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욕지도 뱃놀이
통영군 욕지도 자부랑깽 해안 앞 밤바다, 바람기 하나 없는 해안가 바닷물 위에는 이름 모를 야광충들이 떼를 지어 형형색색 불을 밝히고 파도를 따라 출렁이고 있다. 9월 초순인데도 바닷물은 따뜻했고, 포구 안은 밤안개가 짙게 내려져 있다. 하늘엔 휘영청 달이 밝다.
안소니 퀸을 닮은 전정부가 노를 저어 안개 낀 밤바다로 나가기 시작했다. 휘 젓는 노 때문에 흔들리는 뱃전에 겨우 올라탄 7인은 모처럼 해방감을 만끽하며 온갖 구속에서 훌훌 풀려나 진정한 자유인이 된 기분이다. 달은 밝고 밤바다는 조용하다. 달빛에 눌려 안개가 바다 위에 낮게 내려앉았다. 안개가 거칠은 우리 얼굴을 따뜻하게 감싸며 덮어왔다.
삐걱거리는 노 젓는 소리를 한참 듣고 있던 서미대자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태리 민요 ‘먼 산타루치아’ 였다. ‘잔잔한 바다 위로 저 배는 떠나가며, 노래를 부르니 나포리라네. 황혼의 바다에는 저 달이 비췌이고, 물 위에 덮인 하얀 안개 속에 나포리는 잠잔다 … ’ 서미대자의 아름답고 고운 목소리는 우리 모두를 전율케 했다. 다섯 사내들의 떠들썩한 잡소리와 가쁜 숨소리를 금방 죽여 놓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하던 이 노래를 남성 테너로만 들어보았지, 여성 소프라노와 생음으로는 처음으로 듣는 노래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티끌 많은 이 속세를 영원히 멀리 떠나가게 하는 것 같은 착각 속으로 빠져 들게 하였다.
그날 밤 서미대자는 당당한 체격에 걸맞지 않게 감수성이 예민해 보였으며, 서정적이고, 매우 센티멘탈한 것 같았다. 아마도 떠나온 해안가의 정겨운 야경을 바라보면서, 어떤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되려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멀리 보이는 안개 자욱한 항구와 해안가를 따라 길게 비치고 있는 전등불, 달 밝은 가을밤이 한데 어우러져 그 아름다운 마음을 열었을 것이다.
그날 저녁 우리 눈에 비친 욕지도 항구는 마치 먼 산타루치아 노래 배경이 된 나폴리 항구를 떠올리게 하였다. 서미대자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아도취와 무아지경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서미대자는 이 눈치 저 눈치를 보거나 머뭇거림이 거의 없는 친구였다. 당당한 체격에 가슴 가득, 목 가득 터져 나오는 그 감미롭고 아름다운 노래 소리는 우리 모두를 너무나 놀라게 하였다. 우리들은 마치 전기 충격을 받은 듯, 꼼짝 못하고 부러운 눈으로 그녀를 사랑스럽게 쳐다만 보았다.
우리가 탄 배가 비록 자그만 쪽배에 불과했지만, 마치 지중해 연안의 나폴리 항구를 떠나 머나먼 항로를 따라 먼 여행을 떠나가는 화려한 크루즈선 퀸 엘리자베스호를 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을까? 그날 밤 우리들 모두가 정말로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서미대자의 아름다운 노래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달밤에, 아름다운 연인을 만나, 꿈같은 달콤한 사랑에 푹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1963년 9월, 그때 우리 7인은 모두 피 끓는 청년들이었다. 달 밝은 가을 밤, 밤바다, 포구의 밤안개, 해안가를 길게 비치고 있는 전등불, 우리들의 사랑과 우정, 이와 같은 변수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욕지도 밤 뱃놀이를 나서게 된 것이다. 영도 출신의 전정부와 충무동 출신 강무삼이, 당감동 출신의 윤국창이는 넓은 가슴과 억센 팔을 가진 사내들이었다. 노 젓는 데 이골이 난 듯, 능수능란하게 밤바다를 헤쳐 나갔다. 이 사내들은 얌전한 선생님이 되기보다는 거칠은 대양의 파도를 헤치며 세계의 구석구석 유명한 항구를 떠돌아다니는 멋진 마도로스가 되는 것이 옳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부랑깽 해안에서 조금씩 바다로 나갈수록 돼지 멱따는 듯한 유행가 소리와 파도 소리만 높아갔다. 고고하기만 한 달빛은 ‘먼 산타루치아’를 품고, 젊은 우리들을 유혹하며 부르고 있었다.
