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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l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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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남영역/오전
인천행 완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안내방송이 들려온다. 연주,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한 번 바라보고는 가지고 있던 배낭을 추켜 올리고 6-2번 기차 문 앞으로 다가가 선다. 열차가 도착하면 자신을 비추는 검은 차창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뒤에 발을 내딛는다. 오전이라 듬성듬성 많이 비워있는 열차의 자리. 그 중에서도 좌석의 맨 끝 가장자리를 골라서 앉는다.
#1. 인천행 전철/오전
연주가 자리에 앉자마자 덜커덩 거리는 열차소리를 내며 완행 열차가 출발한다. 덜컹 덜컹 레일 위를 느린듯 느리지 않은듯 달려서 남영역을 벗어 나간다.
#2. 2시간 전 학교/오전
학교의 오래된 붉은 벽돌의 이과 건물이 조명되고, 그 다음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강의실 안의 책상들이 보인다. 수업 중간의 쉬는시간. 연주의 옆자리에 앉은 제일 친한 학과 친구 미애가 말을 걸어온다.
미애 연주야! 소개팅 할래?
연주 소개팅? 누구?
미애 (애교섞인 목소리로)해라, 해라! 응? 준석이 학과 선배!
연주 학과 선배?
미애 응. 나도 저번에 준석이 만나러 걔네 학교 갔다가 한번 봤었는데, 괜찮은 사람 같더라! 사진 있는데, 볼래? (휴대폰 액정을 내밀며)자.
연주 음.. 잘생겼네.
미애 그치, 그치? 한번 만나봐! 집도 좀 잘살고 학교 내에서 평판도 좋은가 보더라.
연주 그런 사람이 여자친구가 없다고?
미애 그래~ 뭐, 자세한 거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확실히 없다 그랬어! 만나 볼거지? 응?
#3. 인천행 전철/오전
숨을 고르게 들이 마시고는 왼손 하나를 턱에 괴어 다시 숨을 내쉰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듯 왼손에 받친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까딱여본다. 그 상태로 오른 손에는 휴대폰을 만지작 만지작거리는 연주.
Nar. 소개팅… 소개팅을 한다고 설레거나 기대하고 자시고 하는 나이는 지났다. 그저 아,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구나. 어떤 사람이 나올까. 최소한 무례한 행동이나 말은 삼가는 그런 사람이면 되는데. 소개팅 자리에서 단번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난다거나 운명의 상대를 나온다거나 하는 바람은 추호도 없다. 그저, 그저, 그저 도를 지나치지 않는, 얼추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면 된다. 그저, 그 정도면 된다.
#4. 얼마 전 학교 도서관 후문/늦은 밤
중간고사 기간.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하다가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도서관에서 나오는 미애와 연주.
미애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을 하며 두 팔을 벌려 기지개를 편다)하아아아아아아압. 졸려. 피곤해. 힘들어! 왜이렇게 범위가 많은거지? 이걸 언제 다보냐구!
연주 그러게. 시험기간인데도 과제는 또 어찌나 많은건지. 교수님들은 우리가 당신네 과목 하나만 듣는다고 알고 있는게 분명해.
미애 힘들다 진짜. 지금 집에 가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연주 그래도 오늘 공부 좀 많이 하지 않았어? 아까 보니까 자리에서 잘 일어나지도 않는 것 같던데.
미애 글쎄… 그랬으면 다행인데…
연주 어? 미애야 너 남자친구.
미애 응? (길을 가다가 그대로 멈춰 선다.)
준석 (환하게 웃으며)이제 나와?
미애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준석아! 뭐야? 어떻게 온거야? 오늘 학교에서 밤샌다며.
준석 그냥. 그럴려고 했는데. 너 보고싶어서. (베시시 아이처럼 웃으며)공부가 안돼.
둘 사이에 어색하게 끼인 연주.
연주 아, 아 나는 그럼 이만 가볼게! 미애 남자친구 안녕. 미애 잘 데려다 줘!
