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과 고무공을 차며 산을 오르다
나는 유아기인 초등학교 입학 전에 개구쟁이였다. 열 가구도 안 되는 오지 마을에 대여섯 명 쯤 되는 형이나 누나들은 적어도 나보다 너 댓살 위였다. 그들은 학교에 가고 또 집에 돌아와서는 소꼴을 베려가거나 땔나무를 하려가기 때문에 함께 놀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보다 어린 아이들하고만 놀았다. 뭐 특별히 놀 거리가 없으니 그들을 데리고 마냥 산과 들로 쏘다니거나 강에 가서 물놀이를 했다. 동네에 사시는 분들은 작은 아버지 두 분과 외가 집 외에 몇 집이 더 있는데 모두가 한 발 걸러 친인척 관계에 있는 분 들이었다.
나를 따라 다니는 아이들은 대게가 여자 아이였다. 그러니 그들에게 나의 존재는 대단했다. 데리고 다니다 보면 말 잘 듣는 아이들도 있고 좀 삐딱한 아이들도 있다. 서로 싸울 때 은근히 말잘 듣거나 예쁜 아이 편을 들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않은가? 그렇다보면 내가 그들을 때렸다고 거짓말도 하고 더러는 부풀려 말해 나는 하루라도 아버지께 매를 맞지 않고 지나간 날이 없었다.
나는 나와 몇 달 차이로 한 살이 적은 바로 사촌 여동생을 제일 예뻐했다. 나는 항상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바로 동생 집으로 가곤 했다. 나는 무작정 그녀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작은 아버지를 비롯해 모든 가족들이 주로 한방에서 취침을 하였기 때문에 나 때문에 모두 잠을 깼다. 작은 아버지가 방안으로 들어오라고 문을 열어준다. 가끔은 감자나 고구마 같은 먹을 것을 주면서 노래하면서 춤을 추게 했다. 그 노래 제목은 ‘나비야.이며 그 가사는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 노랑나비 흰 나비 춤을 추며 오너라 봄바람에 꽃잎도 방긋방긋 웃으며 참새도 짹짹짹 노래하며 춤춘다 ...”이였다.
내가 그 춤으로 유명해진 것은 12살 터울의 우리 집 장남인 형님 때문이었다. 형님은 명절 때가 되면 나를 작은 집으로 데리고 같다. 작은 집 방이 커서 동내 친척들이 다 모여 하투를 치거나 윷놀이를 했다. 형님은 그들 앞에서 한손에는 양재기, 다른 한 손에는 수저를 들게 하고는 나에게 ‘나비야’동요를 부르며 춤을 추게 했다. 나는 손이 나비 날개가 되어 나비가 날아가듯이 춤을 추었다. “이리 날아오너라.”라고 할 때는 마치 고전무용을 하듯 양손을 쭉 내밀고 나서 서서히 팔꿈치를 굽히며 손바닥으로 가슴을 만졌다. 그러면 모두가 배꼽을 빼고 웃었다. 사실 뭐가 그렇게 그분들을 웃기게 했는지 아직도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아마도 상투를 꼽고 콧물을 질질 흘리며 춤을 추는 꼬락서니가 꼭 어른 품바 뒤에 강통을 들고 따라다니는 아기 품바처럼 보여서 그랬을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았다. 춤을 출 때마다 형님은 얼마인지는 모르나 그 당시 화폐가치로 치면 가장 낮은 사탕 하나 값 정도의 지폐 한 장씩 주었다. 나의 꿈은 어른 주먹크기만한 고무공 하나 사는 것이었다. 그 고무공만 있으면 나의 졸개들이 더 나에게 순종할 것이다. 아마도 공 한번 던져 보거나 차 보자고 별 아양을 다 떨 것이다. 나보다 다섯 살 많은 동네 형은 고무공 하나 가지고 있어 그 형을 따르는 남녀 부하들이 얼마나 많은가?
