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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氣가 모이고 있다 #2
2) 중국의 氣
그러면 이웃 중국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중국인들은 대평원에서 살고 있으므로 氣의 밀도가 낮아 중국 사람들은 氣가 약하다.
이것은 넓은 금속평판에서는 절대로 전기 스파크가 일어나는 일이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평평한 금속판은 전하밀도가 낮으므로 이 금속판에서 나오는 전계는 약하다. 따라서 전기 스파크가 일어나 지 않는다.
전기 스파크는 뾰족한 도체 끝단에서 항상 일어난다.
넓은 평원에서 사 는 중국인은 뾰족한 반도에 사는 한국인보다 氣가 훨씬 약하다.
중국인이 일본군에 의해서 10여 년 동안 학살된 사람은 약 3,0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이 고위층에 있는 일본인 거물을 암살하거나 테러를 행한 대사건을 일으킨 일이 거의 없었다.
한국인의 피살자 수는 36년 동안에 약 3만 명으로 중국인 피 학살자 수의 1,000분의 1에불과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항일활동은 대단하였다. 당시 일본정계의 최고거물인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 의사가, 상해파견 군사령관 시라카와요시노리 대장은 윤봉길 의사가, 당시 서울의 황금정 입구(을지로 입 구)에 있었던 동양척식 주식회사와 식산은행에는나석주 의사가 폭탄을 투척하고, 이봉창 의사는 일본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하여일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대사건 을 일으켰던 것을 보면 중국인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중국인은 氣가 약하므로 중국인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고 있는 등소평 사망 후 중국에 대 혼란이 일어나, 4, 5개국으로 분열될 것이다. 그러면 만주는 자연스럽게 한반도의 영향권에 들어오게 된다. 한국인의 氣가 세다는 것은 앞서도 말했지만 한 국 사람은 한국보다 강한 나라 사람의 호칭에 '놈'자를 붙이나 한국보다 약한 나라 사람을 지칭할 때는 '놈'자 대신에 '사람'자를 붙인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중국의 기가 흩어지는 조짐이 보인다.
전기는 평평한 곳에서는 스파크를 일으키지 못한다.
BR평평한 금속판에는 전하밀도 가 작기 때문이다. 뾰족한 금속 봉 끝에는 전하밀도가 높아 전기 스파크를 잘 일으킨다.
다시 말해서 금속 봉으로 볼 수 있는 한반도의 氣의 밀도는 높다.특히 금속봉의 끝에 해당되는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은 氣의 밀도가 높아 氣가 세다. 중국은 넓은 대륙이다. 따라서 중국의 氣의 밀도는 낮다.따라서 사람의 성격도 만만디(慢慢的)가 된다. 중국의 소는 느려 터지기로 유명하다.중국은 광활한 대륙이다. 이 넓은 대륙에 54개 민족이 살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 도 이 넓은 대륙에 있는 다수의 민족을 완전 통일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현재의 중구 국기의 모양이 붉은 바탕에 큰 별이 하나 있고 그 주위에 작은 네 개의별 이 모여 있듯이 중국은 엉성한 통일 상태에 있다.
그 동안 국기의 큰 별 역할을 한 인물이 모택동, 등소평 등이었다.
모택동과 등소평이 원자의 플러스 핵으로서 여러 개의 전자를 붙들고 있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평평한 평판에 물을 부으면 물 은 골고루 퍼지지 못하고 여기저기 고여 여러 곳으로 흩어져 있게 마련이다.
등소평이 세상을 떠났다. 중국은 서너 댓 개로 분열되어 국가연합으로 될 운명에 있다.
그러면 현재 중국의 사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본다.1989년의 동구 민주화는 중국에 천안문사건을 일으켰다. 이 노도와 같은 민중의 폭발을 공산중국은 감수해야 만 했다.또한 공산중국은 경제의 파탄, 민주화의 움직임, 소수민족의 저항 등 대곤 란을 겪고 있다.1986년 고르바초프는 외몽골(몽골인민공화국)로부터 소련군을 철수시켰다.그리고 외몽골에 지금까지 파괴해 왔던 라마교의 사원(티베트계의 불교로 몽골인의 원래의 종교)을 복원시키고, 라마승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를 세웠으며, 라마교의 전통행사 를 부활시켰다. 이것은 몽골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살리는 것이 목적이다.
