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사촌동생 안홍근(安洪根)선생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2010-08-13 10:57
한 가문에 독립유공자 15명
국가보훈처는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 안홍근(安洪根)선생이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 조직에 참가하고
연해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시베리아 내전 후 블라디보스토크 수청촌(水淸村) 일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 전달한 공적 등을 발굴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고 13일 밝혔다.
이로써 안 의사 가문은 그동안 포상된 안중근 의사(1962, 대한민국장)ㆍ안명근(1962, 독립장)ㆍ
안춘생(1963, 독립장)ㆍ최익형(1977, 독립장)ㆍ안경근(1977, 독립장)ㆍ안정근(1987, 독립장)ㆍ
안봉생(1990, 애국장)ㆍ오항선(1990, 애국장)ㆍ조순옥(1990, 애국장)ㆍ안원생(1990, 애족장)ㆍ
안공근(1995, 독립장)ㆍ안낙생(1995, 애족장)ㆍ조성녀(2008, 애족장)ㆍ안태순(2009, 애족장) 선생 등
모두 15분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이는 특히, 올해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안홍근 선생은 1918년 4월 28일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포포프스카야 거리 18번지에 있는
조선학교 강당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정식 선포를 위한 협의회 자리에 있었다.
최초의 한인 볼셰비키인 김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의 지도 하에 이동휘, 김립, 유동열, 박애, 이인섭, 심백원, 김용환, 오성묵, 이한영, 오와실리, 오하묵 등과 발기인으로 참가한 것이다.
이들은 같은 해 5월 11일 포포프스카야 거리 15번지에 있던 조선인민회관(보훈처에 따르면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같은 번지를 포함한 부지에는 현재 빵공장이 있음)에서
한인사회당의 정식창립을 위한 한인사회당 중앙위원회 확대총회를 개최해 중앙간부를 선출하고, 당기관지 ‘자유종’ 창간 및 장교 훈련을 위한 군사학교(교장 유동열) 설립을 결정했다.
안홍근 또한 1918년 8월 말 노령 이만에서 독립단의 일원으로 러시아 적위군과 함께 일본군과 교전했다.
당시 하바로크스크에서 원동소비에트인민위원회는 전쟁을 중지하고 빨치산 투쟁을 하기 위해 적위군들을 아무르주 삼림으로 후퇴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안홍근은 부라뵤바-아무르스카야 역 전투와 이만 전투에서 왜병이 나타나자 러시아 지도자들의 명령을 위반하고
“최후 한 사람까지 왜놈을 죽이고 우리의 원수를 값자”고 달려나가 단병접전에 뛰어들었다.
이만에서 퇴각할 때 왜놈만 보이면 “나의 형 안중근과 안명근의 원수를 갚겠다”며 대오에서 뛰어나갔다고 전해진다.
안홍근은 1918년 9월 초 크라스나야 레치카역에서 다른 동지들과 중국인으로 변장한 일본군 3명을 체포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한편, 안홍근 선생의 친형인 안명근(安明根) 선생은 1910년 독립군 자금모집 활동으로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한 공적으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서훈됐다.
헤럴드경제 > 뉴스종합 > 사회/교육 > 최신기사 김대우 기자
안중근 의사 가문 15명이 독립유공자 [중앙일보]
광복절 기념 338명 포상
국가보훈처는 제65주년 광복절을 기념해 안홍근 선생과 유찬희 선생 부자 등 순국선열·애국지사 338명에게 훈·포장과 표창을 수여한다고 11일 밝혔다.
건국훈장 218명(독립장 5명, 애국장 108명, 애족장 105명)과 건국포장 41명, 대통령표창 79명이다. 여성은 6명이며, 생존자는 없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 안홍근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4촌 동생이다.