미애 연주야. 혼자 가려고? 같이가지?
준석 그러게. 같이 뭐라도 먹고가자.
연주 아냐. 나 지금 가봐야 해서. 그럼 둘 다 시험 잘 봐. 안녕!
미애, 준석 어,어어… 조심히 가!
미애와 준석의 시야를 빠르게 벗어나는 연주. 어쩐지 모르게 쓸쓸해보이는 뒷모습.
#5. 인천행 전철/낮
Nar. 물론 준석이 같은 좋은 남자친구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적도 많았다. 성실하고 예의바르고 싹싹하고. 게다가 키도 크고 잘생기기까지 한, 보기 드문 훈남이다. 미애 옆을 지키고 있는 든든한 어깨가 내심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났었다. 그런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나도 노력 아닌 노력들을 기울이곤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난 여전히 혼자다.
눈을 감고 의자 끝 봉에 몸을 기댄 연주의 얼굴 클로즈 업. 점점 멀어지는 카메라, 지하철 한 칸의 모습을 잡는다. 연주의 바로 옆에는 아무도 앉아있지 않고 연주 혼자 쓸쓸한 모습만 보인다. 금세 잠들었는지 이내 얼굴 표정이 평온해진다.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표정.
#6. 7년 전, 어느 고등학교 운동장/낮
인천시 고등학교 배 축구대회. 운동장에는 상대학교 선수들과 본교 선수들이 팽팽하게 맞서 볼을 향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열기가 한층 달아올라 치열해진 분위기. 그 가운데로 가장 빛나고 있는 주장 민우.
민우 야, 패스해 패스! 이쪽으로!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온 몸이 땀으로 젖어있다. 얼굴과 몸은 햇빛에 그을려 안그래도 건강미 넘치는 외모를 더 멋있게 보이게 한다. 관람석의 스탠드 역시 민우를 응원하는 여고생 팬들로 가득 메워있다. 연주 역시 그 가운데에 앉아 민우를 향해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다.
삐익-! 심판이 부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고, 민우 팀의 패널티 킥 기회가 열린다. 민우, 오른발을 꺾어 슛을 날리면 원반형으로 둥글게 그림처럼 골이 들어간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지고 민우는 그에 대응하여 관람석을 한바퀴 도는 세레머니를 보여준다.
#7. 7년 전, 경기가 끝난 운동장/낮
경기가 끝나고 운동장 뒷편으로 들어가는 선수들. 연주, 기다리고 있다가 민우가 들어오자 그에게로 다가가서 음료수를 건넨다.
연주 오빠, (수줍게 웃으며)이거 드세요.
민우 (당황한듯)아, 안녕. (역시 수줍게 웃으며)고마워.
연주 네. 저... 오늘 밤에 뭐하세요?
민우 오늘? 축구부 애들이랑 코치님이랑 회식하러 가기로 했는데.
연주 아, 그렇구나…
민우 응. 고마워. 잘 마실게.
연주 저기... 연락해도 되죠?
민우 응.
민우를 등지고 나오는 연주 뒤로 다른 여고생들이 민우를 만나러 간다. 여고생들의 손에는 케익과 음료수 등이 들려져 있다. 마다하지 않고 여학우들을 맞이하는 민우. 그런 민우를 한번 바라보고는 씁쓸해져서 다시 풀이 죽어 나온다. 더는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없는 듯 보이는 축 쳐진 어깨와 굳은 연주의 얼굴.
#8 7년 전, 집 앞 놀이터/낮
친구 야. 넌 그 오빠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운동만 잘했지 별 거 있냐? 공부도 못하고. 얼굴도 못생기고. 키도 작고. 니가 훨씬 나아!
연주 아니야… 못생기다니! 공부도 안해서 그렇지 하면 잘할거야…
친구 (어이없어서)하이고. 얘가 빠져도 아주 단단히 빠졌네. 너 임마 그런게 콩깍지야.
