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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으로 찾아가는 죽음여행
제1장 죽기가 힘들었던 사람들
무서운 전염병처럼 사라진 네로
인류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기록되는 네로는 황제이기보다는 시인이고 싶어 했다. 그는 팔리티네궁에서 자신이 지운 노래를 직접 시연해 보이며 곧잘 도취에 빠지곤 했는데, 죽음이 임박해 왔을 때도 무엇인가 괜찮은 시구를 생각해 내어 오래오래 후세에까지 남기고 싶어했다. 그가 지은 <키프로스의 사람> <헤쿠바의 슬픔>은 그런대로 괸찮다는 평판이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소견머리 없고 때론 즉흥적이며 충동적이었다. 기분 나는 대로 정책을 바꾸고, 그 자리에서 신하를 처결하였으며 로마를 불태우고 생모 아그릿빠나를 피살시켰다. 신망 높은 이복형 부리탠니커스를 독살시키고, 심지어는 자기의 처 옥타비아까지 동맥을 끊게 한 다음 더운 물김으로 질식시켜 죽였다.
폭정에 견디다 못한 로마군대가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파죽지세로 몰려왔다. 갈바를 황제로 추대했다는 급보가 왕궁으로 전해졌다.
네로는 자기가 죽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자기를 묻을 무덤을 파라고 명령한다. 그는 자기의 몸에 꼭 알맞게 파라고 흙 위에 드러눕기까지 하였다. 곡괭이질로 흙이 튈 때마다 그는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혔다.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비극 배우처럼 음조를 띄우면서 아! 위대한 예술가의 죽음이란 이런것인가! 하고 부르짓기도 했다. 불태워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 때 로마에서 사자가 달려왔다. 원로원이 네로를 살친자로 판정하고 고식에 따라 처벌하기로 했음을 알린다.
고식이라니 나를 어떻게 한다는 것이냐?
네로는 새파래진 입술을 벌벌떨면서 물었다.
당신의 몸을 세가닥으로 된 창에 올려놓고 죽을 때까지 매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고 나면 그 시체를 티베르 강에다 집어넣는 것입니다.
이젠 나도 죽어야 하나 보다. 아. 아! 위대한 예술가의 죽음이란 이런 것인가?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또 한번 되풀이했다. 그때 밖에서 말굽 소리가 났다. 백인대장이 네로의 목을 가지러 온 것이었다.
자 빨리빨리 하시죠.
옆에 있던 시종이 서둘렀다.
네로는 단도를 꺼내 떨리는 손으로 자기의 목을 찔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손으로 자기의 목을 찌를만한 용기가 없었다.
폐하. 사시는 동안은 그렇지 못했으나 돌아가실 때만이라고 제왕답게 죽으십시오.
영화 쿼바디스 에서는 네로를 도와 단도를 눌러준 사람이 액태였지만 사실은 에파프로디테라는 종이었다. 단도는 깊숙이 그 자루까지 목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튀어나온 네로의 두 눈은 커다랗고 원망과 공포로 가득찬 눈알맹이였다고 <쿼바디스>에 적혀 있다.
엄지손가락을 위에서 아래로 엎어, 쉽게 살인을 결정하던 그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유약한 비겁자였다.
다음날 끝까지 남편에게 충실한 액태는 네로의 시체를 값진 보자기에 싸가지고 향유에 적신 장작으로 화장을 했다. 이리하여 네로는 폭풍처럼, 선풍처럼, 화재처럼, 전쟁처럼, 그리고 무서운 전염병처럼 사라져 없어졌다. 센키비쯔가 쓴 소설 <쿼바디스>의 결미이다.
혼자만 살아남은 광해군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조선조 제15대 왕으로, 15년 1개월이나 지존의 자리에 있었다. 그런 그가 왕비와 세자, 세자빈 등 가족이 모두 자결한 뒤에 혼자만 살아남아서 18년 동안 섬에 갇혀 자연사할 때까지 목숨을 연명했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맞아 북쪽으로 파천하는 몸이 되었다. 조정을 나누어 만약의 비상사태를 대비해야 하므로 임금은 후사를 서둘러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조는 40년을 재위에 있으면서 8명의 부인에게 25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들은 14명인데 적출이 없어 나이 마흔이 되도록 건저(세자를 세우는 일)을 미루고 있었다. 선조가 총애하던 신성군은 피난 중 병사하고 광해의 동복 형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므로 장자임에도 세자책봉에서 제외되었다. 1594년 광해를 세자로 결정하고 명나라에 세자책봉을 주청했지만 장자 임해군이 있다는 핑계로 거절당한다. 임해군은 왕위를 도적맞았다 고 떠들면서 돌아다녔다. 이것을 대북파는 묵과하지 않았다. 그 후 1602년 인목왕후가 선조의 계비가 되어 영창대군을 낳았다. 영창대군을 잘 부탁한다 는 선조의 명을 받은 유영경 등 몇몇의 소북파 신하들은 영창군의 지지파가 된다. 바로 이 소북파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맞서 싸우게 된 것이다.
