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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4년 9월 29일(제39주) 오전 11:00
장소 : 인천은혜교회당
본문 : 창세기 25:27-34
제목 :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사람
사람에게는 자기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성적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직장생활 하는 사람들은 승진이 중요하다고 행각합니다. 몸이 약한 사람은 건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자들은 명예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는 국민들의 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표만 얻을 수 있다면 지옥에까지라도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보면 상대적 중요성입니다. 예를 들면 사회생활을 할 때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를 잘해서 1, 2등 하던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건강이 그렇게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절대적 문제입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 9:27)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잘 죽으려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이 없으면 죽음 이후에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이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것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중요한 줄 알고 그것을 얻는데 인생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사십 세에 리브가와 결혼하였습니다(창 25:20). 그런데 20년이 되는데도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삭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푸시사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하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어머니 태속에서 서로 싸웠습니다. 그때 리브가가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0:23) 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후에 에서의 후손이 야곱의 후손, 곧 이스라엘에게 정복될 것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에서와 야곱이 장성하여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였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에서가 들에서 사냥하다가 돌아왔는데 심히 배가 고프고 피곤하였습니다. 야곱이 끊인 팥죽을 보자 에서는 더욱 식욕이 생겨 팥죽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야곱은 형에게 팥죽을 주지 않고 형의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라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자 에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32절입니다.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은 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장자의 명분을 요구합니다. “오늘 내게 맹세하라.” 자기의 팥죽과 형 에서가 가지고 있는 장자의 명분을 바꾸자는 제안입니다. 그러자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에서에게 팔”았습니다. 그런데 성경 저자는 두 사람의 장자의 명분 거래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합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오늘 이런 내용의 말씀을 가지고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장자의 명분
먼저 장자의 명분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장자의 명분’이란 ‘장자의 상속권’을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의 한 가문에서 장자로 출생한 자가 갖는 특권과 책임을 말합니다.
첫째는 외적 특권으로 아버지의 뒤를 승계하여 가장이 되어 가문의 대소사를 처리할 수 있는 주도권과 다른 형제에게 할당된 유산의 두 몫을 분배 받을 수 있는 자격(신 21:15-17)을 가집니다. 둘째는 내적 특권으로 장자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한 가정의 대표자로서 모든 일을 수행함과 동시에 언약 관계에서 영적 축복의 후계자가 됩니다. 또한 책임도 병행하는데 그것은 부친의 노후나 사후, 모친과 미혼 자매들을 부양해야 할 의무입니다.
언약 관계에서 장자의 명분(영적 축복)이란 아브라함의 가문에 있어서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내포합니다. 즉 “그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될 약속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신령한 복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분량 대비 유명세를 따진다면 아마 에서는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입니다. 그 가장 큰 이유가 장자의 명분을 동생 야곱에게 팔아 버렸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것도 팥죽 한 그릇이라는 헐값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정작 나중에 아버지 이삭의 모든 재산은 다 에서가 차지하고, 야곱은 혈혈단신으로 외삼촌 집으로 도망가서 고생만 실컷 했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모은 재산을 또 형인 에서에게 화해의 선물로 보내게 됩니다. 즉 장자의 명분을 샀지만 별로 도움도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 성경을 읽으면서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는 것과, 야곱이 그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을 받아서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훔치듯 받고서 도망간 것에 주목합니다. 여기서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장자의 명분’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실재로 이삭의 모든 재산 중에 야곱이 차지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장자의 권한과 야곱이 에서에게서 팥죽 한 그릇으로 사고, 또 아버지를 속여서 받은 축복과 장자의 명분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창세기를 통해서 에서와 야곱에 대한 말씀을 듣는 것은 그들의 일이 오늘 우리의 삶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면서까지 얻고자 한 장자의 명분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메시지일까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야곱과 같이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한다면 그 장자의 명분이 오늘 나의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야곱의 축복’ 찬양만 부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축복이 자신의 축복이 되려면 그 장자의 명분을 나도 사야합니다.