해안에서 2㎞ 정도 배를 저어 나오니, 파도가 뱃전을 심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 맞는 생소한 경험이었다.
해안을 떠났던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겁이 슬슬 났다. 그러나 달빛에 넋을 잃은 사내 넷이 바다 한가운데 배를 세워 놓더니, 자기들이 무슨 이태백이나 된 듯, 뱃전에 부딪혀 황금빛으로 부서지는 파도가 좋다면서 팬티만 걸치고 차례로 시커먼 밤바다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이태백이가 왜 그토록 물과 달빛을 사랑했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에 이르런 셈이었다. 흔들거리는 배 위에는 머뭇거리는 나와 서미대자, 장숙저 셋만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배는 파도에 더욱더 흔들리기 시작했다. 움푹 파진 파저들 사이로 검은 머리만 보이다가 숨어버리는 친구들은 멀리 헤엄쳐 가며 노래도 부르고, 고함도 지르며, 서로 어울려 장난도 쳤다. 한참 그러더니, 나를 보고 빨리빨리 바다로 뛰어 들어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서미대자가 나를 말렸다. 바다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두 숙녀 앞에서 쪽팔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저 원수 같은 친구들은 타고난 뱃놈들이라 밤 바다나 낮 바다나, 바다가 얕거나 깊거나간에 접시물에서 노는 것처럼 아무런 문제가 없는 친구들이지만, 나는 파도가 일기 시작한 시커먼 밤바다가 겁이 나고 무섭고 싫었다. 밤바다에 뛰어들면 바다 귀신이 금방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생각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다리오금이 잘 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릿다운 두 숙녀가 내 앞에 앉아 어떻게 하나 쳐다보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사생결단을 할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참으로 민망하고 안타까웠다.
나도 어릴 때에 개울물에서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멱을 감으며 개헤엄을 쳐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수영만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김승만 교수님의 안내와 지도로 멋진 해양훈련을 일주일이나 받았고, 그때 이미 바다를 지배하는 해신에게도 인사를 얌전하게 올린 사내가 아니던가. 용기를 내 자존심을 되찾아야 할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나도 팬티만 걸치고 그렇게 겁나고 두려웠던 밤바다로 뛰어들었다. 사나이 체면이 겨우 서는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찰라, 삼각파도가 나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얼굴을 치면서 물을 먹이지 않는가.
밤바다 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따뜻했다. 그리고 온몸이 포근해지는 것 같았다. 만약 그리운 엄마 품이 있다면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한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바다를 그렇게 무서워했던 내가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 바다가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친구들의 뱃놈 배짱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주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친구들과 어울려 밤들이 노닐다가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귀항하는 마지막 배 젓는 일은 늘 마음씨 고운 이영선이가 도맡았다. 방에 도착하니 새벽 3시가 넘었다.
Ⅱ. 엄마 리더쉽이 탁월했던 서미대자
우리가 한평생 어머니를 잊을 수 없는 것은 자식을 위한 지고지순한 그 어머니 사랑 때문이 아니겠는가. 한평생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자식이라는 그 인연 하나만으로 밥을 해 먹이고, 빨래해 입히고, 잠자리를 마련해 주며,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주며 한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다 죽는 사람이 우리 어머니 아니겠는가. 그래서 꺼떡하면 어머니를 “엄마”라고 약칭해 부르며, 신을 찾듯 갈구하며 부르는 것이리다.
욕지도 원량국민학교에 교육실습을 온 동행자 7인을 위해서 서미대자와 장숙저는 어머니같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헌신과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 우리는 교육실습기간 내내 한 집에서 같이 지냈다. 두 처녀는 우리들의 밥도 짓고, 빨래도 해주었으며, 잡다한 모든 궂은일을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챙겨주고 보살폈다.
