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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사회과학연구소의 기관지 '정세와 노동' 3월호에 실린 부산지회 연구팀이 번역한 글입니다.
12회 연재 1년 예정으로 번역을 할 것입니다. 그로버 퍼 교수의 책으로
그로버 퍼 교수는 미국 싱클레어 대학의 역사학 교수로서
진실에 대한 접근을 하려고 노력하는 진보적 학자입니다.
20세기 후반 사상의 혼돈이 어디에서 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밝혀주는 정말 좋은 책입니다.
물론 앞서 버만 아자드의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와 마리오 소사의 '진실이 밝혀지다'를
읽고난 후 읽으면 정말 좋을 듯 합니다.
이 책 다음으로 끼란 교수의 '배반당한 사회주의'를 번역할까 합니다.
동시에 번역을 하면 인문학 교수와 사회과학 교수의 글을 비교하며 읽는 재미와 함께
20세기 소련의 몰락 아니 사회주의의 몰락 에 대한 온갖 거짓이 한 눈에 보일 수 있지만
역량의 부재로 시에 번역이 어려울 듯 하여
끼란 교수의 책은 내년 퍼 교수의 책 번역이 끝나면 시작할까 합니다.
흐루쇼프가 거짓말했다(1)
1956년 2월 25일의 소련공산당(CPSU) 20차 전당대회에서 행한 니키타 흐루시초프(Nikita Khrushchev)의 악명 높은 “비밀연설”에서 스탈린(그리고 베리아(Beria))의 범죄에 대한 모든 “폭로”는 확실히 거짓이다.
(나는 한 가지를 제외한 모두를 진실이 아니거나 거짓이라고 증명할 수 있다)
그로버 퍼(Grover Furr)
Erythros Press and Media, LLC
Corrected Edition, July 2011
감사의 말과 헌정사
나는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편집자, 번역가이자 나의 친구인 블라디미르 L. 보브르프(Bladimir L. Bobrob)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의 격려와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 책은 결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구하기 어려운 소련에 관한 자료들, 다른 책들과 작품들을 구하는데 꾸준히 도움을 베풀어 주신 몽클레어 대학(Montclare StateUniversity), Harry. S. Sprague 도서관의 국제관계 도서대출 사서인-케빈 프렌데개스트(Kevin Prendergast), 아서 허드슨(Arthur Hudson)과 세르지오 페레이라(Sergio Ferreira)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 * *
나는 이 책을 나의 아들 조셉 퍼(Joseph Furr)의 기억에 바친다: 그는 나의 아들이자 친구이고 숙련된 디젤 트럭 수리공이자 “세상에서 소중한” 사람들 중의 한 명이다.
서론
거짓의 흐루시초프 학파;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연설”
1956년 2월 25일 행해진 니키타 흐루시초프(Nikita Khrushchev)의 “비밀연설” 50주년 기념행사에서는 예측 가능한 논평들이 쏟아졌다. London(UK) Telegraph는 사설에서 그 연설을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연설”이라고 불렀다. 같은 날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의 사설에서 흐루시초프의 전기를 쓰서 2004년 전기문학 분야에서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윌리암 타우브만(William Taubman)은 기념행사에서 그 연설을 “축하를 받을만한” “위대한 행동”이라고 불렀다.
얼마 전 나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을 다시 읽었다. 1962년 뉴 리더(The New Leader)의 특별판으로 출판된 비밀연설 편집판의 HTML 번역판이었다. 그 연설을 읽는 동안, 나는 흐루시초프의 연설에 주석을 달았던 저명한 멘세비키 학자인 보리스 니콜라예프스키(Boris Nikolaevsky)가 흐루시초프의 연설 중에서 몇 가지는 거짓말이라는 자기의견을 표시했다고 언급하였다. 예를 들어 일찍이 그의 연설에서 흐루시초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근에 특히 중앙위원회는 베리아(Beria) 무리의 가면을 벗기고 난 후에 이 무리들에 의해 날조된 연속적인 사건들을 조사하였다. 이 조사는 스탈린의 타당하지 않은 행위와 관계가 있는 야만적인 제멋대로의 행위에 대한 아주 흉한 그림을 폭로하였다.
이 단락에 대한 보리스 니콜라예프스키의 note8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흐루시초프의 이 말은 완전히 사실이 아니다:
스탈린의 삶에서 마지막 기간 동안에 있은 그의 폭력적인 행위들에 대한 조사는 베리아 에 의해 시작되었다... 스탈린의 고문집행실에 대한 조사를 거의 시작한 인물로 그 자 신을 서술하고 있는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이 죽고 난 후에, 실제로는 몇 달 동안 그 방 을 차단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이제 아치 게티(Arch Getty)가 그의 권위 있는 저작인 ‘대규모 숙청의 기원’에서 아주 유사한 내용을 썼다는 것을 기억해내었다.
