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고기와 아이
발가벗은 아이들 물장구 치고 있다
한 아이는 바람의 가랑이를 붙들고
한 아이는 물살의 지느러미를 잡고 있다
서귀포, 바다가 보이는 언덕
퍼즐게임 같은 나무와 풀잎과 벼랑 사이로
이를 악문 바람으로 살아남아야 할 이유
몽유같은 물살로 놀 져야 하는 이유
모른다. 심심한 채,
벽 한 켠에 붙들려 불꽃 퍼득이는 시간들
은박지 깊숙이서 컹, 컹 어둠을 짖는다
무덤 속에서 세상으로 다리 하나 걸친다
큰 눈眼 바라보다
집 한 채 없이, 들판으로 가는 길에
놀빛은 잠기고 퇴로가 막힌
더듬이의 어둠과 붉은 빛 간극間隙 사이로
큰 눈眼 바라보다
집 한 채 없이, 도시로 가는 길에
어둠의 셔터를 열고
오래도록 헤쳐모인
붉은 가슴들 끼리끼리 부등켜 안은 그 길모퉁이에서
큰 눈眼 바라보다
멀고 고단했던, 돌아가는 육체 가볍게 짐 부리며 남은 눈빛을 거두어들이는, 저 열매도 한때는 빛나는 물결 속에 있었던, 단단해진 몸에서 빠져나가 허공을 돌고있는,
이녁에서 큰 눈眼이 바라보는
말씀이 갇힌 그 곳에서,
달빛처럼 갇혀 푸덕거리며
조용하게 물길을 여는 엽맥葉脈이
풀어내는 훤한 말씀,
따라간다
옥수수술을 담그다가
옥수수술을 담그다가 생각났다던 그대 내게 보낸 긴 편지 사이로 환한 둑길이 구겨져 있다 사랑은 가고 봄은 견고한 곳에서 빛난다 막차가 떠나고 남겨진 먼지 사이로 철쭉꽃 빨갛게 터진다
기댈 데 없는
내 마음 깊이, 적막
한때 靑燈 밝혔던 자리 바스락대며
내 마음의 쥐새끼는 울고 또 울고
독한 상처, 술통 속에서 더 독하게 익는다
구룡포에서 만난 놀
돌아가리라 다짐하고도 돌아가지 못함은 돌아갈 차삯이 없어서였지만, 걸어서 재넘을 요량도 없지는 않았지만, 바다가 소주잔 가득 물고 불을 들고 달려나갔던 탓이다. 바람이 들추는 치마 밑으로 모래알같은 사랑의 비밀을 보였던 탓이다. 성게 껍질같은 머리칼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와그르르르 무너지는 저녁놀이 뭍으로 투신하던 탓이다.
비빔밥
초파일 누구도 다 간다는 봉암사엘 거쳐, 회양의 그늘에 와서 늦은 점심으로 비빔밥 먹는다. 삼십 년 넘게 보지 못한 노사老師의 숨결은 지척인데. 화사한 봄도 아닌 날 풀빛같은 노사老師의 공안公案을 고추장에 듬뿍 말아 비빈다. 그릇 가득한 붉은, 노랑, 혹은 풀빛의 젊은 날의 초상, 빛바랜 사진첩의 보조키같은 리듬으로 앗싸앗싸 비빈다.
내 초파일의 가난뱅이를 비비는
엄숙한 전례여
오늘 숟가락질은 왜 이리 흥겹고
허기는 왜 이리 가벼운지
누란(累卵)
찔레꽃 폈다 꽃잎 하얬다 마을 초입 가끔 지나는 버스 바퀴자국 같은 허기 널렸다 초여름 저물고 햇살 바랬다 눈 아렸다 손땀 밴 보리개떡 놀빛보다 노랬다
뒷산 부엉이 소리, 마루 위로, 헛간으로, 담장 너머 당목 그루로 몸뚱이 숨다 포목전 걷고 있을 찔레꽃 하얀 그림자도 몸 숨긴다 석유호롱 그을음에 코언저리가 검다 숨바꼭질 지친 아우 칭얼거린다
찔레꽃 많이 먹으면 배탈날텐데
둑 가까이서 길 잃다
석포쪽 불빛에 그림자 길게 누일 길 있던가
우포에 마음 먼저 가 닿는 여기까지 와서
나는 다시 길 잃었다
추억은 때로 늪 위에 누각 짓기도 하고
생각은 때로 늪 깊이 침잠하기도 하여
내 삶은 때로 누각까지 오르다가
늪 속으로 빠지기도 하여
둑 가까이서 길 잃었다
가까이서 들리는 소금장수 덤벙소리
살아 있어, 그 삶의 겉소리 듣지 못한다면
그 어디에서 늪의 질창 밀어가겠는가
멀리서 들리는 아기 염소떼 멤 소리
살아 있어, 그 삶의 날소리 듣지 못한다면
어떤 생이 저 늪의 질창 걸어가겠는가
내 삶 마디마디에 고인 소沼 따라
늪 밖으로 나오는 길 분주하여
나는 들을 따라, 흩어진 길의 가닥을 따라
집과 집 사이의 길을 따라
몸 부풀린 나무들 곁 조심조심 지나
꼬막집아줌마 치마폭에 묻어둔 비릿한 목소리 껴안고
붉은 등 켠 작부집 간판에도 길게 누워
석포쪽으로 가는 몸의 길 연다
내 몸 누일 그림자 아직도 희미하다
그리운 향촌동
바람 가랑이 붙들고 악다구닐하면
저녁의 술병은 늘 허전하고 배고플까
선화당 자귀, 향촌의 능소 서로 붙어있는
조개젓갈 곰삭은, 표정들 갇혀 시큼할까
새벽달에 놀 가져다 놓으면 파편같은 틀니로도 배고파서
내 속의 배
고파서 안간힘 쓸까
여느 불볕에도 비명소리 깊숙히 사정의 몸 떠는
