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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노동자 신문은 지난 호에 이어 기획특집으로 좌익공산주의자와의 인터뷰를 싣는다.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 남한의 혁명그룹들과 해외의 그룹들을 연결하기 위해서 활동하고 있는 로렌 골드너와의 대담이 지난 해 11월 18일, 25일, 12월 4일 세 차례 진행되었다. 본 기사는 당시의 대담을 정리한 것이다. 먼저 언어 소통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에 응해 준 골드너 동지에게 사의를 표명하는 바이다. 그리고 바쁜 와중에도 본 대담에서 통역을 맡아준 서희준 동지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본 대담이 남한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선진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국제주의의 전망을 불어 넣는데 일조하기를 바란다.
사회주의 노동자 신문 (통역 : 서희준 정리 : 사회주의노동자 )
다음의 인터뷰는 2007년 11월 과 12월 3차례에 걸쳐 서울에서 최근에 좌익 공산주의이론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기 시작한 남한의 맑시스트 그룹 ‘사회주의 노동자 신문’의 투사들과 진행한 것인데 국제공산주의 흐름 (International Communitst Current – ICC), 그리고 국제주의자의 전망 (Internationalist Perspectives – IP)에 이어 진행된 시리즈의 세번째 것이다. 이 두 그룹은 나와 마찬가지로 남한에서는 그전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좌익공산주의 이론을 소개하는데 지난 몇 년간 힘써왔다.
현시기,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좌익 공산주의에 대한 토론, 그리고 아주 최근에야 시작된 남한에서의 그에 대한 관심은, 희망사항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의 주요 트로츠키그룹 (LO - Lutte Ouvriere, LCR - Ligue communiste révolutionnaire, 그리고 노동자의 당 Parti Des Travailleurs)이나 영국의 SWP와 같은 매우 크고 훨씬 더 잘 자리잡고 있는 극좌그룹들과는 대조적으로 아마도 몇백 정도밖에 안될 좌익공산주의의 흐름이나 환경에, 특별한 의미가 두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질문들과 그에 대한 답변들은 내가 생각하기에 지난 40년간의 전 세계상황에 대한 어떤 일관된 정치적 입장이나 판단으로서 수렴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대담이1929년이래로 자본주의 역사에 보이는 심각한 금융위기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고 있는 이 시점에서 보다 진전된 토론과 더불어 낡아 빠진 진부한 것들과 국제적 좌파들의 용인된 관점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촉진제가 되기를 희망한다.
로렌 골드너, 서울에서 2008년 4월
사회주의노동자신문(이하 ‘사노신’) : 한국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한국 노동계급 운동에 대한 인상은 어떠한가?
로렌 골드너(이하 ‘골드너’) : 한국에는 1997년에 처음 왔는데 96년 크리스마스에 통과된 비정규직화와 정리해고를 합법화하는 노동법 개악에 맞선 97년 1월의 총파업 투쟁 때문에 방문한 것이다. 나에게 당시 한국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는 1980년대 후반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을 추적해왔지만 그다지 많이 알지는 못했다. 그래서 1997년 9월, IMF 사태가 터지기 직전에 나는 다시 한국에 왔다. 그때에 나는 많은 투사들을 만났고 나의 관심도 늘어났다. 2005년 한국에서 직업도 얻었는데 한국 노동계급에 대해서 연구하고 배울 수 있는 정말로 좋은 기회였다.
나는 한국 노동계급이 다른 나라들의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후퇴와 방어의 시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난시기의 운동과 관련된 투사들, 활동가들, 지식인들을 만나왔는데 내가 느끼기에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상대적으로 매우 소수인 정규직 고임금 노동자들과 대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 나타나는 분리라는 인상이 들었다. 예를 들어,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공인 파업 투쟁을 정규직 노동자들이 공격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이 나의 주요 소감이다.
사노신 : 우리는 오세철동지로부터 동지가 한국의 혁명가들과 다른 국제 혁명 운동 세력들을 연결시키기 위해 왔다고 들었다. 그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달라.
골드너 : 나는 한국의 운동과 북미, 유럽의 운동에 가교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한국에 왔다. 나는 과거에 많은 시간을 유럽에서 보냈고 크게 봐서 좌익공산주의자들, 자유공산주의자들에 속한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으며 또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있는 몇몇 사람들도 알고 있다. 나는 그 운동들과 여기의 운동들 사이에 소통이, 내가 아는 한, 잘 안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노동운동의 상황은 외국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영어나 다른 외국어로 쓰인 문서 대부분이, 내가 봤을 때, 운동에 대한 매우 협소한 시각인 노동조합주의와 관료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민주노총의 입장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한국에 와서 민주노총 관료들로부터 정보원을 획득하고 있는 서구의 학자들에 의해 더 강화되고 있다.
이 계획을 추진하면서 몇 가지 문제에 봉착했다. 우선 나는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한다. 그것은 많은 투사들과 대화하는데 심각한 애로사항이 되었다. 나는 한국어를 배우려고 시도하고 있지만 그것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내가 접촉해서 가교를 놓으려는 북미와 유럽의 경향들은 상당히 작은 그룹들이다. 그들은 매우 극적인 투쟁의 시기에만, 즉 노동계급의 투쟁이 노동조합의 틀을 뛰어넘기 시작할 때 비로서 자신의 진가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시점에서의 문제는 ‘누구와 무엇을 위해서 가교를 놓는가’ 이다.
사노신 : 왜 동지는 자신을 좌익 공산주의자라고 간주하는가? 그리고 동지를 좌익공산주의 경향으로 이끈 요인은 무엇인가? 무엇이 좌익공산주의의 원칙인가?
골드너 : 내자신이 어느 정도 룩셈부르크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좌익공산주의와 룩셈부르크주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자신을 좌익공산주의자라는 것으로 하겠다 . 나는 1960년대 미국의 운동과 약간 덜 중요하게는 서유럽의 운동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 운동들은 1966년에서 1977년 사이에 발생한 미국 노동자들의 총파업물결, 1968년 5월에서 6월에 이르는 시기의 프랑스 총파업, 1969년에서 1973년 사이 이탈리아에서의 투쟁, 1970년대 중반 스페인에서의 군사독재가 종식된 시기의 노동 자들의 투쟁들, 그리고 이중권력 상황까지 나아갔던 포르투갈에서의 투쟁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모두 나에게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 투쟁들에서 노동계급은 거의 예외 없이 노동조합의 틀을 넘어서는 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거의 비슷하게 전통적인 노동자당이나 사회민주당, 그리고 스딸주의 정당들은 공공연하게 반동적인 역할은 아니더라도 전적으로 보수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 나의 정치활동은 대체로 말하면뜨로쯔끼주의 조직에서 시작되었다. 그 그룹은 국제사회주의그룹(IS)의 미국 지부였는데, 당시에는 토니 클리프가 이끄는 영국의 국제사회주의그룹 산하에 있었다. 물론 그들은 소비에뜨 연방과 모든 스딸린주의 국가들이 계급사회라고 생각했던 점에서 정통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까지는 국제사회주의경향 (IST-International Socialist Tendency)은 아니었으며 당시에 이 조직은 나중보다는 훨씬 개방적이었다. 1970년대 이전에 그들은 국제사회주의 클럽(ISC-International Socialist Clubs)이라고 불렸다. 1970년대에 그들은 국제사회주의자가 되었고 영국 IS (International Socialists. SWP-Socialist Workers Party의 전신) 와 더 긴밀하게 결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스딸린주의 블록에 대하여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뜨로쯔끼주의자들과 달랐다. 그리고 스딸린주의 사회의 계급적 본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이론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스딸린주의 체제들이 계급사회이지 뜨로쯔끼가 이야기한 것처럼 노동자국가는 아니라는 점에는 모두 동의했다. 몇몇 사람들은 스딸린주의 체제를 자본주의라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은 이론적으로 관료적 집산주의로 기울었는데 그들은 스딸린주의 사회가 비록 계급 사회이지만 자본주의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당시, 다수파는 나를 포함해서 관료적 집산주의론자들이었으며 소수파는 토니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을 따라 스딸린주의 사회는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략과 전술적 함의는 양쪽 모두 같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그룹들은, 내 생각에는, 그 당시에 다소 국제 서구 좌파 내에서 예외적인 것으로 동유럽, 스딸린주의 블록을 계급사회로 간주했던 소수파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주제들에 대한 이들의 관점은 사실상 모두 뜨로쯔끼주의적 관점이었는데 즉 노동조합에 대한 입장, 사회민주당과 스딸린주의 노동자당들에 대한 태도, 민족해방 투쟁에 대한 지지,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지지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뜨로쯔끼주의자들로부터 구별되어 나왔을 때 달라진 것은 무었일까. 바뀐 것은 동유럽에 대한 분석뿐, 그 외에는 없었는데 그것이 나의 출발점이었다.
1969년부터, 나는 IS가 가지고 있던 정통 뜨로쯔끼주의의 핵심이론들에 대해 회의적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투쟁들, 영국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나타난 비공인 파업들(wildcat strikes), 특히 프랑스에서의 비공인 파업이었던 5~6월 총파업,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투쟁의 강화는, 노동조합을 노동계급투쟁을 전진케 하는 수단이라는 뜨로쯔끼주의의 분석에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다.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1970년대 초반에 주요 노동조합 관료들은 심지어 공장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그들을 쫒아냈기 때문이다. 반면,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우리는 혁명적인 투쟁을 위한 수단으로 노동조합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IS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뜨로쯔끼주의 그룹들은 그들의 강령 하에 노동조합 기구를 장악하고자 공장으로 들어갔다.
이시기는 바로 내가 초좌익(ultra left -좌익 공산주의가 아니다)이라는 용어로 부른 조류의 이론을 접하게 된 때였다. 그것은 자유 공산주의자들, 상황주의자들, 프랑스에서 조직된 카스토리아디스의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라는 그룹, 그 당시에도 존재했던 ICC, 그리고 다른 많은 소규모 그룹 등을 포함하는 폭 넓은 개념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좌익공산주의라고 부르는데 그 당시 더 널리 사용된 용어는 ‘초좌익’이다. 이러한 경향들은 프랑스에서 1968년 5~6월 총파업의 충격하에서 가장 강력하게 발전했으면 계속 프랑스에서 이어졌다. LO 는 한번도 초좌익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내가 조우하게 된, 잊어먹고 언급하지 않은 보르디가주의자들도 있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역시 프랑스에서는 존재했지만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는 북미나 다른 나라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1970년대 초반까지 나를 가장 흥미롭게 만들었던 경향의 그룹들은 우리가 네오보르디가주의자들이라고 부를만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으며 네덜란드 좌익공산주의와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를 결합하려고 노력했다.
사노신 : 그 때에 동지는 유럽에 있었는가?
골드너 : 나는 1965년부터 유럽에서 살았는데 65년과 66년에는 주로 프랑스에서 지냈다. 1968년 프랑스에서 짧게 체류했는데 불행히도 총파업 기간동안은 아니었다. 그리고 1972년에도 프랑스에 있었다. 그 때에 나는 거의 일 년을 주로 프랑스와 독일에서 지냈다.
사노신 : 동지는 원래 막스 샤흐트만(Max Shachtman)만 경향에 속해 있었는가?
골드너 : 그렇다. 그 당시에 IS 내에는 국가자본주의 분석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는데 다수파는 관료적 집산주의 분석을 유지했다. 그것은 막스 샤흐트만의 이론이었다. 그것은 샤흐트만 만의 이론이라고는 할수 없겠지만 대체로는 샤흐트만의 이론이었다.
사노신 : 그때 샤흐트만 경향과 IS 경향은 같은 조직에 있었는가?
골드너 : 샤흐트만은 이미 1950년대에 우익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미국 ISC를 만든 사람들은 좌익 샤흐트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샤흐트만과 결별했는데 샤흐트만이 미국 제국주의를 지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노신 : 어쨌든 동지가 접한 좌익공산주의 경향에 대해서 말해달라.
골드너 : 그들이 네덜란드 평의회 공산주의로부터 취한 것은 노동자평의회 사상이었고 볼쉐비끼의 전위당 이론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탈리아 보르디가주의자들로부터 취한 것은 공동전선에 대한 거부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정의 내리는 것으로서 농업문제에 대한 테제들이었다. 그때, 나는 프랑스에서 가장 선진적인 토론이 일어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뜨로쯔끼주의자들(그리고 보르디가주의자들도) 또한 노동자평의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므로 노동자평의회사상은 네덜란드 평의회 공산주의 전통에만 독특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위정당에 대한 관점에는 일종의 안티테제와 혐오감을 드러냈는데 이러한 면은 당연히 뜨로쯔끼주의 그룹들 내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네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보르디가주의자들로부터 공동전선에 대한 거부와 농업 문제를 핵심사항으로 보는 분석을 자신의 입장으로 취했으며 또 여러 다른 그룹들은 네덜란드 좌익 공산주의와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를 각자의 방식으로 종합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사실 내가 이런 여러 경향들에서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네덜란드 좌익 공산주의의 주요 이론가인 헤르만 고르터(Herman Gorter)인데 그는 1921년 <레닌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발표하며 러시아와는 다르게 서유럽에서는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 불가능함을 강조했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사실 어느 정도 수퍼레닌주의자였는데 그들은 어떤 점에서 레닌보다 더 레닌주의적이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라는 사고를 거부했다.
이 두 경향은 부르주아 혁명이 농촌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농민이 노동자 혁명과 동맹을 맺을 수 있었던 러시아와는 달리 그러한 동맹이 서구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동지들이 알다시피, 네덜란드 좌익공산주의자들과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서로를 싫어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다른 표현으로 똑같은 것을 많이 말했다. 네덜란드 좌익은 보르디가주의자들을 ‘권위주의적 레닌주의자’라고 불렀고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네덜란드 좌익을 생디칼리스트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 모두 러시아 모델을 세계적인 모델로 간주하지 않았다. 나는 이 점이 이들 경향의 중요성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나를 좌익공산주의 경향들로 인도했다.
또한, 내가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는 미국과 서유럽에서 노동조합을 장악하려고 시도했던 1960년대 전투파들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들에 끌렸었다. 35~40년이 지난 지금 이들 전투파들이 실패했다는 것은 명백하며 나는 그들이 왜 실패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1960년대 이래로, 그리고 유럽과 미국에서는 사실 1940년대 이래로, 노동조합들이 노동계급의 전진을 위해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나는 그것이 한국과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몇몇나라에서는 해당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 당시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 지역에서 노동조합들은 투쟁에 관여하지 않거나 외려투쟁에 반대하여 싸웠다.
내 생각에 좌익공산주의라고 하는 것은 내가 제차 강조했던 것처럼, 러시아 혁명을 일반적인 모델로 적용하는 것을 거부했던 중요한 흐름을 지칭한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을 이중혁명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노동계급이 기본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수행하는 가운데 농민과 동맹을 맺어 백군의 반혁명에 맞서 혁명을 방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그 때 노동계급의 입장이 패배한 후 남은 것은 농촌에서 농민들이 자신들의 땅을 갖게 된 부르주아 혁명인 것이다. 그것이 보르디가의 관점이었다.
사노신 : 동지는 평의회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골드너 : 포괄적으로보면, 나는 평의회 공산주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혁명에 대해 매우 단편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즉, 혁명 투쟁에서 정치적 차원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이 실제로는 단지 네덜란드 좌파가 아닌 독일-네덜란드 좌파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데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인자들이 같은 조류의 멤버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1920년대 초, 공산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단지 볼쉐비끼 형의 정당을 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후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이론을 갖게되었고 1930년대 이후에는 평의회사상을 가진 순수주의자들이 되었다. 그들의 이러한 초기 역사는 잊혀진 듯한데 기본적으로 정치투쟁에 대한 어떠한 관심도 거부하는 그들의 순수한 평의회주의 입장은 너무 순진하다고 생각한다.
사노신 : 유럽에는 평의회주의 경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골드너 : 내가 평의회주의에 대해 언급할 때, 그것은1차 대전 이전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 평의회주의의 역사적 공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노신 : 파울 마틱(Paul Mattick)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골드너 : 파울 마틱 1세인가, 2세인가?
사노신 : 1세를 의미한다.
골드너 : 나는 파울 마틱 1세가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그가 쓴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한 글들은 매우 흥미롭다. 나는 그의 저작들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은 1960년대에 케인즈주의에 대한 비판과 레닌주의, 뜨로쯔끼주의, 스딸린주의, 사회민주주의 좌파에게 매우 널리 퍼져있었던 독점자본주의론에 대한 비판에 있어 특히 중요했다고 본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후기 평의회 공산주의 전통에 속했는데 이 경향은 정치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1920년대 초반의 독일-네덜란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아직은 공산당을 건설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지만 그것이 레닌주의 정당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에 반해서 1930년대에 그들은 단지 노동자 평의회에만 관심이 있었고 파울 마틱이 바로 그러한 전통에 속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노신 : 미국에는 1960년대 이래 파울 마틱의 영향을 받은 경향이 존재해왔다고 들었다.
골드너 : 나는 파울 마틱이 경제학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Root & Branch’라고 하는 작은 그룹이 있다. 파울 마틱 1세와 2세 둘 다 이 조직의 중요한 이론가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이 그룹은 간행물을 통해 영향력을 미쳤을 뿐 실제 투쟁이나 운동에서는 그들의 영향력을 들은 것은 없다.
하지만 파울 마틱의 정치경제학 비판에 관한 저작들은 독일에서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그는 허버트 마르쿠제에 대해 비판했는데, 그것은 매우 뛰어난 글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영향력은 직접 연관되어 있는 그룹이나 정치세력보다 훨씬 더 넓다. 좌파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독점자본 이론이나 일종의 케인즈주의적 맑스주의를 받아들이고 경제위기 문제는 1930년대의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파울 마틱은 매우 독특하게 정통 맑스주의 위기 이론을 옹호하며 주장했다.
사노신 : 그는 헨릭 그로스만(Henryk Grosman)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골드너 : 맞다. 헨릭 그로스만에게 영향을 받았다. 파울 마틱은 그로스만의 주요 제자였다. 나는 그로스만에게 동의하지 않는데 그것이 폴 메틱에 대해서 약간 회의적인 것의 이유이며 외려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주의 위기 이론에 더 많은 영향을 받은 이유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점자본이론, 케인즈주의적 맑스주의 또는 경제학적 문맹이론에 비교해 볼 때 파울 마틱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갖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제 위기는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할 때 그는 “아니다, 자본주의 위기는 맑스의 저작들에 나타난 것처럼 여전히 우리 주위에 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사노신 : 동지가 독점자본 이론을 말할 때 그것은 스위지의 이론을 말하는 것인가?
골드너 : 스위지, 바란, 해리 맥도프, 브레이버맨, 또한 다른 여러사람들의 이론이다. 서유럽에서는 각국의 공산당들이 채택한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 있었는데 다향한 형태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관점이다. 그것의 기원은 1차 대전 전후의 독점자본 이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론은 레닌에게 영향을 주었고 레닌은 <제국주의>와 같은 저작에서 그 이론을 발전시켰다. 아민, 아리기.. 거의 모두 이러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독점자본 학파의 일부였다.
사노신 : 독일-네덜란드 좌익공산주의와 오늘날의 좌익공산주의 사이의 가장 커다란 차이는 무엇인가? 동지는 그것이 당에 대한 태도의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골드너 : 내가 보기엔 그렇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당이 없다면 사실상 중요한 것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1936~37년 스페인 혁명 기간에 보르디가주의자들은 “혁명은 없다. 당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실 그 때에 분리되었는데 몇몇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스페인에 가서 투쟁했으며 나머지는 유럽에 남아서 “이것은 부르주아 분파들 사이의 싸움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 당의 중요성에 대한 일종의 과도한 시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노신 : 오늘날, 일반적으로 모든 좌익공산주의 조류들은 혁명정당 개념을 받아들이는가?
골드너 : 그들이나 나나 모두 그렇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이들은 보르디가주의자들 , 특히, 보르디가 사후의 보르디가주의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보르디가는 사실상 1950년에 활동을 중단했고 1970년에 죽었다). 예를들어 이탈리아의 한 현대 보르디가주의자는 나와 토론하면서 1960년대와 1970년대의 파업의 물결에 대하여 그것은 그저 중간계급의 일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 뒤에는 또한 “당이 한 일이 아니라면, 어떠한 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며,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었다.
사노신 : 2006년 10월, 동지를 포함하여 ICC, IP와 같은 좌익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그들 자신의 데카당스 이론을 제시했다. 나는 동지의 견해를 알고 싶다. 특히 최근의 계급투쟁과 관련해서 말이다. 그리고 동지와 다른 좌익공산주의자들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려 달라. 그리고 2006년에 있었던 한 강연에서 제출했던 동지의 강령을 자세하게 설명해 달라. 그 강령과 쇠퇴하는 자본주의와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골드너 : 나는 그 대회가 불행하게도 물리적인 문제가 좀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각각의 그룹들이 자신의 의견을 제출하기에는 시간이 짧았고, 둘째로는 통역에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각 그룹들이 얼마나 각자의 데카당스 이론을 효과적으로 제시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많은 텍스트를 읽었고, 특히 ICC가 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해 매우 취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일종의 로자 룩셈부르크주의 분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로자 룩셈부르크 자신의 것만큼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생각으로는 그들이 지난 50년 이상 동안의 자본주의 진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ICC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고 본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것이 일어났다고 보는 사람들을 모더니스트거나 절충주의자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ICC가 세계 경제에 대해 매우 추상적이고 지루하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IP는 다르다.
사노신 : 당신에게 동의한다.
골드너 : IP는, 훨씬 작은 그룹인데, 자본주의 발전을 분석하기 위해서 시도하고 있다. 나 역시 그들의 의견이 좀 더 진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데카당스 이론은 그들과도 다르다.
1914년 1차 대전이 일어날 무렵, 자본주의가 전세계적으로 진보적인 생산양식이기를 그쳤다는 ICC와 IP의 의견에 나 역시 동의한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자본주의의 첫 번째 시기인 19세기 초반에서 1914년까지 생산력의 꾸준한 발전과 노동계급의 증가가 전세계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1차 대전 이전의 10년 동안 자본주의는 더 이상 그러한 발전을 평화적이고 진화적인 방식으로 이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독일이 자본주의 강대국으로 부상하여 영국을 따라잡고 넘어섰을 때, 노동계급 역시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1차 대전에서 1970년대까지, 어떤 나라도 미국과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선진자본주의로 발전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1970년대에 시작하여, 특히나 1980년대엔 남한과 타이완은 사실상 효과적으로 제1세계 국가로 발전했다. 그런데 ICC에 따르면 그러한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이 시대는 데카당스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1982년에 ICC와 토론한 적이 있다. 내가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봐라”라고 말하자, ICC는 “그러한 일은 없다. 현재는 데카당스 시대이다. 나는 믿을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또한 나는 데카당스 이론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시아의 호랑이들이 나타났을 때,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하강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14년 이전의 시기와는 다르게, 그것은 전세계적 수준의 팽창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성장이 있었다면 다른 곳에서는 하락이 있었다.
