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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에서 시를 읽다(11)
- 마르모탕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
김철교(시인, 배재대 교수)
2013년 6월 15일(토)
유럽 미술관 순례를 하다보면 인상주의 그림과 피카소 그림은 웬만한 미술관에는 빠지지 않고 전시되어 있다. 특히 마르모탕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으로 유명하다. 마르모탕에는 최초의 인상주의 그림인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인상, 해돋이(Impression : Sunrise)>가 전시되어 있고 오랑주리에도 모네의 거대한 <수련(Les Nymphéas)> 연작이 벽면크기로 한 방을 가득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1. 마르모탕 미술관(Musée Marmottan)
우리 부부는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다. 오늘은 어쩌면 가장 바쁜 날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르모탕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 몽마르뜨, 물랭루즈를 찾기로 되어 있어서다. 9호선 La Muette역에서 하차하여, 아름다운 공원(Ranelagh)에서 20여 분 동안 헤매다 고급주택가에 있는 마르모탕 미술관에 도착하였다. 소장품들을 기증한 폴 마르모탕의 저택이 그대로 미술관이 되어 찾기가 힘들었다.
마르모탕 미술관 건물은, 과거에는 마르모탕 가문이 수집한 미술품을 보관하기 위한 장소였으나, 폴 마르모탕(Paul Marmottan, 1856-1932)이 자신의 컬렉션과 함께 이 건물을 프랑스 예술아카데미에 기증하였다. 특히, 1966년에 모네의 둘째 아들이었던 미셸 모네(Michel Monet)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회화 작품들을 프랑스 예술아카데미에 기증했고, 예술아카데미는 다시 마르모탕 미술관으로 보냄으로써 모네의 그림이 가장 많은 전시관이 될 수 있었다.
마르모탕 미술관은 수백 점이 넘는 인상파와 신인상파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모네의 그림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모네 이외에도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드가(Edgar Degas), 마네(Edourd Manet), 시슬리(Alfred Sisley), 피사로(Camille Pissarro), 고갱(Paul Gauguin), 르느와르(Pierre-Auguste Renoir)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화가중의 하나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의 회고전도 열리고 있어 반가웠다. 마르모탕에 이어 방문하는 오랑주리 미술관에도 그녀의 그림들이 많이 걸려 있다. 이번 마르모탕 미술관의 로랑셍 전시회는 프랑스에서 처음 열리는 것으로, 90여 점 대부분이 일본 동경의 마리 로랑셍 미술관에서 대여해 온 것이라고 한다.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1872년, 캔버스에 유채, 48cmx63cm, 마르모탕 미술관>
이 미술관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은, ‘인상주의’라는 용어의 모체가 되었던 모네의 <인상, 해돋이>이다. 이 작품은 1985년 대낮에 복면 강도들에 의해 도난당했다가 5년 후인 1991년 마르모탕에 돌아와 더 유명해졌다.
<인상, 해돋이>는 르아브르 항구의 아침을 그린 것이다. 아침 안개 속에 붉게 떠오르는 태양과 푸른 빛의 항구, 잔잔한 파도, 배가 뿜어 내는 하얀 연기, 가까이 있는 검은 배 등, 하늘과 안개와 바다가 조화를 이룬 빛의 분위기를 순간 포착하여 그려 놓은 것이다.
1874년 사진사 나다르의 사진관에서 젊은 화가들이 중심이 된 <화가, 조각가, 판화가, 무명예술가협회 창립전>, 소위 <제1회 인상파전>이 열렸는데 모네가 여기에 출품한 그림이다. 나다르는 젊은 화가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실험적인 사진작가였다. 루이 르루아라는 미술기자 겸 평론가가 이때 출품된 모네의 <인상, 해돋이>라는 풍경의 제목을 따서 ‘인상파 전시회’라고 조롱한 기사가 『르 샤리바리』지에 실리면서 인상파라는 이름이 탄생했다고 한다.