야곱이 그렇게 열망했던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받은 장자의 명분은 아버지 이삭이 가진 재산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그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의, 그 의가 이삭으로 나타난바 되었고, 그것이 다시 형인 에서와 야곱으로 나타났으나, 표현된 것으로만 보면 에서의 것이 될 수밖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장자의 명분은 육신으로 형과 아우, 누가 먼저 났느냐 나중에 났느냐 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장자의 명분을 보는 눈이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순간을 보세요. 에서는 배가 고파서 그 배를 채울 수 있는 떡과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이 가진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습니다. 에서에게는 장자의 명분, 곧 하나님의 의보다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마치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성공에 대하여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또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과 같이 자신의 육신으로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육신의 일보다는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을 원했습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의 값으로 지불한 것은 팥죽이었습니다. 그 팥죽이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는 것보다는 그 색이 붉은 색이라는 것에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아담’, 곧 사람이라는 뜻이 바로 ‘붉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샀다는 것은 인생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에 대응되는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서는 오히려 그 몸이 붉어서 그 이름을 에서라고 했지만, 자신이 인생이라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사용하지 않고 그것을 팔아버렸습니다. 즉 육신을 가진 인생을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것에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에서는 ‘장자의 명분이라는 것이 그렇게 판다고 아버지의 재산이 동생의 것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사람의 삶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분명합니다.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의 맏아들이 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하나님 아들의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들인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이삭이 가진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께서 그 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하여 나타내신 모든 ‘의’였습니다. 그 의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삭으로 나타난 것이고, 또한 그 의가 아들들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 장자 명분의 값,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사는 값은 인생이라는 육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과 장자의 명분을 바꾸는 것입니다. 즉 육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믿음으로 그 장자의 명분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히려 인생의 본질적인 존재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붉은 존재 인생이 그 인생으로 바꾸어 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라는 장자의 명분입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에서와 같이 육신의 문제를 그 의보다 믿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장자의 명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배고픔을 채울 수 있는 팥죽입니다. 오히려 세상의 법이고, 세상적인 표현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에서는 이방 여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장자의 명분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산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자 믿는 모든 성도들은 그 장자의 명분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드려서 사야합니다. 그것을 야곱을 통해서 보여주신 말씀이 바로 장자의 명분을 팥죽으로 산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결국 장자의 명분은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을 에베소서 2:8을 보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믿음은 완전한 믿음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완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배가 고프다고 그 믿음으로 팥죽을 삽니다. 믿음을 가볍게 여깁니다. 그러니 그 믿음이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성도는 세상에 살면서 절대로 믿음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 내 인생을 무너뜨리고 말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가장 값지게 만들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장자권의 중요성
이삭이 사십 세에 리브가와 결혼을 하였으나 이십년이 지나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자녀가 없다는 것은 곧 대를 이을 후사(장자권자)가 없는 것으로 그 장자권자란 한 부족의 족장이며, 제사장이요, 가문의 기업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끊어진 것으로서 매우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대를 이을 상속자가 없다는 것은 구약성경이 예언한 메시아가 오시는 길(족보)이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 역시 상속자가 없어 고민하던 중 하나님께서 주시는 때를 기다리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사라의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결과 그 이스마엘이 훗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자녀 이삭을 희롱하고 괴롭혔습니다.
또한 그 일로 인한 두 아내 사라와 하갈의 싸움의 결과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았다는 비극적인 가정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에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 이유는 바로 그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오시는 족보, 곧 장자권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없어 고통 하던 이삭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그 결과 결혼 한지 이십 년 만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자녀가 바로 쌍둥이 에서와 야곱입니다. 성경은 이삭의 기도로 인해 아내 리브가가 임신을 하였는데 쌍둥이였고, 그 아들들이 리브가의 뱃속에서 서로 싸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두 형제는 두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큰 자는 먼저 나온 형 에서를 가리키며, 어린 자는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동생 야곱을 말합니다. 쌍둥이지만 간발의 차이로 먼저 나온 에서가 형 곧 장자권자가 되었고, 나중 나온 동생 야곱은 일평생에서의 장자권을 사모하며 쟁취하려는 삶을 살게 됩니다.
