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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 11장 28-30절
설교제목 : 멍에 메고 배우기
값싼 회개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오늘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입니다. 옛 조상들은 새로운 계절의 시작을 위하여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란 말을 대문에 써 붙였습니다.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한다는 뜻입니다. 농사의 시작점인 입춘에 한 해의 풍요를 기원하기도 했습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봄에 풍요로움으로 삶을 경작하기를 마음먹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따뜻한 새 봄과 같은 소식이 많이 들려야 하지만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는 사건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요즘 한 여성 검사의 성추문 사건의 폭로로 조직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권력과 조직의 민낯의 실체를 목격하게 됩니다. 강자가 짐 지우는 차별과 착취, 멍에를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듯 참으며 살면 괜찮을거라 했지만 그러는 사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여전히 그와 같은 고통은 독버섯처럼 끊임없이 번져갈 수 밖에 없습니다. 더욱 공분을 사게 한 것은 그 사건에 연루되었던 한 남성 검사가 대형교회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며 간증하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회개가 무언인가?” 고민을 하게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마 5 23-24)고 일러주셨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고 용서를 구하기 전에 누군가를 힘들게 하고, 원한을 품게 했다면 그에게 먼저 가서 용서를 구하라는 뜻입니다. 회개는 수직적인 하나님과 나의 문제이기 이전에 나와 너의 문제입니다. 나와 너의 화해가 선행되지 않는 자기만족과 위로를 위한 값싼 예배는 의미없는 몸짓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몸소 가르쳐주신 삶은 기존에 가지고 있는 나의 상식과 가치관, 누군가에게 길들여진 이론이나 전통적으로 학습된 믿음의 체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의 뜻이 실제적으로 나의 경험과 삶으로 번역되어지는 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이 무엇이고,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곡진하게 배워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오늘 예수님은 인생을 가리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라고 하십니다. 인생은 고(苦)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수고해야 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수고로움은 인간의 삶의 근본입니다. 갓난 아이조차도 울어야만 생존이 가능합니다. 울지 않으면 굶어 죽을 것입니다. 길을 막고 모든 이에게 물어보면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학교가는 것이 힘들다고 합니다. 수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제도 있고, 시험도 봐야 하고, 시간에 맞춰 감당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름의 무거운 짐입니다. 때로 무거운 학교가방, 학원가방을 메고 가는 그 가방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어른의 삶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수고하지 않고 사는 인생이 어디 있으며 인생의 두 어깨에 짐을 안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인생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에덴동산에 가만히 놀고 먹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부여하신 일은 경작하며 지키는 일이었습니다.(창 2:15) 수고롭게 경작하며 애쓰며 사는 것 인간의 타고난 삶의 과제와 역할입니다. 인간의 수고로움, 그 노동은 창조 때부터 주신 신성한 의무입니다. 땀 흘리는 노동, 그 수고로움은 인간의 본질이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며 살아가는 인생이 쉼을 누리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인간의 노동이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앗아가 버렸다는 것이 가장 아픈 현실입니다. 시지프스가 신의 형벌을 받고 끊임없이 산위로 돌을 굴려보지만 다시 돌은 아래로 굴러와 끊임없이 돌을 밀어 힘겹게 다시 올리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오늘날 인간도 시지프스처럼 마치 일이 저주처럼 되어버린 형국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수고하고’ 라는 원어는 스스로 많은 일을 하여 지치고 고단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달리다보니 기력이 빠지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쉬면 뒤처진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쉬면 불안에 휩싸입니다. 또한 ‘무거운 짐 진 자’는 누군가가 나에게 부과한 짐입니다. 타인에 의해 부과된 짐입니다. 타인의 시선이나 요구에 의해 짐을 지느라 짓눌려 살고 있는 상태입니다. 체면이나 형식을 강조하는 조직 문화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무거운 짐입니다. 힘의 논리에 의해서 폭력적인 방식으로 약자는 차별과 수모를 견뎌야하는 구조는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입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와 인정에 의해서 나의 삶을 규정하다보니 평화와 기쁨을 누리지 못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내게로 오라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28-30절까지 본문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가 무엇일까요? 나, 내, 일인칭입니다. 무려 7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게’, ‘나’라 할 때는 강조형 부점이 원어에는 붙어있습니다. “제발 나에게 오너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건강이 나의 불안을 잠재우지 못합니다. 비싼 보약이 나의 평화를 담보하지 못합니다. 든든한 통장잔고가 나에게 진정한 쉼을 주지 못합니다. 산에서 삶의 위로와 쉼을 얻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등산을 합니다. 그러나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산도 임시 도피처일 뿐입니다. 쉼이란 한자는 휴休입니다. 사람인 변에 나무목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나무 그늘에 기대어 쉬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나무는 자연적 성장과 모성으로 대변됩니다. 자신의 근원과 연결될 때 쉼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를 십자가의 나무로 표현한 분이 있습니다. 나무 목이 십자가에 걸린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무가 예수님으로 해석됩니다. 나무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그늘에 기댄 인간의 모습이 쉼을 의미하는 휴입니다. 그리스도 곁에 있는 자, 자신의 내적 중심과 연결되어 있는 자는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메고 가야합니다. 나로 인해, 누군가로 인해 지칠 때 오늘 예수님의 음성을 마음에 품었으면 합니다. “내게로 오너라.” 주님에게 나아가 주님과 연결되어 쉼을 얻고, 다시 삶을 노래하고 경축할 용기를 얻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멍에 메기