1918년 독립단 일원으로 러시아 적위군과 함께 연해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올해 순국 100주년을 맞는 안중근 의사의 가문은 안홍근 선생을 포함해
안명근·안춘생·최익형·안경근·안정근·안봉생·오항선·조순옥·안원생·안공근·안낙생·조성녀·안태순 선생 등 모두 15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김민석 기자
건국훈장 애족장 받는 안홍근 선생
연합뉴스 | 입력 2010.08.11 20:32
(서울=연합뉴스) 국가보훈처는 11일 제65주년 광복절을 기념해 338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훈.포장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안중근 의사의 4촌 동생인 안홍근 선생의 군자금 모집활동 동아일보(1922.2.8) 기사.
2010.8.11 < < 국가보훈처 제공 > >
한국근현대신문자료>동아일보 > 1922년 > 02월 > 08일 > 軍資金을 募集 두곳에서 활동;
아라사땅 水淸村에 安弘根 金德漢의 二十名이 나타나 군자금강탈, 姜伯五외 수명은 「시고도와」에서 군자금 모집...
-안홍근 선생의 군자금 모집활동 동아일보(1922.2.8) 기사.
'안중근 사촌' 안홍근, 애국 명가 15번째 유공자
올해 순국 100주기를 맞은 안중근 의사 집안에서 15번째 독립유공자가 탄생했습니다.
안 의사의 사촌동생 안홍근 선생이 그 주인공입니다.
1922년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 안홍근 선생이 러시아에서 독립군을 위한 군자금을 모으고 활동했다는 내용이 소개돼 있습니다.
지난 달 발간된 항일 무장투쟁 독립운동가 이인섭 선생의 수기에서도
"나의 형 안중근과 명근의 원수를 갚는다"며 연해주에서 무장 독립투쟁을 벌였던 안홍근 선생의 족적이 확인됐습니다.
항일 무장투쟁 독립운동가 이인섭 선생의 수기
최근 새롭게 발굴된 이 자료를 통해 안홍근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됐습니다. 이미 독립운동 명가로 알려진 안중근 의사 가문은 15번째 독립유공자를 배출하게 됐습니다.[안기숙/안홍근 선생의 손녀 : 안 씨 집안에서 독립운동을 30명이 했는데 할아버지 뿐만 아니라 저희 아버지도 독립운동 하다 세상을 뜨셨거든요.
(가족들이)고생을 많이 했어요. 죽을 뻔도 하고.]
"가난만 남긴 독립운동 이젠 원망 안할래요"
독립유공 추서 안홍근 선생의 손녀 안기숙씨
부친 사망후 가족 뿔뿔이
생활고 딛고 6남매 키워
"기쁘기는 한데 속이 너무 상해 펑펑 울었어."
할아버지가 훈장을 받는다는데 손녀 안기숙(73)씨는 원망의 눈물을 흘렸다.
평생 딱 한번 얼굴을 본 할아버지와 전쟁 중에 숨진 아버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안씨는 그들의 부재로 인해 젊은 날 지긋지긋한 생활고와 싸워야 했다.
그의 조부(祖父)는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 안홍근(1883~1950) 선생으로 광복 65주년을 맞는 15일 애국훈장 애족장을 받는다.
손녀 안씨는 13일 오전 여느 때처럼 부산 서구 초장동의 성당을 찾았다. 이날만큼은 특별한 기도를 드렸다.
"원망을 했지만 이젠 안 할래요.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좋은 데 가서 잘 지내요." 그리곤 기억을 더듬어갔다.
광복을 앞둔 1945년 어느 날 안씨 등 4남매와 어머니가 살던 중국 북안(北安)성 작은 마을에 아버지(안도생)가 꾀죄죄한,
하지만 눈빛은 살아있는 노인과 찾아왔다. 할아버지라고 했다. '독립운동가' 조부에 대한 안씨의 유일한 기억이다.
북간도 무관양성학교 창립 멤버이자, 이시영 전 부통령의 친구였던 할아버지가 늘 아버지를 끼고 만주와 러시아를 누비는 사이 가족은 배고팠다.
안씨는 "남의 밭에 심은 감자를 몰래 캐먹으러 갔다 왔더니 동생이 죽었어"라고 떠올렸다.
