈수다 라고 주장하면서
▶ 결국 돈오돈수가 2가지 의미로 압축된 것입니다.
▶ 즉, 먼저 깨닫고 뒤에 습을 닦는 돈오점수도....... 돈오돈수고
▶ 먼저 닦음 후에 뒤에 깨닫는 점수돈오도 ............돈오돈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 그러다 보니 성철스님은 꿈 속에서도 화두가 성성하게 들릴 정도까지 닦은 후에
▶ 깨달아야 그것을 돈오돈수라고 주장하였는데
▶ 이것은 점수돈오를 돈오돈수라고 말한 것입니다.
▶ 그런가 하면 한국 전통 선불교의 근시조 경허스님의 맥을 이은
▶ 선장들은 돈오점수가 바른 돈오돈수라고 주장합니다.
▶ 이래가지고 점수와 돈오논쟁이 과열되었는데
▶ 사실은 이렇게 논란은 세울 필요 없는 것입니다.
▶ 육조스님의 육조단경을 착실히 읽어보고 돈오의 뜻을 정확하게 안다면
▶ 공연히 돈오와 점수의 논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 돈오 라는 글자에 이미 돈수의 뜻이 들어있고
▶ 중생은 본래 부처라는 화엄경의 사상에서 온 것이므로
▶ 닦으나 안 닦으나 중생은 원래 부처인 것입니다.
▶ 원래 부처가 자기를 잃어버리고 있었는데 선지식의 가르침으로
▶ 즉시 자기를 깨닫고 부처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 정통 선불교입니다.
▶ 그런데 우리가 성철스님의 훌륭한 점을 배우고 존중하는 것은 좋으나
▶ 그 스님의 말이 100% 다 옳다고 따르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성철스님은 오매일여를 얻지 못하고 깨달은 것은 다 깨달음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 물론 화두를 성성하게 들다보면 오매일여는 누구나 체험하게 됩니다.
▶ 그럴정도로 열심히 수행하다보면
▶ 답이 나오지 안을래야 안을 수 없겠지만
▶ 옛 스님들의 행장을 보면 그런 경지에 가지 않고도 깨달은 사람들이
▶ 부지기수로 많았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깨달음의 장면까지 서술해놓은 설봉스님이나, 대혜스님, 원오스님은 물론이고
▶ 육조스님, 혜가스님, 승찬 스님 등 역대 큰 스승들의 일대기에는
▶ 오매일여가 나오지 않습니다.
▶ 물론 대승경전과 어떤 선서에는 오매일여의 중요성을 말해놓은 것이 있기는 하나
▶ 그것으로 깨달음의 조건으로 삼기에는 좀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 왜냐면 여기 육조스님이나 황벽스님의 말씀처럼 중생이 원래 부처라면
▶ 자기를 아는 데 왜 그리 어려운 과정이 필요하냐 그말입니다.
▶ 순간 네가 바로 부처니라 하는 말을 듣고 '아, 내가 부처였구나' 하고 깨달음이 일어난 사람이라면 오매일여를 얻든 얻지 못했든 상관없이
▶ 바로 부처이지 원래 부처가 부처를 아는데 왜 그리 어려운 과정이 필요하냐 그말입니다.
▶ 성철스님은 식정으로 안 것이 아닌 진실로 부처의 심성과 같아진 상태라야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고
▶ 부처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인데 이러한 큰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 이것은 오히려 본래 성불사상을 모르고 하는 말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어요.
▶ 본래 부처라면 깨달은 즉시 부처이고 이것을 아는 것은 깨달음만 필요하지
▶ 그렇지 않고 닦아서 부처가 되려는 것은 오히려 때 묻히려는 것과 같다는 여기 황벽스님의 사상과도 안 맞는 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되도 않는 사람들이 오매일여의 경지에 들어가지도 않고 모두 깨달았다고 떠들고 다녀서
▶ 불교를 어지럽힌다 하고 .... 당신 또한 그러한 신조로 열심히 수행했으나
▶ 이것을 무조건 따르기에는 역사적인 사실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 후학자들은 수행을 그리 철두철미하게 해서 불행(佛行)을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지
▶ 깨달음이 꼭 그렇게 높고 이상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 이 황벽스님의 법문을 듣고 여러분들은 바로 아셔야 합니다.
▶ 아직도 제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들은 이미 끝난 황벽스님의 전심법요를 차근히 읽어보고 또 이 완능록 계속 몇번이고 읽어보세요.
▶ 지금 여기 마음이 부처편 종미에서도
▶ 부처의 성품은 어디서나 분노를 낼 때에도
▶ 기쁨을 낼 때에도 항상 있다는 말입니다.
▶ 분노가 바로 부처의 성품이고 자비도 부처의 성품이는 말이 여기서 나왔어요.
▶ 분노나 사랑이나 다 한 성품, 바로 불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 분노가 나오는 그 성품이 바로 부처입니다.