흐루시초프의 연설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모순은 베리아와 에조프(Ezhov)에 대한 분명 한 혼란을 포함하고 있다. 에조프의 이름이 때때로 언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범죄자들의 숙청에 대한 책임은 베리아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리아는 1938년까 지 단지 지역공산당의 비서였다. 게다가 많은 보고서들은 베리아가 1938년 에조프의 자리를 물려받았을 때 경찰의 폭력은 진정되기 시작했다고 쓰고 있다. 흐루시초프는 그 의 연설에서 편안하게 에조프를 베리아로 대체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그로 하여금 남의 이름을 함부로 더럽히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쨌든 흐루시초프와 당의 지도자들이 최근에 베리아를 처형한 것은 베리아를 편리한 희생양이 되도록 만든 것이었다. 흐루시초프가 베리아를 기회주의적으로 이용한 것은 그의 다른 단언들에 대 해서도 확실히 의심이 들게 하는 것이다. (p268 n28: 강조의 말이 첨가되었다)
그래서 이전 소련의 비밀문헌자료에서 나온 많은 서류들이 빛을 본 지금, 그 서류들을 이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조사가 스탈린에 관한 흐루시초프의 “폭로”의 많은 것들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에 대해 나는 의심을 하였다.
사실 나는 아주 다른 것을 발견했다. 흐루시초프가 스탈린과 베리아에 대해 “폭로”한 특별한 진술이 진실로 판명이 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입증을 하기 위해 조사할 수 있었던 것들 중 모든 것이 거짓으로 판명이 났다. 흐루시초프는 오로지 스탈린과 베리아의 존재에 관해서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비밀연설” 전체가 날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타우브만이 흐루시초프를 향해 칭찬했던 “위대한 행동”이다. (더 짧은 것일지 몰라도 분리된 기사가 흐루시초프의 저속한 연설을 축하하기 위해 쓴 타우브만의 뉴욕 타임즈 OP-ED 기사에서 거짓말을 폭로하도록 쓰여졌을는지도 모른다.
학자인 나에게는 이 사실이 혼란스러운 일이었으며 심지어 달갑지 않은 발견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대로 흐루시초프의 “폭로” 중에서 25% 내외가 위조라는 것을 발견했다면, 나의 연구는 확실히 놀라움뿐만 아니라 약간의 회의감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개의 내용을 독자들이 수용하고 칭찬해줄 것을 기대한다: “ 퍼의 훌륭한 연구 작업”, 기타 등등이라고. 그러나 나는 내가 흐루시초프가 폭로한 모든 내용이 거짓이라고 주장한다면 아무도 나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 그리고 나의 두려움은 2007년 12월에 출판된 이 책의 러시아어본에서의 경험으로부터 나왔던 것이다. -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철저히, 조심스럽게 증거를 인용하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동시에 흐루시초프 연설의 전체를 반증하는 것은 스탈린 시대의 소련에 대한 전 역사 범주, 이 연설의 근본이 되는 범주에 도전하는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연설 - 항상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 은 완전한 사기였다. 그 의견은 너무 소름끼쳤다. 누가 그러한 결론의 논리가 요구했었던 소련, 코민테른, 심지어 세계역사에 대한 수정주의에 사로잡히기를 원했던가? 모든 사람들이 내가 “책들을 각색했다”했고, 진실을 덮었다 - 내가 흐루시초프를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고발했듯이, 나도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 라고 믿는 것은 대단히 쉬울 것이다. 그러고 나서 특히 내가 스탈린을 인정받는 지도자였다고 생각하는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대해 공감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나의 작업은 대수롭지 않게 무시될 수 있을 것이고, 문제는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연구자가 그의 예견된 사상을 미심쩍어하며 지지하는 것 같은 결론에 이르렀을 때. 비록 나쁜 것은 아닐지라도 그에게서 목적성의 부족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신중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연구가 스탈린과 베리아에 관한 흐루시초프의 폭로 중에서 25%가 거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면, 나는 훨씬 더 마음이 편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조사를 할 수 있었던 모든 “폭로”는 거짓이었기 때문에 증거에 대한 부담은 학자인 나에게는 보통의 수준보다는 훨씬 더 무거운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번 연구에서 다소 특이한 방법으로 책을 구성했다.
전체 책은 두 분야로 나누어져 있지만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된 분야이다. 1장에서 9장까지로 구성된 첫 번째 분야에서, 나는 흐루시초프가 그의 보고서에서 작성하고, 소위 “폭로”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는 진술이나 단언들 각각을 연구하였다.(약간은 앞서 나가기 위하여 나는 내가 61가지의 단언을 확인했다고 기록했다)
이 “폭로”의 각각은 서류자료가 공개된 상황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던 “비밀연설”에서의 인용문을 뒤따랐다. 이 증거의 대부분은 주요자료에서의 인용문들로 제공되어졌다. 단 몇 가지 경우에는 부차적인 자료를 인용하였다. 제20차 전당대회에서의 흐루시초프의 연설이 가지고 있는 허구적인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이전 소련의 문헌에서 주로 발견할 수 있고, 끌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증거를 제공하는 과업에 착수했다. 그러므로 책에 배치된 긴 자료의 인용문들이 읽기에 어려울지 몰라서 책에 간단하게 증거를 언급해야만 했고, 부록의 각 장에 분야 별 주요자료(때때로 부차적인 자료)에서의 완전한 인용문을 따로 두었다.