연주 콩깍지는 무슨. 그래도 오빠정도면 엄청 괜찮지. 우리학교에서 인기 최고잖아.
친구 그거야 다 축구대회 약발아냐? 정신 좀 차려라. 그 오빠 너 갖고 노는거야. 봐, 너한테 마음도 없으면서 잘해주긴 왜 잘해줘? 연락은 왜 다 받아주고. 또 먼저 연락할 때도 있다며! 지 갖긴 안내키고 남 주자니 아깝고 그런거야, 뭐야? 괜히 내가 다 기분 나쁘네.
연주 … …
친구 잘 생각해봐. 계속 그렇게 짝사랑만 할거야? 그 오빠 따라다니는 정성으로 공부하면 서울대 가겠다. 으이구 내가 답답해서 정말.
#9. 7년전, 어느 토요일/밤
폴더형 휴대폰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는 연주. 민우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가 지우기도 수십번 째이다. 삼심분 내지 그러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누른다. 통화음이 오래 안가 전화를 받는 민우.
민우 어, 무슨일이야?
연주 오빠. 지금 바빠요?
민우 아니. 바쁘기보단 그냥 친구들이랑 풋볼차고 출출해서 야식 먹으러 왔어.
연주 아. 그렇구나…
민우 응. 무슨 일 있어?
연주 아뇨… 일이라기 보단… 그냥…
민우 아, 그래?
연주 오빠. 나 좀 진지한 질문 할건데… 대답해 줄거죠?
민우 … … 뭔데?
연주 오빠, 나랑 무슨사이에요? 오빠한테 나 그냥 아는 동생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닌거에요?
민우 … …
연주 … …
민우 음… … 글…쎄… 그건 지금 여기서 대답할 게 아닌 것 같다. 좀 이따 집에 들어가서 다시 전화할게.
연주 네.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전화를 끊은 뒤, 연주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휴대폰만 붙잡고 있지만 민우는 다시 전화하지 않는다. 마음을 접으려고 하지만 혹시 모를 기대감 때문에 쉽게 잠들 수 없는 길고 긴 밤.
#10. 7년 전, 어느 일요일 연주의 집 /오전
한가로운 일요일 오전답게 재방영하는 TV 월화 드라마를 보고 있는 연주. 그러나 TV를 틀어만 놨을 뿐 전혀 집중하지 못한다. 벨소리 볼륨도 가장 크게 설정해놓고, 민우의 전화를 기다린다. 십분에 한 번 꼴로 휴대폰 액정을 확인해본다. 그러다가 벨소리가 울리고 놀라서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며 받을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끊기기 전에 받아 대답한다.
연주 여보세요.
민우 연주야. 내가 어제 오늘 계속 생각해봤는데…
연주 네, 오빠.
민우 아무래도, 우린 아닌 거 같아… 미안.
연주 아… 미안은요. 괜찮아요. 그럼 오빠 우리 친한 오빠동생 해요!
민우 그래. 친한 오빠동생 하자.
#11. 현재, 주안역/낮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떠보니, 내려야 하는 송내역에서 한참 지나서 주안역에 도착해 있다.
연주의 옆에 있던 민우의 환상이 비누방울 터지듯 없어진다. 내릴까 말까를 망설이다가 다시 눈을 감고 종점까지 가서 열차를 바꿔 타기로 마음 먹는다.
Nar. 그러고보니, 참 오래도 좋아했었다. 그렇게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을 거다. 내 중고등학교 학창시절 5년을 갖다 바쳤구나. 오직 그 사람을 위해서. 민우오빠는, 멀리서 지켜보기에도 너무 반짝반짝 눈이 부셨던 그런 사람이었다. 동경했었다. 그 사람의 숨결, 집 냄새, 분위기, 말투, 심지어 주변의 사람들까지. 찬란하게 빛났던 그 사람의 모든 것들을 동경했었다. 어쩌면 그때의 나 자신보다 민우 오빠를 더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오빠를 사랑하는 게 습관처럼 되어버려서 오빠보다 오빠를 사랑하는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되어버렸던 걸지도. 우습다. 결국은 이렇게 지나가버려 기억조차 희미한, 바래진 세월아.
