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漢나라 시대의 서예 1. 兩漢의 시대와 서예 개관 서기전 211년 진시황은 제5차의 순행에서 갑자기 사망하고 그 뒤를 秦二世가 이었으나 가혹한 부역과 세금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게 되면서 사회는 급속히 혼란한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각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남과 더불어 중앙의 권력 계층에서도 죽고 죽이는 권력 다툼이 심화되었다. 趙高는 승상인 李斯와 秦二世를 차례로 죽이고 秦二世의 아들인 子嬰을 秦王으로 옹립하였으나 결국 子嬰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子嬰의 秦나라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關中까지 진입해 있던 劉邦에게 항복하여 그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秦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項羽와 劉邦이 양대 세력을 형성하여 서로의 힘을 겨루었으나 결국 劉邦이 蕭何와 韓信의 도움으로 垓下에서 項羽에게 승리함으로서 다시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서기전 206년에 劉邦은 제후와 여러 장군들의 추대에 의하여 황제에 즉위하고 나라 이름을 漢이라 하고 도읍을 장안으로 정하였다. 이때부터 漢나라는 서기 220년 멸망할 때까지 426년간 중국을 통치하는 통일 왕조가 되었다. 그러나 漢나라가 중국을 통치하는 동안에도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漢 高祖 劉邦이 나라를 세우고 200여 년이 지난 후인 서기 9년 외척인 王莽이 漢 왕조를 찬탈하여 新이라는 이름으로 16년간 중국을 통치하였다. 王莽은 儒家출신으로 국정을 장악한 후 平帝의 뒤를 이을 천자로 두 살밖에 안된 宣帝의 玄孫인 孺子 嬰을 옹립하고 전권을 행사하며 자신이 황제로 등극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讖緯 사상을 이용하여 符命을 앞세우고 또 추종자들을 규합하여 假皇帝의 자리를 버리고 未央宮의 正殿에서 정식으로 황제에 등극하였다. 그러나 王莽의 新정권은 그 정통성과 명분의 부족으로 많은 반대 세력이 나타나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끝이지 않았다. 王莽의 新 정권에 반기를 들었던 세력 가운데 가장 강대한 군사력을 갖춘 사람은 景帝의 六世孫이며 南陽(지금의 河南省 南陽縣)의 호족 출신인 劉秀이다. 그는 지방 세력을 하나씩 평정하거나 흡수하여 漢나라를 다시 세우고 光武帝가 되었으며 都邑을 洛陽으로 옮겼다. 王莽이 통치한 新 이전을 前漢 또는 西漢으로 부르고 光武帝가 洛陽으로 都邑을 옮긴 이후를 後漢 혹은 東漢이라 부른다. 漢나라가 성립된 초기에는 秦나라에서 사용하던 각종 법률과 제도를 많이 계승하여 사용하였으나 漢 武帝(서기전 140-서기전 87)가 즉위하고부터는 太初曆으로 역법을 개정하고 儒家의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채택하여 부국 강병을 꾀하였다. 이전까지는 秦나라에서 통일하여 사용한 小篆과 隸書를 공식 서체로 사용하였으나 점차 隸書로서 小篆을 완전히 대신하게 하였으며 小篆은 점차 실용의 위치를 버리고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되게 하였다. 국가가 점점 부강해지고 안정되어 감에 따라 법률과 제도를 점차 漢나라의 실정에 맞은 것으로 바꾸어 사용하게 되었다. 경제가 발전하고 국력이 강대해짐과 동시에 禮樂과 통치 이념을 儒家의 사상으로 통일하였다. 儒家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채택한 후에는 禮樂의 典禮가 많아지게 되었으며 조상이나 권력 계층에 대한 頌德의 관습이 성행하게 되었다. 따라서 漢나라 시대에는 先秦시대와 달리 각 고을 수령의 덕행이나 儒家와 관계되는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 많이 남아 있게 되었다. 漢나라가 건립한 초기에는 각종 법률과 제도를 秦나라 시대의 것을 계승하여 사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丞相인 蕭何로 하여금 漢나라의 실정에 적합한 형태와 양식으로 바꾸게 하였다. 