우리는 1914년에서 1945년까지의 시기를 시스템으로서의 자본주의 체제의 실패시기로 볼 수 있다. 심하든 심하지 않았든, 끊임없는 위기의 지속, 그리고 전쟁, 반동, 파괴, 기타 등등이 나타났다. 1945년에서 1970년대 초반의 시기는, 전후 붐으로 보통 이야기되는데, 30년대 초반의 위기로부터 재건의 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사실상, 전후 붐은 1960년대 중반에 끝났지만, 그것은 1970년대 끝없이 치솟는 인플레이션을 만든 신용팽창 때문에 1970년대까지 계속되는 것처럼 보였다. 1960년대, 일본, 유럽, 미국에서 중요한 경기후퇴가 있었는데 미국과 다른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은 그들의 경제를 신용으로 다시 상승시켰고 붐을 1970년대 초반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역동성은 사라졌다.
물론, 1945년에서 60년대까지 재건의 시기는 단순히 자본주의를 1914년 이전 수준으로 재건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기술 수준, 삶의 질을 더 높은 수준으로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부터, 전 세계적으로 체제가 비록 평온한 상태를 다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영구적인 위기에 빠져들었다고 하겠다. 자본주의 위기는 생산의 정체, 대중 실업, 낡은 자본의 파괴,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윤을 통한 새로운 팽창의 조건을 창조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1970대와 21세기 초반에 발생한 전형적인 경제 위기는1929년도에 발생했다. 맑스의 <자본론>을 보면 위기의 본질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즉 경쟁력 없는 낡은 경쟁 자본을 쓸어버리는 것, 수많은 가공자본과 신용을 쓸어없애는 것, 가격을 강제로 인하하는 것, 그리하여 자본가들이 훗날 투자할 수 있는 이윤율로 새로운 단계가 시작될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위기의 메커니즘이다.
사노신 : 내가 생각하기에 ICC의 이론은 너무 단순한 것 같다. 1914년이래 자본주의는 하강국면에 들어섰다고 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
골드너 : ICC는 오로지 자신의 세계안에서만 살고있다.
사노신 : 그들은 전후붐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는데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골드너 :나는 전후 붐이란 그저 1914년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돌아가기 위함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서 번역하기가 어렵겠지만 맑스의 용어를 사용해야겠다.
자본주의는 동지들이 알다시피, 맑스가 가치법칙이라고 부른 것에 의해 돌아가는 체제이다. 가치법칙은 한 주기에서 다음 주기까지 자본주의가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상품을 더 싸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기술을 더 싸게 만들고 임금비용을 줄일 수 있게 하는데 노동계급의 소비재 역시 더 싸지기 때문에 임금을 훨씬 더 많이 줄이는 것을 가능케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9세기에 가장 중요한 자본주의 국가들인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 노동자들은 그들의 임금의 반을 먹을 것 사는데 썼다. 그 후 농업 혁명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나면서 캐나다, 아르헨티나, 러시아 등은 곡물을 더 싸게 생산하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1차 대전시기쯤에는 노동계급은 자신들의 임금을 먹는 것에는 덜 소비하고 다른 소비재를 사는데 더 많이 쓰게 되었다.
나는 2차 대전 이후의 붐은 총임금을 낮춘 생산성의 향상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음식과 다른 기본 필수품이 훨씬 싸졌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TV, 자동차, 집 등, 그들이 1차 대전 전에는 살 수 없는 것들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가치법칙은 생산을 더 싸게 하지만 노동자들의 삶을 포함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생활수준이 올라갈 수 있게 한다. 그것이 바로 전후 붐을 설명하는 틀이다.
그러나1914~45년 시기, 자본주의는 19세기의 고전적 위기에 대처했던 방식으로 새로운 팽창 국면을 위한 새로운 기초를 찾고자 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낡은 방식으로는 새로운 팽창은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파괴와, 2년 정도 경기침체후의, 새로운 팽창과 같은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한 배경엔 지정학적 요소들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영국이 더 이상 자본주의 최강국이 아니었지만 영국은 그저 “그래, 나는 더 이상 최강국이 아니야”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을 옆으로 제쳐야 했다. 그래서 독일은 영국을 제치려고 했고, 미국은 영국을 제치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내가 앞서 말한 것처럼 낡은 방식의 자본주의 축적위한 새로운 조건으로 만들기 위해 전쟁과 정치 변동으로 점철된 3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비슷한 과정이 1970년초반 이래로 일어나고 있는데 미국은 더 이상 이 체제의 헤게모니를 쥔 역할을 할 수 없다. 미국은 더 이상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없고 다른 어떤 나라도 미국을 대체할 수 없는지만 새로운 팽창 국면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세계체제를 재조직화하기 위한 투쟁은 존재한다. 나는 1914년에서 1945년에 일어났던 일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평화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것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정확히 모르겠으며,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도 확신하지못한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기에 체제가 정말로 쇠퇴했기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사노신 : 데카당스의 개념은 무엇인가? ICC의 데카당스 개념과 동지의 개념은 같은 것인가?
골드너 : 하나만 더 추가해서 말하고 싶은데, 세계의 여러 지역들, 즉 아시아(일본, 한국, 중국 대만), 러시아, 인도, 유럽은 현재 세계 체제에 완전히 만족하지 않으며 세계체제를 재편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개별적으로 미국의 헤게모니를 전복시킬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 나는 그것이 일종의 현재 진행 중인 위기의 세계의 지정학적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단지 문제의 일면일 뿐이다. 더 근본적 수준에서 보면1914년처럼 세계의 붐이 확장될 수 없으며 그것은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가치법칙은 더 이상 1914년 이전의 시기와 같은 방식으로 세계 생산력을 확장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재생산을 위한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 자본주의 축적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생산성이 증가하면서 소비재들은 더 늘어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노동자들의 임금이 총자본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작아진다고 했을때 내가 의미했던 것이다. 이 체제하에서는, <공산당 선언>에서 언급된 것 처럼 , 체제가 너무 생산적이어서 자본주의 사회 관계 내에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위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체제가 1914년에서 1945년까지 해야 했던 것은 자본주의적 교환, 자본주의 가치법칙을 통해 이루어지는 축적을 위한 조건을 재창조하기 위해 생산력의 파괴와,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노동자들의 힘을 파괴하는 것이었고 그럼으로써 대대적 파괴이후에 자본주의적 상품교환이 재생산 비용으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안에서 다시 발생할 수 있도록하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1970년대 초반 이래로 우리는 똑같은 것을 달성하려고 노력하는 새로운 대대적인 파괴를 보았다.
사노신 : 유사한 파괴가 또 다시 일어났다는 것인가?
골드너 : 그렇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 이래 자본주의의 대차대조표를 살펴보자. 라틴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에서는 대대적인 빈곤과 탈산업화가 일어났다. 20~30%의 인구가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경제활동에서 제외되고 있다. 아프리카는 상황이 훨씬 나쁜데 소위 ‘실패한 국가들’에서는 실질투자가 완전 사라져버렸다.. 동유럽과 러시아는 15년 전에 실패한 충격요법으로 사적 자본주의로 이행했는데 수백만 명이 죽었다. 새로운 인플레 현상으로 그들의 연금이 가치를 완전 상실했기때문이다. 과거 소비에트 중아아시아 공화국들, 소비에뜨 블록의 나라들에서 있어서 삶의 질은 1991년 이전 보다 30% 하락했다. 중동의 비산유국들은 아주 체계적 현상은 아니지만 국민의 삶이 무시되어지는 현상이 보이며 산유국들에서는 아주 왜곡된 형태의 발전을 보였다. 아시아의 호랑이들’과 중국등, 아시아 자체에서는 내가 앞에서 언급했던 특정한 종류의 경제발전이 있었지만, 인도와 중국을 본다면 15억 농민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소외되었다. 나는 그러한 소외된 농민층들을 발전과정에 합류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럽과 미국에서는 대대적인 실업이 계속 확장된 시기였다. 미국과 영국은 탈산업화가 진행되었다. 이것이 바로 1970년대 초반 이래 자본주의의 대차대조표이다.
사노신 : 동지가 생각하는 데카당스는, 즉 동지의 이론은 ICC의 이론과는 달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시기(periods)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시대(era of capitalism)의 불안정성 개념에 가까운 것 같다.
골드너 : 글쎄 그렇지는 않다. 나는 시기 규정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ICC는 그들이 세계시장의 포화라고 부르는 것을 강조한다. 시장의 문제는 상품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론의 특정 부분에 나와 있지만, 나는 그것이 그녀 이론의 가장 탁월한 부분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부분은 ICC의 만트라이다.
자, 나의 데카당스 이론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해보자. 1914년 이전과는 다르게 자본주의는 계속하여 생산력을 발전시켰지만 생산력 발전이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감소로 볼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훨씬 더 짧은 노동시간으로 생산할 능력을 가지고 있고 사회는 전 세계적으로 훨씬 더 짧은 주 노동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 틀 내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산 노동을 필요로 하며, 자본이 되기 위해서는 산 노동에 대한 착취가 필요하기때문이다. 그러므로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세계 노동계급운동의 주요 슬로건 중의 하나는 하루 8시간 노동과 주 40시간 노동제였다. 그리고 그 시기에서 1960년대까지 자본주의는 주간 노동시간을 단축시켰다. 그러나 그다음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가? 이러한 경향은 역전되었고 현재 주간 노동시간은 북미와 유럽에서 늘어나고 있다. 왜 그러한가? 생산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이 자본으로서 살아남고 이윤을 뽑아내기 위해서 산 노동을 착취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동지들은 이것을 바로 맑스의 책 <자본론>3권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뭐라고 말했는가? 자본은 그 자신에 대한 걸림돌이 된다고 했다. 자본은 경쟁을 통해 획득한 생산성으로 얻은 이익을 사회적으로 실현시킬 수 없다. 그러한 상황은 1914~1945년 사이에 한 번 일어났고,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이래로 다시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1945~1973년에 이르는 기간처럼 새로운 붐이 오겠는가? 그럴것이다. 하지만 1945~1973년의 붐은 대다수 인구를 소외시킨채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붐이 올것이겠지만 그것은 1945~1973년의 붐에서 보다 더 많은 인구를 소외시킬 것이다. 이것이 바로 데카당스개념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바의 전부이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는 그것은 기술발전을 통해 자본주의가 이루어낸 생산성의 발전에서 얻어진 이익을 사회적으로 실현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무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브라질에서는 대략 40%의 인구가 돈 버는 일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1%의 인구가 감옥에 있다. ICC는 전혀 이부분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이 왜 2차대전 이후의 경기붐의 본질에 대해, 혹은 70년대 이래 동아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에 대해 그들이 지적인 토론을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사노신 : 동지는 데카당스 시기가 197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골드너 : 나는 1차 대전이 전환점이라고 본다. 자본주의는 1차 대전까지는 계속 확장되었고 그이후 파괴의 시기(19 14-1945), 그 다음의 더 높은 생산 수준으로의 재건의 시기가 있었으며, 다시 새로운 위기가 발생, 그리고 세계적 축적 붐을 위한 조건을 재구축하고자 하는 시기를 거쳐왔는데 지금이 바로 그 과정에 있다.
사노신 : 콘트라티에프(Kontratiev)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골드너 : 나는 그의 이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콘트라티에프는 매우 흥미롭긴 하지만 그의 이론은 대체로 수비학에 가깝다고 본다. 흥미로운 이유는 사실 콘트라티에프의 이론이 장기파동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콘트라티에프이론에 대한 어떤 해석은 18세기에서 1970년대까지의 자본주의 호황과 불황 주기에 상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25년동안의 붐이 있었고 25년 불황이 있었다 하는 식일뿐 이론적인 설명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민이고 교통수단이 말이나 소였던 18세기와 제트여객기나 배를 타고 전 세계를 하루 만에 횡단하는 오늘날, 왜 그 주기가 같아야 한다는 것인가? 그렇지만 콘트라티에프의 이론은 자본의 주기를 설명하는 이론 중에서 맑스의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흥미롭다.
내가 나의 데카당스 이론과 그것이 어떻게 ICC와 다른지 적절히 설명했는가?
사노신 : 대체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으로, 2006년 강연에서 동지는 “100일 강령(First 100 Days Program : home.earthlink.net/~lrgoldner/program.html)”이라는 것을 제시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동지의 데카당스 개념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골드너 : 그 강연은 아마도 <의제자본과 자본주의의 이행>이라는 논문을 가지고 한 강연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 논문에서 시도했던 것은, 내가 논문 초입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개괄적 형태로, 성공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세계 경제에 취할 조치들에 대한 몇가지 근본적인 생각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세계 노동계급의 잠재력에 대한 교육모델(heuristic model)을 발전시키려고 했다.
그것과 나의 데카당스 이론의 관련을 보면, 미국과, 어느 정도는 유럽에서도, 그리고 점차 동아시아에서도 체제의 데카당스가 경제의 왜곡을 초래, 노동자들과 인민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을 제외하고 가장 데카당스한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는, 단지 15%의 노동력만이 오늘날에 생산에 관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연히 미국경제는 세계경제의 기생충이다. 미국은 국제 금융시스템을 통해서 세계의 다른 부분, 예를 들어 동아시아의 한국, 중국, 일본에서 부를 빨아들이고 있는데 그것은 미국으로 하여금 탈산업화하여 소위 서비스 경제로 가게 한다. 그러나 이 서비스 경제는 계속해서 달러를 표준통화로 받아들이고,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미국의 피라미드식 채무상황에 계속 자금을 대 주는 세계경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세계의 나머지는 생산하고 미국은 소비한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의 나머지가 미국의 거대한 양의 돈에 의존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러한 질서는 양쪽 모두에서 조화롭게 진행된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볼수 있듯이 세계의 다른 나라들은 명백히 역동적인 경제 발전을 하고 있어 그들은 팽창을 계속하기 위하여 미국 시장을 필요로 하고 있고 미국은 이러한 기생충의 역할을 하면서 필요한 소비재를 얻는데, 그것과의 교환을 위해 아무것도 생산할 필요가 없기때문이다.
그러므로 미국처럼 정말로 쇠퇴하고 있는 경제상태에서 프로레티리아 혁명을 위한 강령이 필요로 될 때 인민들은 과연 그것이 어떤 것들일 수 있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미국이 여전히 주요한 산업 강대국이었을 때, 노동자평의회와 소비에트의 건설을 통해 인민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기는 쉬웠다. 이곳 저곳에 공장들이 있었으며 그리하여 공장들을 접수하고 적기를 내걸면 그것이 바로 혁명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대부분의 공장은 문을 닫았고 예전에 공장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지금 피자를 배달하거나 맥도날드에서 일하며, 그것도 아니면 부동산업에 뛰어들어 일하고 있다.
물론, 전세계적으로 보면 여전히 공산주의로 이행할 수 있는 적정한 생산이 존재한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물론 점차 서유럽도 포함해서, 그리고 내 생각에는 어느 정도는 일본이나 오늘날의 한국과 같은 나라들에서는, 일상적으로 보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외형은 무시하고, 실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경제에 어떠한 조치들을 취할 것인지에 대한 강령을 제출할 필요가 있다.
내가 바로 그 논문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는 은행, 보험사, 부동산 회사, 그리고 경제의 다른 기생적인 부분에서 노동자평의회나 소비에트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들을 폐지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기생적인 부분에 사로잡힌 노동력, 노동자들을 데리고 와서 이 모든 기생적인 장애물 없이 이들의 주간 노동시간을 더 짧게 줄여 생산력과 물질적인 삶의 질을 높이는데 이용하기를 원한다.
미국 자동차산업의 예를 들어보자. 1973년 미국의 북동부 산업지대에는 750,000명의 자동차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 당시 이 노동자들이 가장 전투적이었고 노동계급의 전위였다. 그러나 지난 35년 동안, 그 노동력은 크게 줄어들어서 오늘날 예를 들어 전미자동차노조(UAW)에는 단지500,000명의 노동자들만이 남아 있다. 동지들이 알다시피, 미국에서는 포드가 파산 직전이고 GM이 파산 직전에 있다. 그래서 이 회사들은 소수로 남아있는 이 노조의 노동자들과 자신들의 최상의 조건을 위해서 협상하려고 하고 있다. 또한 여전히 노동조합으로 조직되지 않은 자동차 공장들이 미국에는 많이 있는데, 특히 남부 주들에 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일본, 한국, 독일, 프랑스등 외국계 자동차 업체들이다. 그러나 그 공장들은 매우 작고 고립된 도시들에 지어졌으며 노동계급 투쟁의 전통이 전혀 없다. 그리고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그 공장들의 노동자들은 전투성도 거의 없다.
그렇다면 혁명적 관점에서 이러한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심지어 40년 전에도 자동차 생산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혁명적 강령의 일부가 아니었다. 진정한 혁명적 강령은 전체 사회가 승용차 사회로 조직되면서 나타나는 자원의 거대한 낭비에 대한 것이며 다른 종류의 교통수단, 다른 형태의 도시들, 새로운 형태의 차연료등등에 대한 것일 것이다. 40년 전에조차 차를 더 많이 만드는 것이 혁명적 강령은 아니었다. 그것은 전체 생산의 본성을 바꾸는 것으로서 승용차에 대한 사회의 의존도를 줄이고, 대중교통수단과 다른 종류의 운송수단들로 승용차를 대체하도록 하며 그와 더불어 도시들도 새로운 형태로 재조직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혁명운동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면 사실, 이것은 대체로 데카당스 시기의 생산형태인 은행, 부동산, 보험사 등과는 다른 생산 형태가 될 것인데 여기에서의 생산은 사회의 틀 내에서 데카당스의 생산과는 전혀 다른 물질적 생산이다. 그러므로 혁명적 강령은 더 많은 자동차 생산을 위한 노동자평의회, 소비에트, 노동자통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노동, 완전히 다른 종류의 생산이 될 것이다.
이것이 강령과 자본주의체제의 데카당스라고 보는 것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의 답이다. 나의 강령은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외관을 벗겨내고 본질로 다가가고자 하는 일종의 추상화된 모델이다.
사노신 : 우리는 그것이 선진국에서 나타난 탈산업화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골드너 : 그렇다. 나는 전세계적차원에서 볼 때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로 상대적으로 고통 없이 전환될 수 있을 정도의 생산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 서유럽의 도시화되고 인구집중화된 지역에서 어떻게 다른 사회가 조직될 수 있는가를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예를 들어 이러한 기생적인 비(非)생산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수백만 인민들에게 존재하는 잠재력을 강조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러한 노동력을 가지고 다음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사노신 : 특별히 서구사회나 미국사회에서 말인가?
골드너 : 내 생각으로는 일본 역시 어느 정도는 같은 추세에 들어간 지역이고, 한국 역시 같은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새 대통령 이명박은 한국을 동아시아 금융의 중심으로 만들고 서비스 경제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나라에서도 같은 추세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노신 : 그것은 이명박에게만 독특한 것이 아니다. 모든 부르주아 정당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골드너 : 맞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는 아마도 그런 정책을 추진하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사노신 : 그런데 우리는 동지의 이행강령이 약간 인위적이라고 생각한다.
골드너 : 동의한다. <자본론> I권과 II권의 부분들 역시 인위적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인위적이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자면, 그것은 명백히 드러나 있지 않는 특정한 문제들을 지적하고 보여지는 외관을 넘어서서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도록 하는 교육모델이다.
사노신 : 어떻게 기생적인 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가?
골드너 : 그러한 부문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사회적 역할이 기생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날마다 자신들이 하는 쓸모없는 일들을 폐지하자고 말하는 일관성있는 강령의 실행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나는 은행이나 보험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기생적인 부분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투쟁해선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확실히 말하고 싶은 것은 만약 우리가 다른 종류의 사회에 대한 진정한 비전을 갖고 싶다면, 이러한 종류의 강령은 사람들이 이러한 투쟁의 목적이 그들의 은행에서 노동자통제를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은행을 폐지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아는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노신 : 내 생각에 많은 은행 노동자들과 서비스 노동자들이 좌익공산주의는 자신들의 일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할 것 같다.
골드너 : 그들의 일자리는 사라지겠지만 그들에게는 사회적 틀 내에서 여전히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다른 종류의 일자리가 주어질 것이다.
사노신 : 동지는 정통 맑스주의 이론이나 강령에서 나타나는 은행 국유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엥겔스는 <프랑스 내전>서문에서, 레닌은 <임박한 파국>에서 그것을 언급한 바 있다.
골드너 : 이행기에는 혁명적 방책으로써 그것은 필요하며 긍정적인 것이다. 프랑수와 미테랑이 1981년 프랑스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그는 은행을 국유화했는데 하지만 그것은 체제의 국가자본주의적 조직화의 일부였을 뿐이다. 그러나 노동자권력이행의 무기로서 국유화는 긍정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은행이 국유화된다면 80~90%의 노동자들이 직업을 바꿔야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류의 은행업이 더 이상 필요 없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은행의 국유화라는 개념은 특정한 정치적 내용과 분리된다면 추상일 뿐이다. 프랑스에서 미테랑의 국유화에는 그 나름의 내용이 있었고 1917년 러시아 혁명에는 자신만의 다른 내용이 있었다. 미래의 혁명에서도 국유화는 자신 나름대로의 내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업 국유화문제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아이디어 하나 자체가 사회주의적이라거나 공산주의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좀 더 커다란 과정의 일부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노신 : 이행기에 노동자평의회나 소비에뜨에 의한 국유화는 산업을 통제하거나 노동력을 분배하는 기회를 줄 것이라고 본다. 다음으로 민족주의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자. ICC는 현재 모든 종류의 민족주의가 제국주의와 관련되거나 혹은 제국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민족주의 운동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동지는 한 토론회에서 아랍의 혁명적 민족주의가 이슬람 근본주의로 대체되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는 민족주의가 더 이상 혁명적이지 않다는 것인지, 아니면 민족주의를 본질적으로 반대한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골드너 : 나는 ICC와는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민족주의는 19세기 부르주아 혁명의 이데올로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단일 부르주아 민족국가의 건설이라는 실현될 수 있었던 실질적 강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했다. 그래서 맑스는 1850년대 60년대그리고 70년대 폴란드 민족국가의 건설을 위한 투쟁을 세계 노동계급의 단결을 위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를 지지했다. 이 점이 몇몇 민족주의 운동을 지지했던 맑스의 기준이었다. 맑스는 폴란드 민족주의와 함께 영국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아일랜드 민족주의 역시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1870년대 몇몇 발칸 봉기를 반대했다. 왜 그랬는가? 그것은 오토만 제국을 약화시킴으로써 러시아 팽창주의를 강화할 것이므로 그가 생각하기에 노동계급을 위해선 러시아의 팽창주의를 계속 억제하는 것이 오스만제국에 속한 민족들의 독립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현대 역사에서, 말하자면 1차 대전 이후에는, 부르주아 민족주의가 단일민족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그러한 것이 세계 노동계급의 단결에 있어서 일보 전진인 경우라고 생각하지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외각의 천연가스와 유전에 의존하는 기생적인 국가 관료체제로 운영되는 또 다른 종류의 국가자본주의를 만들어낸 알제리 혁명은 농민을 소외시키며 오랫동안 지속된 심각한 경제위기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것은 심각한 개발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베트남의 경우를 살펴보자. 스딸린주의 지도부가 지도하는 민족해방운동은 미국을 패배시키고 곧장 소위 시장 사회주의라고 불리는, 오늘날에도 계속 존재하는 체제로 완전히 이행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베트남 민족주의의 승리가 세계노동계급을 위한 일보 전진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기 어렵다고 본다.