10장에서 12장까지의 두 번째 분야는 이 연구로부터 도출 될 수 있는 몇 가지 결론에 대한 논쟁과 방법론적인 성격의 문제에 전념하였다. 흐루시초프가 차용한 속임수 방법이나 거짓의 표상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연설 속에서 언급된 몇 몇 당지도자들의 “복권”자료에 대한 자료를 여기에 포함시켰다. 나는 두 가지 방법으로 주요자료들과 참고문헌들을 다루었다. 전통적이고 학문적인 문헌뿐만 아니라 전기나 대화의 보충을 통해서, 독자들이 주요자료들을 인터넷상으로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이용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모든 URL 참고문헌들은 이 책의 영어본이 완성되어졌을 때 유효하게 되었다.
몇 가지 경우에, 주요자료들은 인터넷에 Adobe Acrobat(PDF) 포맷형식으로 올려놓았다. 어떤 경우에는, hypertext markup language(HTML)를 이용하면 페이지 숫자(서툴거나 불가능한 것)를 알려주는 것도 가능하도록 했다.
결론적으로 미국과 러시아에서 초안상태의 이 글을 읽어주었고 나에게 비판의 은전을 베풀어주었던 나의 동료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 당연히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책 속에 남아있는 실수와 단점들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는 없다.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나의 훌륭한 동료이자, 학자, 연구가, 편집자, 러시아어와 영어 모두에 능통한 번역자인 브라디미르 엘보비치 보블로프(Vladimir L'vovich Bobrov)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그의 영감, 지도, 모든 방면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이 책을 떠 맡았을 수도, 거의 완성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서평과 비판을 해주신다면 감사를 드리겠다.
제 1 장. 개인숭배와 레닌의 유언장
1. 개인숭배
흐루시초프:
동지들! 제20차 전당대회 중앙위원회 보고서에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CC/CPSU) 본회의 이전의 전당대회에 참석한 대의원들의 많은 연설에서 개인숭배와 그것의 해로운 결과들에 관한 많은 말들이 나왔다.
스탈린이 죽고 난 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한 사람을 고상하게 만들기 위해 그 사 람을 신의 능력과 동등한 초인적인 특징을 소유한 초인으로 바꾸는 것은 맑스-레닌주 의의 정신에 허용할 수 없고 이질적인 것이라고 간결하게 지속적으로 설명하는 정책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그런 초인은 아마도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모든 사람을 위해 생각하고, 어떠한 일도 할 수 있다. 그의 행위는 절대 틀림없다. 한 사람에 대한 그런 믿음, 특히 스탈린에 대한 그런 믿음은 오랜 세월동안 우리들 사 이에서 장려되어져왔다.
이 보고서의 목적은 스탈린의 삶과 행동에 대한 완전한 평가가 아니다. 스탈린의 장점 에 대한 책, 소책자, 연구서들이 그가 생존해 있을 때 이미 충분할 정도로 많이 쓰여졌 다. 사회주의 혁명과 반혁명의 내전을 준비하고 수행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건 설을 위해 투쟁하는데, 스탈린의 역할은 국제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모든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현재 우리는 현재와 미래의 당을 위해 커다란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문제와 엮이어 있 다. -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가 어떻게 점진적으로 성장해왔는지, 어떤 특정한 단계에 서 당의 원칙, 당내 민주주의, 혁명적인 법률의 엄수에 대해 대단히 심각하고 위험한 타락의 전 과정으로 빠져들게 한 원천이 되어버렸던 개인숭배가 어떻게 점진적으로 성 장해왔는지.
이 연설은 스탈린이 저질렀던 범죄와 비행에 대해 흐루시초프가 했던 “폭로”중의 하나로서 종종 언급되어진다. 스탈린의 모습을 둘러싼 “특정인물에 대한 숭배”나 “개인숭배”의 부각이 이 연설의 주제였다. 흐루시초프는 “특정인물에 대한 숭배” 자체의 존재를 “폭로”하지는 않았다. 물론 “특정인물에 대한 숭배”의 존재는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스탈린이 죽고 난 후 그 이래로 최고회의에서 계속 토론해왔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연설의 시작에서 스탈린이 개인숭배를 장려했다고 특별히 진술하지는 않았다. 이 부분은 흐루시초프의 연설에서 분명히 신중했었다. 이 연설을 통해 흐루시초프는 -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 그가 증명해야 했던 것을 증명할 수 없었다는 것을 넌지시 전하고 있다: 사실은 연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자신이 독재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개인숭배를 장려했다는 것과 스탈린이 개인숭배를 어떻게 장려했는지에 대한 단 하나의 신뢰할 수 있는 증거도 인용할 수가 없었다. - 추측컨대 그가 심지어 단 하나의 그런 예도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흐루시초프의 전체연설은 바로 이러한 거짓 위에서 작성되었다. 그가 했던 “폭로”의 나머지들도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이 그의 주위에 창조하고 장려했던 “개인숭배”에 대한 설명의 범주 안에서 짜 맞추어져 있었다. 이 연구는 스탈린과 연관된 흐루시초프의 모든 폭로가 실제적으로 거짓이었다는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시작부터 흐루시초프의 설명의 틀 그 자체 - 스탈린에 의해 개인숭배가 만들어졌고, 그 결과 소위 “범죄”의 나머지 부분들이 처벌을 받지 않고 저질러졌을 수 있다는 생각 - 는 그 자체가 거짓이다. 스탈린은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탓으로 돌린 범죄와 비행을 저지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스탈린은 그의 주위에 개인숭배를 만들지도 않았다. 사실 증거는 그 반대의 내용을 증명해주고 있다: 오히려 스탈린은 그의 주위에 구역질나는 개인숭배가 만들어지는 것을 반대했다는 것. 어떤 사람들은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개인숭배를 스탈린이 반대한 것은 위선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은 무엇보다도 스탈린은 그의 권력이 너무나 강력해서 그가 진정으로 개인숭배가 멈추어지기를 바랐다면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이 주장이 증명해야하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강력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스탈린은 “개인숭배”가 불합리하게 그를 두드러지게 만든 사실 속에 있었다는 것을 역시 가정한다: 소련의 모든 인민들과 모든 것들 위에 군림하는 최고 권력을 가진 독재자라는 것.