선화당 자귀, 향촌의 능소 둥글게 부푸는
그리운 그 여름
熟鱠
한 시절 내 바람에 아내는 눈을 감고 누웠습니다
더 이상 꽃피울 수 없다고 아프다며 누웠습니다
파닥거리던 미꾸라지 함지에 소금 잔뜩 뿌리고
굳게 감은 눈 속엔 무엇이 들어있는지
소금알갱이 같은 사랑 하나 들었을라
죽은 듯이 누웠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문지방에 걸터앉아 햇살과 놀고 있지만,
오후의 햇살이 쓰라린 아내의 그림자는
심심한 내 그림자에게 슬적 다리걸곤
방안을 스몄다가 물러나옵니다
소금 뒤집어 쓰고도 기어오르는 칡넝쿨같은
아내의 바람 애린 눈빛이
오늘은 푸른 하늘이겠지요
오늘도 熟鱠 맛은 찬란합니다
갈대
그 늪 퇴적된 깊이
연주하는
대금의 청
울음 속에만 서서
울음 속에만 녹아 들어가는
말 속에 갇혀 이따금 우는
말의 길이 그리운
절망 깊은 수심에
고요한 물풀들이 슬쩍
노리는
저 햇빛그늘에 바글거리는
묵음의 빗소리에
귀에 쟁쟁한 설법에
-----------시인의 산문
*고단한 일상이 개입한 오후의 풍경은 퍽이나 무겁다. 맞은 편 개 축사에서는 저녁을 기다리는 견공들의 소리, 소리들. 그 소리들이 산자락을 길게 덮는 어스름과 교감한다. 소리와 어스름의 뒤섞임은 그 풍경들의 켜켜에 숨겨져 있는 고뇌를 끌어내기도 하며, 그 켜들이 중첩한 어둠이면서 고단한 소리를 응시한다. 그 골과 숲은 맞은 편의 내 집 마당까지 길게 어둠의 숲을 드리우는데, 그 숲은 나를 사유하게 하는 공간이고 일상의 끈을 붙잡는 시간이다. 그 숲은 내 기억이 거쳐가는 여정이면서, 이제 어둠에 잠겨있는 밤으로 진입하는 과정이다. 또한 밤과 어둠은 그 이미지가 다르면서 환유다. 어둠은 일상의 탐욕과 육신의 갈증에 방황하면서도 긴 어둠을 건너야 하는 모색이다. 밤은 침묵하지만 개들의 소리는 너무 깊고 아프다.
*침묵하는 바람과 환한 보름의 달빛에서 별은 제 빛살 뿌리며 산화한다.
무위무념으로 안내하는 묵상의 밤, 밤을 통해 별빛에 이르는 인식의 끝에서 달빛은 방해꾼이다.
*고요한 휴식을 취할 수 있고, 저 초월된 세계를 취할 수 있는 집. 지척에 있는데 가야할 집. 그 집마저 가슴에 무너지는, 끝없는 어둠에서, 별빛은 달빛에 가려진 육체의 욕망 뿐 아니라, 마음의 고달픔이다. 아 피곤한 나를 치열하게 담금질하는, 그래서 온몸으로 별빛을 끌어안지 않을 수 없는 달빛에 가려진 적의敵意여.
*몽상은 아름답다. 몽상은 존재에게 휴식을, 평화를 가져다 준다. 조용한 마당에서 소주 안주로 갑자기 고기 굽는 연기와 냄새들의 부산함에도 몽상은 있다. 몽상은 나를 잡아당기고, 그 시간 속에 나를 삼투시킨다. 그러나 내 정신과 몸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삶은 지글지글 굽힐수록 생생하게 불타는 이름이며 두근거리는 나의 행복이다. 아니 다시 몽롱해진다. 소주와 내가 함께 젖는 순간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몽상 속으로. 그렇게 상상력은 아름답다.
*물 들인다. 햇살은 청명하고 바람은 삭삭하다. 짐짓 머리 위에서 물들인 천들이 날개를 퍼덕이지만 홀로 비상할 수 없다. 줄에 걸린, 그래서 더욱 무겁게 난다.
*나는 어떤 시 속의 화자다. 그때 나는 <나>이다. <나>는 관찰자이고 <나>만을 세계 중심에 두고 <바람 애린 눈빛>을 바라본다. 그런데 나는 그만 아내에게 그 눈빛을 들켰다. 그 대상 <바람 애린 눈빛>은 나와는 무관하다. 나와 대상과는 그만 생뚱해진다. 거기엔 아내의 눈빛이 <햇빛그늘에 바글거리는 묵음의 빗소리> 또는 <귀에 쟁쟁한 설법>으로 울려내린다. <나>는 <바람 애린 눈빛>을 하릴없는 관찰자로서 바라보다가, <가벼운 허기>같은 내 가슴만 공연히 조렸다. <바람 애린 눈빛>은 나에게 안중이 없다.
첫댓글 아싸아싸 비빔밥~엄숙한 전례처럼
그리운 향촌동은 아직도 붉은 가슴들 끼리끼리~임을 봅니다!!
잘 감상하고 갑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 드립니다.
시 읽는 호사를 누립니다.
바람 애린 눈빛이 거느린 시, 감사의 절 올립니다.
능소 둥글게 부푸는 그 여름이 한창이다
즐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