옛날 몽골 은 역사에 빛나는 나라였다.원(元)나라 시대에는 대몽골제국으로서 번영하였으며,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세계에 최대의 국가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 몽골의 군사력이 대제국의 질서를 이루었기 때문에 실크로드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 실크로드로 마르코폴로가 북경까지 올 수 있었다.
몽골의 강력한 힘이 있음으로 해서 유럽과 아시아를 결합시켜 동서양의 안정된 유통환경을 만들었다. 또한 몽골은 야사라는 대단히 우수한 성문법(成文法)을 만들었으며 법률적으로 규율이 잡힌 국 가였던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먼저 외몽골의 민족의식을 고양시켜 내몽골(내몽골자 치구)을 자극하였다.당연히 내몽골은 동요되어 외몽골과 더불어 대몽골제국을 건설 하여야겠다는 의욕을 일으켰다.원래 몽골이 차지하는 지역은 중국의 동북단에 위치하는 흑룡강 성까지를 말하며,현재 중국이 지배하고 있는 대흥안령을 포함한다. 중국에서 이 내몽골이 떨어져 나가면, 단번에 공산중국의 해체에 연결된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고르바초프는 몽골인들이 쉽게 한데 뭉치는 민족이라는 것을 역사를 통하여 알고 있었다.그는 몽골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양시킴으로써, 이것을 중국 각 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소수민족의 대북경정부 이반운동(離反運動)으로 연결하는 하나의 도화선으로 사용하였다.
원래 원나라는 몽골이 중국에 세운 나라였다. 중국 에 그 주변의 이민족이 흘러 들어온 것은 이민족이 중국을 통치했을 때다.예를 들 면 청나라 시대에는 여진족·만주족이 중국을 다스렸기 때문에 만주인이 중국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내셔널리즘은 내몽골에서 몽골어의 학습을 금지해 왔다. 만주에서 는 만주어를, 티베트에서는 티베트어의 학습을 금지해 왔다.이로 말미암아 오늘날 만주지방에서 만주문자를 읽고 쓰고, 만주어를 말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북경정부의 말할 수 없는 주변민족에 대한 탄압은 폴리세트리즘(Polycentrism), 즉 반중화사상(反中華思想)에 의해서 지금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내몽골 이외에 분리·독립 요구를 부르짖고 있는 곳으로는 티베트, 신강웨 이우얼의 두 자치구가 있다. 티베트는 원래 독립국이었다.티베트가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서기 600년경이며, 이때 티베트는 대제국을 이루고 있었다. 현재는 대단히 가난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어려우나 이 지역이 그토록 군사적으로 확장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티베트가 대단히 훌륭한 통치를 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티베트 최후의 왕은 티베트에 불교를 들여온 란다루마 왕이다.그는 서기 842년에 한 불교 승려에 의해 암살되었으나 10세기에 이르러 불교는 전역에 널리 보급되었다. 그리고 당나라 시대에도 티베트는 독립국으로 있었다. 그러나 1207년 칭기즈칸 이 티베트를 보호국으로 만들었고 그 후 중국을 통치한 원나라는 티베트에 대해 종주국이 되긴 했으나 주권을 뺏지는 않았다.종주권이란 내정, 외교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으로 티베트의 경우 외교와 군사를 원나라에 맡겼으나, 내정 즉 주권은 항상 독립해 왔다.이 상태가 공산중국이 티베트를 정복할 때까지 지속되었던 것이다.현재 중국은 티베트를 완전히 자기들의 주권 하에 두고 있다. 티베트는 원나라 시대에는 현재와 같이 종교국이었다. 그리고 명나라(1368∼1644) 시대에는 다시 왕국이 되고,그 후 다시 종교국이 되는 것을 반복해왔다. 1475년에 는 왕가가 없어지고 원나라는 법왕에게 '다라이라마'라는 칭호를 주었으며다시 왕족지배가 있은 후, 1642년 이후 1959년까지 다라이라마에 의한 지배가 계속되었다.결국 티베트는 현재 중국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중국의 속방 이었던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공산중국이 된 후, 1951년 중국은 티베트를 해방시켰다고 선언했으나 이것은 외교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의 증거로 1959년부터 거의 매년 티베트족 의 반란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1965년 중국은 티베트를 자치구로 만들었으나 중국의 침략은 일층 강화될 뿐이었다. 다라이라마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지금까지 120만의 티베트인이 학살되었다고 한다.더욱이 중국은 티베트의 동부를 티베트 자치구에서 제외해 버렸다.이와 같이 종교, 민속, 국가의 3개의 개념이 겹쳐 있는 곳에서는 이스람교권과 마찬가지로 통치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소련은 이미 이것을 알고 손을 떼었으나 중국은 변함없이 무모한 에너지를 쏟아 넣고 있는 것이다.