1. 개인숭배에 대한 스탈린의 반대
스탈린은 수년 동안 계속해서 자신을 향한 칭찬과 아첨에 대해 반대했다. 그는 “개인숭배”에 대한 레닌의 평가에 동의했고 레닌이 했던 것과 똑 같이 개인숭배에 대한 내용을 기본적으로 말했다. 흐루시초프는 레닌을 인용했지만 스탈린이 똑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스탈린이 했던 말의 긴 인용문 목록은 그를 둘러싼 개인숭배에 대해 스탈린이 반대했다는 증거를 여기에서 보여준다. 스탈린과 개인적인 접촉을 했던 사람들의 거의 모든 회고록은 스탈린은 자신에 대한 지나친 찬사를 반대했고 심지어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더 많은 일화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스탈린이 개인숭배를 반대한 것에 대한 더 많은 내용이 덧붙여질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조지아 공산당의 전(前)서기장이었고 나중에 흐루시초프에 의해 처형을 받고 강등되었던 아카키 므겔라제(Akakii Mgeladze)의 최근 사후에 출판된 회고록 Stalin, Kak Ia Ego Znal(“내가 알고 있는 스탈린”, 2003년)에서, 작가는 스탈린이 그를 둘러싼 개인숭배를 혐오했다고 자주 언급한다. 1980년대 사망한 므겔라제는 스탈린이 1949년 70회 생일을 특별잔치로 열지 않기를 얼마나 바랐는가와 스탈린의 생일잔치가 전 세계 공산당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공산주의운동을 통일하는데 봉사할 수 있다는 당의 다른 지도자들의 주장 때문에 마지못해 그것에 동의했다고 자세히 상술한다.
스탈린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다른 지도자들이 1937년 모스크바를 “Stalinodor"("스탈린의 선물”)이라고 다시 이름 짓는 것을 못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소련의 영웅이라는 상을 거절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는 좌절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그가 결코 받지 않았던 그 상이 그가 죽었을 때 그의 관에 놓인 베개에 고정되어 박혀버렸기 때문이다
2. 1953년 4월, “개인숭배”와 관련해서 소련공산당총회를 소집하려고 했던 말렌코프(Malenkov)의 시도
스탈린이 죽고 난 후, 말렌코프(Malenkov)는 개인숭배의 해로운 효과들을 다루기 위하여 소련공산당총회를 소집할 것을 제안했다. 말렌코프는 너무나 정직해서 자기 자신과 그의 동지들을 비판했고, 그들 모두에게 스탈린이 “개인숭배”의 무용성에 대하여 그들에게 자주 경고했던 것을 상기시켰다. 이 시도는 최고회의에서 부결되었다: 특별총회는 결코 소집되지 않았다. 특별총회가 소집되었다면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흐루시초프가 말렌코프의 제안을 지지하였든지 지지하지 않았든지 간에 -이점에 있어서 증거는 불충분하다, - 흐루시초프는 논쟁에 연루되어 있었다. 흐루시초프는 “개인숭배”를 공개적으로 일찍이 다루고자 했던 말렌코프의 시도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말렌코프의 시도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함으로서 말렌코프의 시도가 있었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부인하였다.
3. 1953년 7월 총회 - 주장에 의하면 “개인숭배”를 반대했다는 것 때문에 공격을 받은 베리아(Beria)
1953년 7월 부재중인(아마도 그는 이미 사망했을 것이다) 베리아(Beria)를 공격하기 위해 소집된 총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개인숭배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베리아를 비난했다. 이 총회와 베리아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의 파벌 속에서 흐루시초프의 주도적인 역할은 그가 베리아를 공격하는 것과 베리아를 공격함으로서 베리아를 불신하기 위한 무기로서 “개인숭배”를 지지하는 것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4. 누가 “개인숭배”를 장려했는가?