1608년 선조가 사경에 이르러 광해군에게 선위교서를 내렸다. 이때 영의정 유영경은 이를 공포하지 않고 자기 집에 감춰 버렸다. 이 일이 대북파 정인홍, 이이첨 등에게 발각되었고, 선조가 붕어하자 왕위 계승권은 인목대비에게로 넘어갔다. 영창은 그때 세살이었다. 유영경은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을 즉위시킬 것과 수렴청정을 권했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언문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시켰다. 우여곡절과 14년의 긴 여정끝에 광해군은 34세의 나이로 드디어 제위에 올랐다.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임진난으로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재정을 회복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타버린 궁궐을 중건 개수하며, 선혜청을 설치하고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생을 구제했다. 밖으로는 철저한 실리주의 노선을 걸었고, 안으로는 강력한 왕권체제하에서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했다. 병화로 소실된 서적도 다시 간행 편찬하였다. 이 무렵 동북아의 국제정세도 급변하고 있었다.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했다. 명나라가 후금과 싸워 패하자 광해는 강홍립을 시켜 적당히 싸우는 체 하다가 후금에 투항하게 했다. 누루하치와 화의를 맺도록 하고 그곳에 억류된 강홍립으로 하여금 후금의 동정을 낱낱이 조정에 보고토록 했다. 명나라에 대해서는 협력하는 체 하면서 안으로는 후금과의 우의를 다져나갔다. 그리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대일관계를 회복하여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다. 이러한 치적으로 보아 광해군은 분명 암군은 아니었다.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강한 주장을 물리치고, 자신의 판단으로 인목대비를 살려놓았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도 실상은 반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재위한 15년 동안, 대북파들은 자신들의 정권유지를 위해 참으로 많은 정적을 제거했다. 결국 이귀, 김자점 등 서인들이 능양군을 앞세워 반정을 일으키니 성공을 거두게 된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대명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과 영창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켜 인륜을 저버렸다는 등의 이유였다. 중종반정을 불러온 연산군이 철저한 폭군이었던 것에 반해 광해군은 왕권 도전세력에 칼을 썼으나, 백성을 학대한 일은 없었다. 오히려 민생경제를 일으키는데 전력을 쏟은 임금이었다.
인조반정이 순수한 구국의지에서였다기 보다는 사대주의자들과 광해군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던 자들에 의한 발란이라고 보는 견해에 필자도 공감이 간다.
그러나 붕당에만 치우쳐 명분론만 앞세우던 그들 인조반정 세력은 시대적 대세의 흐름은 읽지 못하고 있었으니 명은 이미 기울어진 나라였고, 청(후금)은 일어서는 나라였다. 명나라를 섬기던 인조는 정묘와 병자, 두 번의 호란을 면할 수 없었다. 삼전도에서 인조는 무릎을 꿇고 청나라와 군신의 의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보내야 하는 쓰라림도 겪는다.
인조가 등극한 뒤 49세로 폐위된 광해군은 강화도 동문쪽에 부인 유씨와 함께 위리 안치된다. 폐세자와 세자빈은 서문쪽에 안치시켰다. 그 후 두 달쯤 지나 세자 내외는 자살을 하고 만다. 한창 혈기왕성한 20대의 세자는 담 밑에 구멍을 파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세자빈은 나무에 올라가 세자가 잡히는 것을 보다가 그만 땅에 떨어졌고, 그 후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더니 욕된 삶을 길게 끌고 갈 것이 없느니라 하고 결국은 목매달아 죽었다. 폐세자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해 늦가을 폐비 유씨마져 병사하고 만다. 자주 격정에 휩싸이며 미칠 것 같다 고 말하던 폐비. 그는 친정오라버니들(유희분, 유희발)이 참살당한 일과 목에 밧줄이 걸려있는 아들, 며느리의 환영으로 몹시 괴로워하였다. 홧병을 얻은 폐비는 괴성을 지르며 가시덩굴 속에서 숨져갔다. 48세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그 해에 세 식구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광해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국내외의 정세에 따라 태안으로 또 강화도, 교동으로 몇 번 이배되었다가 인조 15년 멀리 제주로 옮겨져 거기서 67세가 될 때까지 살았다. 처음 섬에 올 적에 배의 사면을 휘장으로 가리고 목적지를 비밀로 하였으므로 어딘지 모르다가 땅을 딛고 내리자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낭패해 하며 크게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차 단념하며 묵묵히 지내게 되었다.