다음으로 우리는 더 극단적은 예들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포르투갈의 옛 아프리카식민지들인 앙골라, 모잠비크, 그리고 다른 작은 지역들을 살펴보면 독립 후 30년이 되었지만 그들은 ‘실패한 국가’, ‘사회적 재앙’이 되었다.
우리는 또한 1980년대 후반 스딸린주의 블록의 붕괴이래 중앙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나라들이나 동유럽 재편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나라들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혹자는 그 나라들이 성공적으로 새로운 부르주아 민족국가를 만들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들이 세계 노동계급의 단결의 가능성을 높였는가? 나는 그러한 일은 없었다고 본다. 그렇게 본다면, 나는 민족주의가 여전히 오늘날의 세계에서 명백히 아주 큰 힘이지만 노동계급에게 이익이 되는 실천적인 강령을 가지고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사노신 : 왜 이슬람 근본주의가 이슬람국가에서 아랍 민족주의와 비(非)아랍 이슬람 국가들의 민족주의를 대체했는가?
골드너 : 아랍 민족주의는 2차 대전 이후 탈식민화의 전반적인 과정의 일부인데, 그것은 알제리 혁명, 나세르 하에서 진행된 이집트혁명등에서 나타나듯이 독립적인 발전 국가를 목표로 했다. 하지만 이 민족주의는 고도로 관료주의적이며 기본적으로는 일종의 국가자본주의로서 그들은 자기 나라의 진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 완전 실패했다. 나 자신을 뜨로쯔끼주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현대의 부르주아지는 19세기에 했던 방식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했던 뜨로쯔끼의 영속혁명론은 상당히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르주아지는 필연적으로 불안정하며 세계시장에서 깨지기 쉬운 약한 국가를 만들어낸다. 194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이 민족국가들은 어떤 면에선 역동적으로 보였지만, 사실상 이들은 꼬리를 물며 하나씩 실패해 나갔으며 그 실패가 명백해지면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그 공백을 뚫고 들어왔다.
가장 작은 독립국가조차도 조만간 제국주의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한ICC가 옳바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민족주의의 진짜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근본적인 문제는 부르주아지가 1차 대전 이전과는 달리 사회의 더 넓은 문제를 진보적인 방향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데 있다.
나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민족주의가 여전히 매우 강력한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하며 그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에서 언급한 예들에서 나오는 것처럼, 맑스시대의 폴란드 노동자들이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민족주의 운동에 노동계급을 참여하게 만드는 실천적 강령이 없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민족주의적 운동을 위한 효과적인 강령없이도, 민족주의가 자라나게 된 배경인 제국주의가 부과한 고통으로부터 그 제국주의적 과거를 인식할 수 있기때문이다.
사노신 : 민족주의의 부르주아적 성격은 명확하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계급이 약소민족의 운동이나 투쟁을 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동지는 선진국에서 그러한 활동이 노동계급이 노동조합주의와 민족주의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가? 예를 들어 맑스는 잉글랜드 노동자들이 잉글랜드 민족주의와 영국 제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아일랜드 민족운동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이 오늘날의 세계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골드너 : 내 생각도 당연이 미국, 서유럽, 일본, 남한과 같은 선진국에서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의 부르주아지에 반대해야 하고 자신의 부르주아지가 국제적으로 자행하고 있는 일들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점에서 미국 제국주의가 예를 들어 라틴 아메리카를 억압할 때, 미국 노동자들은 그것에 반대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이문제는 그것이 미국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사실상의 정치적 지지의 문제로 될 때 미묘해진다. 나는 우리가 이 문제를 추상적으로 물을 수 없다고 본다. 우리는 맑스가 아일랜드와 폴란드의 민족주의를 지지하고 발칸 민족주의를 반대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기준은 ‘무엇이 노동계급의 단결을 전 세계 수준으로 전진시키는가?’이다.
현시기의 맥락에서 보면,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미국 제국주의가 퇴조하면서 세계는 다극체제로 움직이고 있다. 즉 세계의 여러 부분이 미국 제국주의를 대체하는 권력을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내가 알고 있는 민족주의 운동들은 이러한 새로운 자본주의 재편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그러한 운동들이 세계 노동계급의 단결에서 진보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지 않는다.
사노신 : 프랑스에서 IS와 LCR은 무슬림의 히잡 착용을 지지했다. 그러나 LO는 그것에 반대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골드너 : 나는 이 문제를 미국인의 관점에서 본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나는 사람들이 학교에 입고 가는 옷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종교적인 옷을 입을 수도 있고 입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의 맥락에서는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다. 프랑스 공화국 이데올로기의 특이한 성격 때문이다. 프랑스에 있어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이데올로기인 공화주의 이데올로기는 교육시스템을 프랑스시민을 교육시키는 시스템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프랑스 교육 시스템은 동지들도 알다시피 완전히 세속적이며 비종교적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맥락에서 LO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학교에서 이슬람 복장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적 표현에 대해서도 적대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이 종교와 국가 사이의 분리를 없애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프랑스 공화국이 사회적으로 더 나은 진보의 조건을 만든다고는 생각하지않기 때문에 공화국 이데올로기의 약화에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가 복잡한 것이며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자발적이라는 전제하에서 히잡 착용이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동의할 것 같다. 물론 그것이 정말로 자발적인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사노신 : 그러나 체첸과 같이 러시아나 미국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민족들의 독립운동이 있다. 그리고 중국의 동투르키스탄(위구르) 해방운동처럼 중국 제국주의에 의해서 버림받고 미국 정부가 테러리즘이라고 규정하는 약소민족의 독립운동도 있다. 그러한 종류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골드너 : 나는 이러한 종류의 운동들이 문화, 언어, 그리고 다른 종류들의 자치권등을 위한 상당히 합당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스페인의 바스크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스페인 중앙정부에 맞서서 싸웠다. 내 생각에 바스크어의 표준어화, 교육언어화, 그리고 다른 많은 종류의 기본적인 자치권이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허용되는 것이 완전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중국의 위구르족과 체첸의 경우에도 같은 것이 적용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운동들이 국가의 극단적인 중앙집중화의 결과이므로 혁명가들이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을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운동이 가지고 있는 문화 및 언어대한 요구를 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독립국가 건설은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반동적으로 갈 수 있다고 본다. 알제리, 앙골라 등의 신생국가들이 빠르게 반동적으로 변한 것처럼 말이다.
나는 미국이 중국 서부에서 위구르족의 운동을 달가와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위구르와 체첸의 해방운동,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른 이슬람 운동 사이에 연관이 없다는 것 역시 완전한 사실은 아니라고 본다. 서구의 강력한 세력과 주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그러한 운동들에 많은 돈을 지원했고 무장을 하게 만들어 주었다. 체첸과 위구르의 경우에 나는 미국이 자신들이 지원하길 원하는 어떤 운동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필요한 시기 중국이나 러시아의 힘을 누루는데 이용할 수 있는 그런 운동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노신 :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이 서구의 좌파 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들었다. 이에 대해 설명해 달라.
골드너 :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배한 것이 미국 노동자들의 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미국이 베트콩에게 패배한 것에 대해 미국 노동자들이 기뻐하기도 했다. 많은 미국 노동자들이 베트남 전쟁을 직접 겪었으며 돌아와서는 투사가 되었다. 그러한 상호간의 영향이 있었던 것이다. 반면 베트남과 인도차이나 노동자들에게는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베트콩의 사회주의로의 전진이라고 봤지만, 진행된 상황은 그렇지 않았고, 이것은 베트콩의 승리 이전에도 명확했다고 본다.
1970년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졌을 때, 서구의 많은 뜨로쯔끼주의자들이 민족해방전선의 깃발을 흔들면서 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1945년 호치민이 베트남의 뜨로쯔끼주의자들을 어떻게 억압했는가에 대해서 그들은 듣지 못했고 실제 그 역사를 알았을 때 상당히 당황스러워했다. 그 당시에 그들이 깃발을 흔들었던 것은 자신들도 한 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이러한 그들의 활동은 베트콩이 혁명적 사회주의이며 이들이 만들고자 하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라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마치 러시아의 스딸린주의자들에 대해서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사노신 : SPRI 토론회가 끝나고 정성진 교수와 함께 한 자리에서 동지는 크론슈타트 반란진압이 ‘어쩔 수 없는 비극’이라는 그의 견해에 반대하며 반란진압과 함께 노동자국가는 끝났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최근 소련 문서들에서는 반란자들이 백군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계급 구성이 1917년 당시 혁명적 수병과 노동자들이 아니라 후방의 농민 징집병들로 충원되었다는 뜨로쯔끼의 말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렇다면 크론슈타트를 진압했던 것은 소비에뜨 정부가 살아남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만약 이에 반대한다면 동지는 반란 진압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골드너 : 우선 동지가 이 문제에 대한 정성진 교수와 다함께의 의견 때문에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민노당내의 주체주의자들을 얼마든지 지지하는 사람들이니 무엇이라도 지지할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혁명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크론슈타트반란에 반대되는 의견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가 확실히 중요하긴 하다. 동지는 정성진 교수가 사용한 ‘불가피한 비극’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표현이 들어간 질문에 대답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해보겠다. 혹시 폴 에브리히(Paul Avrich)의 책, <크론슈타트 1921> 을 읽어보았나?
사노신 : 아니, 번역이 안 되어 있다.
골드너 : 폴 에브리치는 러시아 혁명을 연구하는 아주 흥미로운 사학자이다. 아나키스트였던 그는 볼세비키의 반란의 진압은 정당하다고 말한다. 폴 에브리히와 지금까지 읽어본 다른 크론슈타트에 대한 글에 따르면, 반란이 일어났을 때, 페드로그라드에 있던 볼쉐비끼가 대표단을 보내 크론슈타트 소비에뜨와 만나게 했다. 그리고 크론슈타트 소비에뜨가 초기에는 당 동지들과의 토론에 개방적인 태도였다. 그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볼세비키의 대변자는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페트로그라드에서 온 아주 고위층은 아니였어도 중요한 지도자였다. 하지만 그의 거만함과 대화 방식은 기꺼이 대화에 임하고자 했던 크론슈타트 소비에뜨 사람들을 멀어지게 했다. 또한 크론슈타트 반란자들이 그 섬에 있는 공산주의자 관리들을 체포해서 감옥에 넣으면서 ‘나중에 처리하자’고 한 사실도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볼쉐비끼는 이와 달리 섬을 정복했을 때는 모두 쏴죽여 버렸다. 그러니까 공산주의자 관리들을 처형하지 않고 감옥에 넣었다는 사실은 크론슈타트 반란이 갖고 있는 좋은 의도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1991년 이후에 소비에뜨 기록문서들에서 반란이 일어난지 일주일 만에 쓰여진 체카 관리의 보고서가 발견됐는데 그는 이 반란이 백군들의 반란이 아니며 우리는 이 반란에 대처해야한다고 얘기했다.
이에 대해 볼쉐비끼를 지지하는 어떤 사람들은 “봉기가 일어난 지 일주일 밖에 안된 뒤라서 백군의 영향력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보고서는 일급비밀이라 레닌, 뜨로쯔끼, 지노비예프를 비롯한 소수의 아주 높은 볼쉐비끼 관리들만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당 신문과 볼쉐비끼체제의 모든 공개 성명에서는 “이것은 백군들의 봉기이고 반혁명이다. 우리는 이를 진압해야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알다시피 당시에 지노비예프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뜨의 최고지도자였는데 반란에 완전히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며 이성을 잃었다. 지노비예프는 평소에도 꽤 히스테릭한 사람이여서 1917년 가을, 볼쉐비끼 봉기를 반대할 때나 다른 때에도 그런 모습을 종종 보였다.
뜨로쯔끼는 당시에 페트로그라드에 없었는데 “백군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게끔 해야 한다”는 내용의 전보를 연속으로 그 곳으로 보냈다. 물론 동지들도 알다시피 페트로그라드내의 공장 파업은 반란 직전에 이미 끊난 상태였다. 알렉산더 버크만이라는 자유주의 공산주의자가 당시에 페트로그라드에 있었는데 공장위원회의 소비에트 회의에 참석해보니 체카 관리들이 회의실로 들어오면 노동자들이 벌벌 떨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건 하나의 일화일 뿐이지만 오래 전의 자료들이나, 최근의 류한수가 새로이 기록한 자료들을 보면 1921년즈음에는 당과 노동자 평의회, 그리고 소비에뜨의 관계가 심각하게 나빴다는 것, 그들은 존재하긴 하지만 당의 거수기로서만이었다는 것은 이미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변은 1921년경에는 볼쉐비끼 당과 소비에뜨, 노동자 평의회와 같은 노동자 권력의 민주적인 기관이 완전히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뜨로쯔끼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크론슈타트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1917년의 수병과 노동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한다. 솔직히 말해서 사실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뜨로쯔끼의 얘기를 아나키스트들이나 자유주의 공산주의자들의 얘기보다 더 믿을만한 이유가 없다고 본다. 특히 반란 기간에 볼쉐비끼 신문에 실린 거짓말과 선전들 때문에 더욱 그렇다. 또 다른 사실은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붉은 군대의 여러 부대에서 크론슈타트를 공격하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볼쉐비끼는 다른 지역의 군사 학교에서 아주 어린 군인들을 데리고 와야 했다. 공격이 이루어졌을 때는 후퇴하려는 군인들을 쏘기 위해 사람들이 얼어붙은 강 건너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내전 기간 내내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이상할 것은 없지만, 이 같은 사실을 인용하는 이유는 당시 반란에 대한 평판은 꽤 좋았다는 것, 아니면 적어도 공산당과 붉은 군대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반란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많은 붉은 군대의 부대가 공격에 가담하기를 거부했다는 사실과 탈주병들에 대비해 그런 조치까지 취할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마지막 사실 하나는 1921년 3월에 있었던 10차 당 대회에서 레닌이 “크론슈타트 반란은 다른 어떤 사건보다도 시야를 확장시켜줬다”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노동자 반대파가 패배했던 바로 그 대회에서 레닌은 토론 중에 “러시아 노동자 계급은 사라졌다”고 말했다. 1917년의 노동자들은 모두 내전에서 죽었거나 살기 위해서 농장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노동자 반대파 대표 중 하나였던 쉴리아프니코프는 벌떡 일어나서 “그러니까 당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계급의 이름으로 독재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논쟁의 다른 입장에 대해서도 몇 가지 이야기하겠다. 4년간의 1차 대전과 3년간의 내전을 겪은 러시아는 눈에 띄게 완전히 소모된 상태였다. 연합국들의 봉쇄는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고 백군은 핀란드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으며, 핀란드에는 이 반란에 관심을 보이는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와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크론슈타트 반란이 실제로 일어나기 일주일 전에 프랑스 신문에는 이미 이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상황이 어쨌든 간에 나는 크론슈타트 반란이 백군들의 반란이라고 설명할만한 설득력 있는 증거를 보지 못했다. 크론슈타트 군대의 지휘관이 된 군사령관이 있었는데 그는 내전 중에 붉은 군대에서 싸운 사람으로서 혁명에 대한 경력에 있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백군이었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무런 신빙성이 없는 것이다.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또 하나의 사실적인 요소는, 만약 이것이 백군의 계획이었다면 일주일만 기다리면 됐다는 것이다. 그러면 얼음이 다 녹아서 섬은 다음 겨울까지 공격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어쩔 수 없는 비극’이라는 질문으로 돌아가면, 그 상황에서, 즉 7년의 전쟁과 파괴의 나락에서 볼쉐비끼가 백군의 반란에 편집증적인 증세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그러나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비극’이라는 말을 쓸 때는 아주 신중해야 한다. 러시아 혁명이 변질한 시기에 중요하게 드러났던 면은 오랜 세월 망명생활을 했던 높은 급의 지도자들, 즉 레닌이나 뜨로쯔끼 같은 사람들과, 20년 동안 지하에서 발전했던 당 내부의 조직간의 분열이다. 이들은 스탈린처럼 은행을 털고 감옥에서 탈출하면서 아주 흥미롭긴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비합법적 지하생활을 오랫동안 해 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1917년부터 일반 노동자와 농민들을 대표하고 있었고 볼쉐비끼 조직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레닌이나 뜨로쯔끼와 달리 이들은 당과 계급의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밤을 지새우던 사람들이 아니다. 내전 기간 중에 체카의 조직이나 볼쉐비끼 권력의 다른 기관들은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을 범죄의 지하세계에서 영입했다. 그래서 스탈린 이전에 이미 스탈린주의가 전체 볼쉐비끼 당의 한 일부로서 존재했다고 말하고 싶다.
빅토르 세르쥬는 <어느 혁명가의 회고록> 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알려주고 있다. 1920년에 사형 선고를 받은 몇 백명의 아나키스트 정치범들이 있었다. 레닌과 뜨로쯔끼는 그들을 위해 사면 요청을 해서 다음날 사면이 이루어질 예정이었고 프라우다는 그 아나키스트들의 명단을 기재했다. 그러나 사면이 이루어지기 전날 밤에 체카는 이 아나키스트들을 모두 총살했다. 빅토르 세르쥬가 감옥에 가서 관리에게 사면이 됐는데, 왜 그들을 쐈냐고 물었더니 체카 관리가 “레닌과 뜨로쯔끼가 감상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그들 마음이지만 내가 할 일은 반혁명을 파괴하는 일이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이것이 벌써부터 이 시기에 나타난 그들의 분열, 즉 1921년경 경험이 많다는 이유로 범죄의 지하세계에서 부분적으로 영입되었던 억센 조직과, 다양한 이론적인 사상들을 갖고 권력을 잡고 있던 인텔리적인 맑스주의 지도부 사이의 분열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레닌과 뜨로쯔끼의 공식적인 사상에는 당에 대한 충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그런 내용이 그들의 활동을 비호했다고 생각한다. 당에 대한 충성은 본질적으로는 폭력배들의 것인 이러한 행동들에 대한 사상적인 보호막이었다. 1921년에 레닌과 체카의 의장이었던 제르진스키가 이런 사건들에 개입한 체카의 활동에 대한 조사를 비공개로 진행했고 그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그들은 1921년의 상황에서는 그들이 그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조치들이 별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한 가지 잊지 말아야할 사실은 1918년 이후부터 볼쉐비끼는 다른 좌익그룹들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가두고 대부분의 경우 총살했다는 것이다. 멘쉐비끼, 사회혁명가들, 좌익 사회혁명가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이 그들이다. 물론 내전이 불행한 시기이고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당 밖에 있는 모든 반대파를 짓밟아버린 결과 내전이 끝날 때쯤에는 독재 권력이 크게 약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근본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당에 대한 충성의 이데올로기이며 ‘우리는 곧 혁명이고 당신이 우리를 반대하면 당신은 반혁명가다’라는 사상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전반적인 질문에 대답하자면 1921년에 노동자 계급은 당의 최고층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그저 지켜보는 수동적인 위치에 서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노동자국가로서 얘기하는 것은 잘못된 성격규정인 것이다. 혹시 미국의 급진주의자인 막스 이스트만(Max Eastman)을 아는가?
사노신 : 알고 있다.
골드너 : 막스 이스트만은 1922년부터 1924년까지 러시아에 살았고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하면서 레닌, 뜨로쯔끼, 그리고 다른 볼쉐비끼 최고층 관리들을 모두 알게 되었다. 그는 뜨로쯔끼의 자서전을 쓰고 있었고 코민테른의 1922년과 1924년 대회에 참여했는데 그는 볼쉐비끼당의 최고층 인텔리지도부가 스탈린이 조직에 끌어들인 사람들, 스탈린 세력의 기초가 된 사람들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를 묘사했다. 그들이 두려워할 정도였다면 일반 노동자와 농민들은 어땠을지 상상해 보라. 막스 이스트만은 1924년부터 이어진 스탈린의 승리에 미스터리는 없다고 했다.
어쩔 수 없는 비극이었냐고? 비극은 최초로 맑스주의 정치를 표방한 당이 맑스주의 강령을 조금도 이행할 수 없는 엄혹한 상황에서 살아남아야 했다는 데에 있다고 얘기하겠다. 1921년에 그들은 독일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다음 혁명의 파고가 일 때까지 자신들이 이 세계 혁명의 외딴 전초기지를 붙잡고 있는 것이라 상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민족 국가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한 민족 국가의 지도부가 된 그들의 위치는 그들로 하여금 스탈린이 ‘일국 사회주의’라고 불렀던 것으로 가게 했으며, 민족 국가처럼 행동하도록 몰아부쳤던 것이다. 그들은 영국과 통상 조약을 맺고 러시아 내의 상황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경제 정책을 실행하는 등의 개발을 했다. 이 모두가 엄혹한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하자면, 유고슬라비아의
뜨로쯔끼주의자였던 - 나중에는 아니었지만 - 안톤 씰리가(Anton Ciliga)의 <러시아의 수수께끼(The Russian Enigma)> 를 읽어 보았나?
사노신 : 읽어보지 못했다.
골드너 : 그 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씰리가가 나중에는 반동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책이 갖는 힘이 덜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뜨로쯔끼주의였는데 러시아에서 뜨로쯔끼주의자가 됐다. 그는 1920년대에 러시아에서 살았던 유고슬라비아 대표였는데 1926년에 뜨로쯔끼주의자가 됐으며 1930년에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시베리아에서 그는 살아남은 멘쉐비끼, 좌익 사회 혁명가, 아나키스트, 그리고 다른 좌파 정치범들과 함께 강제 수용소에 있게 됐다. 다른 사람들은 나중에 총살당했지만 씰리가는 외국인신분이어서 살아남아 유럽으로 돌아가 책을 쓸 수 있었다. 그가 시베리아에 있는 동안에 러시아 혁명의 실패에 대한 아마도 가장 수준 높았을 논쟁이 오갔을 것이다.
그가 서술하는 내용 중에 놀라운 사실은 뜨로쯔끼주의자들이 국가를 감독·관리하는 위치에 있었을 때와 똑같이 정치수용소에서도 다른 정치적인 경향을 거만하게 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당의 최고층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논쟁에 주목하면서 언제든 다시 모스크바로 호출되어 국가 권력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좌익 반대파에 거만한 태도를 보이고 보다 광범위한 노동자 계급과 소비에뜨 사회와는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은채 당의 꼭대기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이미 완전히 패배한 당시의 뜨로쯔끼주의자들의 심리적인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정성진 교수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더 질문할 게 있나?