쉼을 얻는 길은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내 멍에를 메면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9). ‘멍에’라는 단어는 유대사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훈육관계를 가리킬 쓰는 단어입니다. 멍에는 스승이 학생들에게 주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유대랍비들은 모세 율법 또는 지혜를 멍에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멍에는 당시 유대 교사들이 가르쳤던 인습적이고 전통적인 율법의 멍에와는 다릅니다. 그의 멍에는 강요되고, 의무로 부과된 멍에가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멍에입니다. 그것을 멜 때 쉼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십자가라는 단어를 듣기만 해도 우리는 여러 연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선입관은 대단히 무겁고 힘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내가 이 땅에서 짊어지고 가야할 사명의 멍에일 것입니다. 이런 멍에는 짊어지면 쉼을 얻게 된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힘들고 지치게 만드는 그 이유를 깊이 돌아보면 대부분 내 현실을 내 십자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의 상황과 형편, 처지를 응당 내 것으로 짊어질 때 우리에게 평화가 찾아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언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자신은 아이라 하면서 그 멍에를 짊어지기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어긋난 길을 가는 지도자와 백성들을 향하여 심판을 선언을 했지만 도리어 손가락질 당하고 죽음의 구덩이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그때마다 피하고 싶고, 그 멍에를 던져버리고 싶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럴 때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9) 이것이 예레미야가 짊어진 예언자의 십자가였습니다. 자신의 소명을 따라 갈 때 우리는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는 내 멍에가 쉽고 내 짐이 가볍다 하십니다. 쉽다는 영어로 ‘easy’로 번역됩니다. 다른 영어 번역은 ‘fit’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딱 맞다.” 소가 멍에를 맬 적에 소의 체형에 딱 맞는 멍에를 메고 갑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우리에게 딱 맞는 것일 수 있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인생의 크기만큼 그 멍에를 맞춰주기에 짊어질 수 있습니다. 멍에가 가벼울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멍에는 짐승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하기 위해 쓰는 도구입니다. 이 팔레스틴의 농경문화에서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짝을 이루어 메었습니다. 어미 소와 새끼 소가 함께 밭을 갈 때 멍에는 어미 소만 메고, 새끼 소는 어미 멍에 속에 머리만 집어넣고 갑니다. 새끼 소는 힘들일 필요 없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라는 것은 무거운 십자가 지고 죽을 힘을 다해 살아봐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너와 함께 너에게 부과된 소명의 십자가를 메고 가겠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인생의 십자가, 소명의 멍에를 메고 가기 시작하면 예수님이 함께 져주십니다. 저는 이것이 내 인생을 통해 이루어져야할 하나님의 실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실험이 감행될 때 거기에 치유가 일어나고 평화를 누리고 비로소 내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내가 내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짐을 나눠지면 서로의 짐은 가벼워지고 인류의 고통은 가벼워지고 평화의 세상이 이만큼 도래할 것입니다.
배움
쉼을 얻기 위해 배우라 하십니다. 요즘 어렵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배움입니다. 기계적으로 단어를 암기하고 어떤 정보를 기억하고 습득하는 배움도 나름 어렵지만 실제적으로 나를 배우고, 삶을 배우는 것은 더욱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정보의 홍수 시대에 인간의 지식수준은 월등하게 개선이 되었지만 우리의 의식에는 무의식적인 내용들이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인간은 더욱 더 무의식적 정서와 충동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정보과 지식 습득 위주의 배움은 사실 인격의 내용과는 거리가 멉니다. 노자 도덕경 48장에 배움에 대한 중요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 배움은 날마다 더해하고, 도는 날마다 비워가라는 의미입니다. 학문을 함으로 지식이 늘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외부세계의 삶의 적응을 위하여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본질로서 도, 삶의 길은 비움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마음을 배우라’ 하십니다. 주님의 마음,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이런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낮아짐, 비움일 것입니다. 여러분! 낮아지고 비워낼 때 우리 안에 나의 욕망과 충동이 아닌 다른 것이 깃들 수 있습니다. 그 비워진 여백에 신성함이 깃듭니다. 평화가 깃듭니다. 내 마음 안에 환대의 공간이 커지면 그곳에 진정한 쉼과 평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C.G. Jung은 인간의 최악의 죄과는 무의식 상태에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또한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인간의 과제는...무의식으로부터 엄습해오는 내용들을 의식화하는 것이다. 무의식 상태에 머무르거나 무의식과 동일시하는 것은 점점 더 많이 의식을 만들어가야 할 그의 사명에 불충실한 것이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한, 인간 실존의 유일한 목적은 미미한 존재의 어둠에 불을 밝히는 것이다”<C.G. Jung, Memories, Dreams, Reflection, 326.>라고 했습니다. 의식화한다는 것은 배운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무의식과 동일시하는 것들, 무의식 상태에 머물러 있는 그 어둠에 불을 밝혀 가는 것이 배움일 것입니다. 외부 세계의 것을 배우며 채워가되, 주님의 마음, 그 낮아짐과 비움을 익혀가고, 자꾸 덜어내는 연습으로 통하여 그 비워진 곳에 사랑과 평화가 깃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비워내고 덜어내는 마음으로 새로운 봄의 시작을 활짝 열어 누군가에 그 마음을 아름답게 보여주고 선물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