#12. 현재, 도화역/낮
다시 눈을 감고 있던 연주는 다시 잠에 든다. 잠든 연주의 바로 옆 빈 자리위로 두 번째 남자 환상이 나타나 연주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리고 또 잠들어버린 연주가 귀엽다는듯이 방긋 웃는다.
#13. 2년 전, 주안역 근처의 레스토랑/저녁
승엽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하고, 힘들어간 목소리로)오빠 월급 받았으니까, 먹고 싶은거 다 골라봐!
연주 니가 무슨 오빠야…(눈동자를 굴려 한 번 쳐다보고는) 그래 사준다니깐 사양은 안하지.
승엽 응. 뭐 먹을까? (손으로 메뉴 판의 까르보나라를 가리키며)이 집은 이게 맛있어.
연주 (별 감흥 없이)그래. 그걸로 할게.
#14. 2년 전, 주안역 /밤
승엽이 연주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 주러 가는 길.
승엽 요즘 자기 이상한 거 알아?
연주 뭐가…
승엽 사랑이 식었어
연주 그런거 아니야, 엽아…
승엽 뭐가 아니야. 됐어, 치.
연주 엽아, 우리 좀만 걷자.
승엽 왜. 너 빨리 들어가봐야지.
연주 이쪽으로 좀만 걷다가 돌아서 가자.
승엽 그래.
버스정류장 근처 동네를 한 바퀴 돌아온다. 다 돌아서 다시 버스정류장이 보일 때 즈음. 연주가 어렵게 입을 뗀다.
연주 엽아, 우리… … 그냥 친구하자.
승엽 (얼어붙어서 말을 잇지 못한다.)
연주 미안… 그러는 게 좋을 거 같아.
승엽 … …하(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다)
연주 …(미안해서 말을 잇지도 못하고 어쩔줄 몰라한다.)
승엽 미안. (붉어진 눈에 눈물이 맺혀서)오늘은 버스 오는거 못 기다려주겠다. 먼저 갈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주 곁을 떠나버린다.)
#15. 1년 8개월 전, 버스 안/밤
같은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났던 승엽. 헤어진 뒤로 승엽은 일을 그만 두었지만 승엽의 절친한 친구인 호원과 연주는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계속 하고 있다. 일이 끝나고 집이 같은 방향이라서 함께 버스를 타고 가는 호원과 연주.
호원 근데,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연주 응? 뭔데?
호원 승엽이랑… 왜 헤어지자고 했어?
연주 아… …(고개를 떨어트려 바닥만 쳐다본다.)
호원 승엽이가 뭐 잘못했어?
연주 아니, 그런 거 아냐. 그냥, 내가, 내가 문제였어. 내가 남자 사귀고 이럴 성격이 못돼나 봐.
Nar. 문제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문제가 너무 없는 것도 문제였다. 그 문제 없음이 권태로 이어지고 권태는 콩깍지에 가려져있던 그의 단점을 하나씩 벗겨나갔다. 그리고 지루해졌다. 그를 만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해졌다. 그게 다였다. 더 이상 연애를 지속할 이유가 없던 이유. 그런 무의미한 만남 자체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16. 인천역/낮
인천행 열차의 종점인 인천역에 도착한 연주. 종점이니 열차 안은 텅텅 비어있고 그나마 앉아있던 할아버지들과 몇몇 손님이 인천역 밖으로 나간다. 연주의 옆에 앉아있던 승엽의 환상 역시 ‘뿅’ 하고 사라진다. 열차 밖으로 나온 연주가 하품을 두어 번, 기지개를 피며 반대편의 서울행 지하철을 타러 올라간다.