그동안 유행했던 전통적인 화풍을 보여주는 역사화나 신화의 주제를 버리고, 빛의 이동을 추적한 화면은 거친 붓질로 가득하다. 모네의 빛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은, 작은 배를 작업실삼아 하루 종일 수면에 반사되는 태양광선과 구름의 변화를 열심히 관찰하고 화폭에 담아냈다.
자연을 묘사한 그림은 현장에서 실제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모네는, 세느강의 분위기를 연구하며 관찰하는 동시에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조그만 배를 한 척 사서 화실로 꾸몄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당시 인상파가 등장한 배경에는 사진기의 발명, 일본 목판화의 영향이 컸다. 사진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이 미술가들의 관심이었지만, 19세기 중반 사진기가 등장하면서 화가들은 무언가 출구를 마련할 필요가 절실했던 것이다. 게다가 일본 목판화의 단순한 구도와 색채는 당시 유럽 미술가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유럽인이 보기에 일본 목판화는 회화의 기본 규칙을 무시한 전혀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네, 고흐 등 적지 않은 인상파 화가들은 일본 목판화에 심취하게 되었다.
2. 오랑주리, 콩코드, 튈르리
마르모탕 미술관 관람을 마친 후, 다시 지하철을 타고 콩코드 역에서 하차하였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모네 수련 대작과 튈르리 공원의 유명한 조각들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1) 오랑주리 미술관(Musee de l’Orangerie)
오랑주리 미술관은 프랑스의 근대 회화를 주로 전시하는 국립미술관이다. 오랑주리는 ‘오렌지 온실’이라는 뜻으로 과거에는 겨울철, 루브르 궁전의 오렌지 나무를 보호하는 온실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1563년 메디치가의 캐서린(Catherine de Medicis) 왕비의 요청으로 루브르 궁전 옆에 짓기 시작한 ‘튈르리 궁전((Palais du Tuilerie)’이 그 모체가 되었다. 앙리 4세 때 완성된 튈르리 궁은 루이 14세와 15세를 거치면서 매우 각광받는 궁전이었으나,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면서 그 빛이 바랬다. 특히 파리코뮌(1871년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로 세워졌던 혁명적 노동자 정권)때 화제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현재의 미술관 건물이 재건축된 것은 1853년이다. 나폴레옹 3세는 건축가 피르맹 부르주아(Firmin Bourgeois)에게 의뢰하여 튈르리 정원 안에 별채를 설계하도록 했고, 그의 후계자였던 이탈리아 건축가 비스콘티(Ludovico Visconti)가 건물을 완성하였다. 이 때 완공된 두 채의 별관이 바로 현재의 ‘주드폼 국립 미술관(Gallerie Nationale de Jeu de Paume)’과 ‘오랑주리 미술관(Musee de l'Orangerie des Tuileries)’이다.
(2) 모네의 수련
오랑주리 미술관은 모네의 거대한 <수련> 연작으로 유명하다. 이 그림은 높이가 2m이며 8점으로 구성된 연작이다. 1층 두 개의 타원형 전시실에 4점씩 곡면으로 돌아가며 전시되어 있으며 시간대에 따라 변하는 연못의 모습을 각각 다른 색조로 표현하고 있다. 2000년부터 6년간에 걸친 개장공사를 통해 천장 창문에서 부드러운 자연광이 내리쬐어 마치 수련이 떠 있는 연못에 있는 듯한 느낌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1층(Ground Floor) 첫째 전시실에는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아침(Morning), 초록빛 반사광(Green Reflections), 구름(Clouds)을 주제로 한 수련 연못의 그림이 벽면에 가득했고, 이어진 다음 전시실에는 나무 반사광(Reflections of trees), 버드나무가 있는 맑은 아침(Clear Morning with Willows), 두 개의 버드나무(Two Willows), 흐느끼는 버드나무가 있는 아침(Morning with ‘Weeping Willows’)을 주제로 한 수련 연못이 벽면 가득 펼쳐져 있다.