그는 秦나라에서 사용하던 八體를 정리하고 이를 官吏를 뽑는 시험에 응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隸書를 중점 과목으로 정하고 전문적으로 문자를 관리하는 벼슬인 ‘史書令史’를 두게 된다. 후에 史書令史는 隸書를 잘 쓰는 사람에게 주는 호칭이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漢나라 시대 隸書를 ‘史書’라 부르기도 한다. 漢나라 초기에 문자와 서체를 관리하는 전문 벼슬이 있는 것은 서예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東漢시대에는 隸書가 더욱 성행하여 隸書로서 높은 관직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으며 전문적으로 隸書를 쓰는 서예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서예의 이론에 관한 내용을 중심으로 한 글과 책들이 속속 등장하여 서예는 순수한 예술로서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漢나라 시대의 서체로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되는 것은 隸書이나 刻石 隸書를 중심으로 설명 할 때 隸書 완성은 東漢의 중 후기인 桓帝와 靈帝시대에 이르러서이다. 西漢시대의 초기에는 小篆과 隸書가 다함께 공식 서체로 사용되었으며 新莽시대에는 복고 정책의 영향으로 小篆이 다시 주요 서체로 사용되어 여러 점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시대가 다르고 문화와 사상이 요구하는 심미적 표준이 다른 까닭에 小篆의 筆劃과 結體는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西漢 초기의 篆書와 新莽시대의 篆書는 刻石이나 청동기 명문 모두 秦篆의 강건한 특징을 이어받고 있으나 圓筆보다는 方筆을 위주로 運筆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西漢이 정치와 문화 등 많은 영역에서 秦나라의 제도를 계승하였으나 매우 빠른 속도로 자신만의 고유한 제도를 창출하여 사용하였다. 문자와 서체도 광범위하고 신속하게 변화를 진행하게 되고 새로운 서체를 완성시키고 또 사용하게 된다. 서체 변화의 중요한 표현은 隸變의 완성으로 隸書의 광범위한 사용과 草書, 行書, 楷書 등 今體의 모든 書體가 성행하거나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隸書는 이미 先秦시대에 민간에서 비교적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고 秦나라 시대에는 문자 통일 정책과 함께 공식 서체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西漢시대까지만 해도 비석에 기록하거나 중요한 공문서에는 隸書보다 小篆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隸書는 국가의 일반적 문서나 민간에서 竹簡이나 木牘을 서사 재료로 하여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西漢시대에도 刻石 隸書가 있었으나 아직 보편화되지는 못하였으며 수량도 많지 않다. 또한 서체의 변천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볼 때 竹簡書이나 木牘의 隸書보다 波磔이 발달하지 않았으며 筆劃과 자형에 篆書의 서풍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刻石 隸書의 波磔은 西漢 중기를 거쳐서 점차 발달하고 있으며 자형도 偏方形으로 변해 가서 東漢의 중 후기에 이르러 漢隸의 완성을 맞이하게 된다. 西漢시대에는 隸書의 광범위한 사용과 동시에 草書가 성행하여 개인적 기록이나 서신의 왕래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晉나라 시대의 衛恒은『四體書勢』에서 “漢興而有草書”(漢나라가 발흥하고 草書가 생겨났다.)라 하여 漢나라 시대에 이미 草書가 사용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 출토된『流沙墜簡』,『武威醫簡』,『居延漢簡』 등 西漢시대의 簡牘에서도 많은 양의 章草가 발견되고 있으며 章草와 今草가 모두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물 자료와 문헌의 기록을 근거로 할 때 예전의 학설인 隸書에서 章草가 탄생하였고 또한 章草에서 今草로 변천하였다는 이론은 설득력이 부족함을 알 수 있다. 비록 章草와 今草가 완성되고 또 보편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隸書보다 늦은 것은 사실이나 隸書나 草書의 기원은 모두 戰國시대의 서체에서 찾을 수 있다. 