#17. 의정부 행 전철/낮
서울로 가는 의정부 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이번에도 역시, 가장 끝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잠이 덜 깼는지 앉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잠드는 연주. 연주가 앉은 곳의 문쪽으로 서서 연주를 바라보는 또 다른 세 번째 남자.
#18. 8개월 전 연주의 집/낮
거실 소파에 앉아서 휴대폰을 들고 통화를 하고 있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안하고 오로지 통화만 하며 양쪽 볼이 발그레해져서 수줍게 웃곤 한다. IT 세상답게 스마트폰으로 받은 어플로 가능해진 국제 전화.
연주 응. 뭐 하고 있었어?
원혁 나 아는 누나들이랑 밖에서 밥 먹고 지금 들어왔어. 그냥 누워있다.
연주 (말꼬리를 올리고)아는 누나들?
원혁 응. (일부러 질투를 유발하는 듯)히히히.
연주 (살짝 비꼬며)누나들이랑 맛있는 밥 먹었어요?
원혁 흐흐. 응. 완전 맛있게 먹었지! 예쁜 여자들이랑.
연주 그래, 그래봐라. 나쁜
원혁 흐흐. 너는 뭐 먹었어?
연주 (뾰루퉁한 목소리로)안 먹었다. 왜!
몇 개월 동안 달달한 말을 주고받기도 하고, 때로는 오래 만난 연인들처럼 틱틱대고 질투도 해가면서 서로에게 좋은 마음을 가지는 연주와 원혁.
#19. 6개월 전, 집 근처 카페/저녁
애초부터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고, 시작도 남들과는 다르게 바다 건너 밤낮이 다른 곳에서 부터였다. 장거리 연애가 힘들다고는 했지만, 가까이 있지 않으니 안보면 그만. 처음과는 달라지는 원혁의 태도.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진 원혁이의 문자 말투에서 변화를 알아챈다. 마지막인줄 몰랐던 그와의 마지막 통화.
연주 원혁아.
원혁 응?
연주 있잖아,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니 옆에 있는 사람이 꼭 내가 아니더라도. 너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나한테 말해주면 좋겠지만, 나는 지금 니 옆에 있어줄 수 없으니깐… 옆에 있는 누구한테라도 기대고 그래.
원혁 나 기대는 거 잘 못하는데… 고마워. 그래도 니가 있어서 힘이 돼.
연주 진짜? 진짜지? 다행이다.
그 전화 통화를 마지막으로 서로 연락하지 않는다. 원혁이 바쁠까봐 방해되기 싫기도 했고,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이유로 연락을 보류해버렸다.
#20. 현재, 용산역/낮
송내역에서 내린다는 게 잠에 취해서 내려서지 못하고 노량진 역에서 눈을 뜨는 연주. 다시 사라지는 원혁의 환상. 노량진역을 지나 용산역에서 내려선다.
연주 다시 원점이네.
출발지였던 남영역에서 한 정거장 더 와있는 용산역. 어깨를 파고 들어오는 찬바람에 잠이 깨어 다시 동인천 급행 열차를 타러 자리를 옮긴다.
#21. 현재, 송내역/낮
점퍼의 오른쪽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의 진동음이 울리고, 꺼내어 보면, 원혁이의 카카오톡 메시지가 와있다.
[왔섭]
[미다 코리아]
1주 전에 한국으로 온다고 한국에 가면 한번 보자는 원혁의 메시지 이후의 한국으로 돌아온 원혁의 첫 메시지.
곧바로 확인하지만 메시지를 눌러 읽음 표시를 없애는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고민에 빠져드는 연주.