“개인숭배”의 근원에 대한 연구는 이 저작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파들이 스탈린을 둘러싼 “개인숭배”를 제기하기 시작했거나, 그들의 적대활동에 대한 변명으로서 열정적으로 참여했다는 좋은 증거가 있다. 무방비 상태에서 그의 Ochnye Stavki(고발인과의 얼굴을 마주한 대면) 동안 부하린은 이즈베스티아(Izvestiia)가 스탈린을 과도하게 칭찬하도록 하는 작업을 이전의 반대자들에게 재촉했고, 부하린 자신이 “개인숭배”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또 다른 반대파인 칼 라덱(Karl Radek)은 1934년 1월 1일 이즈베스티아 발행에서 나중에 분리되어 소책자로 출판된 이상한 미래의 Zodchii Sotcialisticheskogo Obshchestva(“사회주의의 건설자”)라는 “개인숭배”의 완전히 부풀려진 예를 처음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흐루시초프와 미코이안(Mikoian)
“스탈린 격하”운동을 선동하고 열심히 장려했던 스탈린 시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출신의 주요인물들인 흐루시초프와 미코이안(Mikoian)은 1930년대에 가장 열심히 “개인숭배”를 장려했던 사람들 중 한명들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흐루시초프와 미코이안이 스탈린을 경외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심으로 스탈린을 존경했다고 가정적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이것은 확실히 많은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므겔라제의 회고록은 개인숭배를 폐기하는 것이 유행이 된 후에도 오랫동안 스탈린에 대한 그의 칭찬을 계속 유지했던 당 지도자의 한 예를 보여준다.
그러나 흐루시초프와 미코이안은 “개인숭배”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을 소집하려했던 말렌코프의 시도가 좌절되었던 그 시기 동안인 1953년 3월 최고회의 간부회의 토론에 참여했다. 베리아가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심하게 비판받고 있는 동안인 1953년 6월에 그들은 당의 지도자들이었다.
흐루시초프의 “폭로”가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이 사실들은 실제로 그 시기 동안의 모임에서 작업 중이었던 것, 즉 위조가 있었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레닌의 “유언”
흐루시초프:
소련과 당의 미래를 걱정하며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스탈린에 대한 정확한 성격묘 사를 하였고, 그가 극도로 무례하여 동지들에게 참된 태도로 대하지 않고, 변덕스럽고, 권력을 남용하는 사실로 인해, 스탈린을 서기장 직위에서 해제하는 문제를 고려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1922년 겨울, 레닌은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서기장이 된 후에, 스탈린 동지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권력을 축적했고, 나는 그가 이러한 권력을 항상 세심하게 사용할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가 없다.’
중요한 사실을 언급하기 위해 잠시 인용을 중단하겠다. 흐루시초프는 여기서 스탈린이 “그의 권력을 남용한다.”는 비난을 레닌이 제기했다고 말한다. 사실은, 레닌은 단지 “스탈린이 항상 세심하게 그의 권력을 사용할 수 있을지 어떨지를 확신할 수 없다”고 썼을 뿐이다. 편지에는 스탈린의 “권력남용”을 비난하는 어떠한 단어도 없다.
흐루시초프는 계속한다:
이 편지-당의 역사에서 레닌의 “유언”으로 알려져 있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문서-는 20차 당대회에서 대의원들에게 배포되었다. 여러분은 그것을 읽었을 것이고 몇 번이고 확실하게 재차 읽을 것이다. 여러분은 레닌이 당과, 인민과, 국가와 당의 미래 정책 방향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분명한 표현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말했다:
스탈린은 지나치게 무례하다. 우리 공산주의자들 사이에는 기꺼이 용인할 수 있는 이 러한 결점이 서기장직을 유지하기에는 용인될 수 없는 결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 는 동지들에게 스탈린을 서기장 직위에서 해제하고 다른 사람을 뽑을 것을 제안한다. 무엇보다도 단 한 가지 성격에서 스탈린과 다른, 즉 매우 관용적이고, 충실하고, 친절 하고, 동지들에게 더 사려 깊은 태도를 가지고, 보다 덜 변덕스러운 성격 등을 지닌 사람으로.
레닌의 이 기록은 13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을 서기장 직위에서 보직 이동하는 문제를 논의했던 대의원들에게 알려졌다. 대의원들은 스탈린이 레닌의 비판적 평가에 주의를 기울이고, 레닌이 심각하게 걱정했던 그러한 결점들을 극복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그의 직위를 유지하는 것에 찬성을 표명했다.
동지들! 당대회에서는 새로운 두 가지 기록을 접하게 되었다. 이 기록들은 레닌의 “유언”에서 이미 윤곽이 그려진 스탈린의 성격을 입증하였다. 이 기록들은 나제즈다 크루프스카야(Nadezhda Konstantinova Krupskaia)가 그 당시 정치국의 수장이었던 카메네프(Kamenev)에게 보낸 편지와 레닌이 스탈린에게 개인적으로 보냈던 편지였다.