팽덕회(전국방장관)는 1950년 수원(綏遠) 지구(현재의 내몽골자치구)에서 4만 8,000명의 회교도(이스람 교도)를 학살한 것을 다음 해 서북군정치위원회(西北軍政 治委員會)에서 자랑스럽게 보고했다.이와 같은 사람들이 정부·군의 중추에서 활동 하고 있는 이상 공산중국은 소수민족의 통치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없다. 이와 같은 잘못을 중국은 신가웨이우얼 자치구에서 범하고 있다.
중국은 신강을 한족화(漢 族化)하려고 수많은 한인(漢人)을 투입하고 있으나 한족화는 성공할 수가 없다. 또 한 티베트도 한족화하려고 하나 티베트인만으로도 살기가 어려운데 한족이 유입되면 경제는 더 악화된다.신강에는 중국이 1963년 상해에서 10만의 청소년을 투입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 중 1만 5,000명이 탈출해 도망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생활고 가 원인이다.그럼에도 중국은 신강에 2억의 인구를 식민하겠다고 공언하고 있으나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중국인은 안이한 생활을 좋아하는 국민 이다.따라서 중국인은 내륙보다 비교적 풍부하고 안이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연안 지대로 유출해 간다. 즉 유민이 발생한다.예를 들면, 사천성 사람들은 광동성으로 흘러 들어간다. 공산중국은 이와 같은 현실과 역사를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정 책을 세우고 있다.그러므로 중세·근세에 있어서 한민족 중심주의의 중국은 하는 일마다 실패해 왔다.역사적으로 보아서 중국이 대국(大國)으로 있었던 때는 언제나 이민족이 정복하고 있었을 시대이다. 한민족은 대체로 중원에 소규모로 뭉치는 민족으로서 이민족 을 지배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중국의 중화사상이 이것을 저해하기 때 문이다.이민족이었던 만주족의 청조(淸朝)까지도 중화사상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신강에서 실패했다. 이 시대에 신강에서는 항상 회도교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황제로 권세를 휘두른 건륭제(乾隆帝)는 회교도의 수모자(首謨者)의 목을 봉밀에 담가서 북경으로 가지고 오게 하였다고 한다. 동시에 수많은 회교도를 학살 하고, 잘라 낸 이들의 귀를 큰 바구니 23개에 담아오게 하였다고 한다.이와 같이 해서도 만주족은 신강을 통치할 수 없었다.중국이라는 나라는 그 거대한 체구에 맞지 않게 의외로 취약한 나라이다.외압을 가하면 간단히 붕괴할 것은 용이하게 상상할 수 있다.이런 관점에서 보면 등소평의 사후 중국의 중앙에 혼란이 발생하면 공산중국으로 부터 티베트는 완전히 독립하고, 그리고 신강웨이우얼, 내몽골, 만주는 북경의 지배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결국 현재의 중국 국경을 형성하고 있는 각 성, 각 지역은 북경의 공산당 지배에 등을 돌리게 된다.몽골이 통일되고 티베트·신간웨이우얼이 분리 독립되면 단숨에 중화인민공화국은 해체될 것이다. 이미 독립국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는 광동성은 북경에 관심이 없다.