따라간 계집종이 패악하게 말을 함부로 하고 윽박질러도,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윗방을 차지하고 아랫방을 거처하게 하여도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잠자코 견디었다.
채근담에 소 라 하거나 말 이라고 하거나 고개만 끄덕인다(지시점두)는 말이 있다. 뭐라고 하면 어떤가? 이미 그런 심경이 아니었을까? 온몸에 바닷바람을 맞으며 파도 소리에 귀먹은 그의 내면은 이미 풍화될대로 풍화된 상태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그가 지은 시, 한 편이 여기에 있다.
몰아치는 비바람 속 성머리 지나니 (풍취비우과성두)
장기 훈음속에 높은 다락이어라. (장기훈음백척누)
창해의 성낸 파도 어둑어둑해 오는데 (창해노도래박막)
푸른 산에 근심한 빛 청추에 어렸더라. (벽산수색대청추)
마음이 가고파 왕손초도 보기 싫어 (귀심염견왕손초)
나그네 꿈 가끔 제자주에 놀래네. (객몽빈경제자주)
나라의 존망조차 소식 끊어지고 (고국존망소식단)
연파낀 강상 외로운 배에 누워 있노라. (연파강상와고주)
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여늬 때와 같이 그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바닷소리를 듣고 있었다. 영욕의 67년을 이끌어온 몸이 그만 눕고 싶어진다. 옆으로 눕자 물살이 떠밀려와 자신을 데려가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좋다고 생각하자 무거워진 눈꺼풀을 다시 뜰 수 없었다. 그날은 화담선생이 떠나시던 날처럼 견우 직녀성이 만나는 칠석이었다.
그는 어머니 무덤의 발치 아래 묻어달라고 유언하였다. 그래서 그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공빈 김씨의 묘 아래에 있다. 제법 많은 나이이건만, 어머니의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의 시 한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5원짜리 관에 묻힌 마지막 황제 부의
중국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은 그의 자서전을 소재로 한 영화 마지막 황제 푸이 덕분이다. 그래서 귀뚜라미와 놀던 어린아이가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1908년, 큰아버지인 광서제가 죽자 부의는 세 살의 어린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아버지 순친왕의 섭정을 받으며 3년간을 황제로 있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그 이듬해에 제위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부의가 퇴위함으로서 268년에 걸친 만주국의 중국지배와 2000년간에 걸친 황제 지배체제가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는 인민공화국으로부터 북경에 있는 궁전에서 살도록 허용이 되었으나 1924년, 몰래 빠져나와 천진으로 갔다. 거기서 일본인 조계로 거주지를 옮기고 그들의 비호를 받으며 만주국의 집정관이 되고 28세 되던 1934년에는 만주국의 황제로 추대된다. 그는 일본 천조대신을 신봉하도록 강요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울분을 삼키며 굴욕적인 황제 자리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계략임을 처음부터 그는 알지 못했다. 부의는 실권 없는 허수아비 왕이 되어 불우한 11년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1945년 일본이 망하자 그는 통화로 도망치는 길에서 제3차 퇴위조서를 반포하게 되며 그 후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적탑과 백리라는 곳에 억류되었다. 부의 그는 5년 뒤 중국으로 송환되어 전범재판을 받게 된다. 1950년부터 시작하여 특사로 풀려 나오기까지 10년간을 그는 중국 포로수용소에 갇혀 지냈다.
중국의 황제이던 그가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쉰세 살이 되어서였다. 그것도 평민으로서였다. 이른바 교육개조를 거쳐 정부의 특사를 받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이 된 것은 1959년 12월 4일이었다. 그립던 북경으로 그가 돌아온 것은 자금성을 떠난 지 꼭 34년 만의 일이었다.
북경에 돌아온 부의는 평범한 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자신의 말대로 옴짝달싹 못하던 왕위 그 어의를 벗어 버리고 평민으로서의 자유를 마음껏 누린다.