형 에서는 어느 날 들에서 사냥을 한 후에 돌아와서 피곤함과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동생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로부터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산 이유는 항상 장막에 머물면서 어머니 리브가의 양육을 통해 장자권의 귀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모하던 장자권을 형에게서 산 야곱은 세월이 흐른 뒤 실제로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장자권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의 출생과 장자권을 둘러싼 이러한 싸움을 육적인 눈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오늘날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옛날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육적으로 보면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하는 어머니의 모습이며, 야곱은 아버지의 눈을 속여서 장자권 축복을 가로챈 거짓말쟁이며, 약삭빠른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육적인 것을 통해 영적 진리를 증거하고, 또한 성경은 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진리임을 전제로 하고 볼 때는 리브가는 사라와 같이 약속의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참 교회의 모형이며, 야곱은 곧 이삭과 같은 약속의 씨로서 오늘날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언약을 믿음으로 구원받고 천국 가는 참 성도의 믿음의 모형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에서가 장자권을 팔아먹은 행위에는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믿음과 천국의 모든 축복을 다 버리고 포기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결국 이삭으로부터 장자권 축복을 받은 야곱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대를 잇는 장자권자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장자권 축복을 빼앗긴 에서는 하나님을 떠나가고 훗날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 민족을 계속해서 괴롭히는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 후손 중 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 때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베들레헴 지경의 두 살 아래 사내아이들을 다 죽이게 한 이두메인(에돔사람)이며 유대 분봉 왕인 헤롯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두 사람이 두 민족을 이루게 되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되리라는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쌍둥이 에서와 야곱이 리브가의 뱃속에서부터 서로 먼저 나오려고 싸웠다는 것은 실로 신비한 일입니다. 성경이 쌍둥이 형제가 장자권을 두고 일평생을 서로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고 기록하는 것은 그만큼 당시의 시대적 문화 배경 아래서 장자권이 귀했음을 가르쳐 줍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장자권을 통해 구원과 관련한 영적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한 뜻이 숨겨져 있음을 증거합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구약 성경의 역사는 장자권 싸움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의 싸움,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의 싸움,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싸움의 중심에는 바로 장자권이 있습니다. 그 장자권 싸움에서 이긴 자가 믿음의 사람들의 대를 잇고,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이 올라가게 됩니다.
구약 성경 속 믿음의 사람들 이야기는 장자권자들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장자권 싸움에서 이겨 족보에 그 이름이 올라갔다는 것은 곧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을 물려받고 그 믿음을 다음세대에 물려주었음을 의미합니다. 그 장자권자들의 족보와 믿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장자권자들의 족보가 바로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마태복음 1:1-16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세스와 세라를 낳고 ....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다시 말해서 구약의 장자권자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장자권 싸움에서 승리하여 하마터면 끊어질 뻔한 예수님의 족보의 대를 이어 놓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이 예언한 메시아 곧 예수님은 장자권자들을 통해서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 자신이 또한 장자(맏아들)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타락한 인생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시고 장자권자들을 통해 그 뜻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반면에 마귀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지 메시야가 오시는 길을 끊어버리고 훼방하는 것이 곧 구약시대 장자권 싸움입니다. 그 결과 믿음의 사람들의 족보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영적 싸움들이 있었고, 대부분의 육적 장자(맏아들)들은 그 믿음이 타락하고 무너진 반면에, 차자나 나중 난 자들이 그 장자권을 쟁취하여 축복받는 역사가 예수님의 족보 속에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장자권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구원과 천국의 축복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어 천국에 가기까지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곧 영적 장자권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이 장자권 축복을 쟁취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운 것은 바로 초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길을 예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아가 신약시대 구원받은 성도들이 천국의 축복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영적 싸움의 모형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영적 싸움에서 이긴 자들이 천국의 구원과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이 올라간 여인들을 비롯하여 구약시대 장자권자들을 낳고 양육한 믿음의 여인들의 믿음도 메시아, 곧 초림 의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열고 예비하는 위대한 일을 한 것입니다. 나아가 신약시대에 신랑 예수님의 참 신부된 교회의 모형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장자권 싸움의 가장 중요한 원인과 배경은 바로 메시아로 오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것을 아는 마귀 사탄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장자권자들을 무너뜨리고, 방해하고, 막는 것이 바로 장자권 싸움이었습니다. 또한 구약시대 믿음의 사람들을 둘러싼 여인들의 싸움이며, 잉태와 출산, 사랑과 결혼의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 구약 성경 속에 믿음의 사람들을 둘러싼 영육 간에 엄청난 싸움들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모든 이야기들을 성경에 기록한 목적은 구약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로 오실 예수님, 또한 장자권자(맏아들)로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관련한 이러한 진리들을 깨달을 때 성도들이 더욱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굳건히 소유하여 크고 작은 영적 싸움을 이기는 믿음의 됩니다.