Nar. 원혁이를 만나도 좋을까. 겨우겨우 잊어냈는데, 다시 만나도 괜찮은 걸까. 다시 만나게 되면 계속 보고 싶을거 같아서 두렵다. 그러면 안 되는데 자꾸 보고 싶고 그리워 지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훗날 돌아봤을 때에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는데… 그런데도 이건, 모르겠다. 한국에 들어온 유학생 친구를 만나는 것을 결정하는 것마저 전혀 쉬운 일이 아니라니. 세상 살기가 이렇게 어려워서, 내 참.
#22. 현재, 송내역/낮
난 이곳을 떠난 적이 없었다. 한번도. 3살 때 이사와서 인천에서만 벌써 21년째다. 내 곁을 떠나간 사람들을 늘 같은 자리에서 기다려왔다. 기다려왔다는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날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늘 있어왔다. 다른 애들처럼 멀리 해외로 이민을 가거나 유학을 간 적도 없으니 그런대로 틀린 말은 아니다. 친한 오빠동생 하자고 했지만 껄끄러운 면은 아직도 남아있는 민우 오빠도. 군대에 간 뒤로 간간히 전화 와서 휴가 때 한번씩 만나곤 했다. 승엽이는 그 때 이후로 연락이 끊겨서 다시 연락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망간 적도 없다. 미국에 있던 원혁이 역시. 원혁이가 미국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난 그 애가 한국에 돌아오면 만날 수 있는 곳에 떠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지금, 내 옆자리는 비워져 있다.
#23. 송내역 남광장 버스정류장/낮
가방에서 mp3를 꺼내서 두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드라마 소울메이트의 ost였던 c’mon through 라는 노래를 재생한다. 한층 더 기분이 미묘해짐을 느끼며 터벅터벅 내려와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버스정류장에 앞에 선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송내역 이라고 씌여진 파란색 간판을 쳐다본다.
Nar. 마치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이 지하철을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여겨진다. 특히 오늘의 기차 여정은 나의 연애와 참으로 흡사하지 않았던가. 이리저리 방황하지만 자리를 잡지 못하고, 나는 그대로지만 그대들은 내게 머물렀다 떠났다 하는 승객들처럼. 나는 한번씩 정거장에 서서. 갈아타기도 하고 때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 열차를 놓치기도 하고. 좀 늦기도 하고.
한 학기동안 써왔던 시나리오... 가 너무 마음에 안들고 챙피했었는데, 시험 끝나고 집으로 가는 동안
실제로 저 루트로 전철을 타서 잠을 자고 깨고 했어요. 그러던 중에 이 경험을 접목시켜서 이야기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모든 시험이 끝나고 시나리오를 한번 써 보았습니다. 이전보다 지금 것이 별로라면 어쩔 수 없는데... 그냥 저는 이 시나리오가 더 마음에 들어서 이 것으로 제출합니다.
정말 여러모로 얻는 것이 많은 수업이었어요. 제 글 실력만 있었으면 정말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수업이었을 텐데..^^
전에는 그저 영화의 줄거리를 보고 재밌다/재미없다, 잘 된 영화다/아니다 를 판단하곤 했던거 같은데 지금은 확실히 전보다
영화 보는 시야도 넓어지고, 마냥 영화를 보는 관객이 아닌 스태프의 입장에서 이건 어떻게 찍었고 지금 이 배우앞에는 카메라가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 연기를 하고 소품의 구조까지... 한 번씩 더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말이 길어졌는데... 한 마디로 정말 감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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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연애에 관한 자기 고백서라 애착이 더 갔을까요?^^ 나레이션이 있어 충분히 상황과 감정이 전달되었지만, 동시에 드라마의 재미를 쉽게 앗아가는 맹점도 있었어요. 대사와 지문으로 설명 못하는 부분을 나레이션이 대신해 주는 게 아니라, 나레이션은 나레이션 고유의 독자적인 기능을 가져야 한다고 봐요. 길고 긴 열차에 대한 자신의 비유, 등장했다 뿅 사라지는 환상의 남자들 설정은 무척 새롭고 재밌었습니다. 이렇게 계속 글쓰기 keep going할거죠? 건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