1962년, 56세 되던 해에 부의는 아내를 새로 맞아들인다. 그리고 식물원의 기계수리 상점에서 일을 하면서 나머지 후반생을 조용히 마쳤다.
부의에게는 황후와 비, 그리고 2명의 귀인이 있었는데, 모두 비극적인 관계로 끝났다. 나중에 만난 간호사 이숙현과 비로소 참다운 부부애를 느끼며 범부로서의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는 죽기 직전에 명나라 마지막 황제가 목매어 죽은 현장을 찾아보았는데 그때 동행한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데 숭정은 포위당해 도망갈 길이 막혔다. 황후와 후궁들이 잇달아 자결하자 그는 이 나무에 목을 맨 것이다. 자칫 세상이 잘못 풀렸던들 나도 이 나무에 목을 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1962년 피섞인 오줌을 누기 시작하던 부위는 그것이 신장암의 징조인지 몰랐다. 인민병원과 협화병원에 아홉 번이나 입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후 병세는 날로 심해져 병원에 다니는 일마저 어렵게 되었다. 시내버스를 타자니 사람이 많아서 오를 수 없고, 세 바퀴차를 불러 타고 싶었으나 홍위병들이 남을 압박한다 고 할 것 같아 그만 두었으며, 정협의 협조를 받자고 하여도 문을 닫아걸고 업무를 담당한 사람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는 매일 부의를 부축하여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서 병원으로 가야만 했다고 술회했다.
그는 특히 혼자 있기를 싫어해서 항상 병원침대 머리맡에는 그의 아내가 지키고 있었는데 세상을 떠날 때도 그의 곁에는 나 혼자밖에 없는 외로운 처지였습니다. 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죽음의 병상에서 부의는 아내 이숙현의 손을 꼭 쥐고 이렇게 말했다.
내병은 고칠 수 없소, 나는 한 평생 황제 노릇도 했고, 평민도 되었으며, 늘그막엔 당신 곁에서 인간생활의 단맛을 보았소. 당신과 생활하는 이 몇 해 동안 나는 진정한 생의 즐거움과 사람을 알게 되었소.
당시 수상이던 주은래는 그들의 뒤를 잘 돌보아 주었다. 부의가 위독할 때도 수상이 ‘특별대우’ 라는 네 글자를 써 주었기에 입원이 되었다. 그래서 마지막 며칠간을 병원에서 지낼 수 있었다. 1967년 10월 17일 새벽 2시 30분. 소매여! 숨이 막힐 것 같다 는 말을 남기며 마지막 황제 부의는 숨을 거두었다. 목숨이란 것은 목에 숨이 붙어 있는 것 이라고 한다.
나를 외롭게 남겨두고 가는 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그 분은 한쪽 눈을 뜨고 있었고, 입도 벌리고 있었다. 안심하세요. 내 걱정 말고 고이 잠드세요. 그의 눈을 감겨주던 지금 이 손에는 그때의 슬품이 흐르고 있는 듯하다 고 이숙현은 당시를 회고했다. 그의 아내는 5원을 들여 산 값싼 관에 시신을 넣어 지게송장으로 장례를 지냈다.
그가 황제 복권으로 청나라 황제들의 능이 있는 하북성, 서릉에 다시 안장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부의는 세 살에 황제가 되고, 39세에 포로가 되었다. 광해군은 49세에 폐위되어 죄인이 되었다. 부의는 14년간을 제위에 있었고 15년간을 포로로 지냈다.
광해군은 15년간을 왕위에 있었고 18년간을 죄인으로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61세와 67세의 나이로 자연사할 때까지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생각해 본다. 그러나 본인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진행되던 시대적인 상황, 그래서 때를 만나든지 못 만나든지 하는 우, 불우는 하늘의 탓이라고 했던가. 역사에는 명에 사로잡혀 자신의 명을 가볍게 버린 사람도 많다. 그러나 기를 쓰고 살고 싶어 하는 쪽이 오히려 더욱 인간적이랄 수도 있다. 무릇 생명이란 살려고 하는 의지이며 살고 싶어하는 것이 본능이기 때문이다. 목숨이란 것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한 죽음이었다.
소금에 절인 생선과 함께 실린 진시황의 시신
진지황은 장양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나라에 인질로 있을때 장양왕은 계획적으로 접근한 대상인 여불위에 집에서 그의 나이 어린 첩을 보자 자기에게 달라고 간청한다. 그녀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자초(장양왕)에게로 가서 12개월 만에 아들을 낳으니 그가 정, 장양왕의 뒤를 이어 13세에 진왕이 된 진시왕이다.