우리는 서미대자를 ‘엄마’라 불렀다. 서미대자와 장숙저는 마치 우리들의 엄마가 된 것 같았다. 일거수일투족 철없이 구는 많은 자식들을 돌보는 엄마처럼 몸을 사리지 않고 그 뒷바라지를 다 해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엄마’였다. 섬에 도착한 처음 하루 이틀 동안에는 서미대자 씨, 미대자 씨, 숙저 씨 이렇게 부르더니, 2~3일 뒤부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모두 이구동성으로 ‘엄마’라고 불렀다. 그렇게 부르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서미대자는 체구도 당당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몸과 마음도 모두 건강했다. 장숙저도 헌신적인 봉사와 노력을 꼭 같이 행했지만, 본인의 머리 만지는 일과 얼굴 화장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 같아, 엄마라는 칭호보다 깔끔한 이성의 처녀로 남고 싶다는 인상을 진하게 풍겼다. 눈가에는 늘 파란 색깔의 아이라인을 그렸고, 연한 밤색의 아름다운 머릿결을 잘 다듬어 중학교 영어 교과서에 나오는 아름다운 소녀 베티스미스를 연상하게 하였다. 어쩌다 깡패 같은 사내들이 도가 지나친 언행을 하게 되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자기보호 본능을 확실히 보여주는 깔끔한 성품의 친구였다. 언행에서 늘 까칠한 면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우리들끼리 그녀가 듣지 못하는 곳에서 “까칠이”라는 별명을 붙여 부르곤 하였다. 늘 염치와 체면을 내세우며, 우아한 여성스러움을 보여주려 안간힘을 썼던 장숙저는 안하무인의 거친 언행을 예사로 저질러대는 사내들 앞에서 탄탄한 방탄막이를 치는 것처럼 보였다. 자기가 성숙하고 얌전한 처녀라는 사실을 늘 일깨워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방탄막이를 깨보려고 윤국창이가 애를 썼지만 늘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반면, 서미대자는 우리들의 기괴한 어떤 형태의 지나친 어리광도 이해해 주고, 받아 주는 통 큰 처녀라는 이미지를 깊게 심어 주었다. 서미대자는 짬이 나는 대로 우리에게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서미대자가 가르쳐 준 노래가 잊어지지 않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지금도 그 옛날 우리들의 추억이 떠오르면 그 노래를 부르며 걸어보기도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노래가 보헤미아 민요 ‘목장길 따라’ 이다.
목장길 따라 밤길 거닐어
고운님 함께 집에 오는데
스타도라 스타도라 스타도라 품바
스타도라 품바 스타도라 품바
스타도라 스타도라 스타도라 품바
스타도라 품바 품품품.
숲 근처 올 때 두견새 울어
내 사랑 고백하기 좋았네/
…
무수한 별이 반짝였으나
내 님의 사랑 더욱 더 빛나/
…
나는 이 노래가 참 좋았다. 가난한 환경에 쪼들리며 사랑이란 것은 상상도 못하며 살아왔던 순진무구한 우리들에게 이 노래는 큰 희망을 주는 것 같았다. 우리 모두가 청춘이었고, 우리 모두가 아름답고 고결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자격 있는 사람들이란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아름다운 사랑의 희망을 갖게 해주는 노래라는 생각이 들어서 열심히 따라 부르며 정성껏 배웠다.
서미대자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잘 어울렸던 노랫말은 다섯 선머슴아들의 가슴을 몹시 두근거리게 했다. 그리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배우는 우리들 태도가 너무나 진지했고, 기분이 좋아서 약 먹은 것같이 황홀하기까지 했다. 이 노래의 힘은 대단했다. 거칠은 다섯 사내들의 못 된 성질도 아름다운 목소리와 서정적인 노랫말 때문에 차츰 얌전하게 변해갔고, 눈빛 역시 순한 양을 닮아 가는 것 같았다.
이 노래를 배우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다섯 사내들 대부분이 음치 비슷한 동질성 목소리를 가졌기 때문이었으며, 그리고 후렴 부분을 부를 때 이영선이와 내가 가장 많이 틀려 ‘다시’, ‘다시’를 거듭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틀리게 되면,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음치에다 바보 같다면서 손가락질을 하며 웃어댔다. 우리는 시간만 나면 이 ‘목장길 따라’를 같이 부르며, 고단한 교육실습생활을 즐겁게 보내려고 애를 썼다.