똑 같은 춤을 열 댓 번 추고 나니 내 호주머니가 빵빵해졌다. 나는 행여나 그 돈을 잃어버릴까 봐 손으로 그 돈을 꼭 쥐고 돌아 왔다. 잠자리에서도 옷도 벗지 않은 채 행여 밤도둑이 훔쳐 갈까 봐 그 돈을 꼭 쥐고 눈앞에 공이 날아다니는 상상을 하다가 새벽에서야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돌차간 호주머니로 손이 갔는데 호주머니가 텅 비어 있었다. 부모님과 형은 일하러 가고 누나는 학교에 가서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안을 아무리 뒤져 봐도 한 장도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식구들 중 누군가가 잘 보관 해 놓았겠지 믿으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누나가 먼저 학교에서 돌아왔다. 그 다음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터에서 돌아 오셨지만 기대는 실망으로 끝났다. 그렇다면 범인은 틀림없이 형이지 않은가.
저녁 식사 무렵에서야 형이 돌아왔다. 그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내 돈 내노라 하니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하냐며 화를 냈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분명 형이 도로 가져갔다는 심증은 가는데 증거가 없다. 나는 그 후로 며칠 동안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형이 혹시라도 그 돈 여기 있다며 내 손에 쥐어 주기를 내심 바랬다. 나에게 베푼 은혜가 흐락이 절대 아니겠지. 형만 졸졸 따라 다니며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 후로 형이 정말 미웠다.
우리 형님은 장남으로 태어나 피나는 고생을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장작을 만들어 팔아 집안 살림을 보탰다. 나에게 준 돈도 바로 장작을 팔아서 저축 해 논 돈이다. 사실 그 돈이 형님 돈이 아니다. 우리 집 생계비다. 형님은 초등학교도 졸업을 한해 앞두고 중도포기 했으나 한학 공부를 많이 해 대단히 유식했다. 얼마나 나를 사랑했는지 결혼 예물인 5돈짜리 금반지와 오리엔트 손목시계도 객지서 공부하는 나에게 필요할 때 팔아 쓰라고 주었다.
나는 33살 때가 되어서야 결혼을 했다. 인생길을 잘 못 찾아 객지에서 많은 고생을 하다 보니 결혼도 늦었다. 형님은 내가 장가를 간다하니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늦장가 드는 동생을 위하여 고향 정읍 산내오지에서 서울 암사동까지 부족한 아파트 잔금을 준비해 가지고 오셨다. 한데 약간의 결혼비용이 부족하다하니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그 돈을 마련해 밤기차로 올라 오셨다. 그리고는 바로 내려가셨다. 오직 완행열차와 버스만 타시고 꼬박 이틀을 왔다 갔다 하신 것이다.
돌아가신 부모 역할을 우리 형님과 형수씨가 다 하셨다. 형님은 딸만 일곱이다. 장손이라서 아들 하나 보겠다고 우리 형수씨 너무 고생 하셨다. 첫째 둘째 딸에 이어 세 번째는 딸 쌍둥이, 그렇게 계속 딸딸 하다가 결국 딸만 7명이 되었다. 누나는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하지만 나도 딸만 둘이고 10살 터울의 막내 남동생도 딸 만 둘이다.
내가 14살 때 동생이 겨우 4살 때 어머니께서는 지천명을 눈앞에 두고 돌아 가셨다. 아버지는 내가 군대 입대 후 4개월 만에 돌아가셔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다. 우리 형님은 평생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며 동생들 뒷바라지까지 다 하셨다.
내가 꼭 성공하여 우리 조카들에게라도 조금이나마 보답을 할여고 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더는 것조차 못하게 했다. 너무 자주 넘어 지다보니 오히려 조카들에까지 피해를 주어 더 부끄럽게 했다. 막내 동생의 사업이 어려워져 집과 사업체를 모두 정리해 주었으나 잘 풀리지 않아 우리 가정이 풍지박살이 났기 때문이다. 그 여파로 하여금 갈 데가 없는 신세가 되었다. 형님께서 조카의 직장 농협에서 상당한 돈을 빌려 월세 보증금을 마련해 주셨다. 지금까지도 그 돈마저 갚지 못해 조카에게 여간 미안하지 않다.