東漢을 세운 光武帝는 西漢의 郡國制를 이어받았으나 西漢의 실패를 거울삼아 제후들의 封邑을 작게 하여 그들의 세력을 축소하였다. 또한 王莽의 집권으로 인한 사회 불안과 장기간에 걸친 흉년과 전쟁으로 인한 백성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세금을 경감하거나 화폐를 개혁하는 등 많은 유화정책을 시행하였다. 또한 사상의 통일을 위하여 유학을 정책적으로 장려하여 太學을 설립하고 五經博士를 두었으며 三公을 비롯한 모든 관리를 임용하는데 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우선 하였다. 光武帝의 뒤를 이은 明帝와 章帝도 讖緯說을 배척하고 유학을 기초로 하여 학술과 문예의 부흥에 전력하였다. 그리고 私學을 크게 발전시켜 경전에 대한 연구를 적극 장려하였다. 경전에 대한 연구는 古文학파와 今文학파의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이에 章帝는 경전 이해의 통일성을 느껴 궁중의 白虎觀으로 古文學派와 今文學派의 대표 학자를 초청하여 五經에 대해 토론하게 하였다. 白虎觀에서 논쟁한 五經의 이해를 근거로『白虎講奏』를 편찬하였으며 후에 班固가 이것을 다시『白虎通』으로 편찬하기도 하였다. 光武帝가 東漢을 세우고 明帝와 章帝가 儒學의 뿌리를 굳건하게 내리게 한 뒤부터 東漢의 문예는 유가 사상을 기초로 하여 급속히 발전한다. 五經의 광범위한 유행과 독서 인구의 증가 그리고 史書令史에 의한 관리의 임용은 서예가 급속하게 발전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이와 발맞추어 종이와 붓 등 서사 재료가 개량되고 역사책과 개인의 창작집이 대량으로 편찬되었으며 여러 형태의 頌德碑를 세우는 풍습이 성행하여 서예의 열기는 최고의 수준에 이른다. 東漢시대에 가장 성행하였던 서체는 隸書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자료를 근거로 할 때 東漢의 隸書는 대부분 刻石 작품이다. 西漢의 刻石 隸書는 簡牘 隸書에 비해 아직 波磔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또 수량도 적은 반면에 東漢의 隸書는 거의 대부분이 刻石 작품이며 완전하게 성숙된 波磔으로 이루어져 있다. 劉勰은『文心雕龍』에서 “後漢以來, 碑碣雲起.”(後漢부터 碑碣이 많아졌다.)라 하였으며 歐陽修는『集古錄』에서 “至後漢以來, 始有碑文.”(후한에 이르러 처음으로 비문이 있었다.)이라 하여 東漢시대에 이르러 비석을 세우는 풍습이 유행하였음을 기록하였다. 현재까지 출토된 東漢의 비석은 모두 170여 점에 달하며 거의 대부분이 隸書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과 실물 자료를 살펴볼 때 東漢시대에 隸書가 매우 성행하였으며 또 碑碣을 세우는 풍습이 얼마나 유행하였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비록 발견되는 수량은 적으나 西漢시대의 簡牘 작품을 근거로 하고 또 東漢의 문예 부흥과 서예 이론의 발전, 서사 재료가 개량된 기록 등을 참고로 할 때 東漢시대에도 簡帛과 종이를 이용한 서예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음을 충분히 짐작하게 된다. 東漢시대에 공식적으로 사용한 서체는 隸書이나 개인 문서의 초고나 서신 등에는 草書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으며 청동기, 瓦當, 印章, 碑額 등에는 篆書가 주로 사용되었다. 東漢의 草書는 章草와 今草의 두 가지 형태이며 簡牘의 草書를 살펴볼 때 서체의 성숙은 물론이고 예술적 수준도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東漢의 趙壹은『非草書』을 지어 당시에 많은 학자들이 학업은 게을리 하고 草書의 연마에 열중하며 서예로서 관직을 얻으려는 풍습을 비판하였다. 趙壹의 의도는 학자들에게 유가의 학업을 닦아 立身揚名 할 것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로『非草書』를 저술하였으나 그 내용으로 당시에 草書가 매우 유행하고 있었으며 또 서예가 창작은 물론 이론적으로 많은 발전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隸書가 공식 서체로서 정부의 공문서나 禮樂의 장소에서 사용되고 草書가 개인적 필요에 의해 사용된 東漢시대에도 篆書는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며 이어져 내려온다. 