나는 이제 이 기록들을 읽을 것이다:
레프 보리소비치!(LEV BORISOVICH-카메네프의 본명)
의사의 허락하에 레닌의 구술을 받아 적었기 때문에 편지가 짧다. 어제 스탈린은 나에 게 몹시도 화를 냈다. 나는 당에서 신참이 아니다. 지난 30년 동안 당의 어떤 동지로 부터도 무례한 말 한마디 들은 적이 없었다. 당과 레닌에 관한 일들은 스탈린에게 뿐 만 아니라 나에게도 매우 소중하다. 나는 현재 최대한의 자제력이 필요한 상태이다. 레닌과 논의가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는 내가 의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무엇 이 그를 거슬리게 하고,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 어떠한 경우라도 내가 스탈린보다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과 보다 더 가까운 동지로서 당신과 지노비에프를 바 라본다. 그리고 극도로 불쾌한 독설과 협박으로부터, 나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무례함 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것을 당신에게 간청한다. 스탈린이 나에게 협박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통제위원회(Control Commission)가 만장일치의 판단을 해 줄 것 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런 어리석은 싸움을 하고 있을 힘도, 시간적 여유도 없다. 그리고 나는 생활인이고 나의 신경은 극도로 쇠약해져 있다.“
나제즈다 크루프스카야
나제즈다 콘스탄티노브나(크루프스카야)는 이 편지를 1922년 12월 23일에 썼다. 두 달 반 후, 1923년 3월 레닌은 다음의 편지를 스탈린에게 보냈다:
스탈린 동지에게:
사본: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프에게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
당신은 내 아내에게 무례하게 전화 호출을 했고, 그녀를 무례하게 질책했다. 그녀가 당신에게 들은 말을 잊을 것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가 그 녀로부터 그 사실을 들었다. 나에 대항하여 하고 있는 일들을 쉽게 잊을 생각은 없다; 그리고 내 아내에게 대항하여 하고 있는 일들을 나에 대항하여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 하는 것으로 강조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나는 당신에게 당신의 말들을 철회하고 사과 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 사이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좋을 것인지를 신중히 판단할 것 을 요청한다.
레닌 드림
1923년 3월 5일
(장내는 술렁였다.)
동지들! 나는 이 문서들에 대해 내 견해를 밝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유창하게 자신들을 변호했다. 레닌의 생애동안 스탈린이 이런 방식으로 처신했기 때문에, 레닌의 가장 충실한 친구이자 당이 건설된 이후로 조직을 위해 적극적인 투사로 활동한 것으로 인정받고 잘 알려진 나제즈다 콘스탄티노브나 크루프스카야에게 그렇게 처신했기 때문에, 우리는 스탈린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했을 지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런 부정적인 그의 성격은 점차적으로 형성되었고, 지난 수년간 절대 참을 수 없는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문제의 문서는 “레닌의 ‘유언’으로써 당의 역사에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았다. 흐루시초프는 1934년의 책 제목으로 썼던 트로츠키로부터 이 용어를 가져왔다. 반대파들 사이를 제외하고는 볼셰비키 당내에서 그렇게 알려진 적은 결코 없었다. 실제로 ‘레닌의 유언’이라는 용어 사용에 대한 역사는 있다 - 그것은 흐루시초프에게 잘 반영되지 못한 것 중의 하나이다.
1925년 트로츠키는 맥스 이스트만(Max Eastman)의 책 레닌의 죽음이후로(Since Lenin Died)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에서 레닌이 “유언” 또는 “유서”를 남겼다는 이스트만의 거짓말을 명쾌하게 거부했다. 중앙위원회 정치국(Poliburo)의 다른 위원들과 함께 트로츠키는 레닌이 그런 것을 남긴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옳은 것으로 보인다: 레닌이 이런 문서들을 유언의 성격으로 남겼다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 그러더니, 1930년대에 트로츠키는 생각을 바꾸어 “레닌의 유언”에 대해 쓰기 시작했고, 이 시기는 스탈린에 대해 그의 당파적 공격이 시행되던 때였다. 그러므로 트로츠키 협력자인 흐루시초프는 그들이 공식적으로 그렇게 인정한 적은 없지만, 트로츠키로부터 이런 용어를 취했음에 틀림없다.
흐루시초프 연설의 다른 부분은 트로츠키의 저술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트로츠키는 모스크바 재판을 날조된 계략으로 보았는데, 왜냐하면 그는 공동피고인으로서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38년 3월, ‘부하린’ 재판에서 아크발 이크라모프(Akbal Ikramov)는 모스크바 재판의 첫 번째 피고인이었음에도 20차 당대회 이후, 1957년 5월까지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하지 못했다. 흐루시초프는 비밀연설에서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그리고 트로츠키파의 형 집행을 개탄하였다. 1936년, 그들이 자백한 범죄가 실제로 유죄라면 그들이 받은 처벌은 그리 가혹하다고 할 수 없으므로 흐루시초프의 개탄은 최소한 그들이 무죄임을 암시하는 진술로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혼자만의 책임이라고 전가시킨 엄청난 범죄들을 통한 사회주의에서의 탈선을 스탈린 혼자만의 책임으로 돌렸던 흐루시초프 연설의 전체적인 취지는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악마로 묘사한 것과 동일하다. 트로츠키의 미망인은 이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비밀”연설이 있은 지 하루 만에, 고인이 된 그녀의 남편의 명예를 회복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나탈리아 세도바 트로츠카야(Natalia Sedova-Trotskaia) 가 “비밀”연설이 곧 있을 것을 알았다는 사실은 트로츠키파가 여전히 소련공산당에서 고급정보들을 접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1923년 3월 5일에 레닌이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가 위조된 것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뒷받침하는 좋은 증거가 있다. 발렌틴 사하로프(Valentin A. Sakharov)는 모스크바 대학 출판사에서 이런 논지의 주제로 중요한 학술서적을 출판했다. 그가 주장한 대체적인 논거는 그가 쓴 여러 글들과 그 책의 비평들에서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 당시 스탈린이 그것을 진짜라고 믿었다는 데 있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설령 진짜라 하더라도, 1923년 3월 5일에 레닌이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가 그를 스탈린과 멀어지게 한 것으로 간주되어왔던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2주가 채 못 되어 레닌의 아내 나제즈다 콘스탄티노브나 크루프스카야(이 서신교환에서는 “울리아노바 동지”로 불렸다)는 레닌이 다음과 같은 말을 그녀에게 끈질기게 요청했다는 사실을 스탈린에게 전했다. 레닌은 자신을 위해, 자신의 극심한 고통을 끝내줄 수 있도록, 스탈린에게 청산가리 캡슐을 구해 놓을 것을 약속받으라고. 스탈린은 동의했다. 하지만 후에 3월 23일, 중앙위원회 정치국(Poliburo)에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적으로는” 그런 일을 하기 위해 그것을 가져올 수는 없었다고 스탈린은 보고했다.