이 지역은 공산당의 최고 간부였던 엽 검영의 힘이 강대했기 때문에 북경의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않았던 곳이다. 경제적 인 자주 기능이 상당한 정도로 주어지고 있고,연안지대인 데다가 홍콩에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을 얻어 경제적인 발전을 눈부시게 해 왔던 곳이다.
이 광동성이 홍콩 을 수중에 넣고 독립하려는 것은 자명한 이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소수민족을 다수 포함하고 있는 사천성(四川省)도 북경으로부터 분리, 성내(城內)에서 각 소수민족이 각각 국가를 형성, 분산될 것이다. 이것은 발칸반도를 연상하면 된다. 이와 같은 북경 이탈의 조후(兆候)는 중국 각지에서 나타나고 있으며중화인민공화국이 무너져 작아지는 것은 시간적인 문제이다.
중국이 이와 같이 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① 등소평을 중심으로 했던 공산중국의 간부들은 역사의 흐름을 읽지 못한다.
한 민족(漢民族)이 제일이라는 내셔널리즘의 시대는 종언(終焉)을 고하고 시대는 바야흐로 유니버설리즘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 이것을 모르고 몽골, 티베트, 신강을 한 민족화 하려는 것은 시대적 착오이다.
② 철학이 없는 중국인은 이권만을 추구한다.
나라가 바뀔 때는 매번 이권쟁탈전 을 벌였다.
근대사에서 보면 국민당 시대의 장개석 일족이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송일족(宋一族)도 같이 막대한 부(富)를 모은 예가 있다.
모택동도 마찬가지다.중국에서는 항상 권리가 우선하고 한번 잡은 이권은 절대 놓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은 등소평뿐만 아니라 공산당 간부들은 자기들의 자녀들을 홍콩이나 미국으로 도피시키고 있다. 또한 스위스 은행에는 공산당 간부들의 예금 총액이 늘어난다고 한다.그 정도의 이권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쓰기 때문에 시대나 역사의 흐름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러면 왜 중국인들이 이권을 따라 움직이느냐 하면 중국인들은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철학이 없는 대신에 윤리 학(倫理學)이 있다.윤리학이라는 것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마찰 없이 품위 있게 살아갈 수 있는가를 가르치는 것, 그 이상은 아니다. 이것은 유교로 대표 된다.이 유교조차 내던진 공산중국은 물질만능주의자의 집단으로 되어 버렸다.
③ 중국에는 54개의 민족이 있다.
그런데 사천성에만 해도 그만큼의 소수민족이 있으므로 엄밀히 세어 보면 한이 없다.몽골인은 중국 사람이지만 한족은 아니다.신강에 사는 민족도 중국인이지만 한족은 아니다. 티베트인도 마찬가지로 한족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중국이 해 온 것을 보면 한민족과 이민족은 매사에 화합을 못하고 적대시하였고 한민족(漢民族)끼리만 뭉치는 방향으로 해 왔다. 천안문사건 이후 서방측으로 탈출한 여성지도자 시령(柴玲)은 연방제 공화국을 중국에 만들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 내용은 내몽골이나 신강, 그리고 티베트를 독립국에 가까운 형태로 하고, 나머지의 중국 각 성(省)에 고도(高度)한 자치권과 상당 정도의 주권을 주어 연방제 공화국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러시아형의 연방제 주권공화국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중국이 선택할 길은 두 개 이다.
① 연방국가
중국의 27개성 각각에 자치구를 인정하여 고도한 자치권을 행사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미국형의 United States이며, 대외적으로는 중국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② 국가연합
각 성, 각 자치주가 독자적인 주권을 갖는 독립국가가 되며, 이들의 상부기관으로 는 각국 상호간의 연결을 담당하는 연락기관을 두는 방법이다. 이 경우에 광대한 국토와 인구를 갖는 중국은 소멸하는 것이 된다.
중국은 결국 ②의 국가연합의 길을 갈 것이 틀림없다.
실제로 해체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중국에서는 이미 공산당의 영향이 희박해지고 있다.
중앙정권의 힘이 약해지면 자연히 지방은 자치체제가 강화된다. 그러면 공산당 지배 후에 오는 국가 형태는 어떻게 될까? 중국에는 해방군이 7개의 대군구(大君區)로 배치되어 있다. 이것이 기축(機軸)이 되어 국가연합으로 이행될 것이다.