홀로 집에 남겨진 세 살배기 남동생이 살충제가 묻은 밥풀을 게걸스럽게 먹다 거품을 물고 숨졌다는 것이다.
그토록 바랐던 '대한독립' 후에도 할아버지는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돌아왔다.
20일 넘게 지붕도 없는 기차를 타고 돌아온 서울 을지로 6가, 아버지는 리어카를 끌며 국수를 팔았다.
독립운동 전 친척들을 위해 "쌀 한 가마니씩 가져가라"던 호기와 재산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안씨는 "든든한 아버지라도 있었으니…"라고 말끝을 흐렸다.
6ㆍ25전쟁은 그나마 남아있던 가족의 안정을 앗아갔다. 갓 태어난 막내 동생 때문에 피란을 미루다 아버지는 죽음을 맞았다.
"통장이 대문을 두드려 열어줬더니 인민군이 들이닥쳐 독립운동가라고 아버지를 끌고 갔어. 문을 열어주는 게 아닌데."
뒤늦게 들은 사실이지만 할아버지 역시 비슷한 시기(50년 10월쯤)에 북한군에 의해 사망했다.
매제인 최익현(77년 유공자 추서) 선생과 황해도 옹진의 과수원을 운영하던 중 국군 5명을 숨겨줬다는 게 이유였다.
아버지를 잃은 가족은 친척이자 독립유공자인 안춘생(초대 육군사관학교장) 선생의 도움으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오빠와 남동생은 부산 송도의 고아원으로, 안씨는 외삼촌 집으로, 막내 남동생은 어딘가로 입양 보내졌다.
엄마는 종교에 귀의했다. "외삼촌도 독립운동을 했는데 후유증 탓인지 정신이 온전치 못했어. 그래서 도망쳤지.
얼마 후 외삼촌이 자기 손으로 가족을 다 죽이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거리로 나선 그 후 삶은 말할 것도 없다. 어찌어찌 결혼을 했지만 입에 풀칠하며 수십 년을 사느라 독립운동 집안이란 자부심을 가질 여유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찢어진 밀가루 종이포대를 재활용하는 일을 남편과 함께 해서 한 달에 17만원 정도 벌었나, 벌써 40년 전 얘기네.
그렇게 6남매를 길렀지. 그래도 지금은 먹고 살만은 해." 안씨가 엷게 웃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5년 전국의 독립유공자 후손 225명을 표본 조사한 결과, 자신의 경제ㆍ생활수준이 '하층에 속한다'는 응답자가 59.4%(133명)나 됐다. 안씨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안씨는 기도를 마무리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나도 곧 갈 테니, 그때 꼭 만나요. 하늘에선 가족을 버려두고 독립운동 할 일은 없을 테니.
" 간경화 뇌졸중 협심증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곳이 없다"는 그의 발걸음은 성당에 올 때보다 한결 가벼워 보였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안홍근 선생은 1918년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 조직에 참가하고
그 해 여름 독립단의 일원으로 러시아 적위군과 함께 연해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정부 수립 이후 총 1만2,209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광복 65주년, 故 유찬희 · 유기문 부자 등 순국선열 · 애국지사 338명 포상
◆ 건국훈장 218명, 건국포장 41명, 대통령표창 79명 ◆
◆ 전체 포상자 338명 중 「전문사료발굴·분석단」의 발굴·포상이 318명 ◆
▣ 국가보훈처(처장 김양)는 오는 8월 15일 제65주년 광복절을 맞아 북간도와 중국 관내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유찬희·유기문 부자를 비롯하여 338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한다.
ㅇ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218명(독립장 5, 애국장 108, 애족장 105), 건국포장 41명, 대통령표창 79명으로서 이 가운데 여성은 6명이며 생존자는 없다. 이번 포상자는 총 338명으로 1995년의 광복 50주년 광복절 포상 이후 단일 계기 포상 규모로는 역대 최대이다.
