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야학사
거제지역의 야학사는 문맹퇴치와 민족교육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야학운동은 거제지역의 교육열기와 민족교육자들 양성의 역사라고 생각된다. 이는 일본인들의 민족말살정책에 반대하는 민족교육운동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옥포 지역은 진정률씨로부터 “현하 우리 민족의 모든 문제의 해결은 교육에 있음을 자각하고 지난 임술 3월 초부터 옥ㅍ리에서 간이유치원을 설립하고 교실은 자택을 무상 사용케 하며 교원의봉급과 아동의 학용품을 전부 부담하고 교육을 장려하는 바 그 성적이 자못 양호하며 계속하여 최초의 계획을 일정 불변하므로 당지 일반 인민들은 그의 열성을 경봉할 따름이다.”라고 한 신문 기사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전정률씨는 지역에서 교육자로 불리어지면서 기독교인으로 일반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옥포교회의 설립자인 주금주씨도 야학을 설립하는데 노력하였다. 다음 기사를 보면,
“이운면 옥포리 거주 한덕화, 윤치우 두 사람은 교육이 열심하여 건축했던 교사가 두 차례나 비바람에 전복되었던 것을 다시 중수했다 함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마을 유력자인 주금주, 김종윤, 정인균, 이경윤, 진창수, 진맹석, 정만열 등 제씨는 그 두 청년 열심에 감복되어 지난 10일에 리회를 열고 교실수리비 부족액을 부담하기로 결의했다는데 개학기는 9월초순경이라더라. 옥포부락 40원, 조라부락 30원, 낙산부락 30원.” 이라고 적고 있다.
주금주씨는 옥포지역의 강습소가 없어 재산을 투자하면서 아이들을 가르티는데 심혈을 다하였다. 지정률 집사는 옥포지역에 이운공립학교의 분교를 설치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운공립보교에서는 아동의 통학 구역이 광대해 불편이 여간 아니므로 당지유지 사이에 여론이 되어 오던 중 동 면 옥포리에다 분교를 설치코자 실현 운동을 열심히 계속하여 오다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실현이 불가능했는데 금번에 나까시 이운공보교 교장이 분교의 설립의 필요를 느끼고 솔선하여 이란 유지와 노력한 결과 옥포리 예배당 부근에 약 천오백여 평의 부지를 동지 유력자 사이에 양해가 성립되어 한편 교사 건축비 삼천원의 기부금도 대략 완료되었으므로 분교장 설치 인가원을 요로 당국에 제출했는데 삼천원은 내년 1월 중순에는 군 당국에 지참되리라.” 한다고 말하였다.
아울러 진씨는 옥포분교를 옥포지역에 있는 많은 문맹자에게는 필수적이라고 역설하였고, 이에 “이운공보는 아동의 통학 구역이 광대하여 통학상 불편을 느낀 당지 유지들은 이운공보교장 설치운동을 개시하여 노력을 거듭한 결과 건축비 2천원을 수집하여 3일에 대표자 진정률 외 여러 사람이 통영군 당국에 분교 설치를 진정했는데 금년도 내에는 개교”할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옥포분교는 “1934년 4월부터 가교사에서 개학하여 불편한 점이 많으나 기부를 이미 승낙한 사람들이 기부금을 내지 않은 관계로 부지가 확정되지 못하여 교사 건축을 하지 못하는 바 언제나 부지가 확정되고 교사가 신축될지 장래”가 막연하게 되고 말았다.
이러한 문제에 봉착하자 “이운면 옥포 300여 호 주민들은 자제 아동들의 교육을 위해 다년 현안이 되어 오는 동 면 장승포보교 분교장 설치 운동은 그동안 오천 여원 자금으로 분교장 두 교실을 신축하여 방금 백 사십여 명의 학생 아동을 수용하고 있는 바 앞으로 학급 연장의 필요를 느끼고 당지 유지인 진명식 주선 하에 관할 내 430여 호에 매호당 보리 1두, 벼 1두 씩을 거두기로 하여 빈자들은 여유있는 사람이 충당하여 보리, 벼 합계 800여 두를 모았다”고 한다.
옥포지역 민중들의 교육열기를 알수 있는 대목이다. 지역의 유력가이자 기독교인인 진정률, 진명식 집사가 지역 서민과 일반 아동을 위해 힘쓰는 모습은 하나님이 축복한 것이라고 하겠다.