중국대륙의 새로운 틀은 크게 나누어 다음과 같다. ·
대몽골제국 : 내외몽골의 통일 ·
티베트법왕국 : 티베트 자치구 독립
·사천공화국(四川共和國) : 성내(省內)의 각 소수민족으로 형성된 지역 연합국가
·광동공화국(廣東共和國) : 홍콩과 통합
·복건공화국(福建共和國) : 대만과 통합
·동Turkestan제국 : 신강 Uigur 자치구와 소련연방 내의 Turkestan, Uzbegstan 등과 통합
중국의 내륙부(內陸部)에서 각 성이 고도한 자치권을 획득하여 독립국가의 형태 를 취해 가고 있다. 그리고 북경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국가의 이익을 고려하여 지역연합을 운영할 것이 필연적이다.
결국 '북경이여, 잘 있거라'가 된다. 역사의 필연 은 아시아를 재편(再編)하여 한국을 중심으로 한
아주공동체(亞洲共同體)가 실현될‘ 것이다.
3) 일본의 氣
그러면 이번에는 옆에 있는 일본의 경우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일본은 바다(氣의 절연체)로 둘러싸여 있는 섬으로 되어 있어서 기학적(氣學的)으로 보면, 일본은 일종의 콘덴서로 볼 수 있다.
콘덴서는 전기를 충전하면 전압이 자꾸 올라가다가 어느 한계치를 넘으면 절연이 갑자기 파괴되면서 Break Down이 일어나 콘덴서에 담 겼던 전기(氣)가 다 방출되어 거의 제로 상태가 된다.(예 :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지금까지 氣를 충전만 하고 방출에 인색하였다. 따라서 일본은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해서라도 계속적으로 충전되는 氣의 적당량을 주변국에 방출하여, 2차 대전 때 피해를 주었던 여러 나라와,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는 개도국을 원조하여 Break Down을 방지해야 할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콘덴서에 氣 가 계속적으로 충전되어 다시 Break Down이 일어날 것이다. 명치유신(1867)부터 2 차 대전 패망한 1945년까지를 Break Down의 한 주기(78년)로 본다면 앞으로 27년 후가 위험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원래 일본의 氣는 백두산의 氣가 부산지역에 모여 한반도에서 최강상태에 있는 氣(陽)가,마주 보고 있는 일본의 야마구치(山口)현의 조슈(長州)를 중심으로 氣가 유도된다.따라서 야마구치현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長州之身)를 비롯한 일본의 정계를 이끄는 거물이 명치유신 이래 수없이 나왔으며, 한반도의 남단을 마주 보고 있는 구주에서도 氣가 유도되어 사쓰마(薩摩)지역을 중심으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비롯한 일본을 이끄는 거물이 많이 나왔다. 최근에는 무라야마(村 山), 호소가와(細川)등이 나왔다.
일본에 유도되는 氣는 유도전기 성질에 의해서 크기는 같고 氣의 극성이 반대로 생긴다.
따라서 일본은 한반도와 상충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막부를 넘어뜨린 다음 곧 정한론을 주장하였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은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이토(伊藤)가 1910년 사이고의 숙원을 이루었던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氣의 극성이 반대로 되어 있으므로 역사상으로 상충의 관계에 놓여 있다.이와 같은 불화합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한반도와 일본에 대교 놓아 연결하여 氣의 극성이 동일하게 하면 상충하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이렇게 되면 일본에 氣가 과 충전되어 Break Down이 생기는 불행도 예방될 것이다. 원래 일본민족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므로 서로 반목하면 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서로 협조하고 화합하면 우리가 21세기에 세계의 중심 역할을 할 때 더욱 효과적으로 하게 될 것이고, 더욱 강력한 주도권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일본의 氣가 꺾기는 조짐이 보인다.
일본의 속사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일본은 미국의 엔고압력(圓高壓力)에 눌려 수출액은 증가하고 있으나 실제로 수출물량은 엔고 영향으로 감소한다.
