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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섬의 작은 방파제. |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 삼천포 주민이 가장 듣기 싫어한다는 이 말의 유래에 대해선 설이 분분합니다. 진주나 진해에 갈 것을 기차를 잘못 타 삼천포로 가는 일이 잦아서 생긴 말이라고도 합니다.
삼천포시장 물메기탕. |
어쨌든 맥락과 상관없이 엉뚱한 소리 할 때 애먼 삼천포를 갖다대니 기분이 좋지는 않겠습니다만, 한편 그런 실수가 왜 유독 삼천포에서 잦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건 혹시 실수를 가장한 일탈이 아니었을까요. 누구라도 겨울 삼천포의 매력을 안다면 그럴 수 있고 말고요.
차디찬 겨울 바람을 뚫고 사천시 삼천포에 다녀왔습니다. 사서 한 고생 맞습니다. 하지만 이맘때면 도저히 놓칠 수 없는 먹거리가 삼천포에 넘쳐나는 데다 값 또한 싸니 어쩌겠습니까. 올겨울도 옷깃 단단히 여미고 수산시장 탐방에 나섰습니다. 오자마자 찾아다닌 놈은 '못생겨도 맛은 좋은' 물메깁니다. 이 겨울 생선을 먹는 방법은 다양합니다만 미나리, 무, 파, 콩나물, 모자반을 넣고 팔팔 끓인 물메기탕이 그 중 최곱니다.
물메기탕 끓일 때 벌겋게 고추장 양념하면 섭섭합니다. 소금간만 한 맑은 탕에 취향대로 고춧가루를 살짝 풀어 넣으면 됩니다. 국물과 무른 살을 숟가락으로 푹 떠서 입에 넣으면 씹을 것도 없이 후루룩 넘어갑니다. 보들보들하니 목구멍으로 넘어간 건 생선살인데 입안에 감도는 건 미나리와 모자반 향입니다. 세상의 해장국 가운데 가장 부드럽고 시원한 것이 이 물메기탕 아닐까요.
삼천포 서부재래시장. |
시장의 아무 식당에서나 시켜먹어도 맛이 괜찮습니다. 생물메기 1만 원어치 사가면 온 식구 입이 즐겁습니다.
흐물흐물한 물메기로 한 끼. 그럼 이제 꼬들꼬들 씹는 맛입니다. 이름과 생김새가 완벽히 일치하는 개불, 거대 아메바같이 생긴 해삼, 참기름 범벅된 채 토막나 꿈틀대는 산 낙지는 모양 때문에 못 먹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시린 바다 속에서 탱탱해진 겨울 해산물을 한 번 맛보면 그 매력에 푹 빠지고 말겁니다.
미끌미끌한 해삼을 젓가락으로 겨우 집어서 입에 넣고 깨물면 언 눈 밟을 때처럼 뽀드득합니다. 산 낙지는 잘게 썰지 않으면 목구멍을 막을 정도로 빨판 힘이 셉니다. 이들에 비하면 향긋한 멍게의 식감은 아이스크림만큼 부드럽습니다. 해산물은 시장 좌판에서 이것저것 사다가 근처 '초장집'에서 초장값 내고 먹는 게 제맛입니다. 제법 살이 붙어있는 우럭대가리 매운탕에 공기밥까지 먹으면 금상첨화입니다.
산 낙지, 개불, 해삼, 멍게 등 해산물. |
돌아갈 땐 손이 좀 무거운 게 좋습니다. 삼천포 수산시장은 건어물 천국이기도 합니다. 멸치며 쥐포가 도시와는 비교도 안되게 쌉니다. 저라면 말린 물메기나 말린 대구를 사가겠습니다. 바닷가 사투리로 '메거지'라고도 하는 말린 물메기는 물에 불려서 찐 다음 초간장에 살짝 찍어 먹는데 반찬으로도 맥주 안주로도 그만입니다.