다음으로 장승포지역 민중의 교육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인데, 이운공보교(현 장승포초등학교)는 “수학연한이 4년제 뿐임으로 학부형들은 이것을 유감으로 여기어 각 방면으로 학년 연장운동을 한다함은 기보한 바 거니와 지난 22일 오전 12시에 동교에서 학부형대회를 열고 박성옥씨의 사회하에 어디까지든지 이문제를 실현하도록 노력하기를 결의하는데 동시에 도와 군에 교섭할 위원을 선거하였는데 즉석에서 교섭위원의 여비에 충당하라는 학부형의 연출금도 나왔다더라. 도군교섭위원 김종혁, 박성옥, 비출연자 신용권-금 10원, 이경인-금 5원, 이내인 - 금 2원, 김동보-금 2원” 등을 내어 학연연장을 위해 노력하였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교육이 중요한 시가라 학부모들은 끊임없이 학교측에 요구했다. 이 부분은 지금 교육 열기와도 다르지 않은 양상이다.
한편 아양야학회는 1937년 3월 15일에 설립되었는데, 옥포야학회의 진정률씨가 자금을 투자하였다. 이곳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이 담긴 노래를 가르쳤다.
“조선은 우리가 자란곳 반만년만에 살아온 조선이라 동무야 우리가 젓너의 꽃이니라 이대로 나아가면 하늘이 되네.”
이 노래는 강습회의 김수영 목사가 가르쳤고 그 외에도 “조선농부가”, “조선지리가” 등을 가르쳤다. 이때 아양강습회 내에서 야학을 가르친 r사는 탁철호, 배춘일이며 교육내용은 조선어, 산수, 찬송가 등을 가르쳤다.
또한 주인선씨는 “지금부터 3년 전에 경남 거제도 이운면 장승포에는 문맹에서 헤매는 아동을 광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야학교를 설립하고 교사 이명수, 김인 두사람이 자발적으로 무보수의 교수를 하여 오며 교과목은 조선어, 산술, 일어, 수신, 작문, 습자이다. 일반인사는 교수자의 열성에 감사함을 느끼고 학생들의 열심에 칭찬한다는 데 지금 학생수는 12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하였다.
장승포 지역의 야학회는 ‘어린이 날’을 맞아 대규모의 행사를 펼쳤다.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장승포 노동야학교에서는 오는 5월 4일의 어린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일부터 기념에 대한 모든 준비를 하느라고 분망 중인데 금년 어린이날은 예년보다 대대적으로 하여 여러 단체의 참가자와 후원으로는 거제 청년동맹, 중외일보거제지국이다. 순서-오전 6시 조기회, 오전 10시 기념식 거행(식장 : 장승포야학교), 하오 1시 반 일반 아동 무료 건강 진찰 (장승포야학 교실, 장승포 통제병원), 7시 반부터 제등 행렬.” 등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동부 지역은 “가배리 유지 이잔재, 김용한, 김용철군이 우리가 생활다운 생활을 하자면 문맹을 퇴치함에 있고 문맹을 퇴치하자면 노동야학에 있다는 원대한 뜻으로 지난해 10월부터 노동야학을 가배강습회내에 개최하고 제반준비품은 물론 독본잡기장, 연필 기타 학용품까지 제공한 이찬제군의 의무적 교수로 남녀 약 50명을 수용한다는데 부근인사들은 그 열정에 감복하는 동시에 장래를 축복한다”고 전했다. 동부면 가배리 출신 이찬재는 일반 서민들과 기독교인들의 문맹을 없애기 위해 야학을 설립하였다.
동무면 일단 기성회에서는 위치를 결정한 동부면 공립보교 신설위치에 대해 기성회장 김헌수가 하등 상의없이 통영군수와 타협하여 기정된 저구리를 취소하고 명사리에다 변경했다는 것으로 관계자 양기옥 외 5명이 7일 아침 경남도청을 방문하고 230며의 연명 조인한 진정서를 제출했다. 진정위원의 말에 의하면 김면장은 기성회에서 결정된 위치를 무시하고 부정하게 위치를 변경하여 일반 통학 아동의 편리를 위해 동부면의 중앙지인저루리에다 설치키로 하였다고 한다.