사노신 : 그러니까 이해할 수는 있지만 불가피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골드너 : 당시의 처지를 봤을 때, 볼쉐비끼 당이 나아간 방향을 봤을 때, 1921년의 엄혹한 상황, 그리고 무엇보다 서구에서의 혁명의 실패를 봤을 때, 대단히 불가피했다고 할 수 있다. 서구의 공산주의자들이 내전 중에, 그리고 후에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그들은 서구 유럽의 정세에 어두운 레닌의 모습에 상당히 놀랬다. 1921년에 몇몇 독일 공산주의자들이 레닌과 대화를 하러 와서 앉았는데 레닌이 독일 지도를 펼치고는 “동지들, 그래서 최초의 혁명은 어디에서 일어날까요?”하고 물었다고 한다. 독일 동지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어떻게 대답을 해야 될지 몰라 곤란해 했다.
한편,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이 레닌만은 아니었고 러시아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서구 유럽의 혁명가들도 1차 대전이 끝난 상황이 혁명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고 믿었다. 불행히도 그들은 모두 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주의전술이 볼세비키전술에 아주 중요했기 때문에 - 이것은 그들이 혁명을 먼저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 그들이 틀렸음이 드러났을 때 ‘불가피성’이 중심점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볼쉐비끼들뿐만 아니라 서구 유럽의 많은 혁명가들 역시 지녔던, 혁명이 임박했다는 전망을 나는 러시아 혁명 패배의 ‘비극적인 필연’, 혹은 ‘비극적인 불가피성’으로 지적하고 싶다. ‘불가피성’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다면, 아주 후진적인 국가의 맑스주의 당이 세계 상황에 대한 잘못된 평가를 갖고 표면상의 승리를 이뤘다는 것, 그것이 나머지 모든 것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대답하겠다.
사노신 : 볼쉐비끼가 너무 일찍 권력을 잡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권력을 잡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는가?
골드너 : 아니, 권력을 잡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1917년 가을에 그곳에 있었다면 독일이 상황의 열쇠를 갖고 있다는 파악 하에 권력 장악을 찬성했을 것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틀렸을 것이다. 내전 기간 중에 모든 좌익 반대파를 체계적으로 짓밟아버린 것은 잘못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발생한 상황에 대해 이 불가피성의 요소를 더한 것은 이러한 당에 대한 충성과 “우리가 곧 혁명”이라는 믿음이였다.
사노신 : 1921년에 소련이 루비콘 강을 건넜을 때 동지는 소련이 노동자의 국가였다고 생각하는가?
골드너 : 노동자들이 소비에뜨나 노동자 평의회 같은 조직에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노동자국가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노신 : 그렇다면 1921년 이후의 소련 국가 권력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나?
골드너 : 1921년 3월, 10차 당 대회의 토론 중에 레닌은 이것은 국가 자본주의라고 비판하는 노동자 반대파에게 대답하길 “우리가 국가 자본주의라도 되면 운이 좋은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 계급이 국가를 관리하고 소생산자와 농민들이 대부분인 후진 자본주의의 상태에 놓여 있다”고 했다. 레닌은 노동자 반대파의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희화화하면서 우리가 국가 자본가라도 되면 그것은 행운이며 오히려 진일보라는 얘기를 한 것이다. 당 대회 의사록을 보면 이 발언을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은 노동계급에 찬성하는 자들이 국가를 관리하는 소생산자 자본주의라는 말이다.
당시에 토지는 농민 개개인에게 할당되어져 농민이 모두 소유하고 있었으며 1914년 수준의 15%인 국유화된 산업과 함께 경제의 토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면 1921년이후에는 무엇이 행해졌는가? 7년의 네프 시기, 그에 이어진 스탈린의 무지막지한 제 1차 5개년 계획, 1928년 이후에 일어난 집산화와 다른 모든 것 등등. 나는 정당이나 개인의 사상적인 선언에 담긴 의미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맑스주의적인 기준을 적용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1921년 당시의 몇몇 볼쉐비끼들은 자신들이 후진적인 자본주의 국가를 관리하는 노동자당이라고 진심으로 믿었을 것이다. 혹시 미아스니코프(Miasnikov)를 아는가? 미아스니코프는 1921년의 작은 좌익 반대파였던 ‘노동자 그룹’의 이론가였다. 그는 노동자였으며 1902년에서 1903년 사이에 볼쉐비끼에 가입했고 감옥에도 갔었으며 3번이나 탈옥을 했던 사람이다. 혁명가로서 완벽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볼쉐비끼가 그를 감옥에 넣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와 레닌이 토론을 했는데 미아니스코프가 “알겠다. 부르주아 정당을 금지하는 것은 이해하겠다. 그렇지만 노동계급의 다른 정치적 경향을 인정하는 민주주의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들은 논쟁을 했고 레닌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미아스니코프는 스스로 추방당하는 것에 동의했다.
필립 보리네(Philippe Bourrinet)라고 들어보았는가? 필립 보리네는 기존에 ICC의 역사가였고 훌륭한 책을 서너 권 썼다. 한 권은 독일-네덜란드의 평의회 공산주의에 대한 것이고 두 권은 보르디가와 보르디가주의자등에 대한 것이다. 정말 굉장한 웹사이트(www.left-dis.nl)도 갖고 있다. 그리고 레닌과 미아스니코프의 대화에 대한 아주 좋은 기사들도 썼다.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데 영어로 번역됐을 것이다. 꼭 한 번 찾아봤으면 한다.
어쨌든 1921년에 볼쉐비끼는 영국-러시아 통상 조약을 맺고 러시아 내에 해외 투자를 받아들이고 1920년 12월에 터키 정부 카말 파샤와 통상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을 맺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케말 파샤는 터키 공산당의 모든 지도자들을 붙잡아 총살했는데 그들은 룩셈부르크주의자였으며 독일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활동하며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볼쉐비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악수를 하고 협력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페르시아의 길란 소비에뜨를 알고 있는가? 길란은 이란이나 페르시아의 북부 지역인데 1920년에 그곳에서 소비에뜨를 지지하는 혁명이 일어났다. 그때 존재 했던 영국-페르시아 조약은 기본적으로 영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페르시아 정부에게 길란 소비에뜨를 파괴할 자유를 주었다. 1920년에 뜨로쯔끼가 쓴 문서를 보면(이 문서에 관심갖고 있는 뜨로쯔끼주의자들은 거의 없는데) “식민지와 半식민지사회에 대한 우리의 정책에 있어 우리는 영국 제국주의에 양보를 해야 하며 우리 동지들이 혁명적인 전술을 추구하는 것을 막아야한다” 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멘쉐비끼의 관점을 1920년에 레온 뜨로쯔끼가 자신의 입으로 말을 한 것이다. 알다시피 1920년 내전이 끝나기 전에 소비에뜨 정부는 독일 군대가 우크라이나에서 훈련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이는 독일 장교들이 붉은 군대의 장교와 사병들의 훈련을 도와주는 것의 대가였다. 1922년에는 러시아와 독일 사이의 공식적인 통상 외교 관계를 열어 준 라팔로조약이 있었다. 이로 인해 러시아내의 독일 군사 행동이 늘어났는데 연합국은 독일의 재무장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붉은 군대와 독일 군대의 고위관료차원에서의 긴밀한 접촉으로 이끌었다. 그 예를 들어보면 1923년 10월에 뜨로쯔끼와 지노비예프는 독일 혁명의 마지막 국면을 지도해 보려고 했었다 ( 1923년 10월 함부르크에서 일어난 봉기가 독일 혁명의 마지막 날들이었다). 3차 인터내셔널의 지도자로서 그들은 마지막 국면에 접어든 독일 혁명을 촉진하려 노력했지만 함부르크 봉기가 엄청난 대참패로 끝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함부르크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독일 군대가 사용했던 무기는 소련이 독일에 판매한 것이었다. 나는 이사실을 뛰어난 역사가인 필립 보리네로부터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한 번 말하면, 뜨로쯔끼와 지노비예프가 1923년 가을에 독일에서의 혁명을 진심으로 원했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비에뜨 정부의 실천은 내가 언급했던 모든 상황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민족 국가로 점철된 세계에서 점점 더 자국의 이해를 위해 움직이는 하나의 민족 국가가 되어갔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천이 의식을 규정한다고 믿는 맑스주의자로서 세계 곳곳에서의 이러한 소비에뜨 정부의 실천때문에 남아있던 볼쉐비끼의 진정한 혁명적 국제주의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그런 모습을 어떤 식으로든 노동자국가라고 부르는 것은 그저 관념적인 바람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1840년대 맑스의 저작들을 통해 알고 있듯이, 우리가 개인이나 정치적인 운동을 판단할 때는 그들 자신의 평가가 어땠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어떤 사회적인 활동과 실천을 했는가를 봐야한다.
사노신 : 이 문제는 논의하다보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고 이쯤에서 마무리해야 될 듯하다.
골드너 : 알겠다. 그런데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마지막에 내가 언급했던 이란과 독일의 사례들, 뜨로쯔끼가 중동지역의 동지들에게 혁명정책을 추진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 그리고 터키에 대한 얘기들을 알고 있었는가?
사노신 : 아니다.
골드너 :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다. 최일붕이나 정성진씨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
사노신 : 동지는 노동조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ICC나 IP가 얘기하듯이 자본의 기구라고 생각하는가. ICC 동지들은 남한의 노동자들과 투사들이 민주노총에 가입하고 있는 현실이 국제적으로 볼때 일반적인 현실이 아니라고 하면서 특수한 것이 일반적인 것을 대신할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남한에서 우리의 활동을 펼치기 위해 노동조합에 참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것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하는가.
골드너 : 나는 ICC와 IP (IP가 조금 덜하지만) 가 계급투쟁이 어떻게 발전하는지에 대해 아주 관념적으로 접근한 결과 스스로 그 분석의 피해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난 35년간 ICC를 알아왔으며 그들의 자료를 읽어왔다. 처음에는 꽤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어 ICC에 속해 있는 많은 사람들과 IP 사람들을 포함한 과거 ICC였던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과 대화를 하면서 계급투쟁과 계급 의식성은 아주 불규칙적이고 단편적으로 발전한다고 하는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1982년에 파리에서 ICC와 토론을 가졌을 때 내가 “남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경제 성장을 봐라”고 했더니 그들은 “그것은 불가능하다. 지금은 자본주의의 데카당스 시기이지 않느냐”라고 했다.
그러나 모든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노조에 대해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니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을 좌익 공산주의의 전통에 포함시킨다면, 그들은 노조 내에서 활동하는 것에 찬성한다. 그러나 독일-네덜란드 평의회 공산주의의 전통을 잇는 단체나 유럽 등에서 나타나는 대부분의 현대 좌익 공산주의 흐름은 노조 활동을 거부하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노조에 대한 그런 식의 관념적인 판단은 거부하지만 동시에 혁명을 위해 노조를 장악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뜨로쯔끼주의자들의 관점도 거부한다.
따라서 올바른 전략과 전술은 노조가 있는 곳에서는 그 활동에 개입하되 노조주의자는 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노조 밖에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연대를 형성하면서 투쟁을 확장시키려고 노력하는 노조안에 있는 사람들의 투쟁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런 활동 자체가 노조 관료주의를 무너뜨리는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60, 70년대 서구의 모든 계급투쟁들, 즉 미국, 영국, 프랑스의 비공인파업들(wildcat strikes)으로 부터 68년 5월투쟁, 그리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의 운동, 1974년, 1975년 포르투갈의 운동 등, 이 모든 경우에 노동자들의 행동과 요구에 노조의 성장이 중심내용이었던 적은 하나도 없었고 조합주의의 촉진이 이슈가 된 적은 없었다. 비공인 와일드캣 파업이나 프랑스의 총파업, 1969년에서 1977년의 이탈리아의 ‘지속되는 오월(Creeping May)’ 등의 어떤 파업에서도 노동자들이 “우리는 더 많은 노조를 원한다”고 외친 적은 없었고 노조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운동에 반대하여 싸웠다. 또한 내가 말했던 것처럼 예를 들어 1970년대 초반 이탈리아에서 노조 관료들은 노동자들이 쫒아 내기 때문에 공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이 때는 2차 세계대전 후 성장의 붐이 일어 노동자들은 언제든지 직장을 옮겨 다닐 수 있었던 시기였고 아무도 경제대공황의 상황을 상상하지 못했던 시기 였기때문이다. 그런데1970년대 이후에, 세계경제의 대대적 위기 혹은 자본주의 구조조정이 시작되면서, 내가 알고 있는 한 어떤 노조도 협소한 노사협조주의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아주 중요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절벽 위를 달리다가 깊은 협곡위의 공중에 떠 있는 상태에서 아래를 보자마자 뚝 떨어지는 만화 캐릭터를 아는가?.
사노신 : 알 것 같다.
골드너 : 서구의 노조들이 그런 상황에 있었다. 예를 들어 1973년 미국의 자동차 노조에는 조합원이 75만 명이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50만 명도 안 될 것이다. 그렇게 퇴보하는 동안, 좌파 평조합원 반대그룹이 노조 전술을 비판할 때마다 노조 관료들에게는 슬로건이 있었는데 “망가지지 않았으면 고치지 마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퇴직할 때까지 노조비 수입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조합원수는 줄어들고 있었지만 조합원들은 여전히 회비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노조 관료들은 자신들의 연금에 필요한 만큼의 충분한 돈이 들어와 퇴직을 할 수 있기만을 바랄뿐이었던 것이다. 이건 그냥 하나의 일화일 뿐이지만 70년대에 공황이 시작된 후부터 노조는 전술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었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 대해 아주 협소한 접근만을 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노신 : 한국도 지금 마찬가지이다.
골드너 : 미국의 상황은 좀 극단적이다. 자동차 산업 같은 경우 포드자동차와 제너럴 모터스, 이 2개의 대기업이 거의 파산 상태이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노총처럼 미국의 자동차 노조는 외주화와 인력 감축 등 회사의 전략을 모두 수용했다. 반면에 몇몇 개발도상국에서는, 즉 1970년대의 공황이 시작된 이후에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들, 즉 남한, 브라질, 조금 다른 경우로서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또 다른 경우로는 폴란드와 이란등 이런 모든 나라들에서 일정 시기동안 노조는 ‘민주주의’로의 이행에 전투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란을 제외한 모든 경우에 노조의 주류적인 사상은 “우리는 민주화 투쟁의 전위이며 민주주의가 확립되면 노동자 단체를 위한 강력한 힘을 갖게 될 것이다”는 것이었다.
사노신 : 맞다, 여기도 그렇다.
골드너 : 이란을 제외하고 모든 경우라고 언급했다. 이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런데 군사 독재 혹은 스탈린의 독재가 끝나자마자 노동자 계급은 신자유주의로 인해 급격하게 파편화되고 노조의 성장 토대였던 산업적 기반은 해체되었다. 노조가 위의 나라들에게서는 전위 부대였고 민주화 운동의 투사들이었는데 민주주의가 정착하고 기존의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난 뒤에는 신자유주의가 노동 운동의 중공업적 기반에 엄청난 공격을 퍼부으면서 노조의 힘을 약화시켰다. 이런 맥락에서 ICC의 관점과 다르지 않게, 현재의 자본주의는 영구적인 개량이 불가능한 자본주의라는 관점을 확인시켜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조합주의의 긍정적인 역할을 제시하는 듯한 기존의 발전들은 아주 짧은 시기에 그쳤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오히려 노동자계급을 위한 장기간의 개량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체제의 데카당스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노신 : 어떤 의미에서 개량이라는 말을 쓰는가?
골드너 : 얘기하려던 참이었는데, 1914년 이전에 독일, 미국, 영국, 그리고 어느 정도는 프랑스에서도 노동자계급이 산업화와 함께 성장하면서 안정적으로 노조를 만들고 임금을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노동자 당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독일의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점진주의와 수정주의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에서 그러한 것은 실현이 불가능하다. 내가 언급했던 서구의 경우에도 그렇고 브라질, 남한, 폴란드처럼 독재 권력으로부터 벗어난 곳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처음에도 얘기했듯이 노조 문제에 대한 혁명적인 접근이 단순히 ‘노조는 부르주아적이고 노조에 가입하는 것은 부르주아 기관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1860년에 칼 맑스도 노조는 부르주아 기관이라고 얘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회주의자, 맑스주의자, 모든 종류의 좌파들에게 노조에서 활동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몇몇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여전히 주장하고 있지만, 노조를 장악하는 전략은 이제 희망이 없음을 그 때 이후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1914년에 이미,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모든 나라의 노조에서는 자국의 정부와 함께 자본가들과 협력하여 국가 자본주의에 가까운 계획처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때에도 모든 나라, 모든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에서 노조는 역시나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전쟁에 노동자계급을 참전시키는데 앞장섰다.
오늘날처럼 노조의 위치가 약해진 상황에서 같은 일이 생길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그러므로 노조 문제 전술에 대한 내 의견은 노조가 있는 곳에서는 활동에 개입하되 노동조합주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과 노조에 참여할 기회조차 없는 억압된 계층을 모두 포함하여 그들을 최대한 투쟁으로 조직하는 전계급적인 관점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남한의 이랜드 투쟁이 어느 정도는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는 2003년에서 2004년까지 있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하철 파업의 예다. 지하철 노동자들이 주 30시간 노동,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2000명의 노동자를 신규 채용할 것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였다. 그리고 승리했다. 물론 대도시의 지하철 노동자들은 특별한 힘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어쨌든 나는 이것이 바로 노조에서 활동하는 노동자들이 계급적인 방향으로 행동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사노신 : 동지의 전술에 동의한다. 우리도 노동조합이 국가기구화 되고 있다고 보지만 참여는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좌익 공산주의자들 같은 경우에는 참여자체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노조에의 참여를 뜨로쯔끼자들이 주장하는 노동조합의 장악과혼동하는 것 같은데 해외에서도 우리와 같은 관점을 갖고 있는 혁명적 조직이 있는가?
골드너 : 거기에 대답하기 전에 한 가지만 덧붙이겠다. 유럽과 미국에 있는 많은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이제 노조에서 다양한 위치의 간부들이 되었다. 특히 프랑스에서 그러한데 3개의 주요 뜨로쯔끼주의그룹 모두 노조안에 자신들의 유니온 샾사무장들(union shop stewards)과 낮은 직위의 관료들을 갖고 있다. 미국에서도 규모는 훨씬 작지만 다른 방식으로 비슷한 발전을 보인다. 그런데 그들은 노조에 침투해 들어가는 것을 토르츠키주의 강령의 성공이라고 제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현실은 이와 다르다. 그들은 뜨로쯔끼주의자라서, 혹은 뜨로쯔끼의 이행 강령 때문에 당선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투사들이기 때문에 당선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정치전략은 자신들의 성공과 그 성공에 대한 환상에 의해 망가지고 있다.
ICC와 같은 좌익 공산주의자들의 관념적인 이론이 파산 지경에 이르렀음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일화를 더 들겠다. 5년 전에 미국 남부에서 닭고기를 포장하는 공장에서 불이 났는데 사측에서 비상구를 모두 잠가서 대부분이 흑인 여성이었던 공장 노동자들이 빠져나오지 못했고 그로 인해 여성 30명이 죽었다. 그들은 이후에 무엇을 했을까? 노조를 결성해서 사람들이 회사로 하여금 일하는 동안에 비상구를 열어두도록 만들었다. 나는 ICC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 대면해서 그 사람들에게 “안 됩니다. 지금은 자본주의 데카당스 시기이며 모든 노조는 반동적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싶다.
나는 미국의 동쪽 해안에 있는 큰 대학의 교직원으로 몇 년간 일했는데 도서관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노조 설립을 추진하는 운동이 있었고 마침내 15년이 걸려 승리했다. 대학 본부에서는 갖은 방법으로 노조 설립을 막으려고 했다. 노조가 1989년에 승리했을 때, 최근 20년 내에 가장 성공적인 사무직 노동자들의 노조 설립으로 평가받았다. 노조 승리의 즉각적인 결과는 가장 적게 임금을 받던 교직원들의 임금이 10% ~20% 인상된 것이다. 임금 인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이 대학 경영진들을 비판하고 말대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자, 여기까지가 좋은 얘기다. 안 좋은 얘기는 노조가 승리하자마자 대학에서 새로운 전략을 취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살라미 전술이라고 들어보았나?
사노신 : 그렇다
골드너 : 한꺼번에 파괴할 수가 없으니까 조금씩 떼어내는 것이다. 대학 당국은 노조를 약화시키기 위해 살라미 전술을 펼쳤다. 주로 교직원들을 전문직으로 다시 분류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노조에 가입할 자격이 있던 8000명의 노동자들 중에, 10년이 지나고 나니, 4000여명이 이런저런 책임자가 되면서 노조원 자격 범위의 밖으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노조 지도부, 노조를 설립했던 사람들은 이러한 전술에 협력했다. 또 다른 일화를 들면 노조 설림을 인정하는 마지막 투표가 있기 직전에 노조를 지지하는 민주당 정치인들이 참여한 집회가 있었다. 노조 설립을 지지했던 이들 민주당 정치인들은 좌파민주당, 중앙파민주당, 그리고 우파민주당 모두 포함하고 있었는데, 노조설립을 주도했던 지도자들이 노조 조직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저들이 발언을 하면 누가 발언하든 모든 발언에 박수를 쳐주시기 바랍니다. 11월에 누가 당선이 되든지 간에 의회에 친구를 하나 둘 수 있으면 좋으니까요”라고 말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노조일 뿐이고 정치적인 조직은 아니다. 하지만 의회 선거를 통해 친구 하나는 있으면 좋겠다”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노조는 설립된 지 20년 만에 이런 다양하고 일관성없는 전술로 인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9년 당시에 이 대학의 노동자들에게 “노조를 만들지 마십시오. 지금은 자본주의 데카당스 시기입니다. 노조는 자본가들의 수단일 뿐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완전 파산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대학 본부도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대학은 미국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학교들 중 하나였고 그 명성을 생각할때 예를 들어 폭력 등을 이용해서 노조 설립을 막는다면 그의 명성에 치명적 손상을 얻게 될 것이므로 그렇 순 없었다. 이러한 특수한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노조를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 노조를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ICC 같은 그룹들이 갖고 있는 관념적인 공식은 이런 불규칙적이고 파편적인 계급투쟁의 현실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얘기한 관점을 실천하는 혁명적 조직이 있냐고 물어봤는데, 생각해보니까 북아메리카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만약 유럽에 있다고 해도 나는 잘 알고 있지 않다. 내가 서울에 없을 때는 뉴욕에 사는데 거기에 있는 LRP (The League for the Revolutionary Party)라는 아주 작은 그룹의 구성원인 뜨로쯔끼주의자 몇 명을 알고있다. 혹시 들어보았나? 그들의 이론가 중 한 명이 월터 다움(Walter Daum)인데 <스탈린주의의 흥망성쇠(The Rise and Fall of Stalinism)> 라는 훌륭한 책을 쓴 사람이다. 그들은 소비에뜨 연합에 대해 국가 자본주의적 분석틀을 갖고 있으며 지하철과 시공무원 노조에서 일하는 열성적 투사들도 있다. 그들은 전투적인 활동과 개입으로 이들 노조내의 중요한 소수의 노동자들에게 많은 신뢰를 얻고 있다. 노조 관료들은 이들을 너무 싫어해서 어떻게든 해고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하지만 소수 집단의 노동자들이 이들을 지지하기 때문에 쉽게 없애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뉴욕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노동 운동을 알고 싶으면 ICC나 IP에게 묻지 않고 이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이들은 하루하루의 투쟁에 대한 아주 구체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LRP는 전형적인 뜨로쯔끼주의 조직으로 내가 아는 한 이들의 전망은 언젠가 가능하다면 노조를 장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통상적인 뜨로쯔끼주의 전략과 전술을 실천한다. 그들은 노조간부들의 주장을 그대로 가져와서 “간부들은 우리가 10% 임금 인상을 받아야한다고 합니다. 10%를 위해 싸웁시다!”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노조의 틀 밖으로 시야를 확장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ICC에게 이들은 부르주아의 좌파일 뿐이다. 그러니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LRP의 관점이 갖고 있는 결점, 착각은 노조 내에서 권력을 잡을 상황이 오면 그 때는 이미 노조를 벗어난 더 커다란 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며 결국 그 운동과 대면하여 자신의 입장을 펼쳐야 할 것이라는 것과 관련있다. 그들이 권력을 잡을 날이 온다면 노조를 장악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전략은 노조나 일터 밖에 있는, 투쟁에 관심이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무시하고 간과하는 것으로 될 것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들의 문제점이다.