분명한 것은 구약성경 속 믿음의 사람들이 장자권자가 되는 것이 결코 저절로, 쉽게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고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고 천국 가는 축복도 결코 쉽게, 가만히 있어도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귀가 성도들이 천국 가는 길을 방해하고 막는다는 것을 깨달아 그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야곱과 같은 영적 장자권 싸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주신 구원과 천국의 축복을 귀하게 여기고 끝까지 싸워 지키는 믿음이 바로 야곱과 같은 믿음입니다. 반면에 에서처럼 그 귀한 구원의 축복을 팥죽 한 그릇(먹는 것=물질)에 팔아먹는 어리석고 망령된 믿음(히 12:16)이 있다는 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에서와 같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그 귀한 천국의 축복을 빼앗기는 어리석은 믿음을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 믿음을 끝까지 지켜 천국 가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 믿음으로 모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여 천국에 가서 아담 이후 모든 장자권자들과 함께 영원한 천국기업을 상속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장자권을 가볍게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믿는 믿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3. 성도가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할 것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에서는 이삭의 장자로 야곱의 쌍둥이 형입니다. 에서는 털이 많고 사냥을 잘하는 들사람으로 활동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그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원문/ ‘그 사냥한 고기가 자기 입에 있기 때문’) 사내답고 야성적인 에서를 사랑했습니다(28절).
반면에 에서는 배고픔 때문에 소중한 장자의 명분을 한 끼 식사에 지나지 않는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리는 충동적이고 경솔한 사람이었습니다. 에서의 최대 관심사는 먹을 것이었습니다. 장자의 명분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에서는 성격상 늘 밖에 나가서 사냥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경건한 부모님의 신앙교육과 감화를 받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무지했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에서와 야곱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고, 야곱은 형의 약점을 이용해서라도 가지고 싶어 할 만큼 그것을 소중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고대 족장시대에는 자식이라고 다 같은 자식이 아니었습니다. 장자에게는 다른 자식들과 다른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을 ‘장자의 명분’이라고 합니다. 장자는 ① 가정을 통솔할 수 있는 아버지의 권위를 공적으로 계승하였습니다. ② 부모 재산을 물려받을 때 다른 형제의 두 몫을 받았습니다(신 21:15-17). ③ 가정의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영적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장자는 단순히 가정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가정의 영적 수장이었습니다. 이것은 장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장자의 명분을 갖고자 취한 야곱의 방법이나 행동은 바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난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야곱의 행동에 대하여 책망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장자의 명분을 갖고 싶어 하는 야곱의 태도와 집요함에 대하여 상당히 긍정적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장자 명분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사모했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비열한 방법으로 형을 속이면서까지 그것을 가지려고 했을까요? 물론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이 야곱의 불의한 태도에 대해서는 침묵하며 에서의 태도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고 하여 야곱을 옹호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을 그 뒤에 펼쳐진 야곱의 험난한 생애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지키고 있다고 하여 다 주인이 아닙니다. 그것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킬 수 있습니다.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소중한 것을 지키고, 또한 주인이 되는 비결입니다. 장자의 명분에 대한 야곱의 태도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소중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의 가치를 깨닫고 잃어버리지 않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에서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소중한 장자의 명분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볍게 여겼습니다. 장자의 명분에 대한 에서의 자세가 문제였습니다. 본문 34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야곱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며 갈망했던 장자의 명분을 에서는 가볍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자의 명분에 대한 에서의 그릇된 태도입니다.