교육실습 기간 내내 초승달이 보름 달이 되면서 밤하늘에는 늘 달이 떠 있었다. 그리고 달 밝은 밤이면, 집 안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 고질병을 가장 심하게 앓던 사내가 강무삼이었다. 어떻게든 우리들을 꼬드겨 욕지도 해안가를 걷게 하였다. 걸으며 이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 그리고 때때로 능력 있는 학부형의 배를 빌려 달빛 푸른 가을 밤바다에서 노를 저으며 또 이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배운 노래이니, 여태까지 잊혀 지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눈을 감을 때까지 이 노래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고인이 된 서미대자나 이영선이, 장숙저, 전정부도 우리들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 추억의 노래만큼은 눈을 감을 때까지 잊지 못하고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숨을 거둔 서미대자나, 아까운 처녀 선생님으로 숨을 거둔 장숙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우리는 매일 한솥밥, 한 솥 국을 먹으며, 한 방에서 딩굴며 우정이 깊어갔다. 밖으로는 거친 것 같았지만, 속내는 그렇게 순진무구할 수 없는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이 정말 좋았다. 그리고 정말로 운 좋고 다행이었다 싶었던 것은, 그렇게 멋진 여자 친구들과 뱃놀이와 뒤풀이 행사를 하는 동안은 운명처럼 뒤집어쓰고 다녔던 가난과 누더기 옷을 잠시나마 훌훌 벗어던질 수 있었다는 것이고. 나름대로 우리들 각자의 미래에 대한 희망찬 설계를 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이다. 진정 우리들에게 청춘이란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나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 막연했지만 깊은 생각을 하게 했던 행복한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찾아왔던 것이라고 보았다.
달빛 어린 밤바다에 뛰어들 수 있었던 취기 어린 내 친구들이 한편으로 가엽고 슬프기도 했지만, 이런 행동이 미래의 도전에 대응하려는 우리들의 천진스런 몸짓이란 것을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서 참 좋았다. 그래서 우리들은 서로 마주보며 허물없이 환하게 웃을 수 있었던 것이고,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지냈다.
Ⅲ. 그리운 한새벌 내 친구들
내 희망의 반을 꺾어 진학한 대학이 부산대학교 병설부산교육대학이었다. 기가 죽은 채 착잡한 마음으로 1학년의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따뜻한 봄날, 음악실 옆을 지나가는데 피아노 반주와 함께 아름답고 우렁찬 멋진 테너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 아름다운 테너 목소리가 내 마음을 흔들기 시작했다. 내가 진학한 부산교대의 정체성을 느끼기에 충분한 순간이 온 것이다. 그 피아노 소리와 그 우렁찬 테너 목소리는 처음으로 내가 부산교대생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뒤에 알고 보니, 그 테너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 1회 이창욱 선배님이셨다.
1학기가 지나고 한새벌에 가을이 찾아왔다. 피아노 연습실에서 능숙한 피아노 반주와 함께 당당하고, 자신 있고, 풍부한 음량으로 교실이 쩡쩡 울리는 매혹적인 소프라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이창욱 선배였는데, 이 여자는 과연 누구일까? 호기심에 끌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그곳으로 옮겨 갔다. 도수가 높은 검은 테의 안경을 낀 그 유명한 육반의 서미대자가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서미대자는 책읽기를 좋아한다고 했고, 장래 훌륭한 소설을 쓰겠다는 다부진 야망과 희망을 가진 다재다능한 문학소녀라고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앞에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서미대자는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유별났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수더분하게 차려입고 다니는 천재형 보통 여학생이었다. 화장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밝고 화사한 두꺼운 얼굴은 기품을 지닌 예사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그리고 장숙저는 같은 마산여고 동기이고 친구지간이었지만, 서미대자와는 상대적으로 많이 다른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장숙저는 마산여고 때부터 영어에 뛰어난 특출한 재주를 보였으며, 대학에 와서도 영어반에 들어가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 모습도 서구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매혹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아담사이즈 체격에 늘 진한 청녹색 아이라인을 그리고 다녔으며, 머리카락 끝이 아래로 향하게 꼬슬꼬슬한 모양의 파마를 예쁘게 하고 다녔다. 그리고 늘 머리에 연한 밤색 염색을 하고 다녔다. 구닥다리 내 생각으로는 학생 신분으로서는 좀 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탁 튀고, 까칠 하면서도, 깔끔한 성품을 지녀 우리들의 관심을 끌었던 멋쟁이 친구였다.
우리 동기생들이 8 반에 모두 320명이 있었다. 짧은 2년 동안 대학을 같이 다녔지만, 이무영이 외는 대부분 누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고 지내다가 졸업 후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이었다. 다행히도 반별, 학문별 활동이나 부속국민학교 교생실습, 지방학교 교생실습, 대학 내 클럽활동 등이 있어서 친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일선 학교에서 반갑게 만나 한 평생 친구가 되는 것이 우리들의 운명이었고, 우리들이 가는 인생길이었다.