유럽 같은 경우에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더 폭넓은 계급의식이 존재하고 뜨로쯔끼주의와 같은 흐름이 노조 내에서 일한 지가 더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루떼 우브리에(Lutte Ouvrier, LO)가 있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다시피 그들이 노조의 유니온 샾이나 낮은 직위의 관료로 뽑힐 때는 혁명가로서가 아니라 훌륭한 노조 활동가로서다. 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노동자들은 뜨로쯔끼의 이행강령 때문에 그들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통적인 노조의 투쟁에 능해서 지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짧은 휴식기간의 대화)
사노신 : 내 생각으로 혁명가들은 투쟁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골드너 : 그렇다. 문제는 훌륭한 투사가 되는 것과 당면한 투쟁, 조합주의를 넘어선 진정한 어떤 것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사노신 : 한국의 경우 1987년 이후 많은 노동투사들이 있어왔지만 그들은 투쟁성자체 혹은 투쟁적 조합주의를 넘어서지 못했으며 지금은 조합주의자가 되버렸다. 내 생각에 이것은 혁명가들의 잘못이라고 본다. 노동자투사들은 혁명가가 될 수도 있었는데 대부분의 혁명가들은 그들과 함께 혁명적 원칙을 실행해 나가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자신들 또한 단순한 조합주의자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동지는 1987년 한국에 있진 않았지만 그 상황에서 어떤 것이 진정으로 혁명적 전술일수 있었는지 인터뷰가 끝난후 동지에 게 의견을 묻고싶다.
골드너 : 그것은 내게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다. 단지 여기선 혁명적 투사가 단순한 투사로 변하게 된 경우에 대해 이런 표현이 있음을 말하고 싶은데 “당신이 오랫동안 오리처럼 꽥꽥거리기만 한다면 당신은 물갈퀴발을 갖게 될것이다” 가 그것이다.
(인터뷰계속)
골드너 : 프랑스의 경우는 굉장히 특수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아주 오래된 혁명전통을 가진, 정치적 관심이 무척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3개의 주요 뜨로쯔끼주의 그룹의 성공적인 노조 활동은 어떤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사노신 : 3개의 그룹은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골드너 : LO, LCR, 그리고 파티 드 트라바예(Parti des Travailleurs), 노동자들의 당이라는 뜻인데 이들은 람베르트주의자(Lambertists)이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 LO는 투표의 5%, LCR도 5%를 받았고, 이 그룹은 1%를 얻었다.
사노신 : 줄여서 뭐라고 부르는가?
골드너 : 그들은 그냥 파티 드 트라바예, 노동자들의 당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파티 드 트라바예는 OCI라는 조직 하에 있다. 그들은 람베르트주의자들인데 아주 희한한 그룹이다. 영국에 있는 힐리(Healy) 그룹을 아는가? Gerry Healy는? 이 OCI는 프랑스의 힐리주의자들과 동지적인 관계에 있는 그룹이다. 어쨌든 OCI는 다양한 형태로 프리메이슨(Freemasons)도 포함한 프랑스 정치의 상층부에 실제로 침투해 들어갔다. 이들은 침투전략에 대한 확고한 관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총리였던 조스팽이 전에 이 조직에 속해 있었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들은 상층부에 영향력을 갖고 있고 프리메이슨 조직망을 통해서 프랑스 전체의 정치적 계급을 알고 있지만 대중적인 기반은 LO나 LCR보다 약하다. 그러나 2003년 5, 6월의 공무원 파업과 같이 큰 투쟁이 있을 때마다 완전 숨어만 있던 그들의 노조 관료들은 난데없이 나타나서 총파업을 요구했다. 그들의 활동은 말하자면 전혀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마무리해보면, 나는 파리에 있는 아주 흥미로운, ‘엑스트라유니온(extra-union)’ 투사들의 소규모 네트워크에 대한 기사를 쓴 적이 있다. 내 웹사이트에 가보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작은 그룹이긴 하지만 그들의 조직 원칙은 훨씬 큰 규모에도 적용될 수있다. 그들의 이름도 간단해서 ‘지지 위원회’(Support Committee)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구성된 그룹인데 자신들의 활동을 ‘날아다니는 피켓’(flying picket)의 역할을 함으로써 펼친다. ‘날아다니는 피켓’이란 한 직장에 속한 조직이 아니고 한 가지 직업에 오랫동안 있지 못하는 비정규노동자들을 구성원으로 취한다. 그렇게 노동력 사이를 떠돌다가 어떤 사업장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곳에 가서, 예를 들어 20명밖에 없던 작은 파업 현장을 갑자기 300명의 활동가로 채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노신 : 엑스트라 유니온은 무엇인가?
골드너 : 내 입장이 엑스트라 유니온주의라 하겠는데 그것은 조합내에 있든 조합밖에 있든 전망은 조합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엑스트라 유니온은 조합을 넘어서라는 의미이다
사노신 :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지지 위원회(Support Committee)’?
골드너 : 그렇다. 아주 간단한 이름이다. 이 그룹은 그냥 작은 예에 불과하지만 그것의 응용은 기본 적으로 광범히 하게 적용될수 있다. 그들은 상설 기구가 되어 사람들을 모집하는 데에 관심이 없고, 여러 가지 상황에 개입할 수 있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발전시키려고한다. 예를 들어 2002년에 파리의 맥도널드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는데 이들은 파리 전역에서 사람들을 데려와 맥도널드 앞에서 항의해서 결국 승리했다. 8~10% 임금 인상, 악덕 관리인의 해고등과 같은 조그마한 요구들을 쟁취했다. 그렇지만 이 광범위한 ‘지지 위원회’가 없었다면 고립되고 패배했을 것이다. 이들은 다른 상황에서도 비슷한 활동을 했다.
사노신 : 그들의 정치적인 입장은 무엇인가?
골드너 : 잡동사니로 섞여있다.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공산주의자들 등등 이것 저것 다 포함하고 있다.
사노신 : 그러니까 그냥 전투적인 조직인가?
골드너 : 그렇다. 그들은 정치적인 전망은 없으며 그것이 그들의 약점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비정규직의 위치를 강화시켰다. 다시 말하면, 자본가들은 비정규직화로 계급투쟁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했는데 ‘좋아, 안정적인 작업장은 이제 없고 모든 사람들은 파편화되고 고립되고 원자화됐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지 위원회’는 비정규직화가 오히려 날아다니는 피켓이 되어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들의 부대를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몇몇 작은 파업에서 이 전술을 성공적으로 적용했다.
사노신 : 프랑스에는 블랙리스트가 없나?
골드너 : 블랙리스트? 물론 있을 것이다. 왜 물어보는가?
사노신 : 한국에서는 블랙리스트에 한 번 오르면 직업을 못 구한다.
골드너 : 그런 게 있긴 하겠지만 그런 얘기는 못 들었다. 그런데 투쟁이 정말 희한하게 전개된 경우가 있었다. 당시 파리에 살고 있어서 그들의 활동 중 하나에 직접 참여했는데 4개의 체인을 운영하는 음식점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파업 노동자들은 모두 스리랑카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파업이 시작됐고 ‘지지 위원회’와 아나키스트들, 아나키스트 생디칼리스트 노조도 그들과 함께 활동을 했다. 그런데 두세 달이 지나 알고 보니 파업 노동자들의 절반이 타밀 반군의 일원이었다. 그것이 파업에 엄청난 문제를 야기했다. 길고 긴 사연이 있었는데 이야기의 주제에 중요한 내용이 아니라서… 어쨌든 이 타밀 반군들이 다른 파업 참가자들을 암살하겠다고 협박했다. 충격적이었다. 음식점 주인이 영국인과 인도인의 혼혈이었는데 스리랑카의 타밀 반군에 연락을 해서 돈을 줬다. 타밀 반군은 파업에 참가한 반군들에게 그만 둘 것을 지시하고 파업을 계속하려는 나머지 참가자들을 협박했다.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주제에서 한참 벗어난 얘기지만 파리에는 약 2만 명의 스리랑카 노동자들이 살고 있는데 타밀 반군이 비밀 정부처럼 사찰을 하고 자신들에게 골칫거리가 되는 사람들을 살해한다. 알제리에서 온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도 프랑스에 사는 북아프리카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같은 일을 하려고 한다.
어쨌든 노조 문제로 돌아와서 ‘지지 위원회’라는 그룹, 그리고 이탈리아에 있는 비슷한 그룹들은 작업장 중심도, 노조중심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계급투쟁을 발전시키기 위한 시도들을 하고 있고, 조금씩 성공을 거두고 있다. 하지만 물론 가장 큰 예는 아르헨티나의 피케테로(piqueteros)들이다. 특히 초기에 그들 역시 ‘날아다니는 피켓’ 전술을 써서 작업장에서 뿐만 아니라 병원, 경찰서, 슈퍼마켓 등에서 시위를 했다. 이 모든 것들이 노조를 넘어선 전망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투쟁의 형태들이다. 더 이상 이에 대한 질문이 없다면 다음으로 넘어가자.
사노신 : 잠깐더 얘기해보자면, 작업장에 개입 전략을 쓰고 있는 것은 뜨로쯔끼주의자들 밖에 없다고 봐야하는가?
골드너 : 글쎄, LO조차 배타적으로 작업장에만 집중하는 것을 그만뒀다. 그리고 1995년쯤부터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파리와 그들이 영향력을 갖는 다른 도시에 지역 위원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술집과 식당에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설득하여 지역의 투쟁에 참여시키는것이 중요했는데 비정규직화, 신자유주의의 구조조정 하에서 기존처럼 배타적으로 작업장에 중심을 두는 활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한 작업이 크게 성공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노조가 있으면 장악해야한다는 그들의 관점 자체가 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전투적 인자들은 여름기간 이동버스를 타고 프랑스 전지역을 도는데 내가 아는 한 중요한 성과물은 없는 듯 하다.
(다시 인터부주제로 돌아가서)
골드너 : 관심이 있다면 최근 15년, 20년 사이에 등장한 작은 노조들에 대해서 몇 가지 더 얘기하고 싶다.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지금은 독일에서 전통적인 노조 기구의 외부에 조그만 노조들이 생겼다. 이들은 더 전투적이고 더… 이들은 스스로를 계급 조합주의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 작은 노조가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은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고 이전에 ‘자주관리’노조였으며 지금은 아주 우익화된 CFDT에서 나온 조직이다. 처음에는 우체국과 철도에 기반한 것으로 기억한다. 몇몇 전투적인 파업을 지도했는데 중앙으로 집중된 조직이 아니라서 어떤 사람들은 전투적이고 노조 관료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덫에 빠지기도 해서 조직의 성격이 일관적이지 않다. 이런 식으로 전통적인 노조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들이 있는데 내가 알기로는 딱히 성공했다고 할 만한 것은 없고 지금 성공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이 어떻게 노조 활동과 관련을 맺을 것인가의 문제를 대답하는 데에 있어서 생각해봐야 할 또 하나의 요인이다.
사노신 : 혹시 SUD인가?
골드너 : 맞다. 예를 들어 ‘지지 위원회’가 깊이 개입하고 있던 파업이 있었는데 고급 호텔에서 호텔청소부로 일하던 아프리카 여성들이 참가하고 있었다. 그들은 파업을 하면서 SUD에 가입을 했고 초기에 SUD는 최대한 그들을 돕고 있었다. 하지만 파업은 10~12달 동안 이어졌고 두세 달 뒤에는 참가자들이 20~30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자 SUD는 더 관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빠져나갔다. SUD가 투쟁에서 빠지고 나니까 파업하는 여성들을 외부에서 지원해주는 곳은 ‘지지 위원회’뿐이 었는데 그들은 아주 독창적인 전략들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이들은 토요일 밤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저녁 식사와 파티를 하러 화려한 호텔 레스토랑을 찾는 때에 그곳에 확성기를 들고 가서 파업에 대한 유인물을 나눠주고 호텔 로비에 가서 카펫 위에 그냥 앉아 와인과 치즈, 파테드프아그라 등을 꺼내놓고 파티를 벌였다. 결국에는 회사 측에서 “그래 20-30명밖에 안되는데, 그냥 줘버리자” 하면서 파업 기간 임금의 50%를 지급하는 등 그들의 요구를 다 수용했다. 파업자들은 합의안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겠다는 것만 양보했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투쟁이 승리하고 나서 SUD가 갑자기 다시 나타나서 피켓 라인에서 피켓을 들고 있는 여성들의 사진을 찍고 자기들의 잡지에 실으면서 SUD와 아무 상관도 없는 파업자들의 포스터에 “SUD”라고 써넣다는 사실이다 . 어쨋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노조안에서 활동하는 트로츠끼주의자들의 경우와 더불어 프랑스에는 어떤 면에서 아주 특별하며 다른 나라에선 존재하지않는 파업 문화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더 있는데 음식점을 닫으라고 요구하면서 확성기를 들고 들어가 손님들이 오지 못하도록 하는 시위에 직접 참여한 적이 있다. 그 때 경찰이 왔다. 음식점 경영자가 법원에 가서 ‘지지 위원회’의 활동은 본질적으로 불법이라고 하는 법원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경찰이 법원 명령을 들고 와서 음식점 문에서 바로 협상이 진행됐다. 경찰들은 “자, 봅시다. 확성기를 들고 들어갈 수는 있지만 출입구를 막아서는 안 되고…” 이런 식으로 파업 참가자들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모든 구체적인 사항들을 훑고 있었다. 미국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경찰들이 그냥 와서 곤봉을 휘두르기 시작했을 거다.
사노신 : 한국에서도 모든 것이 불법이다.
골드너 : 알고 있다. 뉴욕에서는 경찰 백여 명이 와서 모두를 때리고 연행해 가면 그만일 것이다. 다시 그 파업얘기로 돌아가면 몇 주가 지난 후에 시위가 있을 때마다 경찰들이 왔는데 그들은 경영자들의 불만 호소때문에 오는 게 지겨워지고 있었다. 어떤 여자가 걸어가다가 경찰에게 “무슨 일이예요?”하고 물어보니까 경찰이 파업 참가자들의 유인물을 집어 들어 건네주면서 “이거 읽어보세요. 여기에 다 나와 있어요”라고 하는 상황을 목격한 적이 있다. 자,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자.
사노신 : 원래 묻고자 했던 것은 그런 투쟁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가는 혁명가 조직이 있냐는 것이었다.
골드너 : 일반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없다.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우프헤벤(Aufheben)그룹이나 이와 관련된 독일의 몇몇동지들은 비전위적 방식으로 투쟁에 개입하려고 노력해왔다. 사실, 중요한 얘기를 빼먹을 뻔 했는데 프랑스 사람들은 혁명가 조직들이 과거에 투쟁에 개입한 방법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1968년 이후 70년대, 80년대에 LO와 LCR의 활동가들이 다양한 투쟁에 나타나서 “저는 LO에서 왔습니다” 혹은 “저는 LCR에서 왔습니다”라고 하면서 “우리는 당신의 투쟁을 지지합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조직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교묘한 술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그런 경험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혁명가 조직의 투사들이 회의나 총회에 와서 토론이 새벽 3시까지 이어지다가 결국 그런 작은 조직에서 온 사람들만 남아서 표결에 부치고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한다.
사노신 : 한국에서 그런 일은 드문 것 같다.
골드너 : 그런가? 이런 작은 혁명가 조직들은 회의 때 어느 누구보다도 오래 버티는데 전문가들인 것 같다. 예를 들어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뜨로쯔끼주의 그룹이 부두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에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랜 전투적 전통이 있는 노조였는데 이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이런 전략을 펼치면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노조 회의에서 새벽 2시에 이들은 시온주의에 맞서 싸우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지역 부두 노조의 조합원인 우리는 시온주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전적으로 지지함을 선언합니다.” 노조의 일반 조합원들은 노조 신문의 다음 호를 보고서야 이런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노조 회의 때 이것이 논점이 되었다는 것도 몰랐다.
여기에서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주요 뜨로쯔끼주의 그룹들이 더 이상 회의에 나타나서 이러저러한 그룹에서 왔다고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어떤 공장에서 왔습니다” 내지는 “이 사무실, 이 회사에서 왔습니다”라고 얘기한다. 그들이 회의를 주관하고 LO의 정책들을 추진하는 것을 봤지만 회의에 참가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이 LO 소속이라는 것조차 모른다. 회의에서 사회를 보고 조정을 하지만 LO라고 쓰인 배지를 달지 않고 무슨 노조, 무슨 사업장을 나타내는 배지만 달면서 뜨로쯔끼주의 그룹들과의 관계를 절대로 얘기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한데 사람들이 회의에서 그런 교묘한 술수를 쓰는 것에 질렸기 때문이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자.
사노신 : 우리가 알기로는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모든 종류의 부르주아 선거에 반대한다고 들었고 의회 참가도 반대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의회 참가자체가 아니라, 그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선거를 하면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지기때문인데, 이런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기권해야 되는가, 아니면 대중이 관심을 가지니까 어떤 정치적인 입장을 취해야 되는 건가?
골드너 : 노조 문제와 마찬가지로 모든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의회 활동을 거부한다고 하는 것은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노조에 참여하는 것을 찬성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어떤 상황에서는 의회 선거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데카당스 개념을 거부하기 때문에 1890년에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했던 활동을 오늘날에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어쨋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을 많이 못해 봤다. 내가 개입했던 상황들이나 알고 있는 국가들에서 이 문제가 현실적으로 제기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의 반자본주의 운동이 훨씬 크게 발달하면, 어떤 상황 하에서는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상상은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렇지만 1960년대 이후 유럽의 경험을 보면 의회 선거에서 얻을 것은 별로 없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LO는 LCR처럼 5%의 투표권 내에서 꽤 성공적인 대통령 선거 캠페인을 벌였지만 그들의 실제적인 기반, 작업장과 지역에서의 영향력과 그들이 선거 때 대중에 영합하면서 이용하는 미사여구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LO가 벌이는 선거 캠페인의 대중추수주의(populism)는 때로는 경악할만한 수준이다. 그리고 혁명가들이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아주 거리가 먼 것들이다. 그들이 선거 참여도 하나의 교육이라고 정당화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들은 교육을 하지도 않을 뿐더러 거기에 쏟아 붓는 활동력에 비해 얻는 이득은 아주 적다고 생각한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바로 지난달에 LO는 처음으로 지역 선거에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과 선거 연합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 나라는 역시 미국이라 할 수 있는데 미국에서 뜨로쯔끼주의 그룹들이 한 번씩 하는 선거 캠페인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들이었다. 미국에서는 인구의 50%만이 선거에 참여하는데 그 50%는 부유층의 50%이며 노동자 계급과 빈곤층은 전반적으로 투표를 안 한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선거에 참여하는 문제를 한 번도 중요하다고 생각해보지 못했다.
예를 들어, 내가 교직원으로 있었을 때, 그 대학이 있는 도시에 살았는데 그곳의 시의회가 좌파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주 강력한 임대 주민들의 조합이 있었다. 1970년에서 1994년까지 이 조합의 영향력으로 도시에서는 집세가 철저히 통제되어 일 년에 1%~2%밖에 오르지 않았다. 지역의 정치는 집세의 통제에 대한 문제로 완전히 나뉘어 있었다. 나는 시의회 선거에서 집세를 통제하는 후보들을 찍고 그들을 위해 유인물을 나눠줬지만 그것이 혁명적인 개입이나 전략의 중요성을 갖는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부르주아 정당과 상관없는 아주 구체적 성과가 있다면 선거를 지지하거나 참여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혁명적 전략의 일반적이고 중요한 요소가 되는 상황은 그려지지 않는다. 혹시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언제 중요한 지에 대해서 토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노신 : 모든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공동전선을 거부한다고 생각하는가?
골드너 : 넓게 말해서 그렇다. 하지만 내가 몇 년 전 이탈리아의 한 보르디가주의자와 얘기해 봤을 때, 그는 “아니요,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은 찬성합니다”라고 말했다. 혁명가들이 지도부의 통제력을 깨기 위해 사회주의당과 공산당의 평당원들에게 호소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의미였다. 솔직히 그건 내게 뜨로쯔끼주의자의 관점과 매우 흡사하게 들렸다(보르디가주의자들은 동의하지 않으리라 확신하지만 트로트키주의자들 역시 평당원들의 불신을 불러일으키도록 ‘개량주의적’ 당들의 지도부에 공동전선을 요청한다).