여기 ‘가볍게 여겼다’는 말은 매우 부드러운 표현입니다. 이 말은 본 뜻은 ‘업신여기다’ ‘멸시하다’ ‘경멸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32절) 라고 하는 그의 말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시쳇말로 ‘여기서 죽이 나와 밥이 나와, 이까짓 것이 무슨 소용이야’와 같은 말입니다. 이것은 에서가 어떤 사람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말입니다. 말은 곧 그 사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4:4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떡과 팥죽에만 얽매인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다고 해서 당장에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로운 일, 뜻있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배고픔을 참고 견딥니다. 배고픔을 참고 견디면서 그 일들을 추진합니다.
그런데 에서는 잠시 배고픈 것을 가지고 죽음을 운운하며 그 소중한 장자의 명분을 한 끼 음식과 바꾸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장자의 명분이 아니라 실제적인 이익이었습니다. 당장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물인 장자의 명분을 눈앞에 놓인 한 그릇 팥죽보다 못하게 여겼습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포기한 것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것 때문에 영원한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긴급한 것 때문에게 중요한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육적인 것 때문에 영적인 것을 포기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을 업신여기며 멸시하는 것입니다. 사소한 이익이나 쾌락을 위해 값비싼 희생을 지불한 참으로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러한 에서를 “망령된 자”(히 12:18)라고 하며,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히 12:15)고 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에서와 야곱의 인생이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에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삭 가문의 장자로 태어났으나 그 소중한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으로 명령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과 그 백성 가운데서 쫓겨나게 되고 영원히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대조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되었고, 에서는 복을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결국 복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기준이 ‘장자의 명분’에 대한 신앙적 자세였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중요한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아주 가벼운 인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명분들에 대해서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에서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들을 가볍게 여기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리스도인의 명분을 귀하게 여기시나요? 이제부터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명분들을 중하게 여길 줄 아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들에게도 목사나 장로, 안수집사, 권사, 집사라는 등 직분의 명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은사의 명분이 있습니다. 달란트의 명분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명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명분이기에 그 명분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함으로서 에서의 뒤를 따르지 않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16-17을 보면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에서는 버린바가 되었고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육신적인 것은 당장 눈에 보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기지만, 정말 귀하고 가치 있는 영적인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가치 있고 영원하고 영존하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8:5-6은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8-9은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서와 같이 아직도 눈에 보이는 것, 변하고 가치 없는 육신의 것을 바라보고 추구하며 목표를 삼아 달려가는 ‘또 다른 에서가 아닌가?’ 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장자의 명분이란 오늘날 하늘나라의 시민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축복을 육신의 정욕 때문에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말씀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하늘나라의 축복을 매일 받아 누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농부가 자신의 농장 가운데 있는 물웅덩이를 보고 늘 투덜거렸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도 없이 고약한 냄새만 풍기면서 농장을 망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농부는 그 웅덩이가 딸린 농장을 사정하다시피 하여 헐값에 팔아버렸습니다.
‘웅덩이와의 결별’이 있던 날, 농부는 파티를 열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정은 농부에게 일생 최대의 실수가 되었습니다. 고약한 냄새만 풍기는 그 쓸모없는 물웅덩이는 다름 아닌 기름 웅덩이였습니다. 그곳에서 거대한 유전이 발견되었습니다. 노다지도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겐 무가치한 골칫덩어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것의 가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 7:6)고 하셨습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복입니다. 그래야 가치와 역량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의 소중한 것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명분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감당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절대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중요한 것을 가볍게 여겨서 실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가볍게 여기다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동생까지 죽이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절대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예배는 성도가 하나님을 향하여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사울 왕은 사무엘 선지자의 말을 가볍게 여겨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순종이 중요한데 사울 왕은 순종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 결과 사울 왕은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에서도 정말 중요한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다 실패한 사람입니다.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을 복으로 여기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행복을 행복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에서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을 생명을 걸고 꼭 붙잡아야 하는데, 장자의 명분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팔아버렸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망령된 사람,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에서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절대로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 그리스도인의 명분