2009년 추석 때 고향에 내려갈 형편이 되지 않아 내려가지 못해 마냥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그해 10월16일 72세에 형님께서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 날 전날에 결혼식장에 다녀오셨다. 평소 약주를 많이 드신 편이라 그 날도 과음을 하셨다. 하지만 형님께서는 과음을 하시는 날은 일찍 주무시고 그 이튿날엔 새벽같이 일어나신다. 그 날도 잘 주무시다가 이튿날 아침에 부엌에 나와 물을 드셨다. 물을 마시고 나서 바깥바람을 좀 쐬고 다시 주무시다가 급성 심근 경색이 발생해 2시간 만에 돌아 가셨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변고에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다. 세상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탈상을 마치고 돌아 설 땐 나도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희한한 것은 임종 며칠 전에 내가 꿈을 꾸었는데 형님이 우리 집 앞 하늘에서 온 몸에 반짝이는 별 옷을 입고 장구를 두드리며 춤을 추고 계셨다. 하도 이상한 꿈이라서 바로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니 그야말로 하늘이 온통 벌떼 같은 별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나의 운명의 비극의 시작은 13년 전에 찾아왔다. 여려 번 넘어지다 결국 작년에는 암수술에다 집까지 경매로 넘어가 하마터면 가족들이 집도 절도 없어 길거리에 나자빠질 뻔했다. 수술을 마치고 병원에 회복 중에 있었을 때 형수씨가 조카들을 데리고 시골에서 올라 오셨다. 형수씨는 치료비에 보태라고 상당히 큰돈을 준비해 오셨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마냥 눈물을 흘리셨다.
복원 수술 까지 다 마친 1년2개월이 지난 현재는 대장 내시경 결과 별 이상은 없다. 하지만 잘라낸 대장 탓으로 수시로 분비물이 쏟아져 항문이 여간 쓰리지 않아 거동이 불편하다. 단 몇 시간이라도 돌아다니려하면 밥을 굶어야한다. 몸이 나으면 제일 먼저 고향에 가서 형수씨부터 뵙고 형님이 좋아 하는 막걸리 한 병 가지고 산소에 가서 형님 앞에 따라 드리겠다. 지금은 항문이 쓰리어 정상적으로 걷지 못하지만 갈지자로라도 조심조심 걸어서 앞산을 종종 오른다. 하늘에 계신 형님과 고무공을 서로 차며 산을 오른다.
형님, 너무 보고 싶습니다. 고무공 꿈을 꾸며 밤새 뜬 눈으로 보냈던 그 날 밤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이제 형님을 미워할 날은 영원히 이 세상에서는 없습니다. 오직 한올지던 날들만 이 가슴에 그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시 한수 올립니다.
나비야, 나비야
내 사는 앞산 6부 능선에 있는 너럭바위에 올라
녹색이 짙어가는 봄을 마시며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노래하며 춤을 추네
춤 한번 추고 나서 갈참나무 한 잎을 따 호주머니에 넣네
양쪽 호주머니가 빵빵할 때까지 계속 춤을 추네
둥근 고무공이 하늘 위를 나네
키 작다고 멸시당한 서러움도 날아가네
형들이 내 공 한번 차보자고 알랑 방구 뀌네
부하들이 내 꼬리 들고 이리저리 따라 다니네
설날 밤 동내 어른들이 모이면
형은 나를 꼭 데리고 가서 ‘나비야’ 를
노래 부르며 춤을 추게 했네
밤새 웃음바다 출렁거렸네
춤을 출 때마다 빳빳한 지폐가 쌓여
내 호주머니가 빵빵 해졌네
어른 머리통만한 공이 밤새 내 머리 위를 날아다녔네
그러다 호주머니에 돈을 꼭 쥐고 깜박 잠이 들었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그 돈이 새가 되어 날아 가버렸네
형은 자기가 아니라고 시치미를 뗐네 ...
랄 라라 노래하며 산을 오르네
형과 공을 차며 산을 오르네
형이 나에게 공을 차며 피식 웃네
형에게 볼을 차주며 나도 피식 웃네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낯 달과 공놀이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