▶ 부처가 자기를 몰라서 혹은 잊어버리고 내는 것입니다.
▶ 깨달은 자라면 항상 자비가 나오므로 그래서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 그렇다고 깨쳤을 때에도 역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니라.
▶ 깨달았을 때 부처의 성품이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예전부터 있던 그 마음, 분노내고 성질내고 시기 내고 삐기던 그 마음이 바로 깨달음을 얻는 마음인 것입니다.
▶ 그러니 부처 마음이 중생이고 중생 마음이 부처인 것이지 따로 뭐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천진스런 자성은 본래 미혹할 것도 깨칠 것도 없으며, 온 시방의 허공계가 바로 나의 한마음의 본체이니라.
▶ 미혹하고 깨닫는 것은 내가 어리석어서
▶ 知을 가지고 있어서 가려서 그렇게 된 것이지
▶ 知를 벗어난다면 그 마음이 그 마음인 것입니다.
▶ 그러니까 知에서 벗어나려고 해야지 부처가 되려고 하면 안되요
▶ 부처는 이미 되어있는 것입니다.
▶ 부처가 나이고 뿐만 아니라 온 시방의 만물이 다 부처입니다.
▶ 따라서 마음이 우주의 주인이고 부수고 세우는 자이고 이 마음을 근원이요, 부처라해요.
▶ 그러니 네 아무리 몸부림친다 해도 어찌 허공을 벗어날 수 있겠느냐?
▶ 만물이 근원지 허공을 벗어날 수 없듯이 중생도 허공과 같은 부처의 성품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 허공이란 본래부터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번뇌라 할 것도 인위적인 작위도 없으며, 미혹할 것도 깨칠 것도 없다.
▶ 허공이 원래 비어서 크고 작고 깨닫고 깨닫지 못하고가 없고
▶ 미혹이니 잘남도 없는 것처럼 원래 비어서 본래 부처인데 도대체 무엇을 얻었네...깨달았네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 원래 비어서 때도 묻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 여러분은 지금 그 앉은 자리에서 이 마음은 원래 비어서 때가 묻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깨달으시면 됩니다.
▶ 그러면 그만이지 다시 비우고 버리는 수행은 필요없어요.
▶ 원래 비었는데 또 뭘 버립니까?
▶ 여러분의 원래 마음은 중생도 부처도 없습니다.
▶ 되고 안되고도 없어요.
▶ 원래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 원래 부처인데 다시 무엇이 될 필요가 있겠습니까?
▶ 여러분들은 다만 이런 사실을 한번 깨달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 털끝만큼이라도 사량분별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니,
▶ 더이상 의심하고 헤아리고 따지지 말아요. 우리가 이렇게 깨달은 스승들의 글을 읽는 것은
▶ 더이상 의심을 끊고 바로 가기 위함입니다.
▶ 여러분이 원래 행복하고 편안한 부처임을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마세요.
▶ 의지하여 기댈 만한 것도 없으며, 달라붙을 것도 없다.
▶ 여러분이 바로 부처이고 스스로 일어선 장부요, 천상천하에서 유일하게 높은 자이니
▶ 여러분 자신을 놔두고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거나 기대지 말아요.
▶ 오직 스스로 당당하게 선 장부가 되어야 합니다.
▶ 이름하여 부처!
▶ 한 줄기 맑은 흐름이 자성의 남이 없는 진리[無生法忍]이니,
▶ 한줄기 맑은 흐름이 무엇입니까?
▶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것이 바로 남이 없고 새지 않는 진리라는 것인가요?
▶ 최상의 진리.... 최고의 자리....
▶ 그래서 때묻지 않고 항상 맑은 흐름만 있는 그 자리.....
▶ 뭐라고 말하면 때묻히는 것이 되어 틀리는 그 자리
▶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해도 틀리는 그 자리.....
▶ 맑은 흐름만 있는 그 자리는.....
▶ 바로 "냄새 나는 자리 " 라고 말하겠습니다.
▶ 어찌 머뭇거려 헤아리고 따질 수 있겠느냐!
▶ 제가 냄새나는 자리라고 말하면 바로 알아들어야지
▶ 머뭇거리고 따지지 말아요.
▶ 냄새난다 했을 때 바로 맑은 자리를 보인 것인줄 알아야 합니다.
▶ 참 부처는 입이 없기 때문에 설법할 줄 모르고, 진정으로 들음은 귀가 없으니, 뉘라서 들을 수 있겠느냐!
▶ 이 법은 귀가 없고 눈이 없어야 진정함을 좀 아는 정도입니다.
▶ 여러분들은 입이 없고 눈이 없고 귀가 없는 사람처럼 한동안 지내세요.
▶ 그리고 나면 비로소 말이 트리고 귀가 트이고 눈이 밝아집니다.
▶ 한동안 그래봐야 해요.
▶ 수고하였다. 편히들 쉬어라."
▶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첫댓글 네..네..네..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