ㅇ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65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되며, 해외에 거주하는 유족에게는 재외공관을 통해 전수된다.
▣ 총 338명의 포상자 가운데 94%에 달하는 318명은 국가보훈처의 「전문사료발굴·분석단」이 행형기록 및 일제 정보문서, 신문보도 기사 등을 찾아 분석·검토하고, 현지조사를 통해 동일인 여부와 활동 전후의 행적을 확인하는 등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자료를 발굴하여 포상하게 되었다.
ㅇ 한국근현대사, 독립운동사 등 역사학 전공자를 주축으로 2005년에 발족한 국가보훈처 「전문사료발굴·분석단」은 그 동안 수형인명부와 범죄인명부, 형사사건부, 신분장지문원지, 가출옥에 관한 서류, 판결문 등의 국내 사료는 물론 중국 자료,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 등에 산재한 다양한 자료를 수집·분석하여 국내와 중국 관내 및 만주, 노령, 일본 등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을 다수 발굴·포상하여 왔다.
▣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대한민국장 30, 대통령장 93, 독립장 806, 애국장 3,669, 애족장 4,547, 건국포장 866, 대통령표창 2,198명 등 총 12,209명에 이른다.
▣ 앞으로도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등과 기존의 사료 수집 공조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국외 소장자료를 지속적으로 발굴하는 한편, 지방자치단체와 문화원 등과도 긴밀히 협조하여 독립유공자 발굴 작업을 더욱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 금년도 제65주년 광복절 포상자 중 주요 인물의 공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ㅇ 안홍근, 안중근 가문의 15번째 독립유공자 배출
1918년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 조직에 참가하고 그 해 여름 독립단의 일원으로 러시아 적위군과 함께 연해주 일대에서 제국주의 간섭군의 앞잡이였던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시베리아 내전 후 블라디보스톡 수청촌(水淸村) 일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 안홍근(安洪根)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한다.
안홍근 선생은 안중근 의사(1962, 대한민국장)의 4촌 동생으로, 국가보훈처에서 선생의 공적을 발굴하여 포상하게 되었다.
이로써 안중근 의사 가문은 이번 안홍근 선생에 대한 포상으로 그 동안 포상된 안명근(1962, 독립장)·안춘생(1963, 독립장)·최익형(1977, 독립장)·안경근(1977, 독립장)·안정근(1987, 독립장)·안봉생(1990, 애국장)·오항선(1990, 애국장)·조순옥(1990, 애국장)·안원생(1990, 애족장)·안공근(1995, 독립장)·안낙생(1995, 애족장)·조성녀(2008, 애족장)·안태순(2009, 애족장) 선생 등 모두 15분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함으로써 올해 안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그 의미를 더하게 되었다.
...중략
대한민국정책포털 공감코리아| 미디어다음 등록일 : 2010.08.11
문의)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02-2020-5233
http://korea.kr/newsWeb/pages/brief/partNews2/view.do?dataId=155667089
안홍근(安洪根)
순흥안씨 1派30世-참판공파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子
1派31世 1派32世
안덕생(安德生)ㅡㅡ>안기동(安基東)안기선(安基善)안기성(安基成)안기후(安基厚)안기옥(安基玉)안기방(安基芳)
안도생(安道生)ㅡㅡ>안기준(安基俊)안기언(安基彦)안기숙(安基淑)
안무생(安武生)ㅡㅡ>안기철(安基哲)ㅡㅡ>안영희(長女)
안홍근(安洪根)할아버지의 生年과 墓의 기록은없고 1950년 10월 15일경에 북한군에의해 피살되심만을 기록되었네요.....
안중근 가계도
안중근(安重根)의 친인척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유력한 인물이 등장하게 되면 그와 관련된 친인척의 존재가 함께 부각되기도 한다.
유럽의 교회사에서는 역대 교황 중에 친인척 관리를 잘못하여 지탄을 받는 인물도 나타난 바 있었다.