그의 길게 찢어진 눈, 높은 코, 넓다란 가슴, 거기다 산개의 울음소리보다 더 우렁찬 목소리는 주위를 압도했다고 한다.
그는 삼황오제의 존칭을 줄여 스스로 시황제라 칭하였으며 성격은 포악하고 사치를 즐겼다. 분서갱유를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한종, 후공, 석생을 시켜 불사약을 구해오도록 명령하였다. 방사, 서시 등이 동해로 나가 신약을 찾았으나 수 년이 지나도 성공하지 못하자 견책을 받을까 두려워 거짓말을 꾸며대었다.
봉래섬의 신약은 얻을 수 있으나, 항상 큰 고래같은 물고기가 방해하여 그곳에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활을 잘 쏘는 사람과 같이 가서 그것이 나타나면 활로 쏘게 해주십시요.
마침 시황은 해신과 싸우는 꿈을 꾸었는데 해신의 형상이 마치 사람과 같았다고 한다.
점몽 박사는 이런 해석을 내렸다. 수신이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어나 교룡이 나타나면 그것이 바로 수신이 나타나는 징후입니다. 이 악신이 나타났다면 당연히 몰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선신이 나타날 것입니다.
시황은 선약을 구하러 동해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대어를 잡는 도구를 휴대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자신도 직접 활을 갖고 나가 지부에 이르러 대어를 한 마리 사살하였다. 그 후 해안을 끼고 서쪽을 순행하는 도중 평원진에 이르자 진시황은 병환이 났다. 갑자기 위중해져서 황제는 아들 부소에게 발상하면 함양에 돌아와 장례에 참여하라 는 친서를 보내도록 하였다.
무더운 7월 병인일, 그렇게 살고 싶어하던 시황은 불사의 꿈을 끝내 버리지 못한 채, 사구평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그의 나이는 쉰 살 밖에 되지 않았다.
승상 이사는 황제가 외지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공자의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워 이 사실을 숨기고 진시황의 관을 온량고(온도가 조절되는 수레) 안에 안치하고 밥때가 되면 환관으로 하여금 음식을 갖다 바치게 하며 황제가 사망한 사실을 숨겼다.
한편 조고는 공자 호해와 승상 이사와 음모하여 공자 부소에게 보내는 친서를 파기하고 승상 이사가 사구에서 시황의 유조를 받은 것으로 꾸며 호해를 태자로 세웠다. 그 후 다시 공자 부소와 몽념의 죄를 꾸짖으며 자살하라는 위조친서를 보낸다. 더위가 한창인지라 온량고 안에서는 사람 썩는 악취가 새어나왔다. 당황한 그들은 소금에 절인 생선을 같이 싣게 해서 냄새를 위장하였다. 일행이 함양에 도착하자 비로소 발상을 하고 태자 호혜가 제위에 오른 그로부터 두 달 뒤인 9월에야 시황은 여산에 매장되었다.
시황은 즉위 초부터 여산을 조영하기 시작하였다. 궁형을 받은 죄인 등 70여만 명을 투입하여 궁정 백관의 모형과 각종 진귀한 기물로 그 안을 가득 채웠다. 수은으로 황하, 양자강 등 수많은 강과 대해를 본떠서 만들고 천상과 지상 세계를 갖추어 축소 재현하였다. 진시황릉에 부장된 병마용갱의 병사와 말은 실물의 크기로 7000여 체가 매장되어 그 규모와 위용은 실로 대단하였다.
94년 여름, 그것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다행이 필자에게도 주어졌다. 돔형 은회색 지붕으로 된 제1호 갱 안에 들어서니 발 아래의 호 속에 병사들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군모와 군장을 갖춘채 도열해 있었다. 한 마디로 충격적이었다. 진시황의 아들 호해는 후궁들은 순사케 했을 뿐만 아니라 매장에 관여한 장인들까지도 모두 산 채로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무덤 위에 나무를 심어 산처럼 보이도록 위장을 하였다. 그러나 1974년 3월 농업용수를 구하기 위해 우물을 파던 한 노동자에 의해 2200년간이나 잠들어 있던 진시황의 지하군단이 세상에 밝혀지게 된 것이다.
4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이 진시황릉과 만리장성, 그것이 중국을 먹여 살리는 관광수입의 한 몫을 톡톡히 한다지만 무모한 집착과 그 어이없는 큰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