<‘버드나무가 있는 맑은 아침’의 수련 연못으로 가고 있는 필자>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말년의 모네가 이를 기념하여 프랑스 정부에 <수련> 연작 중 두 점을 기증할 의사를 밝힌다. 그 후 1922년 그는 수련 연작 중 거대한 사이즈의 작품 8점을 국가에 기증하게 되는데, 높이 2미터에 총 가로 길이의 합이 백여미터에 이른다. 정부는 오랑주리에 이 거대한 작품들을 전시하기 위해 건축가 르페브르(Camille Lefèvre)에게 설계를 맡겼다. 모네는 개관 5개월 전인 1926년 12월 86세에 세상을 떠났다.
다른 층(Level-2) 전시실에는 미술품 수집가이면서 후원자였던 폴 기욤(Paul Guillaume, 1891–1934)과, 기욤의 부인이 남편과 사별한 후 재혼한 건축가 쟝 발터(Jean Walter)가 기증한 작품들이 중심이 되어 전시되고 있다. 입구쪽에서부터 드렝(Andre Derain), 수틴(Chaim Soutine)과 위트릴로(Maurice Utrillo), 세잔과 르느와르, 피카소와 드렝, 마티스와 피카소, 로랑생, 루소와 모딜리아니의 작품방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3)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과 아폴리네르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여류 화가로 꼽히는 마리 로랑생의 작품을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의 연인으로 더 유명한 마리 로랑생은 당시 유행과는 달리 자신만의 감각적인 화풍과 감수성을 보여준 여류 화가였다.
피카소를 통해 아폴리네르를 만나게 된 로랑생은 5년간 열렬히 사랑한다. 그러나 5년후 이들은 이별하게 되고, 세느강을 건너 자신의 집으로 향하던 아폴리네르는 미라보 다리에서 자신의 실연을 시로 읊는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 우리들 사랑도 흘러간다....”로 시작되는 <미라보 다리, Le Pont Mirabeau)>는 아폴리네르의 시집 『알코올(Alcools, 1913)』에 실려 있다.
아폴리네르는 1880년 폴란드 귀족출신 어머니와 이탈리아 장교인 아버지 사이에서 로마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남프랑스로 이주하였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19세에 파리로 오게 되어, 출생의 비밀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였지만 1898년부터 여러 잡지에 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 무렵 무명의 피카소 등의 젊은 화가들과 교류하게 되었고 당시 아방가르드 화가들과 시인들의 가난한 공동체이자 작업실이었던 몽마르트의 ‘세탁선(Bateau Lavoir)’에 드나들게 되었다. ‘세탁선’은 원래 피아노 공장이었는데 낡아서 세탁부들이 빨래터로 이용하는 강변의 낡은 배와 비슷하다고 ‘세탁선’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아폴리네르는 로랑생을 만나게 된다.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은 1907년 로랑생의 개인전에서 피카소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고, 27살의 젊은 시인과 24살의 여류 화가의 사랑은 열렬하였으며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아폴리네르의 시집 『동물시집 (Le Bestiaire, 1911)』, 『알코올(Alcools, 1913)』등이 이 시기에 나왔고, 마리 로랑생의 대표작이라고 할 작품들도 이 시기의 것들이 적지 않다.
로랑생과 이별한 후에 아폴리네르는 또 다른 여인들을 만났고 또 그녀들을 위한 시를 썼다. 아폴리네르는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보병 소위로 입대하여 평생 원하던 프랑스 국적을 획득하였으나, 1916년에 머리에 파편을 맞아 후송되어 제대를 하였지만 두 번이나 수술을 해야 했다. 결국 1918년 허약한 상태에서 스페인 독감에 걸려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폴리네르의 부고를 들은 마리 로랑생은 충격을 받고 절망에 빠졌었다고 한다.