살아있는 권력자가 친인척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는 일은 혈연을 중시하던 전근대 사회의 한 유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친인척 관리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오늘의 우리까지도 친인척 관리를 잘못하여 곤욕을 치룬 인물들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안중근은 죽어서도 친인척 관리에 남다른 역할을 발휘하고 있었다.
‘애국선열’이며 ‘신앙인’이었던 안중근의 모범은 그의 친인척을 채근하여 민족 독립을 위한 바른 길로 내닫게 했다.
안명근의 독립운동
안중근의 친인척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할아버지 대까지는 소급해 올라가야 한다. 안중근의 조부는 아들 여섯 명을 낳았다.
이 가운데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그 세 번째 아들이었다. 남자 형제가 많은 만큼 안태훈은 매우 번성한 집안 출신이었다.
안중근에게 두 명의 백부와 세 명의 숙부가 있었다. 그리고 근자(根字) 항렬의 4촌 형제들이 열한 명이었고,
이들이 소생인 생자(生字) 항렬의 6촌 조카들이 적어도 스물 두 명은 되었다.
안중근의 친인척 가운데 독립운동을 위해 노력했던 주요한 인물로는 안명근(安明根, 1879-1927)을 들 수 있다.
그는 안중근의 중부(仲父)인 안태현의 맏아들이었다.
안명근은 1910년 말에 발생한 ‘안악사건’ 혹은 ‘안명근 강도사건’의 주모자로 등장하고 있다.
안악사건은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해 황해도 일대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금하던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안명근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체포되어 1911년 7월 22일 강도급강도미수죄(强盜及强盜未遂罪)로 종신징역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그가 체포되던 과정에서는 당시 서울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가 개입되어 있었다.
뮈텔 주교는 황해도 신천 청계동에서 선교하던 빌렘 신부를 통해서 안명근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식민지 조선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은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이었던 아카시 장군이었다.
아카시는 일찍이 파리주재 일본공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한 바 있었고, 아마도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듯하다.
그는 프랑스인 선교사 뮈텔 주교와 가깝게 지냈다. 거기에는 물론 조선에 나와 있는 선교사들을 회유하려던 식민당국의 복선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뮈텔은 안명근이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카시에게 직접 찾아가 알려주었다.
물론 뮈텔의 제보가 있기 전에 총독부 헌병경찰에서도 이미 이 사건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뮈텔의 행동에 대해 총독부에서는 특별한 감사를 표시했다.
뮈텔(Mutel 민덕효) 주교
뮈텔 주교의 이와 같은 행동은 안중근 사건으로 인해서 조선천주교회가 일본 식민지 당국자들에게 실추당한 체면을 회복해야 한다는
교회행정가의 입장에서 내린 판단의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서 안명근의 체포는 당겨졌고, 안명근의 독립운동 사건은
이른바 ‘데라우찌 총독 암살미수사건’ 혹은 ‘105인 사건’으로 확대 조작되어 많은 애국지사들이 죽음과 고통을 강요당했다.
그런데 오늘날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일부 인사들은 이 사건을 가지고 뮈텔 주교가 고해비밀을 누설하여 안명근을 고발했고,
총독부로부터 고발의 반대급부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해비밀 누설이라는 주장은 결코 사실이 아니며,
이는 고해비밀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의 잘못된 주장일 뿐이다.
물론 뮈텔 주교는 안명근의 형(刑)이 확정된 다음 그의 석방을 위해서도 노력한 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사건과 관련해서 나타난 뮈텔 주교의 단견은 한국교회사의 어두운 부분으로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안명근은 1926년 가출옥으로 석방되어 신천 청계동에서 천주교 관계의 일을 거들다가
나중에 만주 길림성 의란현 팔호력(八虎力) 원가둔(袁家屯)으로 이주했다. 그는 이곳에서도 천주교 전교에 종사했다.
그러던 중 어떤 신자의 종부성사에 배석하고 나서, 이질에 이환되어 일주일 동안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안명근 사건의 생존인사들과 함께] 백범은 환국후 안명근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고초를 겪었던 옛동지들과 함께 서대문감옥을 방문했다.
