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9장 1-14절.
두 번째 기회를 주신 하나님.
율법을 이야기하면 불편하다. 그 이유는 더 이상 규범의 하나님이 아닌, 은혜와 자비,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을 믿기는 오히려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2세기경 마르시온은 “현대의” 신약의 기독교를 “이미 유행에서 사라진” 구약의 뿌리로부터 단절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현상을 오늘날 현대
기독교의 목회자들 조차 동의 하고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오래전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적인
있다. 본문에는 ‘율법을 지키면’ 이라는 조건을 전제로 하는 구절이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율법이라는 단어를 건너뛰고 결론에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단어만 집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혹시나 했는데, 동일한 본문을 2년후에 다시 설교하면서, 역시, 율법이라는 단어를 건너 뛰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율법
폐기론자’ (개인적인 생각) 였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목회자들이 마르시온주의 자로 살기를 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의 은혜로, 자비로, 사랑으로 덮어두지 않고는 도무지 성도들에게 설교하기 불편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유월절을 중심 주제로 하고 있다. 애굽에서 나온 후, 이들은 처음으로 이 절기를 지키는 순간이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구속사(그들의 주인이 바뀌어지는 순간)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이다. 하나님은 시간과 방법까지 세밀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했다. 닛산월
14일에 흠 없는 1년된 새끼 양이나 염소를 이날 밤에 잡아서
그 피를 설주와 인방에 바른 후에 집에서 나오지 말고 집안에 모두 들어가 있으면, 죽음의 심판이 너희들
에게는 임하지 않고 “넘어갈 것이다”. 약속대로 정해진 날, 한 밤중에 애굽의 모든 장자와 초태생의 죽음의 비명소리가 갑자기 온 애굽 땅에 들려지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와 염소 고기, 그리고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만찬이
끝나는 순간에, 그들은 “떠나라”는 소리를 듣는다. 430년만에 들려온 해방의 복음(GOOD NEWS)이었다. 그 후 하나님은 이 유월절을 7일동안 대대로 지킬 것을 법으로 규정했다. 유월절의 어린양과 염소의
피는 이스라엘의 장자와 초태생을 대속한 역사적인 구원의 사건이었다.
그런데, ‘만약 현대인들 중(이방인
그리스도인들) 누군가 율법으로 규정한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제한 된 것이지, 그리스도인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는 예수만으로 족하다’, 라고 말한다면, 그는 여전히 예수를 모르거나, 아니면 그들은 애굽인들과 같은, 아니! 애굽에서 나온 “잡족” 만도
못한 이방 종교인에 불과한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두 번째 기회에 귀를 기울어야 할 것이다. 분명히
유월절을 의도적으로 거부한 사람은 누구도 예외없이 공동체에서 추방되어, 죽음의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규정된 법을 스스로 어기기 까지 하면서, 두 번째 기회의 문을 열어 둔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 죽은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게 된 자, 또는 멀리 집을 떠났다가 유월절 날에 참석하지 못 한자는 반드시 다음달 같은
날, 같은 규정대로 이 절기를 지켜야 했다. 만약 하나님께서
두번째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애굽사람들처럼 모두들 죽음의 시간만 기다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유월절날에 함께 우거하는 나그네까지 이 절기를 지킬 것을 법으로 규정했다. 법으로 규정한 이유는 그들을
배척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사건에 이방인을 포함할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너희는 이방인이다. 나는 너와 언약을 맺은 적인 없다. 그러니 너희들은 나의 언약 백성들이 아니니, 너희들은 유월절에 참석하지마라!” 지금 율법폐기론자들이 원하는 것이 이와 같은 하나님은 명령이라면, 그들은
유월절날 그 자리에서 행복했을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이날에 제외 시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마, 하나님이 이들이
원하는 대로 했다면, 정신적, 육체적, 영적인 수치심에 사로잡혀, 모두들 갈 바를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그들 모두를 불러서 언약 공동체 안으로 초청하여, 즐기자고 한다. 나는 묻고 싶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면, 무엇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자비가 아니면 무엇인가?
예수님은 유월절을 위한 어린양으로 오셨기에 유월절에
인류의 부정함(아담 이후의 죄)을 제거하기 위하여 돌아가셨다. 바울이 고린도 전서 5장 7절에서, 예수를 “우리의 유월절 양” 이라고 부른 것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속죄의
제물 되심과 율법의 성취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려준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두 번째 기회이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우리의 믿음을 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아주 단순한 대답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만 큼이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무 크기에
우리의 죄가 가리워져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것들 거두어 버린다면, 우리는
죄 안에 가두어진 채 벌거벗은 존재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유월절 어린 양 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두 번째 기회를 얻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는 것인가? 고린도 전서 5장 8절에,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 없이 오직 순전 함과 진실 함의 떡으로 하자.” 바울이 말하는
누룩은 죄와 죽음이었다. 유월절의 피는 죄와 죽음의 영역을 지나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진 사건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애굽 왕의 포로 민이 아니라, 하나님의
포로 민이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의 방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언약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살아온 것처럼, 하나님의 포로 민이 된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