앞서 우리가 독일-네덜란드와 이탈리아 좌파 공산주의의 기원들에 대해 논의한 것처럼, 우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3차와 4차 대회에서 공동전선 전술이 나온 유래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레닌은 독일-네덜란드와 이탈리아 좌파 공산주의를 비판하며 <좌익공산주의 : 유아적 혼란>이라는 소책자를 썼다. 그는 좌파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 선거 참여를 거부하고 코민테른의 공동전선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
앞서 말한 대로, 나는 독일-네덜란드 및 이탈리아 좌파 공산주의자들에 관련해 진짜 중요한 것은 러시아 혁명이 보편적인 모델일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 그들이 비판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이것은 다른 관점에서 볼때 다른 계급과의 제휴문제를 의미했다. 독일-네덜란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경우 그들은 1918년에서 1921년 혹은 1923년까지 자신들이 혁명적 상황 속에 있으며, 의회 활동은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반동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탈리아의 경우는 좀 더 미묘한데,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이탈리아 사회당 좌익과 공동전선을 하라는 코민테른의 지시는 자기들이 분리해 나온 지 겨우 6개월에서 12개월 밖에 안 되는 바로 그 사람들과 다시 합치라는 지시와 다름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들은 1914, 15년 당시 참전을 지지했던 자들도 포함하고 있었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1921년 공동전선으로의 전환이 우리가 앞서 영국-러시아 통상 협정과 같은 다른 외교정책에 관해 논할 때 이야기했던 서유럽과 세계의 안정화로의 전반적인 상황전환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1921년 공동전선으로 전환은 세계정세가 우경화하고 서유럽에서 혁명의 잠재성이 줄어들었던 전반적 상황전환의 일부분이었던 것이다. 1921년이 되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가까운 미래에 서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내 생각에 코민테른의 공동전선으로 전환은 그러한 상황에 적응한 것이었다. 내가 말한 대로 이탈리아뿐 아니라 모든 나라에서 이것이 실제로 의미했던 것은 1914년에 전쟁을 지지했고, 1920년에 코민테른의 21개 가입 조건을 거부한 인자들을 공산당 내로 받아들이거나 그들과 손을 잡는 것이었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이 코민테른 전략에서 특히 반대한 것은 공동전선으로의 전환을 대중획득을 위한 전략으로 보는 사고이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강령을 파산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며 혁명의 시기가 끝났다는 것을 알지만, 중요한 것은 혁명적 공산주의 강령의 핵심적인 부분을 보존하고 다음의 전투적 활동의 물결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이는 이것이 종파적 태도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실제로 그당시의 이탈리아의 구체적 상황은 그 다음 해 무솔리니의 파시즘 체제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그러한 상황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실례로 나는 보르디가의 그러한 종파적 태도가 무솔리니의 승리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이탈리아 아나키스트들과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을 많이 알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논할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명확한 것은 1921년에 시작되어 1924년에 이르러서는 모든 공산당안에서 공동전선을 통해 당에 들어간 인자들은 스탈린주의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마르셀 까쉥(Marcel Cachin)은 악명 높은 예이다. 그는 1914년에 전쟁을 지지한 사회주의자였고, 공동전선 전략을 통해 공산당에 들어갔다. 그리고 1924년 이후 프랑스 최대의 스딸린주의자가 되었다. 독일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벌어졌는데 …
사노신 : 텔만(Thalmann) 말인가?
골드너 : 탤만이 1914년에 전쟁을 지지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또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보르디가주의자들이 1921년 이탈리아의 당시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들과 협력하는데 종파주의적 태도를 보였는지 몰라도, 이 문제에서 있어 실제로 벌어진 일은 전체 운동을 통해서 볼 때 공동전선 전략이 미래의 스딸린주의자들이 운동에 들어오는 통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와 유사하게 공동전선으로의 전환은 미국 공산주의자들에게IWW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는 상관말고 보수적인 노동조합 단체인 AF of L(American Federation of Labor)에 들어가도록 명령했다. IWW를 아는가?
사노신 : 혁명적 생디칼리스트 조직 아닌가.
골드너 : 맞다. 1921년에 IWW는 여전히 강력했었다. 영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는데, 코민테른은 영국 공산주의자들에게 노동당에 들어가라고 했으며, 또 TUC (Trade Union Confereration)의 틀 내에서 활동하라고 했다. 추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코민테른이 옳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산당에 입당한 사람들을 보면 구체적 결과는 좋지 못했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공산당을 자신들의 사회에 순응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노신 : 그러한 결점은 공동전선 이후 공산당에 가입한 사람들에게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전술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을 실행한 서유럽 공산당의 문제가 아니었는가?
골드너 : 구체적인 실례를 얘기해 줄 수 있겠나?
사노신 : 예를 들어서 1926년 영국 총파업 당시 영국 공산당 활동가들은 노동조합 관료나 노동당 관료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했다.
골드너 : 나는 그게 바로 1921년에 시작된 노동당과 TUC 가입의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전쟁이 끝난이후1919년 영국에서는 거의 독일 혁명이나 이탈리아 공장 점거 운동에 비길만큼 중요한 노동자 운동의 강력한 혁명적 파고가 있었다. 그 투쟁이 패배로 끝날 무렵 공산당은 이미 노동당과 노조에 순응하고 있었다. 나는 특별히 영국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지만, 1926년에 그 당은 이미 상당히 스딸린주의화 되어 있어다고 생각된다. 내 말이 틀렸을 수도 있다. 다른 구체적 예를 들고 싶은가?
사노신 : 다시 이야기하자면, 1926년 영국 총파업 당시에 그렇게 됐다는 것인가?. 코민테른 공산당들이 스탈린주의화된 것은 일반적으로 1924년과 1925년에 ‘당의 볼쉐비키화’로 전환하는 과정이 시작이라고 보는데, 그 기간이 너무 짧은 것 같다. 1, 2년 사이에 당의 성격이 그렇게 변했을까. 당의 스탈린주의화의 결과로 총파업 당시에 그렇게 노조 관료나 노동당에 공산당이 의존하게 되었다는 것이 적절한 평가인가?
골드너 : 글쎄, 나는 그들이 스딸린주의자가 되기 전에 그것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스딸린주의에 대한 설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유럽 당들의 초창기(1919, 1920, 1921)이후에 코민테른의 새로운 방침에 따라 그들을 대체한 사람들은 스딸린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노신 : 그건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공동전선은 노동자들 생활수준을 보호하며 그를 통해 당의 대중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전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전술들을 일반적으로 배제해야한다고 생각하는가.
골드너 : 나는 구체적 상황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보르디가가 공동전선 전략에 있어 반대한 사항은 혁명적 관점이나 혁명적 강령이 아닌 그 이하의 무언가를 가지고 대중적 인기를 획득하려는 시도였다. 나는 전반적으로 봤을 때 1921년 전환 이후에 공산주의에 이끌린 사람들이 스딸린주의의 기반을 놓는 요소들을 당내로 끌고 들어 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1924년 지노비예프의 지도 아래 벌어진 소위 코민테른의 볼쉐비끼화는 여러 서유럽 공산당들 안에 스딸린주의적 요소들을 확고화시켰다. 투쟁이 하강하는 시기에 공산주의 조직이 어떻게 활동하고 생존해야 하는지는 매우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이다. 그래서 아마 추상 속에서는 코민테른의 공동전선으로의 전환에 긍정적인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당시 구체적 상황을 보면 내가 아는 한 모든 경우에 결과는 재앙이었다.
사노신 : 뜨로쯔끼주의자들의 이행강령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그것이 공동전선의 요구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골드너 : 대답하기 전에 내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을 먼저 말하겠다. 무엇보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이 사회민주당과 스딸린주의 정당들의 성격을 노동자 정당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공동전선 문제가 중요하게 남아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그들은 프랑스 사회당과 프랑스 공산당을 ‘노동자 정당’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하다. 그들은 독일 사민당도 ‘노동자 정당’이라고 부른다.
1970년대 칠레에서 시작해서 1980년대 초 스페인과 프랑스에서(칠레에서는 그 연정에 작은 부르주아 정당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다르긴 한데) 진행된 상황을 보자. 1981년과 1982년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사회당, 즉 소위 노동자 정당은 의회에서 절대적으로 다수를 획득했기 때문에 부르주아적인 어떤 정당과도 공공연히 연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나라들에서 여러 뜨로쯔끼주의자들은, 공동전선 전략에 대해 자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를 실천하고 고 이행강령을 적용하기 위해 “인민전선을 거부한다!”라는 슬로건 외쳤는데 이는 이들 정부 (프랑스에서 미테랑 정부와 스페인에서 곤잘레스 정부)가 권력을 잡은 노동자의 당이라는 믿음하에 그들의 본질은 공동전선 전술에 의해 폭로될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당들은 전혀 아무런 문제없이 15년 동안 집권했으며 뜨로쯔끼주의자들의 공동전선 활동은 근본적으로 아무런 역할도 못했다. 이들정부가 노동자 정당이라고 생각하면서 이행강령를 실행한다는 아이디어는 관료들의 수사학과 대중들의 욕구 사이에 간극이 있음을 폭로하는 데 있다. 하지만 아무런 모순도 없었다. 그 당들은 자기들이 자본주의를 운영하겠다고 말했고 그렇게 했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이행강령을 밀어부친다면 노동자 정당의 배신자관료들과 노동자들을 떼어놀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의 근본적 문제는 자기들이 늘 1917년에 살고 있는 줄 안다는 것이다. 그들은 볼쉐비끼가 케렌스키에게 한 것을 자신들도 개량주의적인, 소위 노동자 정당들에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1980년대 LCR의 슬로건 ( LO를 제외한 프랑스의 모든 뜨로쯔끼주의 그룹들은 노동자들에게 2차 투표에서 미테랑의 사회당에 투표하도록 요구했다)은 “사회 운동인3차 투표를 위해 2차 투표를 승리로 이끌자” 같은 것이였는데, 일단 미테랑이 집권하면 진정한 혁명이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 데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미테랑은 14년 동안 집권했고 이전에 LCR에 속했던 많은 사람들이, 386세대가 노무현 정부에 들어간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미테랑 정부의 중급수준의 관리가 되었다.
사노신 : 다함께 그룹 (Korean Cliffites)은 권영길이 노동자들의 대통령 후보라고 생각하며, 항상 말하기를 그가 선출되면 한국 사회가 매우 달라질 것이며 그가 한국에 모종의 진보적인 프로그램을 가져 올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과거에 그들은 순수한 부르주아 정치가인 조순과 김대중을 지지했다.
골드너 : 미테랑 정부는 자신들의 소규모 그룹을 떠나 행정부의 관료나 관리가 된 뜨로쯔끼주의자 요원들이 없었다면 그렇게 성공적일 수 없었을 것이다.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는데, 언젠가 LCR의 지도자 알랭 크리빈이 미테랑 정부의 외교정책에 반대하는 작은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몇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정부에서 “알겠다, 당신들과 대화할 관리를 한 사람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관리가 도착했는데 그는 지금은 외부부의 차관 비슷한 것이 된 예전의 LCR 조직원이었다. 그건 죠스팽이 OCI 노동자당의 예전 멤버였다는 것과 비슷한 얘기다.
물론 “이건 몽땅 허튼 수작이다. LCR과 같은 대그룹들은 뜨로쯔끼주의를 배신했으며 우리야 말로 진정한 뜨로쯔끼주의자다”라고 말하는 아주 정통적인 뜨로쯔끼주의자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2차 대전 이후 상황에서 이행강령을 계속 유지하면서 이러한 공동전선 전략을 적용하려는 시도가 우스꽝스러운 짓이라는 것이다.
사노 : 반세계화나 연금 같은 문제에 있어서 사회민주당에 반대하는 영국 리스펙트(RESPECT)나 독일의 좌파당(Die Linke)이 있다. 동지는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골드너 : 독일 좌파당 디린케는 대체로 동독의 옛 스딸린주의 그룹에서 나왔는데 통일 때문에 고통을 겪었던 동독사람들을 주로 대상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그들이 스딸린주의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더 이상 명백히 스탈린주의 정당은 아니다. 아마도 좀 더 좌익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가까울 것이다. 다른 모든 당들(녹색당과 사회민주당)은 그들과 관련맺고 싶어 하지 않는데 그들이 예전의 동독과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디린케에서 어떤 긍정적인 것도 찾을 수 없다. 리스펙트의 경우, 그것은 영국 IS의 프론트조직인데 그들은 지방 선거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를 후보로 내세웠다. 이들은 스코틀랜드에서 온 한 유명한 정치인을 주요 인사로 삼고 있는데, 한 번 더 말하지만 리스펙트에서는 어떠한 혁명적 관점도 찾아 볼 수 없다 (2008년 1월 30추가된 내용 : 리스펙트는 자신의 조직에서 SWP (Socilaist Workers Party. IS는 1977년에 SWP로 이름을 바꿨다) 를 추방한 것 같은데 이것은 프론트조직이 자신의 모체를 추방한 경우가 된다).
사노 : 그 정치인이 조지 갤러웨이인가?
골드너 : 그렇다. 조지 갤러웨이는 인기 있는 인물이고 SWP는 그를 리스펙트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프랑스에 있는 내 친구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정치적 내용이 별로 없는 선동꾼에 불과한데 그의 인기 때문에 SWP는 그를 이용하고 있다. 그런데 IS가 리스펙트를 통해 영국에서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행동을 한국에서 다함께가 주체주의자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그들은 주체주의자들을 이용하여 새로운 멤버를 확충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방금 이야기했던 선거에 대한 질문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오래된 질문이다. “누가 말이고, 누가 기수인가?” 이것은 동맹의 의미에 관한 질문으로서 누가 동맹으로부터 이득을 얻고 있으며 일은 누가 다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다함께그룹과 영국 SWP는 그들이 기수이고 다른 그룹들이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내 생각에는 그것은 반대라는 것이 확실하다 (2008년 3월 추가된 내용: 리스펙트의 SWP추방은 이 문제에 대해 결정적인 답을 주는 것처럼 보이며 200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다함께그룹의 주사파후보 지지는 대실패였다). 리스펙트 집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럴것인데, 2006년 8월에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고 헤즈볼라와 전쟁을 하는 동안 영국의 SWP와 리스펙트는 15,000명의 반전 집회를 조직했고 그때 그들의 주요 구호는 “우리는 모두 헤즈볼라다”였다. 이것이 내가 그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의 대부분이며 나는 그들이 어떠한 중요성도 가지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않는다 .
사노 : 이들이 모호한 세력이고 긍정적으로 생각되지 않지만 이걸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노동당이나 사회민주당이 민심을 잃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가 되지 않는가.
골드너 : 그렇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출현이 어떤 식으로든 낡은 조직의 쇠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노 : 동의한다.
골드너 : 그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지원하고 있으며 내 생각에 그들은 이미 타락했다. 영국에서 몇 년 전에 한 시위가 있었는데, 그 이슈가 무엇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영국 SWP가 매우 큰 역할을 했으며 리스펙트가 이에 관련되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몇몇 파키스탄 게이들이 그 집회에 자신들의 플래카드를 가지고 왔다. 영국 SWP의 폭력단원들이 그들을 시위에서 퇴출시켰는데 그들은 집회에 참가하고 있던 파키스탄 이슬람 그룹들을 화나게 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말한 것을 분파주의적 태도라고 말할 것임에 틀림없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자.
사노신 : 볼쉐비키 당 모델에 대해서 반대한다고 그 전에 밝힌 것 같은데, 이게 흥미로운 토론이 될 수 있는 문제인 것 같다. 동지는 <무엇을 할 것인가?> 초판의 타이틀페이지에서 레닌이 라살(Lassalle)을 인용했다고 하면서 이는 당의 정화를 암시한 것이라고 얘기했다(이 인용은 이후의 재판본들에서는 사라졌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레닌한테 초중앙집권주의자라고 비난했던 것도 동지는받아들이는 것 같은데 여기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좀 부탁한다.
골드너 : 인용된 문구는 “당은 자신의 숙청을 통해 자신을 정화한다”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라쌀레가 매우 중요한 선구자로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924년 코민테른 대회에서 막스 이스트만에 따르면 연단의 뒤편에 세 사람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는데 그것은 맑스, 엥겔스, 그리고 라쌀레였다. 나는 이사실이 그 시기까지도 라쌀레를 노동계급운동의 발전에 공헌한 혁명가로 여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혁명정당은 직업 혁명가들의 특수한 전투 정당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사람은 레닌이 아니라 라쌀레였다.
1920년대 중반이래로 라쌀레는 혁명의 전당에서 제거되었기 때문에, 러시아 운동에 있어 그의 커다란 영향은 널리 평가받지 못했다. 라쌀레가 비밀리에 비스마르크와 회동을 가졌다는 것이1924년 대회 이후에 밝혀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정확한 날짜를 확신할 수 없지만, 1924년 대회 이후에 라쌀레는 잊혀졌고 인용될수 없는 문서들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라쌀레가, 러시아에 맑스주의가 소개되기 이전, 그리고 확실히 볼쉐비즘이 나타나기 이전, 러시아 혁명 전통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그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러시아의 혁명적 인텔리겐차가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서 매우 독특한 발전을 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동지들은 네차예프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사노 : 그렇다.
골드너 : 네차예프는 1870년대에 <혁명가 교리문답>이라는 글을 썼는데, 그는 혁명가는 친구가 없고, 애정관계도 없으며 오직 존재하는 세계의 파괴만을 위해 산다고 썼는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비슷한 내용들이 더 많이 있을 것이다. 아마 동지들도 알텐데,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맑스주의와 볼쉐비즘 도입 이전에 러시아의 혁명적 인텔리겐차의 정신상태를 그린 아주 감동적인 소설 <악령>을 썼다. 그 소설에는 러시아의 혁명적 인텔리겐차 비밀그룹들이 모여 앉아 “물론 우리는 불가피하게도 완벽한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수백만 명을 죽여야만 할 것이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 러시아의 혁명적 인텔리겐차는 네차예프와 그의 특정한 행동을 거부했지만 반면에, 내 생각으로는 그러한 정신상태는 러시아의 혁명적 환경에 널리 퍼져 나간 것 같다.
사노 : 한국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영향을 받았다.
골드너 : 그런가? 주체주의자들처럼?
사노 : 그렇다.
골드너 : 빅토르 세르쥬의 보고에 따른면 1920년과 21년 1대 코민테른 의회에는 세계 각국의 공산당 대표들이 참여했는데 그들 중에 러시아의 혁명적 인텔리겐차에 비교할 만한 경험과 태도를 지녔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나는 우리 모두 네차예프의 <혁명가 교리문답>이 혁명적 개인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볼쉐비즘이 만들어지는 데 있어서, 이러한 러시아의 혁명적 인텔리겐차의 매우 독특한 진화의 영향, 맑스가 아닌 라쌀레의 영향이 존재했으며 러시아 혁명전통이 맑스주의의 언어만을 사용하게 되었을 때에도, 이러한 다른 요소들은 항상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 를 쓸 때 그는 노동자 투쟁, 자생적인 노동계급의 투쟁은 결코 노동조합주의 의식을 뛰어넘을 수 없으며, 진정한 계급의식, 혁명적 의식은 이러한 특수한 층의 혁명가들안에서 체현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바로 내가 앞서 말한, 볼쉐비끼당은 혁명을 체현하고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들이 혁명이고 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반혁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레닌의 관점에는 노동계급의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주의적 실천과 당의 혁명적 전망이라는 이원론이 존재하는데 직업 혁명가의 특수한 조직이 없다면 노동계급이 결코 노동조합의 개량주의적 실천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1905년이 찾아 왔고, 소비에뜨와 노동자평의회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소비에뜨와 노동자평의회는 볼쉐비끼가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그들의 관점은 모두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소비에뜨와 노동자 평의회는 이론가들이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서 동지들이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실천으로 발견된 것이다.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 를 출판했을 때, 그를 비판사람은 로자룩셈부르그만은 아니었다. 뜨로쯔끼는 1904년,두 편의 글, <시베리아 대표의 보고> 와 <우리의 정치적 임무> 에서 “레닌의 개념에서 당은 노동계급을 대체하며 중앙위원회는 당을 대체할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총서기가 중앙위원회를 대체할 것이다”라는 아주 유명한 말을 했다. 비슷하게 룩셈부르크의 비판도 한 줄로 요약되는데, 그녀는 “노동계급이 실질적인 운동에서 얻은 실책과 교훈이 가장 똑똑한 중앙위원회의 지령보다 더 중요하다”라고 썼다. 이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 에 나오는 표현을 향한 지적으로써 내가 생각하기에 러시아 당 조직에 독특한 요소들이며 우리가 크론슈타트반란에 대하여 얘기할 때 거론된 것으로 크론슈타트의 유래와 관련하여, 노동계급의 현실 운동 위에 군림하여 혁명을 체현한다는 이러한 종류의 당기구에 대해 그녀는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지가 알다시피, 그녀가 죽기 직전 1918년에, 그녀는 레닌에 대해 두 번째 비판을 했다. 그 글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소비에뜨 러시아에서 보는 것은 독재이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아니다.” 지금 더 이야기를 진행하기에 앞서 지적해야 할 것은 로자 룩셈부르크 역시 중앙집권주의자였다는 것이다. 그녀가 거부한 중앙집권주의는 레닌과 레닌의 중앙집권주의였으며 중앙집권주의 자체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민족문제에 대한 그녀의 글은 정말로 꽤 주목할 만 한데 그녀는 그 글에서 핀란드, 폴란드, 그루지야에 독립을 주었던 레닌과 볼쉐비끼를 비판했다. 그녀는 볼쉐비끼가 이들 나라에서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과 화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나는 정말로 그녀의 민족문제에 대한 글들을 읽기를 추천한다. 그것들을 읽어본 적이 있는가?
사노신 : 그것들은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골드너 : 그러한가? 그것들은 영어로 이용가능하다.
한편, 나는 불행하게도 로자 룩셈부르크가 너무 일찍 죽어서 공산주의 당에 대한 자신의 독자적인 관점을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동지들이 알다시피, 그녀가 죽던 해에, 그녀는 제3인터내셔널의 설립에 매우 회의적이었다. 왜냐하면 서유럽에서 독립적인 공산당의 발전에 앞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설립되면 불가피하게 러시아 공산당이 운동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많은 정통 레닌주의자들과 뜨로쯔끼주의자들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사회민주당으로부터 독자적인 그녀 자신의 당을 건설하기 위해 좀 더 일찍 행동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또한 제1차 세계대전 전에 페네코엑(Pannekoek), 고르터(Gorter), 롤란드 홀스트(Roland Holst) 등 네덜란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과 매우 친했는데 그들은 1908년에 네덜란드 사회민주당을 탈당하면서 로자에게 물었다. “왜 동지는 탈당하지 않는가? 독일 사민당이 개량주의에 굴복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자 로자는 “가장 나쁜 사회민주주의 대중정당이 현실성 없는 외각의 분파보다 낫다”라고 대답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정통 뜨로쯔끼주의자들이나 레닌주의자들과 토론할 때 로자나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 혁명정당을 제때 만들지 못해서 독일 혁명이 실패했다고 그들이 말하면 내가 항상 그들에게 묻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왜 혁명정당이 없었는가? 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의 답은 무엇인가?” 그러면 그들은 머뭇거리기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레닌의 말을 들었어야 한다”라는 답만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문제에 있어 강조해야 할 것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1910년에 카우츠키와 결별했으며 카우츠키가 제2인터내셔널에 소속된 독일 사회민주당의 보수적인 인자일뿐이라는 것을 그녀가 깨달았다는 점이다. 사실상, 로자 룩셈부르크는 레닌보다 앞서서 독일 사회민주당 중앙이 이미 썩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14년에 레닌이 사회민주당이 전쟁 공채에 찬성표를 던졌다는 성명을 실은 뉴스를 독일로부터 받았을 때, 그는 그것이 실제로는 악선동이며, 모두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레닌이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보다 더 많은 환상을 가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로자 룩셈부르크와 당 좌익이 왜 더 일찍 분리되어 나오지 못했는가에 대한 질문은 레닌주의와 뜨로쯔끼주의의 당물신주의 (당절대주의)로 거슬러 올라가는 다소 비역사적인 질문이다. 내 생각으로는 정당이 만들어지는 조건에 대한 레닌주의와 뜨로쯔끼주의 관점은 일종의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있다는 관점이다.