그런데 잠깐, 벌써 가시려고요? 정 급하시면 어쩔 수 없지만 사천 바다의 고운 풍광을 놓치게 돼 안타깝습니다. 기왕이면 하룻밤 머물면서 창선·삼천포대교 건너 남해 구경까지 하면 좋겠습니다만 안된다면 사천 앞바다의 일몰과 낙조만큼은 눈에 담아가시죠. 해넘이가 아름다운 몇 곳을 콕콕 짚어 드리겠습니다.
사천시 대방동과 실안동을 잇는 실안해안도로의 일몰과 낙조. 일찌감치 좋은 자리를 잡고 기다리던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셔터를 눌러댄다. |
■일몰과 낙조
사천 앞바다는 여느 남해풍광과는 다르다. 어쩐지 얕아 보이고 저물녘이면 유난히 반짝인다. 모래사장보다는 갯벌이 훨씬 많다. 이건 아무래도 남해보다는 서해와 닮았다. 지도를 펼쳐 서쪽을 향해 방향을 틀고 있는 사천만을 확인하면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사천앞바다는 일출보다 일몰, 여명보다 낙조다. 특히 사천시 대방동과 실안동을 잇는 실안해안도로의 낙조는 무척 유명해서 하늘이 깨끗해 지는 겨울이면 전국의 사진애호가가 몰려든다. 2차로였던 실안해안도로는 최근 4차로로 확장돼서 접근성은 좋아졌지만 확실히 고즈넉한 분위기는 덜하다.
실안해안도로는 별다른 낙조 포인트가 없다. 일몰이 시작될 때 잠깐 차를 세우면 거기가 포인트다. 단 사진찍기 좋은 곳은 따로 있는데 해넘이와 죽방, 오가는 배, 무인도를 한꺼번에 렌즈에 담을 수 있는 명당이다. 실안동 죽방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5분 쯤 올라가면 된다. 실안의 요염한 낙조는 언제나 사진보다 아름답다. 애매한 사진보다는 일몰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눈 속에 담고 가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실안해안도로를 달리다보면 피어 형태의 수상 카페가 눈에 들어온다. 워낙 예쁘고 눈에 띄는 건물이라 위치를 일러줄 것도 없다. 해진 뒤 경관조명이 켜지면 환상적인 야경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조금 더 먼 해변에서 바라보면 아름다운 일몰이 포착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카페 안에서 즐기는 일몰과 낙조도 분위기 있다. 뚜렷하고 붉은 해가 넘어가면서 카페 창을 채우고 내부를 물들인다. 주위 하늘이 불붙은 듯 붉어졌다가 서늘하게 파래지면 딴 세상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창선·삼천포대교야 말할 필요도 없는 낙조 명소다. 대교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해넘이를 보는 것도 괜찮지만 최고의 풍경을 원한다면 조금 더 수고를 하자. 대교가 내려다보이는 각산 봉화대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낙조 포인트다. 대방사 입구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좌불상이 보이고 조금 더 오르면 암자가, 그 이후엔 세갈래길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각산산성, 조금 더 가면 봉화대가 있다. 표지판이 잘 돼 있어 헷갈리진 않는다. 30분쯤 미니 등반을 해야 한다.
남일대해수욕장 해변을 따라 안쪽으로 걸어들어가면 진널전망대가 있는데 여기 낙조도 아름답기로 손꼽힌다. 삼천포 화력발전소의 조형미 넘치는 세 굴뚝은 밋밋해 지기 쉬운 일몰·일출 사진에 훌륭한 포인트가 돼 준다.
조금 멀긴 하지만 사천대교 건너 서포면 비토섬 낙조도 근사하다. 별주부전 배경지인 비토섬에는 남해안에선 보기 드물게 넓은 갯벌이 자리잡고 있다. 일몰 때면 넘어가는 해가 S자로 난 물길에 반사돼 온 갯벌이 붉어진다. 자가운전 여행이라면 가볼 만한 곳이다.