백범 왼쪽의 김홍량은 도산과 함께 신민회 주도인물 중의 하나로 백범이 양기탁 주도의 비밀회의에 참석,
황해도 대표를 맡아 신민회 무장투쟁 자금 15만원 모금에 나서자 선뜻 토지와 가산을 내놓은 바 있다.
사진 앞줄 왼쪽부터 김홍량, 백범, 도인권, 둘째줄 왼쪽부터 감익용, 최익형, 한사람 건너 우덕순(1946년 1 월23일 서대문감옥에서)
그 밖의 친인척들
안중근에게 마지막 성사를 집전하기 위해 주교의 명령을 어기고 여순 감옥에 갔던 빌렘 신부는 그 후 동료 선교사들에게 왕따를 당했고,
결국은 조선선교지에서 쫓겨나 프랑스로 추방되었다.
이때 그는 안중근의 사촌인 안봉근(安奉根)의 독일유학을 주선해서 함께 동행하여 조선을 떠났다.
그후 안봉근은 베를린에서 거주하다가 나치스에게 추방되어 이탈리아로 갔다.
이는 안중근의 친인척 중 일부가 이탈리아와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30년대 초 상해에는 안중근의 사촌인 안경근(安敬根)이 있었다.
그는 안중근의 숙부인 안태민(安泰敏)의 맏아들이었다.
안경근은 1918년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바 있고, 1925년에는 중국 운남군관학교 졸업하고 나서,
만주에 세워진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30년 상해로 와서 백범 김구를 보좌하며 항일 운동을 계속했고,
독립운동가인 이회영(李會榮)의 밀고자를 수색하던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자상하고, 재치 있고 인정이 넘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도 자신의 사촌형 안중근처럼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의 선봉에 서 있었다.
한편, 해방 이후에도 안중근의 가문과 연결되는 인물들에 관한 기록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 예로써 우선 안악인 최익형(崔益馨)을 들 수 있다. 그의 아내는 안명근의 누이였던 안익근(安益根)이었다.
그는 처남인 안홍근(安洪根)과 함께 해방 이후 옹진으로 이사하여 옹진중학 서무주임을 하면서 적산 과수원 1만여 평을 매입하여 이를 함께 경작했다.
이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처 후퇴하지 못했던 국군 5인을 자신의 과수원에 숨겨주었다가 1950년 10월에 발각되어 공산군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그해 10월 15일 경 후퇴하던 공산군에게 총살당했다.
안홍근의 셋째 아들은 안무생(安武生)이었다. 안무생은 일제말엽 간도지방의 교우촌 가운데 하나였던 해북촌(海北村)에 살던 중 강도에게 피살되었다.
그의 아내 차로길(車路吉,루시아)은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아예 안로길로 개명할 만큼 안씨 가문의 아내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안 루시아는 남편이 죽자 하르빈으로 이주해서 살았다.
중국에 인민정권이 들어선 1949년 이후 안로길(루시아)은 중국천주교 애국회에 참여를 반대하던 김선영 신부와 임복만 신부를 도와 일하다가
이들이 투옥되자 그 옥바라지를 감당해 갔다.
그러다가 자신도 애국회의 미사 거행을 방해한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안로길은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다음에도 내몽고지방으로 끌려가 20년간 ‘노동개조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무의탁 노인이었던 그는 겨우 1999년에 이르러서야 그 농장을 떠나 하르빈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제 안로길은 90년을 지탱해준 늙은 몸을 누일 방 한 칸을 겨우 마련해서 남편안무생과 시숙 안중근이 기다리는 천국으로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안중근과 그 일가들이 다녔던 천주교 청계동 본당과 교우
안중근의 친인척에게 있어서 안중근은 평생 우러러야 할 사표(師表)였고, 옳은 길을 걷도록 이끌어 주던 길잡이였다.