사노 신: 내 생각에는 로자가 좌익과 함께 당에서 분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되었다.
골드너 : 그렇다면 동지는 언제 그녀가 분리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사노 신: 적어도 1차 세계대전 동안에 그렇게 했어야 했다.
골드너 :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했다. 좌익은 1915년, 1916년에 독립사민당을 설립했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불충분했다. 그래서 공산주의 분파가 성장해서 거기에서 나왔다. 내가 생각하기에, 역사는 노동자 정당들, 혁명정당들이, 볼쉐비키 당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성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상황에서 성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새로운 정당의 건설이 가능해지는 것은 바로 파열이 일어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과거에도 독일사회민주당에 반대파가 있었다. 1891년, 당의 청년조직이 분리해 나가면서 당이 완전히 부르주아적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작은 분파에 불과했으며 곧 사라지고 말았다. 내 견해로는 사회민주당과 분리하여 독립 정당이 된 좌익의 실패는 사실상, 독일 노동계급내에 존재했던 개량주의의 무게와 1918년 이후에 보여지는 것처럼 소수만이 혁명을 지지하고 있던 상황의 반영이라고 본다.
그러나 나는 1916년, 1917년, 1918년 이전엔 어느 때라도 소수파가 사실상 분파가 아니라 일관된 방식으로 분리해 나올 수 있었을 때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문제를 우리가 앞서서 토론한 문제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러시아와 함께 독일 사회민주당의 혁명적 성격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과대평가가 있었다고 보는데 그래서 내가 볼때는, 당에서 분리하여 독립적인 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어떠한 미성숙한 시도도 매우 커다란 부담감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다른 중요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제2 인터내셔널이나 사회민주당과 분리하기 위한 시도가 제1차 세계대전끝나기 전까지는 없었다는 것을 명심하자. 러시아 혁명이 승리하면서, 그리고 볼쉐비끼 모델이 일반적인 모델로 받아들여지면서, 이렇게 무에서 유가 만들어지는 것 같은 레닌주의적 정당에 대한 환상이 생겼다. 그리고 많은 나라에서 이러한 식의 당이 보다 일찍 만들어졌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는 당이 건설되는 방식에 대한 매우 비역사적인 관점을 만들어냈으며 오늘날까지 정통 뜨로쯔끼주의나 레닌주의로 계속 살아남아 있다. 예를 들어 현대 뜨로쯔끼주의 글들과는 다르게, 파리 꼬뮌에 관한 팸플릿에서, 맑스는 “당만 있었더라면…”하면서 글을 마치지는 않았다고 하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러한 전반적인 사고방식은 레닌과 레닌 이후의 레닌주의자들에 의해서 노동계급에 소개되었고 발전해왔던 것이다. 나는 맑스와 엥겔스에게는 계급이 당을 조직하는 것이지 당이 계급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해가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당은 계급을 조직한다. 그러나 그것은 계급의 산물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여러 나라들에서 당의 약화는 우선 계급의 약화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내 혁명정당에 대한 관점에 대해 보자면…그 답을 지금 이 주제와 함께 이야기해도 되겠는가?
사노 신 : 물론이다.
골드너 : 좋다. 나는 분명히, 내가 말한 모든 것에서 레닌의 관점보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관점에 더 동조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또한 말한 것처럼, 로자가 1919년에 살해당했기 때문에, 그녀의 저작에는 일관된 당이론이 없으며 단지 실천과 그녀의 볼쉐비즘에 대한 비판에서 볼 수 있는 의견 정도뿐이다. 오늘날 필요로 하는 정말로 근본적인 것은 혁명적인 조직이 사회민주주의와 볼쉐비즘의 실패를 정말로 깊이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나는 또한 독일-네덜란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당자체에 대한 거부의 태도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1920년대초에는 독일-네덜란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 역시 혁명정당을 주장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1930년에 평의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느정도 견고해지면서, 당을 주장하는 요소들은 완전 사라져버렸다. 그러므로 오늘날 혁명조직이 사회민주주의와 볼쉐비즘의 실패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바는 정치조직보다 계급의 경험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전위란 전투적 노동자들과 의식적 혁명가들로 구성된 선진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적인 혁명가가 혁명과정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들은 보통 노동자들이나 심지어 전투적인 노동자들조차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투쟁에 개입하는 것은 공산주의자의 임무가 노동계급의 단결을 촉진하는 것이라는 맑스의 생각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존 사회에 대한 강령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투쟁을 이용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전형적인 전위 그룹이 하듯이, 조직의 새로운 멤버를 모집하는 수단으로 투쟁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혁명가들이 투쟁을,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투쟁 자체를 넘어선, 현존사회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의 대안을 소개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위란 계급의 선진적 부분에 확고히 응축되어 있는 역사의 경험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하며 그러한 것이 어떤 구체적 조직으로 체화되거나 결정화될 필요는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혁명적 조직은 혁명 몇 달 전에 대중조직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혁명의 시기 사이에, 혁명적 조직이 어디에 있는지, 노동계급이 사회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매우 명확한 지도를 그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역사적 경험은, 특히 1968년 이래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자본주의의 틀 내로 자신을 안주시키는 조직은 강력한 투쟁의 시기가 아닐 때는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0~40년 동안 전위그룹들이 추구한 대안이란 역사적 경험을 자신들의 조직안에서 구체화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내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폭발적인 투쟁의 순간에 생겨나는 선진적인 계급의식을 자신의 조직을 건설함으로써 구체화시키고 있다고 상상하는 그들의 관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계급의 운동과 분리된 인위적인 조직이 되면서 그 다음의 급진화 단계에 있어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예로 들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 토론해왔던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 그룹들이다. 그들은 노동조합 조직이나 사회당 혹은 공산당 조직에 침투한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한 전략이 성공을 거둔 것은 그들이 헌신적이 투사였기 때문이지 그들의 강령을 사람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이러한 종류의 인위성이 혁명조직의
발전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위험요소라고 생각한다. 매우 조심스러운 예를 들자면, 나는 지난 30년 동안 어떤 혁명적 전위조직에도 소속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참여할 수 있는 투쟁들에 참여하며 최대한 나의 전망을 도입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나는 글을 써서 그것을 나의 웹사이트에 올리고 또한 그 글들은 세계의 여러 잡지들에 실려서 읽혀지는데 사람들은 동의 하기도 하고 동의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내조직으로 끌여들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 자체에 어떠한 상실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운동전반에서 항시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당조직에 대한 관점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당이 운동에 공헌해야 하는 것이지 우위적 입장에서 운동을 지도한다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서구에서 일어난 폭발적인 투쟁들중 단 하나도 전위정당에 의해 시작된 것은 없었으며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레닌은 1905년과 그 전시기에 다음과 같은 똑 같은 말을 했다. “그렇다. 대중파업의 물결이 일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시점에선 정치조직이 중요해진다.” 그러나 내가 잊어버리고 얘기못한 것인데 1905년 이후에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틀렸다. 분명히 <무엇을 할 것인가?> 에서 내가 말했던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러시아에서의 소비에뜨, 노동자평의회 그리고 이중권력의 구성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당의 개입없이 노동조합 의식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의 문제점을 바로 잡기위해 ‘무엇을 하면 안되는가?’ 라고 불릴 팸플릿을 쓰지는 않았다. 현대 볼쉐비키-레닌주의 전통에는 1917년 이전 볼쉐비키당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많은 신화가 있다. 하지만1905년 이후에 또는 1905년 패배 이후에 볼쉐비끼는 커다란 침체에 빠졌고, 아마도 1912년까지는 국내조직력이 매우 약화되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레닌이 1917년 4월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 그는 스딸린과 지노비에프, 그리고 모든 주요 지도자들이 케렌스키 정부를 지지하고 있음을 알게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하다. 동지들이 알다시피, 뛰어난 정치전략가였던 레닌은 4월 테제와 그 다음에… 그러니가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레닌과 그 다음엔 뜨로쯔끼가 그 해 안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날수 있는 가능성을 얘기하기 전까지 당기구 자체는 상황에 대해서 완전히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는 것인데 당 기구는 보수적이었지만 이러한 예외적인 상황에서 이들 특별하게 뛰어난 개인들이 존재하여 상황을 바꿀수 있었던 것이다. 귀환 직후 4월 테제를 발표했을 때, 레닌의 태도에 대해 볼쉐비키 당의 대부분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레닌이 말했던 것은 다음과 같았다. “노동계급이 하고 있는 것을 보라. 노동계급이 당보다 백배나 더 급진적이다.” 레닌은 노동자들이 케렌스키 정권에 대립해서 나아가고 있는 러시아 상황의 급진화를 인식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컨데, 나는 동지들이CLR 제임스의 저작들을 읽어보기를 적극 권한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글을 썼는데 그는 러시아 혁명 이후의 혁명가들의 역할은 노동계급의 행동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혁명정당에 대한 레닌의 이론을 완전히 부정했던 것이다.
나는 제임스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는데 나의 웹사이트에 보면 제임스와 그의 관점에 대한 논문 2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제임스의 생각에는 중요한 통찰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그에게 있어 레닌의 전략적 탁월함이란 그가 노동계급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주목하면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존재로서의 당이 아니라 노동계급이 하고 있는 일에 반응하는 존재로서 당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제임스의 중요성은 노동계급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당정책의 가이드가 되며, 당의 역할은 계급투쟁의 역동성을 잘 표현해 내는 것이라고 한 레닌의 발견이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현대 레닌주의자와 뜨로쯔끼주의자들과는 다르게 레닌은 그의 전성기에 있어 당물신주의자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1917년 이후 우리가 거론했던 상황속에서 레닌주의적 당조직의 가장 부정적인 면들을 발생시킨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여러 해가 지난 1930년대에, 빅토르 세르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딸린주의의 바이러스가 레닌주의 안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레닌주의안에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많은 다른 바이러스들도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말이다. 다른 질문이 없다면 이문제는 여기서 끝내자.
사노신 : 질문이 더 있지만 일단 정리하기로 하고 다음문제로넘어가자. 동지는 볼쉐비끼 당 모델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당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동지는 당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골드너 : 다시 한번 말하건데 러시아 혁명가들과 인텔리겐차들은 매우 독특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비록 레닌과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이 1870~80년대 발전한 인민주의 전통을 거부하긴 했지만, 인텔리겐차의 문화는 여전히 인민주의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이들이 농민이 압도적인 사회에 존재하는 아주 소수집단이라는 사실은 인텔리겐차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은 러시아에서는 합법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던 서구 유럽의 대중적 노동운동 경험으로부터 나왔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자적인 당 이론을 발전시킬 기회가 없었는데 그녀는 1차 대전이 발생한 이후까지 독일 사민당에 머물렀으며1909년 독일 사민당과 결별하라고 호소하는 독일 네덜란드 극좌파의 권유를 거절했기때문이다. 내가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동의하는 것은 중앙집권주의(centeralism)에 대한 거부가 결코 아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현명한 중앙 위원회의 가장 훌륭한 지도보다 대중운동의 실수들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1919년 1월 암살당했기 때문에 독일 공산당의 발전에 영향을 끼칠 기회가 없었는데 그녀 자신이 매우 확고한 중앙집권주의자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는 독일 사민당안에서 규율을 깨는 사람들을 제명시킬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었고 민족문제에 대한 글들을 보면 로자는 레닌보다 훨씬 더 중앙집권적이다. 그녀는 짜르 제국 내의 폴란드, 핀란드, 그루지야 및 기타 다른 나라들에게 독립을 주는 것에 대해 레닌을 비판했다.
문제는 중앙집권주의 자체가 아니라 어떤 식의 중앙집권주의냐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독일-네덜란드의 좌파 공산주의자들, 즉 극좌파들도 혁명정당을 지지했다. 내 생각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하게 강조해야 할 것은 로자와 독일-네덜란드 극좌파, 그리고 보르디가가 러시아 모델의 보편성을 의문시했다는 점이다. 나는 러시아 모델이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특별한 역사와 농민이 압도적으로 많은 사회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볼쉐비즘이 서유럽에 적용될 수 있는 모델이 아니라는 초기 서유럽 사람들의 비판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알다시피 로자는 창설당시 제3 인터내셔널 건설을 반대했다. 로자는 그 때 창건하면 제 3 인터내셔널을 러시아가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옳았다.
사노신 : 그렇다면 동지가 생각하시는 당의 개념은 뭔가?
골드너 : 당에 대한 내 자신의 개념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오늘날 혁명정당은 사회민주주의와 볼쉐비즘의 실패에 대해 진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농민문제를 이야기할 때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두 당의 모델은 농민인구가 대다수이고 중요한 농업문제를 가진 사회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사노신 :과거의 실패에 대한 진지한 이해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골드너 : 볼쉐비즘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 중에 하나는 혁명을 당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당이 혁명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계급이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계급은 당을 필요로 한다. 나는 사회민주주의와 볼쉐비끼의 경험으로부터 생겨난 오류는 당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형식주의적 이해였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존재하고 있는, 여전히 레닌주의적 당개념을 가지고 있는 그룹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무엇보다 자기 당의 성장을 위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더 넓은 사회적 투쟁에 있어 혁명가들의 적극적인 개입이란 사람들을 자기조직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귀착된다.
내 견해로는 전위란 한편으로는 의식적인 혁명분자이지만 동시에 노동계급의 가장 전투적인 계층이기도 하다. 이 말은 당이 체현하고 있다고 하는 역사적 의식이란 실제로는 전체로서의 계급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의 예를 들면, 지난 6개월간 이랜드 투쟁의 경험은 이랜드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다른 사람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많은 노동자들이 이랜드 투쟁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투쟁이 승리하든 패배하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이해와 노동자들의 연대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는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으로 형식화될 필요는 없다. 역사는 혁명적 상황 밖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틀 내에서 형성된 조직은 그 사회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내 관점에서는 혁명 정당이란 기본적으로 혁명 전 마지막 시기에 대중 정당이 되는 정당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볼쉐비끼-레닌주의적 정당들은 내가 얘기한 것처럼 사람들을 자기 조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투쟁에 개입하고 존재한다. 혁명적 조직과 당의 역할은 주요목적을 자신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계급투쟁의 발전에 대한 이해를 일반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혁명적 상황이 아닌 시기에 있어 볼쉐비끼 레닌주의 정당들이 가지고 있는 당의 형식화된(formal) 성격에 대한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많은 소규모 전위조직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혁명이라고 주장하며 돌아다닌다. 그들은 혁명을 자기들이 성장할 때 성장하는 무언가로 이해한다. 하지만 실제로 역사는 혁명조직이란, 실제로는 조직으로서 형식화된 어떤 것이 아니라 혁명 전 마지막 순간에 노동자의 선진적 층으로부터 형성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또한 전위 정당의 그런 형식성을 지켜본 사람들이 그 경험으로부터 당 자체를 반대하거나 당은 필요없다고 하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 의견은 그렇지 않다. 나는 계급의식이 있는 인자들이라면 이랜드 투쟁 같은 상황에 개입하면서, 맑스가 <공산당 선언> 에서 말한 대로 공산주의자의 임무는 언제나 노동자 계급을 단결시키는 것이라는 방식으로 투쟁을 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맑스가 <공산당 선언> 에서 “노동계급을 공산당으로 단결시켜라”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상기하자. 오늘날의 전형적인 볼쉐비끼-레닌주의자나 뜨로쯔끼주의자들의 글을 보면 어떤 투쟁에 대해 얘기할 때 항상 끝을 이렇게 맺는다. “노동자들에게 혁명적인 전위 정당만 있었더라면, 투쟁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텐데…” 여기에서 말하는 혁명적인 전위 정당은 물론 자신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1848년이나 파리꼬뮌에 대해서 쓴 맑스나 엥겔스의 저작들을 보면 그런 식의 의견은 찾아볼 수 없다. 맑스나 엥겔스는 왜 그렇게 썼고, 나중에 20세기에 와서 볼쉐비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왜 내가 방금 말한 식으로 썼는지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당이란 의식적인 혁명적 인자들로서 투쟁에 개입하고 노동자 계급을 단결시키기 위해 투쟁을 확대하려 노력하며 진정한 계급의식은 계급의 가장 전투적인 부위의 경험 속에서 구체화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혁명적 조직이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적인 로드맵이다.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계급투쟁은 어디에 와 있는지, 그리고 계급투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이 어디에 존재하는지에 대해 아주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로드맵말이다. 로드맵이 없거나 틀리면 당이 곧 혁명의 구현이라거나 혁명 자체라는 관점을 더욱 부풀릴 것이기 때문이다.
사노신 :대중적 혁명투쟁 정세하에서만 당이 자라난다고 하는 점에 일반적으로 동의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인 시기에도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대중 속에 기반을 만드는 노력들은 항상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예를 들어 얼마 전에 우리가 만난 ICC 동지들 같은 경우에 사실상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어났을 때만 거기에 개입한다는 사고 자체가 상당히 수동적으로 보였다.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골드너 : 투쟁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수동적이지 않은 건지 먼저 묻고 싶다.
사노신 : 예를 들어 ICC가 얘기했던 것은 프랑스 CPE 투쟁처럼 아주 큰 투쟁들이 발생할 때그런 데에 확성기를 들고 가서 선전선동하고 신문 팔고 한다는데그것이 활동의 전부인 것 같다. 사실상 일상적으로 공장이라든가 작업장에서 일어나는 투쟁들도 있기 때문에 그런 투쟁들에 개입하는 것들이 필요하지 않은가. CPE같은 대규모의 투쟁이란 몇 년에 한 번씩만 일어나는 건데 그런 투쟁에만 개입한다는 것은 너무 수동적인 것 같다.
골드너 : 일단 ICC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면 ICC는 좋은 로드맵을 갖고 있지 않은 조직의 아주 적절한 예이다. 1980년대에 ICC는 혁명적인 계급투쟁의 주기가 오고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들은 1980년대 중반이 격렬한 계급투쟁의 시기라고, 적어도 서구 유럽과 미국에서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노동자급이 엄청난 패배를 겪은 시기였다. 이전에 ICC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얘기해주기를, 프랑스나 벨기에의 어느 도시에 신문을 잔뜩 들고 파견되어 현장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다시 한번 간단한 반대의 경우를 얘기하자면, 나는 약 30년 동안 어떤 혁명적인 조직에도 속해있지 않았다. 하지만 가능한 한 투쟁에 참여하고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글을 쓰며, 또한 동지들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하면서 한 개인으로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언가가 꼭 조직으로 형식화될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은 이미 운동 안에 있다.
물론 진지한 로드맵을 가지고 있는 조직에 가입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노동자들의 일상생활과 투쟁에 개입할 가능성이 있는 그러한 조직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참여는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큰 투쟁에 비해서 일상적인 상황은 아주 제한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는 가운데 이뤄져야한다. 비유를 하자면 오늘날 존재하는 많은 조직들은 마치 큰 파도가 밀려온 뒤 해변에 남은 나뭇가지들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많은 ‘형식화된 조직’들이 그 나뭇가지들이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이 가장 좋은 예라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80년 전에는 중요하고 대중적인 운동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쓰나미가 지나가고 난 후 떠밀려온 나뭇가지들과 같다. 마찬가지로 미래를 바라본다면 일상의 시기는 다음 쓰나미가 덮치기 전의 해변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생각들이 내가 로드맵, 그리고 상황에 맞게 조율해내는 능력을 말할 때 의미하는 것들이다. 최근 한국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황은 조용한 일상에서 갑자기 거대한 운동으로 변하기도 한다.
사노신 : 잘못된 로드맵을 갖고 있으면 다 헛탕이라는 건가.
골드너 : 일단은 그런 로드맵은 노동자계급과 실질적인 연관이 없는 투쟁에 자기 조직원들을 소모시킨다. 동시에 큰 투쟁이 있는 곳에 개입하는 것은 내가 봤을 때…그곳에서는 누구나 발언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잊어버리지 말아야할 것은 1918년 11월 독일 혁명이 일어났을 때 백만 명이 베를린 시내에 모였는데 광장의 한쪽 끝에서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독일 소비에트 연방을 만들자고 외치고 있었고 다른 쪽 끝에서 사회 민주주의자들이 독일 공화국의 설립을 주장하고 있었으며 광장 양쪽에서 모두에서 관중들은 열렬히 환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분위기는 너무 열광적이어서 일반 노동자들은 한쪽 끝에 있는 사회 민주주의자들과 다른 쪽 끝에 있는 공산주의자들 간의 차이를 구별하고 있지 않았다. CPE투쟁 당시 파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 집회에서 사람들이 ICC에게 갖는 관심은 다른 뜨로쯔끼주의 그룹에서 온 훌륭한 발언자에게 갖는 관심과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것이 나의 느낌이다.
LO같은 그룹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면 그들은 40여년이상이나 소식지를 발간하는 공장 위원회를 조직하에 두어왔으며 최근에는 지역 위원회를 시도하고 있고 여름에는 이동 버스를 타고 이지역 저지역들을 돌며 선전활동을 하는등 여러가지를 시도하고 있다. 동지들은 어떤 활동들인지 감을 잡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활동은 물론 유용하겠지만 항상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자본주의 하에서 일상이 주는 중압감 때문에 그런 활동의 중요성이 과대평가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사노신 : 동지의 의견 중에서 ‘당의 역할이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키는 것이다’ 라는 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좀 이해가 안되는 게 당이 그렇다면 혁명적인 시기에만 필요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일상적인 시기에도 당이 필요하다는 것인지. 만약 일상적인 시기에도 필요하다면 그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형식인건지. 얼핏 들으면 혁명적 시기에만 당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들리는 면이 있다.
골드너 : 어쩌면 조직이 형성되는 초기에 ‘당’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소규모 그룹들은 좋은 로드맵을 가지고 있으면서 리그룹먼트(regroupment)나 프리파티포메이션(pre-party formation), 혹은 그와 비슷한 것으로 스스로를 칭하고 있다. 그들은 최근 몇 십 년, 그리고 현 시기 자신들의 역할은 때로는 개인적차원에서, 때로는 작은 그룹차원에서 토론을 하고 글을 쓰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는 일, 말하자면 자기의 조직을 설립하는 것보다 토론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가능한 곳에는 투쟁에 개입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사노신 : 한국 사회주의 그룹들의 전형적인 활동중에는 공장에 직접적으로 사람을 투입해서 현장에서 투쟁을 하고 선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이 포함되어있다. 그런데 ICC는 이런 활동에 대해서 대리주의(substitutionism)라고 얘기하면서 이해하지못하는 것 같은데 동지는 어떻게 생각는가.