거제 지역의 미중야학운동, 지역청년운동가들로 중심이 되어 일반학생들을 위해 설립된 야학은 많은 호응을 낳았고, 일반 민중들의 교육열은 지금과 못지 않은 열기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청년회 활동과 더불어 지역의 교육문제를 발벗고 나서 민족교육운동에 앞장선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기독청년들은 지역 청년회와 손을 맞잡고 지역교육에 직접참여하여 민족교육운동을 일구어냈다. 당시 기독청년들은 야학운동외 농민, 노동운동에 있어 사상이나 이념을 떠나 민족의 이익을 위해 싸웠던 민족운동가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여러 활동들은 1930년대 말부터 일제의 강압 정책으로 서서히 사멸하고 있었다. 초기엔 문화정책이니 유화정책을 내세우며 조선인을 자유롭게 한다고 했지만, 중국과의 전쟁 이후로 일본은 조선인들, 특히 지역청년운동가들을 더욱 무서운 눈초리로 감시하였고 더욱 탄압을 자행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1920년대 전후 교육운동은 일반 민중들에게 소용돌이처럼 퍼져 각 마을, 교회마다 야학회나 강습소가 설치되었고 지역봉사단 등이 결성되어 농촌활동을 병행하였다. 1930년대 초엽에는 지역청년회를 중심으로 조직적 교육운동과 항일운동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청년운동의 성장기와 야학운동은 항일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공동체운동이었다.
거제 지역의 민중야학과 처년운동에 있어 그 특징을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거제지역의 야학운동가들은 지역청년과 지역유지의 지원으로 야학회를 중심으로 조선어, 반일의식을 교육시키는 주요업무에서 조선인들이 참여하면서 민족교육을 인식하자 사상적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데 깊은 영향력을 주었다. 이는 청년회나 항일운동가들의 지도방침을 따르면서 도단위 청년회나 각 지역청년회의 사회운동과 접목되면서 항일․반제의식을 고취시키느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둘째, 야학운동은 농민,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연초, 하청면은 광할한 농토와 소작농들이대거 거주하고 있었고, 장승포읍 지역은 어업기지로 각광을 받아 조선인 어업노동자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맹인 농민, 노동자들은 신식교육과 일제에 대한 수탈을 무시하지 않았고 직접 수탈당하는 피압박자였다는 데 민중, 노동야학이 크게 늘어났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민중야학의 장소는 대부분 교회 건물이나 지역청년회관내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자유롭게 이루어졌고 민족의식이 담긴 노래를 가르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예는 이운청년회관, 아양교회, 사등교회, 옥포교회 등에서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
출처: 거제도이야기 100선 (거제문화원)
==참고 ==
-거제향교:세종4년 (1432) 고현의 도론골에 창건 그 후 현종 5년 (1664) 거제 서정리로 이관. 명륜당을 설치하여 거제 유생의 강학도장으로 사용하고, 현령 또는 부사등의 정치 자문에 응하였다.
-반곡서원 :숙종 30년(1704) 거제면 동상리에 창건, 고종 5년 (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1971년 복원. 이곳은 우맘 송시열선생이 1차 유배때 거처하던 곳임.
-서당 :우리나라는 선조 18년(1585)소학언해가 발간되어 국민이 볼 수 있는 국민교과서 편찬되었으나 1929년 일제시대 도지사 허가 사항으로 변경되면서 탄압이 극심해지자 점차로 폐쇠되었다. 거제도의 서당은 최초로 어디에 실시되었는지는 몰라도 추론해 보건데 1800년대가 아닌가 싶다.
-사학:우리나라는 1905-10경에 사학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는데 거제에는 1890년년대 어업의 목적으로 대거 입주자들이 몰려 오며따라 장승포에 1905년에 일본인 심상소학교가 생겨나고 1907년 거제, 1908년 지세포.송진, 1910년 칠천도.구조라에도 생겨났다. 그러나 그당시에는 대부분 일본자녀들이 다니고 일부 한국인 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공립학교는 1911년거제에, 1921년 장승포, 1923년 하청, 1930장목,1931사등.연초, 1932년 둔덕.명사 이어서 한면에 1개 학교가 생겨났다.
출처:2002 거제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