▶일몰사진 TIP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만 목 빼고 기다릴 필요는 없다. 지나치게 쾌청한 날씨엔 태양이 너무 강해서 노출차가 심해지기 때문에 오히려 사진이 어색하다. 안개나 구름이 옅게 깔린 날 지는 해는 더 부드럽고 뚜렷하게 나온다. 비온 뒤 먹구름이 물러가는 하늘의 낙조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위 사진-실안해안도로의 수상카페. 해 진 직후 어스름한 '매직아워'에 경관조명이 켜졌다. 아래 사진-남일대해변 안쪽 진널방파제에서 바라 본 여명. 삼천포화력발전소의 세 굴뚝은 훌륭한 배경이다. |
■일출과 여명
낙조보다 덜하다 해도 사천엔 일출 명소도 많다. 이글이글 불타며 바다에서 분리되는 동해 일출과 달리 사천 해는 산 사이로 수줍은 듯 고개를 내밀며 떠오른다.
우선 창선·삼천포대교는 매년 1월1일 대규모 해맞이 행사를 열 정도로 일출이 유명한 곳이다. 남해 창선도에서 삼천포로 넘어오다보면 대교 중간에 초양휴게소가 있는데 이 곳이 대표적인 일출 감상 지점이다. 삼천포화력발전소 바로 건너편 방파제도 언덕 사이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기 좋은 곳이다. 남일대 진널전망대 옆 진널방파제는 일출도 일출이지만 해뜨기 전 여명이 특히 아름답다. 새벽 불을 밝힌 발전소 건물이 센스있는 배경이 된다. 낙조명소 실안해안도로에서도 일출을 볼 수 있다.
# 숙소·가볼만 한 곳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남일대해수욕장·남일대리조트, 고성 학동마을 돌담길, 노산공원. |
◀남일대해수욕장·남일대리조트
남일대해수욕장은 참 아담하지만 모래사장이 흔치 않은 사천에선 피서일번지요 휴양일번지다. 사천 사람이라면 남일대에 얽힌 추억 하나쯤 갖고 있다는 데이트 명소이기도 하다. 정말 코끼리를 꼭 닮은 코끼리 바위, 사자 바위를 구경하면서 남일대 해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산책하기 좋은 덱이 바다를 따라 길게 설치돼 있다. 진널전망대와 진널방파제는 각각 일몰과 일출을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남일대 해변을 품고 있는 남일대리조트는 사천에서 가장 '럭셔리한' 숙소다. 해변뷰 베란다 풍광이 아름다운 엘리너스 호텔을 비롯해 다양한 가격대·형태의 숙박시설이 구비돼 있다. 큰 방과 연회장이 있어 기업체 연수나 MT 장소로 인기가 많다.
리조트 내 해수월드의 해수탕·찜질방은 큰 창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목욕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24시간 영업한다. 해가 지고나면 작은 노천탕에서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헤는 즐거움도 만만치 않다. http://www.namiltte.com (055)832-9800
◀노산공원
삼천포 노산에 있는 공원으로 입구에 박재삼 문학관이 있다. 내용은 체력단련시설과 지압공원이 있는 동네의 여느 공원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산책로를 따라 오르면 바다 끝에 매달린 팔각정이 나오는데 여기선 와룡산·각산 등 사천의 명산과 삼천포항, 창선·삼천포대교, 건너편 남해 창선, 한려수도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성 학동마을 돌담길
남일대에서 10분 거리엔 유명한 고성공룡박물관이, 조금 더 가면 학동마을이 있다. 이 마을 돌담은 납작납작한 돌로 쌓고 황토로 바른 것이 특징이다. 돌모양이 특이해서 깎은 것이 아닐까 싶지만 수태산에서 채취한 자연석이라고. 옛 가옥들이 보존돼 있다면 일찌감치 내로라는 문화유산이 됐겠지만 새마을운동 당시 기와 대부분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고 최영덕씨 고가(문화재자료 178호) 등 일부 건물만 옛 모습대로 보존되고 있다. 최씨 고가(055-673-6904)에선 숙박도 한다. 황토빛 돌담길을 걸으며 사색하기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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