에서는 배고픔으로 인해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에서는 장자였지만 장자의 책임과 축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몰랐습니다. 눈앞의 먹을 것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배를 채우는 것을 더 중요시 했습니다. 장자는 장자다워야 합니다. 배가 고파도 동생들을 먼저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장자입니다. 부모님을 대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가문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장자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 돈을 따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도는 무슨 일을 행하기 전에 먼저 명분을 생각해야 합니다. 정치인들도 명분을 중시합니다. 정치인들이 명분을 잃어버리면 시정잡배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명분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즉 성도에게는 그리스도인의 명분이 중요합니다. 나의 판단의 기준, 결정의 기준, 행동의 기준이 돈이나 명예나 욕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명예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라면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십자가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성도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세상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인다면 그리스도인의 명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속이며 남을 헐뜯는다면 그리스도인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제2의 에서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보다 잘살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출세하지 못했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의 명예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복
이스라엘에서 장자의 축복은 곧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팥죽 한 그릇만도 못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16절은 그런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복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야곱은 모든 것을 걸고 장자의 명분을 얻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복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평생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살았습니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해주었습니다. 바로 왕을 만나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했습니다. 임종 직전에도 아들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했습니다. 복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그대로 믿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복 받는 일이라면 야곱처럼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에서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죽 한 그릇 만큼도 못하게 여기는 자는 절대로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도는 예배하는 일이라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에서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귀한 장자의 명분을 죽 한 그릇에 팔아먹는 어리석은 인간이 되었습니다. 구원의 족보에서 벗어난 인생이 되었습니다. 후에 통곡하며 후회했지만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구속의 은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의 처형을 받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게 하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당할 인생이 영원히 천국에서 주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평생 그 은혜를 갚으며 살아도 다 갚을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을 믿으시나요? 내가 믿지 않아도 천국과 지옥은 있습니다. 이세상은 잠깐입니다.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갑니다. 저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눈을 감으면 열일곱 여덟 때의 생각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어느덧 중년이 되었습니다. 저보나 나이가 적은 목사님도 할아버지가 된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죽음은 정한 이치요 그 다음은 심판이 있으리라고 히브리서는 말씀합니다.
그 심판의 결과는 지옥과 천국으로 나누어 질 것입니다. 영벌에 처하거나 영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천국에 갈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갚을 수 없는 구속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값없이 이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이 구속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넷째, 성경의 약속
약속은 구속력이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약속은 시간만큼 귀중합니다. 그래서 약속은 손해가 나도 지켜야 합니다.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편의에 따라서 지키고 안 지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말로 한 약속이라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타인과의 약속이든 자기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든 지켜야 합니다. 약속을 잘 안 지키는 사람치고 성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약속은 손해가 나도 지켜야 합니다.
카네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한 번 약속한 일은 상대방이 감탄할 정도로 정확하게 지켜야 한다. 신용과 체면도 중요하지만, 약속을 어기면 그만큼 서로의 믿음이 약해진다. 그러므로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진실한 사람입니다.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은 아무리 마음이 착해도, 좋은 일을 많이 해도, 공부를 잘해도, 사업에 성공했어도 진실한 사람이 아닙니다. 약속을 명분으로 알고 잘 지키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사람”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자면 “믿음을 가볍게 여긴 성도, 예수님을 가볍게 여긴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많이 하며 삽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가리켜 서원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언약입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이라고 부릅니다. 옛 언약, 새 언약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그 순간부터 이 언약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 언약을 지키면 천대가지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갈 것이고 안 믿으면 지옥 갈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바치겠다고 약속한 것만이 서원이 아닙니다. 예배시간, 봉사, 직분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사사기에 11장에 보면 ‘입다’라는 사사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큰 용사였으나 기생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쫓아내 버렸습니다. 얼마 후 암몬 자손들이 쳐들어 왔는데 나가 싸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가서 우리의 장관이 되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입다가 그 청을 받아들여 군사들을 이끌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전쟁에 자신이 없어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시면 돌아올 때 ‘내 집 앞에서 자기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겠다’고 서원하고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승리하고 돌아올 때 자기 집 앞에서 자기를 제일 먼저 맞이한 사람이 자기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습니다. 입다는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을 향하여 약속을 하였기에 그 서원을 지켰습니다.
성도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명분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명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명분은 에서에게 주었던 장자의 명분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가볍게 여기기 않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