훌륭한 인물을 배출한 집안의 사람들은 때로는 그 어른 때문에 자신의 행동거지에 제약을 받게 되는 부담을 감내해야 할 때도 있었을 법하다.
그러나 안중근의 친인척들은 대부분 안중근과의 관계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의 삶을 본받고자 했다.
안중근의 조카 중 하나로는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는 독립유공자 안춘생(安椿生)도 있다.
그를 비롯하여 안중근의 가계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은 북풍한설을 마다하지 않고 민족의 광복을 위해 투신했다.
그들은 신고로운 삶을 살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일제의 추적을 당했다.
민족이 해방된 이후에도 그들은 남한정권의 이승만에게 배척당하거나, 북한의 인민군에게 피살되기도 했다.
이들의 삶은 탄압받고 찢겨져 있던 우리 현대사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하나로 엮어 준 것은 안중근이 믿던 천주교 신앙이었고, 안중근이 가지고 있던 민족애였다.
우리에게 안중근과 그 친인척들이 있었음에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교회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조광/ 이냐시오, 고려대 사학과 교수
입력 2008.7.21. 조광http://cafe.daum.net/cchereandnow가톨릭인터넷언론 지금여기
안악사건 [安岳事件]
1910년 12월 안명근(安明根) 등이 황해도 신천(信川)에서 무관학교의 설립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된 사건.
안명근사건이라고도 한다. 국권피탈 이후 서간도로 이주하였던 안명근은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인재를 양성해야 함을 느끼고 1910년 귀국하였다.
그는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황해도의 부호들인 이원식(李元植)과 신효석(申孝錫)에게 기부금을 받았다.
그 뒤로 신천군 발산(鉢山)에 사는 민모(閔某)에게도 기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권총으로 위협하는 등 충돌을 빚은 뒤 자리를 피하였다.
민모는 즉시 이 사실을 일제에 밀고하였고 그해 12월 평양에서 안명근을 비롯하여 배경진(裵敬鎭)·한순직(韓淳稷)·박만준(朴萬俊) 등이 검거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한 것으로 날조하여 관련인사 160여 명을 일제히 검거하였다.
이 가운데 김홍량(金鴻亮)·김구(金九)·최명식(崔明植)·도인권(都寅權)·김용제(金庸濟) 등은 안악에 있는 양산학교(楊山學校)와 면학회(勉學會)에서 애국적인 문화운동에 힘썼다.
일제는 이들에게 모진 고문을 하여 사건을 더욱 확대하고 날조시켜 안명근 이하 16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1911년 8월에 있은 공판에서 안명근은 종신형, 김구와 김홍량·배경진·원행섭·이승길·박만준 등은 징역 15년, 도인권은 징역 10년, 김용제, 최명식 등은 징역 7년,
최익형(崔益馨), 고봉수(高奉守) 등은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최익형 [崔益馨, 1890.1.25~1950.10.15]
황해도 안악(安岳)군 문산(文山)면 원성(遠星)리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해 황해도 지회에서 활동하였다.
105인사건 때 옥고를 치른 후, 군자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모금된 자금을 임시정부로 보내는 등 항일 투쟁에 힘썼다.
1890년(고종 27) 1월 25일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항일 투쟁에 뛰어들었다.
1907년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장지연(張志淵) 등 와해된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청년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해 황해도지회에서 활동하였다.
신민회가 만주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창건하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일제가 안명근 사건(安明根 事件)을 확대해서
1911년 1월 일본 경찰이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다수의 신민회원을 체포하고 고문한 105인사건(안악사건)때 회원들과 함께 체포되어 7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5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인 1921년에는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적십자사 사장으로 있던 처남 안정근(安定根)으로부터 임시정부의 자금 모금을 의뢰받고
나태섭(羅泰燮)동지들과 함께 군자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모금된 자금을 임시정부로 보냈다.
이후 계속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 같은 해 8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두번째 옥고를 치렀다.