1963년 9월, 우리 7인은 지방교육실습지로 욕지도를 택했다. 우리들은 부산과 경남에서 초등교육 여건이 가장 열악한 학교를 찾아가기로 의견을 모으고, 내가 도서관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장소를 물색했다. 부산·경남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 국도였다. 알아본 결과 분교가 하나 있었다. 전체 학생 수가 10여명에 불과하여, 복식수업을 하고 있어서 교생을 받을 수 없다는 답신이 왔다. 그 다음으로 먼 거리에 있는 섬이 통영군 욕지면 욕지도였다. 욕지도 원량국민학교가 우리들을 받아주기로 결정이 났다.
우리들은 쌀, 된장, 숟가락, 수저, 밑반찬, 밥솥, 가스 등 모든 준비물을 분담하여 준비했다. 그리고 시청 뒤 부산항에서 통영 가는 배를 탔다. 부산~통영, 통영~욕지도 항로를 따라 2번이나 배를 갈아타야 했다. 낙동강 하구에 이르자 배가 앞뒤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도 마도로스 아들인 전정부와 깡패들이 우글거리던 충무로 일대에서 뼈가 굵은 강무삼이와 작은 체구이지만 깡다구가 센 당감동 출신의 윤국창이는 날뛰는 파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 견뎌냈다. 그러나 허약한 나와 귀골에 미남이었던 이영선이와 좀 까칠한 성품에 우아한 모습을 견지하고 있던 장숙저는 토를 겨우겨우 참으면서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체격이 당당한 서미대자는 끄떡도 하지 않고 파도를 타는 배와 더불어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푸른 바다와 새파란 하늘과 흰 구름과 바다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흰 갈매기의 날개 짓을 바라보며 초가을 바다 경치를 즐기는 듯, 뱃전에 서있었다.
그날 오후 내가 가장 염려했던 위기가 다가왔다. 통영에서 욕지도에 가는 배를 바꾸어 탔을 때다. 안소니 퀸 전정부와 약간 수재라고 거드름을 피우는 윤국창이는 같은 수학반에서 열공하는 천재들이었다. 머리 좋은 친구 둘이 친하다 보니, 갑판에서 손과 발을 휘두르는 장난도 치고, 큰 소리로 농담도 하면서 여학생과 동승한 좀 어색한 분위기 전환을 위해 애를 썼다. 때로는 오버액션을 취하며 주먹을 휘두르며 싸움꾼 흉내를 내기도 냈다. 그런데다 잘 생긴 여학생이 2명이나 끼어 있었고, 좀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돈 있는 버릇없는 대학생들이 여학생 둘을 꼬셔 야리끼리 여행을 다니면서 철없이 굴고 있다는 그런 인상과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듯한 순간이 왔을 때였다.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던 험상궂은 얼굴의 통영 깡패들이 소매를 걷어 부치며 갑판 위로 걸어 나왔다. “이 씨팔놈의 새끼들이 어디서 까불고 나자빠졌어! … ” 거친 저음을 이상한 입모양을 만들어 내뱉아 퉁기며 주먹을 내밀고, 다리를 앞뒤로 크게 벌리며, 가슴을 풀어헤친 채, 우리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부산 충무로의 깡패 스타일에 익숙해 있던 강무삼이가 어느 새 “저 새끼들은 뭐야! ” 중저음 큰 목소리로 말끝을 치켜 올리며, 깡패들을 꼬나보고 눈을 부라리며 싸울 폼을 잡고 나왔다.
강무삼이는 동래고등학교를 나온 수재였지만, 어깨가 떡 벌어지고 가슴이 넓었으며, 팔과 다리가 굵은데다 두 주먹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컸다. 거기다 필드하키와 럭비로 다져진 다부진 체격을 갖고 있는데다, 용기와 결단력이 있고 친구간의 의리가 유별났다. 가끔 괄괄한 성질을 잘 부리는 것이 유일한 매력적인 약점일 뿐이었다. 그러나 화가 나면 친구들의 이빨도 분질러 빼놓는 깡 기질이 대단한 우리들의 대 깡패용 중추 고참 멤버였다.