로랑생은 적대국인 독일출신 남편과의 결혼으로 스페인으로 망명하였다가 다시 조국 프랑스로부터 귀국허가를 받은 것은 1920년 서른일곱이 되던 해였다. 그리고 이듬 해 독일인 남편과 헤어졌다. 파리로 돌아온 로랑생은 1920년 로마의 개인전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1920년대 파리의 유명인사로 활약하였다. 그녀는 ‘피카소 등의 입체파(Cubism)의 영향을 받았지만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대상을 감각적이며 유연하게 표현하고 연분홍의 파스텔 톤과 담홍·담청·회백색의 유려하고 투명한 색채배합을 한 그녀만의 그림을 완성한 화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예술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던 로랑생은 장 콕토(Jean Cocteau)와 앙드레 지드(Andre Paul Guillaume Gide)의 책에 삽화를 그렸고, 연극무대의 디자인을 맡는 등 사교계의 꽃으로 환영받았던 예술가였으며, 특히 여인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자화상, 1908, 도쿄 마리로랑셍미술관 소장> <샤넬부인초상, 1923, 오랑주리 소장>
프랑스를 대표하는 패션 디자이너인 샤넬을 모델로 그린 <샤넬부인의 초상(Portrait of Mademoiselle Chanel, 1923, Oil on Canvas, 92x73Cm)>은 로랑생 작품들 중 특히 잘 알려진 작품으로, 그녀 특유의 회색빛이 도는 파스텔 컬러와 아련한 느낌이 잘 어우러져 있다. 화가인 마리 로랑생과 주인공인 코코 샤넬은 1883년에 둘 다 태어났고 비슷한 환경을 지녔으며 미술과 패션에서 대단한 활약상을 보였다.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낸 여류화가와 패션 혁명가의 만남이 이 한 점의 그림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4) 콩코드 광장(Place de La Condorde)과 튈르리 공원(Jardin des Tuilleries)
높이 23M의 오벨리스크가 있는 파리의 중심광장인 콩코드 광장은 프랑스 혁명 당시 ‘대혁명 광장’이었다. 단두대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아네트 그리고 혁명을 주도했던 로베스 피에르를 비롯하여 1343명이 처형된 곳이다. 혁명이 진정된 1795년에 이 광장을 ‘화합의 광장(Place de La Concorde)’이라고 개명하고 1833년 지금의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이 오벨리스크는 이집트 룩소 신전에 있던 것을 이집트 왕이 샤를 5세에게 헌납한 것으로 운송하는데만 4년이 걸렸다고 한다.
콩코드 광장은 루이 16세 시대의 건축가 가브리엘이 1755년부터 1775년에 걸쳐 조성했다. 원래는 루이 15세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었으나 1790년 프랑스 혁명당시 파괴되었다고 한다. 광장에 있는 8면의 여인상은 프랑스의 8개 도시를 상징한다.
루브르 박물관과 콩코드 광장 사이에 위치한 튈르리 정원은 궁정에 속해 있었으며 17세기에 정원 건축가 노트르(Andre Le Notre, 1613-1700)에 의해 지금의 프랑스식 정원으로 모습을 갖추었다. 마욜, 자코메티, 뒤뷔페 등의 조각이 정원 나무 사이사이에 세워져 있어 조각미술공원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공원 동쪽에는 카르제 개선문(Arc de Triomphe du Carrousel)이 있고 서쪽에는 오랑주리 미술관이, 사진 전문 미술관인 주 드 폼(Galerie Nationale du Jeu de Paume) 미술관과 함께 나란히 있다.
<튈르리 공원 야외 카페에서> <콩코드 광장을 배경으로 쉼의자에서>
콩코드 광장에서 몇장의 사진을 카메라에 담고, 튈르리 공원에서 음료수 한잔의 휴식을 취하고는 노트르담 사원을 향해 지하철역에로 발걸음을 옮겼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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