1934년 비밀히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로부터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가족을 상하이로 보내라는 밀명의뢰을 받고 귀국한 뒤,
김선량(金善亮)으로 하여금 안악에 거주하고있던 김구의 어머니와 아들을 호송하도록 자금을 제공하는 등 항일 투쟁에 힘썼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학계는 일제시대 독립에 뛰어든 안의사 일가는 40여명으로 추산한다. 이중 서훈자는 안의사를 비롯,
안의사의 동생 정근·공근, 사촌 명근·경근, 조카 춘생·봉생·원생·낙생, 안명근의 매제 최익형, 안춘생의 부인 조순옥 등 11명.
오영섭 연세대 연구교수는 “안의사 집안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천주교에 개종한 것도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요인이 된 것 같다”고 밝혔다.
◇해방 후 통일운동으로 이어져=해방 후 귀국한 안의사의 일가는 대부분 김구의 임정조직과 한국독립당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자료바로가기 링크 아래 권업신문을 클릭하세요
권업신문 : 1913년 / 07월 / 20일
http://search.i815.or.kr/OrgData/OrgList.jsp?tid=ns&id=GU1913072003-08
신문명 권업신문
기사제목 광고 제二四호
발행일 1913-07-20 (俄曆(러시아력)一千九百十三年 七月 九日)
본회에 의연한 제씨의 씨명과 금액을 좌에 게재함.
최덕여 五十전, 최학선 五十전, 박석기 五十전, 고병순 一元, 신원규 一元, 이홍근 五十전, 공대여 五十전, 정망옥 五十전, 신석환 五十전, 정병영 五十전,
최순관 五十전, 김치보 五十전, 신자옥 五十전, 남화실 五十전, 김현섭 五十전, 박완석 二十●전, 신석고 十전, 홍여경 一元, 서상헌 一元, 엄치운 二十전,
이춘삼 五十전, 문호여 三十전, 김창원 三十전, 고진숙 三十전, 안홍근 三十전, 문한락 三十전, 문세홍 三十전, 문정옥 三十전, 문호일 三十전,
이의순 三十전, 김중천 五十전, 신석순 五十전, 김장복 三十전, 이관삼 二十전, 최정보 五十전, 신병헌 三十전, 김성여 二十전, 황일성 五十전, 김치화 二十전,
이영세 一元, 장남극 一元, 박종형 一元, 김기홍 二十五전, 유근여 五十전, 최홍렬 二十전, 한춘식 十五전, 조승렬 二十전, 안창국 三十五전, 이춘삼 一元,
●●국 六十전, 김창오 六十전, 신운경 六十전, 석순보 六十전, 우치세 四十五전, 김주삼 四十五전, 석진보 四十五전, 김용섭 四十五전, 석준봉 四十五전,
김준화 四十五전, 김용기 二十전, 고도일 二十전, 김용택 二十전, 이영실 二十전, ●홍빈 五十전, 나근삼 二十五전, ●춘봉 二十전, 김군● 五十전,
김●순 五十전, 고주삼 三十전, 장남극 二十전, 이치● ●●전, 최●진 五十전, 김●● ●●전, ●●● ●●전, 신석률 五十전, 조●● 三十전, 이●● 二十전,
박●보 二十전, 김병● 三十전, 김인● 二十전, 박교화 三十전, 박●● 五十전, 채문팔 二十전, 김홍범 三十전, 장남홍 五十전, 김용삼 五十전, 김승권 三十전,
김●● 五十전, 이병준 三十전, 전창● 二十전, 신성학 三十전, 김상률 三十전, 강●규 五十전, 김임● 五十전, 김●남 四十전, 김인순 五十전, 김●남 三十전,
김형옥 五十전, 우●하 五十전, 손춘세 一元
이상은 수청(파르티잔스크) 손춘세, 김태익 양씨 수봉
이상 합계 四十五원 五十三전
재二三회 이래 합계 九百四十二元 三十四전
이상 양합 九百八十七元 八十七전
고 이준공 전기간행, 유족구휼 의연모집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에서발췌함
권업신문
-매일신문 중국 하얼빈에서 박병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