옛 것을 숭상하는 중국 사상과 篆書가 가지는 고유한 형태와 심미적 특징은 비석의 머릿글이나 印章 등과 같이 신분을 나타내고 징표로 사용되는 장소에서 여전히 사용되었다. 碑額이나 印章에 篆書로 쓰고 새기는 관습은 漢나라 시대에 머물지 아니하고 현재까지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漢나라 시대의 서예 작품은 대부분이 글을 쓰거나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어느 작품이 누구에 의해 쓰여지고 새겨졌는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역사의 기록과 몇몇 작품에 남겨진 이름을 근거로 하여 당시에 활동한 서예가들을 알 수 있다. 兩漢의 걸출한 서예가로는 草聖이라 불리는 張芝, 隸聖이라 불리는 蔡邕, 行書를 창조하였다고 전하는 劉德昇이 있다. 그밖에 西漢의 蕭何에서부터 篆書에 능한 曹喜, 草書에 杜度(操)와 崔瑗, 隸書에 뛰어난 師宜官과 梁鵠 등이 있었다. 이상의 걸출한 서예가 이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많은 서예가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남겨진 수많은 刻石과 簡牘 서예 등을 근거로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漢나라 시대에는 서예 작품의 창작 뿐 아니라 문자학과 서예 이론에 관한 연구도 높은 수준에 달하였으며 몇 편의 書論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전하는 최초의 書論 저술은 東漢시대 崔瑗의『草書勢』로 비록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晉나라 시대 衛恒의 서론인『四體書勢』의 내용 가운데 자세히 전해지고 있다. 이 밖에 漢나라 시대의 書論으로 趙壹의『非草書』와 蔡邕의『筆論』,『九勢』 등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서예 이론으로 쓴 저술은 아니지만 揚雄의『揚子法言』과 許愼의『說文解字․敍』가 후대의 서예 이론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揚雄은『揚子法言』에서 “言, 心聲也. 書, 心畵也.” (말은 마음의 소리이고 글은 마음의 그림이다.)라 하여 말과 글의 중요한 심미적 특징을 설명하였다. 또한 許愼은『說文解字․敍』에서 “書者如也”(書는 만물의 근본 형태이다.)라 하여 한자는 곧 만물의 형태에서 기원하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漢나라 시대 이후의 서론은 크게 서예의 심미적 특징과 서체의 형태로 나누어 이론을 전개하고 있으며 모두 “書, 心畵”와 “書者如也”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漢나라 시대 서예의 개괄적 특징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다양한 書體의 출현과 전문 서예가의 등장 그리고 書論의 저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漢나라 시대에 서예가 발전한 이유는 다음의 몇 가지와 같은 직접 혹은 간접적 까닭이 있었다. 당시에 儒學의 적극적 수용으로 經書가 광범위하게 편찬되고 禮樂을 숭상함에 따라 儒家의 中和 사상과 선현을 송덕하는 전통이 싹트게 되어 서사 활동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또 종이가 발명된 후 蔡倫의 공로로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어 서사 재료로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붓과 먹 등의 서사 용구가 개량되어 문자를 기록하고 보관하기에 매우 편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隸變이 완성되어 隸書가 공식적으로 쓰였으며 今草와 章草가 공식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창작 활동에도 응용되었으며 楷書와 行書까지 탄생하여 서예가 발전할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先秦시대의 甲骨文과 金文에서 출발한 자연발생적 서예 활동은 秦나라와 兩漢을 거치면서 예술 작품으로서 창작하고 감상하는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
출처: 중국과 서예 원문보기 글쓴이: 금릉산방인 소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