이 자료들은 레닌에 대한 매우 적대적인 전기에서 디미트리 볼코고노프(Dimitrii Volkogonov)에 의해 인용되었다. 복사본들은 의회도서관의 볼코고노프의 논문에 존재한다. 그것들의 진실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레닌의 비서 중 한 명이였던 리디아 포티에바(idia Fotieva)는 1922년 레닌이 그의 병이 어떤 단계를 넘어서게 되면 청산가리를 달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므로 비록 레닌의 1923년 5월 5일의 편지가 원본이라 하더라도-그리고 사하로프의 연구는 심각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 레닌은 여전히 스탈린을 신뢰하고, 의존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는 전혀 소원하지 않았다.
볼코고노프(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따르면,
12월 24일 아침에 스탈린, 카메네프 그리고 부하린은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그들은 그 들의 지도자(레닌)를 잠자코 있도록 할 권리가 없었다. 그러나 가능한 한 돌보고, 배려하 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다음이 결정되었다.
1.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하루에 5~10분 동안 구술할 권리가 주어졌으나, 서한의 형식은 아니었고,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이러한 노트에 대한 답변을 기대하지 않았다. 만남은 전 혀 허용되지 않았다.
2. 친구들과 가족 모두에게 블라디미르 일리치에게 정치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그것은 자극이 되는 것들을 제공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로버트 서비스(레닌의 작가)에 의하면, 레닌은 아래의 날에 심각한 “사건”(아마도 뇌졸중이었을 것이다)을 겪었다.
○ 1922년 5월 25일-“심각한 뇌졸중”(p.443);
○ 1922년 12월 22~23일-레닌은 “신체의 오른쪽을 전혀 쓸 수 없었다”
○ 1923년 3월 6~7일 밤-레닌은 “몸의 오른쪽 손발을 전혀 쓸 수 없었다”(pp.473~4).
12월 18일 공산당 정치국은 스탈린에게 레닌의 건강에 대한 책임을 부여하고, 어느 누구도 레닌과 정치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금지했다. 12월 22일, 스탈린은 크루프스카야가 이 규칙을 위반한 것에 대해 질책했다. 바로 그날 밤에 레닌은 심각한 뇌졸중을 겪었다.
1923년 3월 5일, 크루프스카야는 레닌에게 스탈린이 지난 12월 그녀에게 무례하게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레닌은 격분하여, 유명한 편지를 스탈린에게 썼다. 크루프스카야의 비서 V.드리조(V. Dridzo)-이 사건에 대한 그녀의 글은 1989년에 출판되었다-에 의하면 이런 방식이었다.
이제,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의 이름과 스탈린의 관계가 몇몇 출판물에서 더 자주 언 급되었을 때, 어쨌든 내가 아는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왜 나데즈다와의 대화 에서 스탈린의 무례함이 있은 지 두 달 후에 V. I 레닌은 무례함에 대해 그녀에게 사과 하라고 요구하는 편지를 스탈린에게 썼는가?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바가 그것에 대해 나 에게 종종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 일이 어떻게 해서 생긴 일인지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23년 3월 시작하자마자 그 일이 있었다.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와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화 가 울렸다.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가 전화기로 갔다(레닌의 아파트에는 전화기가 항상 복도에 놓여 있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그녀에게 물었다; ‘누가 전화했오?’-‘스탈린이예요, 그와 나는 화해했어요.’-‘무슨 뜻이요?’
그리고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는 스탈린이 그녀에게 전화했을 때 일어났던 모든 일을 말해야 했다-그녀에게 무례하게 이야기했고, 그녀를 통제위원회에 출석시킬 것이라고 위 협했다는-.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는 레닌에게 모든 것이 정리되었고 그녀가 그 일에 대해 잊었기 때문에 신경서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완강했다. 그는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에 대한 스탈린의 존경받지 못할 행동에 대해 매우 기분이 상하여 1923년 3월 5일, 지노비예프와 카메네 프에게 보내는 복사본과 함께, 스탈린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글을 썼다. 스탈린은 사과해 야만 했지만, 그는 그 일을 결코 잊지 못했으며,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녀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다음날 레닌은 더 심한 발작을 했다.