엔고로 인하 여 단가가 올라가므로 바이어들이 구매하는 물량이 줄게 마련이다.팔리는 물량이 줄면, 공장의 생산라인이 전 가동
을 못하게 된다. 그러면 회사의 인원을 줄여야 되고 사회적으로 실업자 문자가 대두되고 국민의 구매력이 떨어진다. 그러면 구매력이 없는 일본시장을 보고 자연히 수입물량은 줄이게 된다.
수출금액은 증가하고 수입액은 줄었으니 자연히 무역흑자는 늘게 마련이다.무역흑자에 비례해서 엔고압력은 더 강해진다. 한때 일본도 버블경제 현상으로 부동산, 지가(地價)가 막 뛰어오른 적 이 있었다. 일본은 이 과열된 버블경제를 진정시키기 위해 부동산세를 강화하였다.이로 인해 지가는 폭락하고 대지를 담보로 하여 대출하였던 은행들은 대 곤란을 겪었으며 이들 중에는 도산한 은행들도 많다. 일본은 엔고압력에 살아남기 위해 조기 퇴직제, 연공 서열제를 무시하고 실력위주의 직제개편, 전통적인 종신고용제를 폐지하는 등 대변혁이 일어나고 있으며 경기도 상당히 침체되어 있다. 일본은 일본의 생명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첨단과학 연구개발비를 어디서 염출 할 것인가를 걱정하고 있다. 핵융합, 우주개발, 초전도 등 이제부터의 연구개발은 연간 조(兆) 단위의 연구비가 드는 것뿐이다.이러한 대 연구 프로젝트에 배당할 자 금의 여유가 없으며 일본은 영원히 채산이 안 맞는 유산을 자손에게 남겨주게 되어 있다.
세이칸(靑函 )터널(아오모리-하코다데 사이의 해저 60㎞터널), 혼시가교(本四架橋 : 本-四國 사이에 놓은 대가교), 도쿄만가교(東京灣架橋), 이것들을 사용하면 할수록 돈이 든다.영원히 상각(償却)이 안 되며 매년 막대한 유지비만 부담이 된다. 말하자면 일본의 현재는 미래를 먹어 없애며 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본은 장차 대연구 개발프로젝트에 투자할 돈도 없어질 것이다. 일본은 2000년대의 후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큰 짐을 떠맡기는 운명에 있다.
3. 위대한 쥬신족(朝鮮族) 동이족(東夷族)인 우리는 쥬신족(朝鮮族)이다.
쥬신족은 지금부터 약 6,000년 전에 는 바이칼 호부터 남쪽의 양자강까지의 남북 5만 리,서쪽 몽골사막부터 동쪽의 황해까지 2만 리의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였던 위대한 민족이다.
동이족의 대표적인 위대한 인물로는 동양철학인 주역(周易)을 창시한 복희(伏羲), 농사법과 한의학, 경 제, 음악 등을 창시한 신농(神農), 유교의 개조(開祖) 공자(孔子), 중국 역사상 가장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강태공(姜太公) 등을 들 수 있다.
대다수의 한국 사람은 식민 지 사관에 젖어 우리 조선족은 한때 부여, 고구려를 거쳐 만주를 지배했다가 지금 은 한반도에서 두 쪽으로 갈라져 살고 있는 약소민족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쥬신족의 氣가 쥬신족의 사상 절정기에 있었던 부여 이전의 역사는 전혀 모르고 있다. 이것은 중국이 고구려가 패망한 후에 우리의 상고 때의 찬란했던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한 자료를 인멸 은폐하였으며, 일본도 1910년에 한반도의 성 공적인 식민지통치를 위하여 20여만 권의 쥬신족의 고대사서(史書)를 소각했기 때 문이다.말할 것도 없이, 이 때 소각된 사서들은 우리가 읽어보면 프라이드와 힘을 느끼게 되는 것들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족사'(朝鮮族史)는 일제가 의도적으로 남겨놓은 사대주의 사상에 절어 있던 김부식, 일연이 쓴 『삼국사기』『삼국유사』등에 근거한 식민지 사관이다. 즉 식민지사관에 의한 조선족사는 "조선족은 양같이 양순하여 한 번도 남의 나라를 침범한 일이 없고 패기가 없으며, 강대국에게 눌려만 살아 왔으며, 남 을 헐뜯고 단결을 전혀 하지 못하는 약소민국이다."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쓴 신라를 중심으로 한 쥬신족의 일종의 지방사(地方史)이다.