골드너 : ICC가 그렇게 말했다니 반갑다. 왜냐하면 실제로 많은 경우에 그러한 대리주의로 되기 때문이다. 내가 잘 알고 있는 미국과 유럽에서의 경험이나 미흡하게나마 조금 알고 있는1980년대 남한의 “학출” 활동가들의 운동을 살펴보면 중산층 사람들이 공장에 들어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무척 중요한 일이지만 노동계급의 발달에 정말 기여할 가능성은 제한적이고 종종 그 성과가 없다. 내 생각에 공장 노동자들을 포함한 노동계급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혁명적 조직은, 말했다시피 자신의 진정한 위치, 역할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고 본다 . 그리고 이 문제는 사람들을 공장으로 보내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사노신 : 또 다른 질문은 직업적 혁명가에 대한 것인데 예를 들어 ICC 동지들은 자신들 모두가 노동자이므로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지않는다고 한다. 동지는 직업적 혁명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하는가?
골드너 : 전반적으로 건강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레닌과 그가 쓴 <무엇을 할 것인가?> 의 잔재 중 하나가 직업적 혁명가를 혁명을 체화하고 있는 혁명적 의식의 담지자라고 보는 것이다. ICC가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들의 솔직한 관점인지 의문은 들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좋은 일이다.
사노신 : 그런데 직업적 혁명가라는 개념과 동지가 언급한 의식적 분자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골드너 : 의식적 분자란 우리 같은 사람들, 즉 혁명적인 진전을 위한 준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 가운데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적절한 로드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의식적 분자들은 개인으로든 소규모 그룹으로든 혁명적 상황에서 모아질 재편성(regroupment)의 과정에 관계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가장 잘 싸우는 전투적인 노동자들 역시 포함한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미국에 있는 헌신적인 투사들을 몇 명 아는데 그들은 볼쉐비끼-레닌주의의 성향의 아주 진지한 사람들이며, 언젠가 혁명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당과 계급의 관계에 대한 질문, 예를 들어 “레닌이 없었다면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까?”와 같은 질문을 그들에게 던지는 것은 흥미롭다. 왜냐하면 아까 말했다시피 그들의 글은 항상 상황이 나아지려면 혁명 정당이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당이 없는 것인지, 왜 역사는 당신들이 주장하는 식의 당이 필요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해왔는지 내가 질문을 하면 그들은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레닌이 없었다면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까?” 물어보면 그들은 “당연히 안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그건 좀 비참한 것 아닌가. 그 모든 게 한 사람에게 달려있다니 이 거대한 사회적 진보의 약점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라고 말한다.
사노신 : 동지의 소련에 관한 글에서 동지는 보르디가를 인용하여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농업혁명 혹은 농업의 자본주의화와 동일시하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이 견해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 남아 있는 비자본주의적 생산관계들 혹은 소부르주아 부문들을 없애는 것을 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자세히 설명은 하지 않았고 다만 러시아에서 스딸린이 농업집단화 정책을 의식적이고 유혈적으로 실시했다고만 언급하고 있다. 보다 자세한 설명을 부탁하며 아울러 농업의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지주와 농민의 계급투쟁으로 설명하는 브레너의 입장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얘기해 달라.
골드너 : 아시다시피 보르디가는 러시아 혁명이 이중혁명, 즉 노동계급과 농민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혁명이라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1917년에서 1921년까지 혁명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볼쉐비끼 정부는 무엇보다도 농민 대중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백군들은 자신들의 강령에 토지 개혁의 내용을 포함시킬 능력이 없었다. 그 결과 농민 대중은 비록 볼쉐비끼를 좋아하지 않았고 내전 중의 식량징발을 탐탁치않게 여겼지만 토지를 분배하는 볼쉐비끼의 강령에 호응했다. 볼쉐비끼나 대체로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쓰여진 러시아 혁명의 역사를 보면 대부분 당과, 산업 도시의 노동자계급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17년부터 20년대 말, 30년대 초의 집산화 시기까지 농촌에서의 일들에 주목해야 한다. 이전의 답변에서 얘기했다시피 내전 말기에 러시아 노동계급은 대부분 살아남기 위해 농촌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1921년 네프(NEP)는 농업의 부흥에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다. 1924년에서 1928년까지 좌파로는 뜨로쯔끼, 우파로는 부하린, 그리고 소위 중앙파로는 스탈린이 있었던 산업화 논쟁에서의 중대한 문제는 어떻게 농민들로부터 원시적축적을 하여 나라를 산업화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이 중앙파였다고 하는 것은 물론 당시의 논쟁 구도로 볼 때 얘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다시피 사실은 스탈린이 가장 위험하고 반혁명적이었기 때문이다. 부하린주의 우파는 농민들에게 부유해지라고 하면서 그러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장을 활용하라고 했다. 뜨로쯔끼주의 좌파는 프레오브라젠스키의 경제 이론에 영향을 받았는데 조직된 자발적인 집산화를 이루어야 하며 동시에 산업을 구축하기위해서 농민들로부터 잉여 농산물을 가져와야 한다고 했다. 스탈린의 중앙파라는 건 이름만일 뿐인데 그는 양 쪽을 서로 대립하도록 만들고는 궁극적으로 좌파들의 프로그램 대부분을 자신의 것으로 도용했기때문이다. 뜨로쯔끼주의가 갖는 심각한 개념상의 결점 중 하나는 그 시기의 스탈린을 중앙파라고 규정했던 데에 있다. 만약 부하린주의 우파가 당파 싸움에서 이겼다면, 스탈린이 그 뒤 30년 동안 국제적인 혁명 운동에 가했던 손해보다 더 많은 손해를 입혔을까? 하지만 뜨로쯔끼주의자들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부하린이 이겼다면 소련에서 자본주의가 복원됐을 것이고 볼쉐비끼 정당은 전복됐을 것이다.” 그게 사실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과연 20년대에서 50년대 사이의 스탈린주의 소비에트연방이 행했던 역할보다 더 무겁게 반혁명을 촉진시켰을까?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부하린은 반대 입장에 있던 좌파들의 정책 결함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1928년쯤에 그는 좌파들의 프로그램을 이행하려면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관료주의를 필요로 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이유들로부터 우리는 러시아 혁명의 패배의 중심에는 농민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르디가는 1917년 혁명이 이중 혁명이라고 했는데 이 혁명에서 노동자계급은 ‘농민에게 땅을’이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혁명의 목표를 실현하였다. 그리고 노동자계급 차원의 혁명이 파괴되고 난 후 남은 것은 이 부르주아 혁명이었으며 이것은 전혀 위협받지않고 살아남았다. 1919년에서 1921년까지 레닌과 서구 유럽의 좌익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토론에 대한 문제로 돌아가보면,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당신은 러시아에서 농민들과 연합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구 유럽에서 농민들과 연합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미 토지가 있고 부르주아 혁명은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제 질문의 두 번째 부분, 즉 브레너의 농업의 자본주의화에 있어서 지주와 농민의 계급투쟁으로 설명하는 입장에 대해서 답변해보겠다. 자본주의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놀라웠던 한 가지는 17세기 농업 혁명의 계획이 20세기 공산당의 계획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17세기 중반에 농업 문제가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해결이 된 나라들에서는 20세기에 대중적인 공산당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 영국, 스위스, 네덜란드 그리고 이후 미국이 이런 나라들에 속한다.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농업에서의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국가들에서는 17세기 중후반부터 중상주의를 실행했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프랑스와 영국이 주요 라이벌이었는데 영국에서는 1640년에서 1688년까지 부르주아 혁명이 있었다. 농업에 있어서 훨씬 뒤쳐진 프랑스는 영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콜베르의 중상주의를 발전시켰다. 프랑스에서 콜베르와 루이 14세 시대부터 프랑스 혁명 시기까지 중상주의가 의미하는 바는 농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고 이는 농촌에 상품 생산관계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농촌에서 상품생산 관계가 강화되었는데 어떤 면에서는 1650년대, 60년대 콜베르의 프로그램은 소비에트 경제가 1920년대에 농민들에게 실행했던 프로그램의 초기 형태라는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 자본주의 혁명은 이미 일어난 상태였기 때문에 17세기 중후반 영국 농업의 생산력은 프랑스의 농업 생산력보다 훨씬 높았다. 후진적인 농업의 문제를 안고 있던 모든 국가들에서 프랑스의 중상주의 정책을 따랐는데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군주 국가들, 프러시아 등의 독일 국가들, 스웨덴 그리고 마지막으로 러시아등이 이들 나라들에 포함된다. 그래서 17세기 중상주의 국가들의 지도에서 이들 해당 주요 국가들을 보면 20세기에 공산당이 대중 정당이 된 국가들과 겹친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20세기 초기까지도 아직 노동자로 전환되지 않은 농업 소생산자들이 아주 많았다는 것이다. 영국은 이미 17세기 중반에50%가 도시화되었다. 하지만 유럽 대륙에서는 농촌으로부터 노동력을 보충하는 똑같은 과정을 국가가 나서서 실행해야 했다. 공산당 이전에 19세기 말의 유럽 국가들에서는 똑같은 문제를 반영하는 대중적인 사회민주당이 존재했다. 그들은 “우리는 사회주의자이며 노동자계급의 당이다”라고 했지만 실상은 국가주의자들이었고 그들의 진짜 계획은 사회를, 그리고 무엇보다 농업을 근대화하는 것이었다. 당과 조직의 문제로 돌아가서 다시 말하자면, 사회 민주주의와 볼쉐비끼는 자국 자본주의와 그리고 무엇보다도 농업의 근대화를 강령에 포함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 이들의 실패를 이해할 수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탈린주의를 20세기형 콜베르티즘(중상주의)의 극단적인 형태였다고 함으로서 역사적인 맥락을 연결해볼 수 있다.
이제 브레너 얘기로 넘어가자. 내가 14세기~17세기 역사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브레너의 이론은 내게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그 기본 아이디어는 14세기 중반 대역병 (The Great Plague) 이후 영국 농촌에 노동력 부족이 나타나서 농업 노동자들, 그러니까 살아남은 농업 노동자들의 위치가 강화되었는다는 것이다. 14세기 후반 당시 영국뿐만 아니라 많은 서구 유럽의 국가들에는 대규모의 농민 봉기가 일어났는데 특히 영국에는 봉건제도를 철폐하고 농촌에 상품으로서의 임금노동 생산관계를 도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영국은 세계 어느 곳보다도 가장 먼저 농촌에 임노동하는 프롤레타리아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 농민들로 하여금 자본가로서 생산력을 혁신하게끔 하여 그 결과 그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농업 생산력을 갖게 되었다. 브레너의 이론은 역사가들의 뜨거운 논쟁거리이지만, 내가 그의 이론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회를 정복한 기계적인 힘(mechanistic force)으로 자본주의를 규정하기보다는 계급 간의 투쟁의 결과로 본다는 것이다.
사노신 : 그러면 유럽에서 농업 혁명이 그런 식으로 일어난 곳은 영국 밖에 없는데 영국에서 혁명 정당 자체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니까 이러한 농업 문제들 때문에 노동자당들이 하나의 국가주의적이고 농업 개혁적인, 그리고 민주적인 성격을 띠게 됐다는 건데 유일하게 인구 구성에 있어서 그렇게 된 나라는 영국 밖에 없고 엄밀히 얘기하면 원시적축적이라는 것도 영국과 몇몇 나라 정도에서만 일어난 것 같은데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가 다수가 된 영국에서 아예 혁명적 흐름 자체가 형성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골드너 : 내 이론은 그런 대중 정당은 농민 문제와 커다란 농업 인구가 아직 중요한 사회 문제였던 프랑스나 스페인, 독일등과 같은 나라들에서 성공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영국은 높은 수준의 도시화를 이뤘고 이미 오래 전에 농업을 완전히 자본주의적으로 변형했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국의 노동자계급은 1차 세계대전 전후에 일련의 폭발적인 진보를 겪기는 했다. 1908년부터 1914년까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생디칼리스트 파업이 연달아 일어났고 많은 영국 자본가들은 이미 승부가 났다고, 혁명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1, 2년 전부터 1919년까지 더 큰 대중 파업의 파도가 영국 전역을 휩쓸었다. 1919년 당시에 총리였던 로이드 조지가 노조 평의회 위원장을 만나서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권력라면 가져가라. 권력은 이제 당신들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들은 권력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에는 부르주아지가 노동자계급자신들보다 그들의 힘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19년에서 1920년 사이에 영국에 형성된 공산당은 20년대 초기에 레닌과 코민테른으로부터 영국노동당에 들어가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던, 상대적으로 작은 분파에 불과했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공산당은 대중 정당이 되는 데에 실패했는데 왜 노동당은 대중 정당이 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답은 영국의 정치경제 발전의 긴 역사에 있으며 그것이 이미 1차 세계 대전 훨씬 전부터 폭넓은 의회 활동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영국노동당은 1906년에야 형성이 되었는데 그것은 노동자들이 투표를 통해 내내 지지해왔던 대중적인 자유당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독일 사회 민주주의자들과 달리 영국 노동당은 어떤 식으로도 혁명적인 정당임을 주장한 적이 없다. 그래서 볼쉐비끼-레닌주의적 신념을 갖는 사람들이 “이 소수의 혁명가들이 왜 혁명 정당을 조직하지 않았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역사적 사실에 어긋난 질문이다.
미국에서는 그런 일이 더 극적으로 일어났다. 1870년대에서 1차 세계대전 말까지 미국은 어느 선진 자본주의 국가보다도 더 유혈적인 노동운동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1870년대에서 1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미국 노동자계급의 역사는 자본가들이 공권력 뿐 아니라 사병(私兵)을 동원하여 파업을 파괴하는 피로 얼룩진 전투를 펼친 얘기들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선진 자본주의적 경제의 성격과 정치의 근대화로 인해 공화당과 민주당은 이 시기에 걸쳐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그들이 대중 정당이 된 국가들의 상대적인 후진성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 발달한 선진 국가들에서는 그런 정당들이 발전하지 않았다.
사노신 : 남한의 사회주의자들대부분은 우리그룹을 포함해서 스스로를 레닌주의자로 생각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뜨로쯔끼주의를 받아들이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레닌주의나 뜨로쯔끼주의에 대해 전반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골드너 : 내가 앞서 CLR 제임스의 책을 읽어보라고 권했는데 그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할 만한 기사들이 내 웹싸이트에도 있다. CLR 제임스는 레닌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관점을 갖고 있다. 그는 레닌이 1917년 이전 시기의 혁명에 있어선 아주 올바른 이론가였지만 1917년 이후에는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었고, 그 이후 레닌주의 모델은 불필요해졌을 뿐만 아니라 틀렸고 반동적이었다고 말한다. 내 생각엔 제임스가 1917년 이전의 레닌에 대해 상당히 이상화된 관점을 갖고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은 뜨로쯔끼주의자들이 아직도 레닌주의 모델을 혁명적인 모델로 생각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제임스의 말에 따르면, 그리고 나도 여기에 완벽하게 동의하는데, 뜨로쯔끼주의자들은 낡은 레닌주의 모델 중 가장 좋은 부분을 그것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임스의 개념 중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이 과거에 사회 민주주의자들이나 특히 볼쉐비끼들에게 배웠던 것들을 오늘날에는 사회 전반에 걸친 조직화에서 배운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임스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러시아 혁명의 패배가, 1917년 이후 그가 생각하기에 세계적인 경향으로 된 국가자본주의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는 1차 세계 대전 전과는 대조적인 것인데 그 때는 민주주의적 자유주의가 몇몇 국가들에서만 이뤄졌고 나머지 국가들에서는 그것을 향해 발전해 가고 있었다. 사회 조직에 대한 스탈린식 모델은 1900년에는 누구도 상상할수도, 생각해 본적도 없는것이었다. 그래서 제임스가 생각하기에 스탈린주의는 국가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형태로서 이는 나치 독일이나 루즈벨트 당시의 미국에도 존재했는데 그들은 사회를 실제로는 전체주의적인 방식으로 조직하고 있으며 노동자 계급이 기존에는 사회 민주주의자들과 볼쉐비끼 당에게서 배운 것들을 이제는 사회에 대한 국가의 통제적 편성으로부터 배운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당들은 사회를 국가차원에서 조직한다는 교의를 유포했었는데 그시기는 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 이전의 형태들이 모든 곳에서 지배적이었던 시기로 이러한 생각은 소수파의 관점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에 국가 자본주의가 모든 사회생활을 조직하게 되자 사회생활전체에 즉각적이고 전반적인 정치화가 이루어졌다. 제임스는 헝가리 혁명을 예로 드는데, 거기서는 스탈린주의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사회에 대한 지식이 노동자 평의회를 어떠한 정치적 정당 없이 즉각 건설해 내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누가 뭐라 말하든 헝가리 혁명은 노동자계급이 전위 정당 없이 권력을 잡은 혁명이었다. 물론 그들은 소비에트 침공으로 진압될 때까지 겨우12일 동안 권력을 잡았지만 제임스는 그럼에도 그것이야말로 노동자계급에게 더 이상 레닌주의적인 전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그의 이론을 뒷받침할 아주 근본적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1958년, 헝가리 혁명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현실를 직시하며(Facing Reality) > 라는 뛰어난 책을 썼다. 그 책에서 그는 “언젠가는 프랑스 노동자계급이 움직일 것이고, 그것은 공산당을 공중에 붕 뜨게 만들어 버릴 것”이라고 말했는데, 10년 뒤인 1968년 5월에 정말 그가 얘기한대로 되었다. 내가 봤을 때 제임스는 혁명 조직의 필요성을 반대하면서 너무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의 분석은 내 관점, 즉 혁명 조직의 적정하고 겸허한 역할과 계급의 활동을 전위의 가장 중요한 일부로 보는 관점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다.
전에 했던 얘기지만 반복하자면 1906년에서 1911년까지 러시아의 볼쉐비끼 조직은 거의 무의 상태로 전락했다. 그후 레닌이 러시아로 돌아왔던 1917년 당의 세력은 복구되어있긴 했지만 그가 발견한 사실은 당의 지도부 전체는 카렌스키를 지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레닌이 4월 테제를 발표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준비할 것을 당에 요구했을 때 대부분의 볼쉐비끼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레닌은 이들에게 “노동자계급을 봐라. 그들이 어떻게 당보다 백배는 더 급진적인지, 부르주아 정부와 혁명적으로 대면하기 위해 길을 나서고 있느지를”하고 답했다.
제임스는 그 경험을 들어 혁명당의 과제는 노동자계급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며 그것이 혁명당의 진정한 역할이라고 주장했다. 혁명당 그자체가 독자적으로 노동자 계급에게 가져다 줄 것은 없다는 것이다.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혁명적 상황이 아닌 시기에, 의식이 있는 혁명가들은 전체적인 노동자계급이 모르고 있는 것을 분명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활발하게 제기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제임스의 분석이 갖는 가치는 볼쉐비끼 모델이 오늘날의 선진 자본주의 세계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것들과는 아주 다른 사회의 상황에서 어떻게 발전했는가를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뜨로쯔끼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전혀 파악을 못하고 있는데 그들은 아직도 카렌스키 정부에 맞서기 위해 준비하는 1917년도에 살고 있다.
사노신 : 한 가지 더 물어보겠다. 벌써 이전에 물어봤어야 했는데 ICC나 IP외에 좌익 공산주의 조직이라고 얘기할만한 데가 있는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골드너 : 자신을 맑스주의자로서 정의하며 뜨로쯔끼주의자들의 좌측에 자신들을 위치시키는 것으로 좌익공산주의를 정의한다면 전 세계에, 특히 유럽에 좌익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소규모 그룹이나 개인들이 폭넓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를 예로 들면, 지금 그곳에는 각각 20명 정도의 회원을 가진 6개의 보르디가주의 조직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다른 여러나들에서 뜨로쯔끼주의자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데 통합 회의를 위해 모일때마다 다시 갈라져 나온다. 보르디가의 영향력은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프랑스에서도, 모든 조직 너머에까지 뻗어있다. 그의 저작들은 널리 분포되어 읽히고 있고 보르디가의 사상은 어디에나 있다.
전위주위, 볼쉐비즘, 뜨로쯔끼주의에 대한 전반적인 반대의 분위기속에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에는 무정부주의자, 자유주의 공산주의자, 무정부 공산주의자, 그리고 여러 다른 조합으로 스스로를 일컫는 사람들이 비교적 많이 있는데 이들도 넓은 의미에서 좌익 공산주의 경향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범위를 너무 넓히고 싶지는 않지만 미국에서는 60년대 초반에 뉴레프트 운동이 시작되면서 맑스주의에 대한 거부가 널리 퍼졌다. 그러나 6~8년정도 지나면서 맑스주의에 대한 이런 자유주의적 거부는 쇠퇴하고 사람들은 점점 다양한 종류의 맑스주의에 끌리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구 유럽과 미국에는 맑스주의의 르네상스가 일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무정부주의자나 상황주의자(situationist)로 출발했지만 상대적으로 빠른시간안에 <자본론>를 공부하게 되고 과거의 혁명적 운동의 실패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하면서 좌익 공산주의나 거기에 가까운 생각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무정부주의는 현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이론으로 별로 흥미롭지 못하다. 아나키즘이 소비에트식 맑스주의나 마오주의 모델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그에 끌렸던 사람들은 곧 흥미가 시들해지는데 그때가 바로 더 풍부한 다른 맑스주의적 대안을 발견하기 시작하는 때이다.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libcom.org(Libertarian Communist싸이트)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추천한다.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기사들을 담고 있는데 이 한 곳에서 그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리브콤은 심지어 ICC조차 논쟁에의 참여를 허용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그저 조롱하며 웃어넘긴다.
사노신 : 스탈린주의가 아니면서도 스스로를 볼쉐비즘이라고 얘기하는 조류가 해외에 있는가.
골드너 : 물론 있다.
사노신 : 뜨로쯔끼주의 말고.
골드너 : 뜨로쯔끼주의자도 아니고, 스탈린주의자도 아니지만 레닌주의자? (한참 생각) 레닌과 스탈린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뜨로쯔끼주의자가 되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 아, 그러고 보니 CLR 제임스와 그의 사람들, 제임스는 15년 전에 사망했고 제임스의 조직은 없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레닌주의자라고 부르는데 뜨로쯔끼주의자는 아니고 스탈린주의자도 아니다. 그리고 라야 두나예프스카야(Raya Dunayevskaya)를 아시는가.
사노신 : 이름은 들어봤다.
골드너 : 그녀가 만든 <뉴스 앤 레터>(News and Letters)라는 그룹도 스스로를 레닌주의자라고 하는데 스탈린주의자도 아니고 비록 뜨로쯔끼주의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뜨로쯔끼주의자들도 아니다. 사실 20세기 후반에 나온 가장 흥미로운 혁명 이론들은 다 기존에 뜨로쯔끼주의자들이었던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제임스도 그렇고 60년대에 훌륭한 책들을 썼던 상황주의자 이론가인 기 드보르(Guy Debord), 그리고1947년에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라는 그룹을 만들었던 카스토리아디스(Castoriadis)도 뜨로쯔끼주의자 였으며, 미국에는 맥스 샤흐트만과 샤흐트만주의자들이 소비에트 연합의 성격에 대한 의견 차이로 뜨로쯔끼주의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이들 역시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에는 혁명가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뜨로쯔끼주의는 많은 경우에 혁명적인 이론의 발전을 위한 학교였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