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양원교회는 10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1909년 광주 나병원(癩病院)이 한센인 전도를 위해 교회를 세우고 그곳 지명을 따서 봉선리교회당이라고 했다. 이 명칭은 1925년 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로 이전할 때까지 사용했다.
1925년에 이전을 시작한 애양원은 1928년에야 완료할 수 있었다. 이전을 한 율촌면 신풍리의 이름을 따라 교회 이름을 신풍교회당이라고 했다. 예배당이 이주 마을의 중심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초라한 모습에 성도들은 마음앓이를 해야 했다.
그를 즈음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재미교포 석은혜란 독지가가 예배당 건축비로 거금을 보내겠다는 거였다. 건축을 한 뒤, 감사하는 뜻에서 교회 이름을 석은혜 예배당이라고 불렀다. 한센병에 대한 도타운 애정과 깊은 이해 없이는 선뜻 나올 수 없는 선행이다.
애양원의 초석을 놓은 사람은 윌슨(Robert M. Wilson, 禹日善) 박사다. 1935년이었다. 윌슨은 본원의 이름을 환우들에게 공모했다. 많은 응모 이름 가운데 애양원이란 이름을 채택했다. 사랑 애(愛), 기를 양(養), 동산 원(園) - 사랑으로 돌보는 동산! 따라서 교회 이름도 자연스럽게 애양원교회가 되었다.
이때 애양원 원장은 윌슨 박사였지만 애양원교회 담임은 김응규 목사였다. 김 목사는 1931년에 이 교회에 부임했다. 한국인으로는 초대 담임이 되는 셈이다. 2대 담임이 1939년 7월 14일 부임한 손양원 목사이다. 손 목사는 1950년 9월 28일 순교할 때까지 애양원교회 담임목사였다.
11년을 애양원교회 담임목사로 목회를 했다. 이 중 5년을 감옥에 있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써 사회를 어지럽게 했다는 것이다. 우상숭배의 죄를 범할 수 없다는 신앙적 양심을 일제는 항일로 간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한 것이다. 영어(囹圄)의 기간을 제외하면 손 목사의 애양원교회 목회는 6년밖에 안 된다.
애양원교회 이름이 성산교회로 바뀐 것은 1982년이었다. 제4대 담임 윤성화 목사 때였는데,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한 배려의 마음에서였다. 또 한센인 환우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비한센인 성도가 많아지는 것도 명칭 변경의 한 사유가 되었을 것이다. 성산(聖山)은 거룩한 동산이란 뜻이다.
6대 이광일 목사는 애양원교회의 역사와 손양원 목사의 글들을 정리하는데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손양원의 신학을 학문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다. 박사학위 논문도 "산돌 손양원 목사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였다. 그는 손양원 목사의 설교들과 체형조서를 정리해 출간하기도 했다.
애양원교회의 이름 변천 고(考)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봉선리교회(광주)⟶신풍리교회(여수)⟶석은혜예배당⟶애양원교회⟶성산교회. 이광일 목사 소천 후 지금은 7대 정종원 목사가 부임해서 역동적으로 사역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