신라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하여 중화족인 당나라를 집안싸움에 끌어들여 동족인 백제를 멸망시킨 후, 중국식을 따르고 모방하며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로 행세하였다 .한족(漢族)의 적을 자신들의 적으로 삼아 한족와 맞서 싸운 만주지방의 우리 동 이족(金,淸)을 모두 오랑캐라고 칭하며 우리 쥬신족으로부터 분리시켜 놓았다.우리 쥬신족은 파미르고원에서 발상(發祥)하여 바이칼 호를 거쳐 백두산 쪽으로 이동 정착하였다.쥬신족의 氣의 발원지인 백두산에 도착한 우리 조상들은, 백두산 을 중심으로 집단 정착하여 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사상(史上) 쥬신족의 氣의 절정기에 있었던 기원전 6,000년경에는 홍산문명(鴻山文明)을 일으키고 이어 남쪽으로 내려와 황하문명을 일으켰다. 우리 조상들은 이미 서기전 4,000년경에 배달나라를 세우고 농경민족인 중화족을 제압하여 대제국을 세웠다. 氣의 상승기에 있던 우리 조상들인 동이족은, 이미 치우천황(蚩尤天皇)이 기마민족인 쥬신족을 총동원하여 대 장정을 감행함으로써 활동 무대를 만주에서 황해 연안을 따라 산동반도, 하북성 일대로 진출하였다. 쥬신족은 이어 남쪽으로 양자강 이남까지, 서북쪽으로 몽골, 동북 동남쪽으로 시베리아, 전(全)만주, 한반도 및 일본열도까지 지배하였다.쥬신족은 새를 숭상하였으며, 특히 봉황(鳳凰)을 상서(祥瑞)로운 새로 받들었다.
한편 중화족은 용을 길하게 여겨 받들었다.
중화족은 용을 길하게 여겨 받들었다.따라서 동양의 고대역사는 봉황의 쥬신족과 용의 중화족과의 대패권 다툼의 역사로 볼 수 있다. 쥬신족은 본래 기마민족으로 민족이동이 빠르고 용이하여 발해 연안으로 황해 안을 선점하여, 중화족을 내륙 쪽으로 몰아붙여 봉쇄하였으며, 중화족은 화산(華山) 을 중심으로 내륙 산간지역에 갇혀 바다를 볼 수가 업었다.
우리 동이족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만주 벌판이 주 활동무대였던 관계로 철광 과 양질의 유연탄을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철의 제련법을 개 발하여 철제무기로 무장한 우리 동이족(쥬신족)은 기병을 주력으로 하여, 석제와 목 제 무기로 무장한 중화족을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다.이것은 철(鐵)의 고자 (古字)가 쇠금변(金)에 동이족의 이(夷)자를 쓴 철( )이라는 글자였던 것을 보더라도 용이하게 알 수 있다. 즉 철(金夷)이라는 글자는 동이족인 쥬신족이 세계에서 최초 로 금속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이후 고구려가 당에 패망한 수에 중화 족이 철 鐵)자로 바꾸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화족은 쥬신족을 보고 동이족이라고 불렀다.
이(夷)자는 옥편에 '오랑캐 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설명이다. 다시 말해서 이(夷)자는 크다는 뜻의 큰대(大)자를 활궁(弓)자에 덮어씌워 만든 글자로서 큰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중 화족이 보기에는 쥬신족이 상고 때 동쪽에 살면서 말 잘 타고 큰 활로 맹수사냥을 잘 하는 민족이었으므로 동이족이라고 불렀다. 이런 연유에서 오늘날 올림픽 양궁 경기에서 금메달을 종목별로 다 따는 것은 지극히 당연지사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농경을 주업으로 하던 중화족은 의심이 많고 왕래가 없어 발전 속도가 늦고, 순장(殉葬) 풍습 때문에 백성을 병사로 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동이 적은 중 화족은 문자를 발달시키고 인구도 빠른 속도로 증가하여 연나라 때 이르러 그 숫자 가 동이족의 10배 정도로 팽창하여 동이족은 서서히 중원(中原)에서 밀려나기 시작 하였다.