안소니퀸을 닮은 전정부 역시 키가 큰데다 영도 봉래동의 깡패들을 보고 자란 터라 강무삼이 보다는 못했지만 다른 장점이 있다면, 매사에 한번 물면 절대로 놓치지 않는 끈질김이 있다는 것이다. 왼쪽 눈가의 칼자국 흉터를 내보이며, 눈가를 찡그리더니 깡패들을 째려보며, 목에 힘을 주고 싸울 채비를 하고 나섰다. 미남 깡패 이영선이와 뽀빠이 팔뚝을 내보이며 윤국창이가 달려 나오자, 깡패들이 두리번거리더니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하선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간이 콩알만 해져 연신 서미대자와 장숙저의 얼굴을 살피며 보호해 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 두 여학생을 꼬드겨 여기까지 오게 하여 결국 피를 보게 하는구나 싶어 안절부절 못하며 사태의 귀추를 기다렸다. 서미대자와 장숙저, 나 셋만 싸움판에서 싸울 폼을 잡지 못하였지만, 우리 셋도 성난 얼굴로 눈을 부라리며 깡패들을 노려보기는 했다.
서미대자는 입술이 아래 방향으로 활처럼 휘어지더니 험상궂은 얼굴이 되어 이들을 노려보는 것이 나보다 훨씬 적극적인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었고, 장숙저는 ‘나 지금 몹시 떨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얼굴로 깡패들을 노려보고 서있었다.
이렇게 욕지도 귀항이 순탄하지 않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7인은 깡패를 퇴치한 기쁨을 안고 똘똘 뭉친 채 7인의 악당들로 변해 욕지도에 상륙했다. 욕지도에 도착한 7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왕성한 식욕이었다. 처음 가져간 쌀과 부식들이 금방 동이 났다. 가장 많이 먹는 사람이 강무삼이와 이영선이와 윤국창이였다. 서미대자, 전정부, 나도 그들 못지않았지만 이들에 비하면 조족지혈 이었다. 가장 적게 먹는 사람이 장숙저였다. 처음부터 이런 사태가 올 것이란 예상을 하고 숙소를 마련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실습학교와 좀 멀리 떨어진 곳에 방을 얻었다.
욕지도 근해는 우리나라 3대 청정해역의 한 곳이다. 해산물이 풍부했다. 교육실습 기간 내내 싱싱한 문어와 갈치와 조기, 도미를 구해와 매끼 파티를 열어 원 없이 많이 먹었던 기억이 난다. 매운탕을 해 먹거나 다른 부식 자료가 더 필요하면 인근 학부형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래도 부족하면 현지 조달을 책임진 서미대자가 명령을 내렸다. 조달 명령을 받은 당번이 밖에 나가서 부식 자료를 구해 와야 했다. 당번 차례를 정하는 것과 조달 명령 발동은 서미대자 몫이었다.
인근 넓은 산비탈의 학부형들 텃밭이 우리 텃밭이 된 셈이었다. 당번에서 제외된 사람이 서미대자와 장숙저 둘이었다. 이 두 친구는 지금 틀림없이 극락왕생을 했거나 하늘나라 천당에서 즐겁게 봉사활동을 하며, 뭇 연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지내고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사랑했던 이 친구들을 다시 만나보려면, 이 세상에서 지은 죄를 말끔히 회계하여 죄사함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도 올해부터 교회에 나가기로 작정했다.
서미대자, 이영선, 장숙저, 전정부! 사랑하는 내 친구들아! 이 세상에 살면서 겪었던 모진 풍파와 외롭고 고통스럽던 일들일랑 다 잊어버리고, 즐겁게 지내던 우리들의 욕지도 기행을 기억해라라. 행복할 것이다.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다 우리 다시 반갑게 만나보자.
7인의 광인 강무삼, 서미대자, 윤국창, 이영선, 이학원, 장숙저, 전정부 중에 서미대자와 이영선, 장숙저, 전정부 넷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강무삼, 윤국창, 이학원 셋은 살아있다. 아직 살아있는 이 셋도 온전히 살아있다고 볼 수 없다. 어느 고승이 말하기를, 우리 나이가 되면 죽은 자나 산 자가 모두 같은 것이라고 알려주지 않았던가!
가을이 오고 또 겨울이 오면, 여름철에 그렇게 무성했던 나무 잎들이 짧은 기간 동안 고운 단풍이 들었다가 곧 낙엽이 되어 땅에 떨어지고 만다. 겨울에 벌거벗은 나목이 되면 멀리서 보면 죽은 나무인지, 산 나무인지 잘 구별이 안 된다. 우리 나이와 우리 인생도 이때가 되면 삶과 죽음이 잘 구별이 안되는 그런 때가 아닌가 싶다. 이것이 우리 인생이고 자연이 아니던가.
사랑하는 친구! 서미대자·이영선·장숙저·전정부, 내가 그대들 앞에 이렇게 엎드려 명복을 빈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랑하는 친구들에게도 내 안부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