크루프스카야가 정치적 사안들-당원으로서 어떤 것을, 그녀는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을 레닌과 논의한 후, 레닌은 매번 짧게 발작을 했다. 이런 일이 동시에 발생했을 리는 없다. 왜냐하면 레닌의 주치의가 어떤 일에 대해 레닌이 흥분하지 말 것에 대해 특별히 경고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레닌의 지난 두 번의 심각한 발작을 촉진시켰던 것은 바로 크루프스카야의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 같다.
오랫동안 레닌의 비서로 근무했던 리디아 포티에바(Lidia Fotirva)가 말했다;
나데즈다 콘스틴티노브나(크루프스카야)는 그녀가 했었어야 하는 일을 항상 실행하지 못 했다. 그녀는 레닌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말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레닌과 모든 일 을 공유하는데 익숙했다. 심지어 그녀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 상황에서 조차 레닌 과 모든 일을 공유했다... 예를 들어, 스탈린이 전화상으로 그녀에게 무례하게 굴었는지 를 왜 레닌에게 말했을까?...
그런데 1932년 스탈린의 부인이 자살했을 때, 크루프스카야는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은 위로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 편지는 1932년 11월 16일 프라우다(Pravda)에 출판되었다.
친애하는 이오시프 비사리오니치(Iosif Vissarionych)(역자 주-스탈린의 본명)에게:
요즈음은 웬일인지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당신을 생각하도록 만들고, 당신의 손길을 원 하도록 만든다. 당신과 가까운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나는 일리 치가 병환 중일 때 그의 사무실에서 당신과 대화를 나눈 사람들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 다. 그 당시에 그들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다시 한 번 더 당신에게 애도를 표한다. N. 크루프스카야
이 편지는 1922년 12월 두 사람 사이의 논쟁이 있은 후에 스탈린이 레닌의 부인과 멀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보여준다. 스탈린은 레닌 가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아주 커다란 존경을 받고 있었다. 작가인 알렉산더 벡(Aleksander Bek)은 리디아 포티에바의 전기를 썼는데, 회고록에서 그녀가 말했다:
당신들은 그 시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당신들은 스탈린이 얼마나 위대하며 중요성 을 가졌던 사람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스탈린은 위대하였다... 블라디미를 일리 치가 살아 있는 동안에 마리아 일리니치나(Maria Il'inichna)〔울리아노바(Ul'ianova), 레 닌의 여동생〕가 나에게 말했다: ‘레닌의 사후에, 스탈린은 당에서 가장 지성적인 사람이 었다... 스탈린은 우리의 권위자였다. 우리는 스탈린을 사랑했다. 그는 위대한 사람이었 다. 하지만 그는 종종 말했다’: ‘나는 단지 레닌의 제자일 뿐이다‘(벡의 글에서, op. cit)
흐루시초프는 진행되고 있던 일들에 대한 어떠한 이해를 전달하기 보다는 오히려 스탈린을 “나쁘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단지 노력하고 있었다.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레닌의 편지를 상황에서 벗어나 해석을 했고, 그렇게 함으로서 그가 상황을 심각하게 왜곡시켰다는 것은 분명하다. 당중앙위원회가 레닌의 건강을 위해 레닌을 정치적인 주제들로부터 확실히 떼어놓도록 할 것을 스탈린에게 지시했던 사실을 흐루시초프는 빼버렸다. 이 금지는 명시적으로 “친구들”과 “가계의 사람들”을 언급했다. 레닌의 비서들은 당중앙위원회의 지시를 어기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가계의 사람들은 특히 레닌의 여동생과 그의 아내인 크루프스타야를 포함하는 것으로 의도된 것이었다. 스탈린은 크루프스카야가 이러한 격리를 어겼기 때문에 그녀를 비판했다.
레닌의 메모에 대해 1923년 3월 7일에 쓴 스탈린의 답장이나 나중에 레닌이 스탈린에게 독약을 요구한 내용도 흐루시초프는 역시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빼버림으로서 흐루시초프는 1923년 3월 5일 스탈린에게 보냈던 메모가 발생했던 상황을 심각하게 왜곡했고, 스탈린과 레닌의 관계를 고의적으로 왜곡했다.
흐루시초프는 레닌의 여동생인 마리아 일리니치나의 설명도 빼버렸다. 레닌의 비서였던 볼로디체바(Volodicheva)와 포티에바, 크루프스카야의 비서였던 드리조는 여전히 살아있었지만 그들의 증언은 찾아지지도 않았다. 레닌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데 대한 소련 공산당의 금지를 어겼던 크루프스카야의 행동들이 당연히 레닌의 두 번에 걸친 발작의 원인이었다는 것을 빼버렸다. 스탈린과의 관계가 깨져버렸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2주 뒤에 레닌은 그가 독약을 요구하면 독약을 줄 수 있도록 하는 비밀스런 요구를 스탈린에게 맡길 만큼 유일하게 스탈린을 믿었다 마지막으로 흐루시초프는 크루프스카야와 스탈린의 화해도 빼버렸다.
흐루시초프는 이 사건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스탈린의 나쁜 면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흐루시초프는 실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관심이나 혹은 상황 속에서 그 사건을 이해하는 것에 대한 관심은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