서기전 3898년에 개국한 환웅시대(桓雄時代)는 그 나라 세력이 강대하여 영토는 전술한 바와 같이 바이칼호부터 남쪽으로는 양자강까지 남북 5만 리, 서쪽은 몽골 사막부터 동쪽의 황해까지 동서 2만 리, 이 광대한 땅이 모두 우리의 것이었으며 환웅의 나라는 1565년간 지속되었다.
서기전 2333년에 환웅왕조(桓雄王朝)를 마감하고 도읍을 백두산 아사달로 옮겼다. 이때 나라 이름을 단군쥬신(檀君朝鮮)이라 하고 이 해를 단기원년(檀紀元年)으로 하였다.단군쥬신은 만주벌판 및 시베리아를 강한 힘으로 다스렸으며 그 통치기간이 2,096년이나 되었다.그 후 북만주에 예로부터 자리 잡고 살던 가우리(高句麗)사람, 몽골족을 비롯한 주변 종족을 제압하고 북부여 나라를 세웠다.부여 이후는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등을 거쳐 쥬신족의 氣가 서서히 하 강하다가1950년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의 氣는 상승기인 6,000년의 대주기와 360년 의 소주기가 다 같이 다시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불과 40여 년 만에 세계의 170여 개국의 하위권에서 일약 UN의 이사국,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을 건설하였다.
4. 결론
백두산의 氣의 변화주기, 즉 한반도에 발생한 氣의 변화주기를 생각해 보면, 최근 한반도의 氣가 최소의 상태에 있었던 때가 6.25동란이 일어난 1950년이다. 이미 앞 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1950년부터 180년간은 계속 올라가고 180년간은 서서히 내려간다.
한국의 氣는 1950년부터 올라가기 시작하여 50년이 지나갔다. 따라서 아 직도 130년 간 상승하게 되어 있으므로 21세기는 한국이 주도하는 세기가 되는 것 이 명백하다.氣의 상승 커브에 간혹 플럭추에이션(fluctuation)이 있어 우리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때도 있으나 대세는 역시 올라가고 있다.
즉 우리 민족은 급속도의 발전가도에 있다.1960년 초에 5,000만 달러밖에 수출하지 못하였던 것을 지금의 수출량에 비교해 보면 혁명적인 발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한반도의 급속한 발전에 세계가 놀라고 있다. 갑자기 국교가 넓어지면서 UN이사국이 되고 OECD 회 원국으로 가입하여 국제적으로 그 위치가 높아지고 있는 것은 한국의 국력이 신장 한 결과이다. 우리 쥬신족은 氣가 센 곳에 태어나 천부적으로 氣가 강하고 창조력도 뛰어난 민족이다.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고 거북선 등을 발명했다.
우리민족은 음(작대기 둘), 양(작대기 하나)과 천(○), 지(口)의 이론의 조합으로세계에서 가장 잘된 문자 '한글'을 창조했다.
일본의 가다가나와 히라가나는 한자의 획을 따서 만든 글자이고 글자 수도 각각 51개나 되어 배우기가 불편하다.
한글은 영어 알파벳보다도 2자가 적은 24자로 모든 음을 나타내고,받침으로 뜻도 표시하게 되어 있는 세계적인 걸작이다.
일본인은 어떤 사물을 보면 곧 본체에 아이디어를 첨가하여 편리하게 만드는 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
가다가나, 히라가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국 민족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창조적인 일에 소질이 있는 민족 이다.
2,000년대는 기존의 과학과 기술은 그만하고 새로운 과학기술을 창조하고 새로운 윤리,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야 하는 시대가 된다. 다시 말해서 창조력의 경쟁 시대가 된다. 이 새로운 시대에 가장 잘 맞는 민족이 氣가 센 한국 민족이다.
편집 정리 2012. 9. 29 鍊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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