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0:19~25).
1. 옛 언약 안의 제물을 대치하고 끝냄
사람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가?
원시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사람은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법을 연구해 왔고,
또 그대로 시행해 오면서 그 모든
방법 들이 있었지만 대표적이고 가장
완전한 것이 구약의 율법이라 할 수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하나님께로
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가. 옛 언약 안의 제물(방법)
율법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제물을 통한 제사 의식으로 하나님께 접근하려는 방법이다.
같이 음식을 먹어야 친해지는 것처럼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고 만족케 하면 하나님과 가까워진다는 개념이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제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는 방법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예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접근하려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하나님이 만족하시고, 하나님이 만족하시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다는 개념이다.
율법에는 이런 것은 행하고 저런
것은 행하지 말라고 규정 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러니까
행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이
저러니까 행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10장 1절에는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하였다.
장차라는 말은 지금이 온전하지 않아서 나온 말인데 그럼 무엇이 온전한 것인가?
이것을 몰라 많은 방법과 수단이 나왔다
의식적인 제사를 드린다 해서
하나님이 만족하시는가,
행위만 고친다 해서 하나님이 만족하시는가? 그렇지 않다.
의식적인 제사를 드리거나 행위를
고친다 해도 사람은 그대로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의 상태로는 만족이 안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족하시려면 하나님이 만족하실 수 있는 어떤
온전한 인격이 필요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하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는
참 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예배라는 의식에
젖어 있어서 예배라는 순서에 따라 찬송을 하고 설교를 듣고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도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 입으로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해야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모든 상태는
어떤 관념에 젖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거기서 나오기 어렵다. 종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이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은데, 그렇기 때문에 얽어 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심지어는 찬송가 하나를 바꾸는 것조차도 어렵다.
자기들과 다른 찬송가를 부르면
‘이 사람은 이단이 아닌가?’라고 의심한다. 찬송가는 누구나 만들 수
있고 누구나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3-4절에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하였다.
‘죄를 생각나게 한다.’는 말은
‘죄를 의식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제물들이 드려지는 것을 볼 때 죄의식을 가질 수는 있어도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해마다 제물들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죄를 의식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죄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면 ‘장차 올 좋은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죄가 없어지는 일이다.
죄가 없어져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일이 가장 좋은 일이다.
율법은 이 좋은 일을 위해서 있었던 전조의 그림자요 예표였을 뿐이다.
구약의 제사의 예법들은 사실은 그리스도의 정확한 예표였지
실재는 아니다라는 것이다.
나. 새 언약의 제물
새 언약의 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옛 것을 완전히 끝내시고 죄를
없이 하는 길을 여셨다.
우리의 죄가 없어져야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다.
죄를 가려 놓거나 덮어 놓는
방식으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
히10장은 히브리서 1장부터 9장까지의 추가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죄를 없이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죄를 없이 하는 길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길, 산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오늘날
기독교에 꼭 필요한 말씀이다.
제사나 예법이나 제도,
그 외의 모든 방법들은 예표나
상징일 수는 있어도 실재는 아니다.
최고로 높이 쳐 준다 해도 상징이나 예표에 불과한 것일 뿐 실재는 아니다.
그런 모든 종교적인 방법들을
끝내려고 예수님이 죽으셨다.
왜 그런 방법들이 많이 생겼는가?
진짜 길이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병을 치료하는 결정적인 약이 없으면 수없는 약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리스도는 그런 모든 것들을
없애려고 죽으셨고 그 죽으심만이
새로운 길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길이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하면 완성할 수 없는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허락하셨다.
죽음을 통한 향기만을 요구하신 것이다.
구약의 예법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죽음을 통한 향기만을 요구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길을 버리고 다른 길을 찾으려고 하다 보니까 여러 가지 방법들과 예법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십자가를 제시하고 이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해도 한쪽에서는 그 길을 피해서 다른 길을 늘 찾는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완전한 그 길이 자기에게 보이지
않으면 ‘이 길밖에 없는가?’라고
생각하고 다른 길을 찾게 된다.
제일 어려운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다. ‘말은 옳지만 꼭 그 길만이라고 할 수 있느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말씀을 듣다 보면 아니라고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해서
꼭 그것만이라고 할 수 있느냐?’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 참 형상이 아니다.
‘참 형상’이라는 말은
‘그것 자신’이라는 말이다.
율법은 좋은 일 그것 자신이 아니다.
그것 자신과 같지 않다.
히브리서 10장 1절의
‘형상’이라는 말은 히브리서
1장 3절의 ‘형상’과 다른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할 때의 ‘형상’은 ‘인을 치다. 복사하다. 묘사하다.’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복사판, 묘사판이라는 뜻이다.
10장 1절의
“참 형상이 아니므로”라는 말은
좋은 일 그것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일과 닮은 것, 비슷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옛날에 송아지와 양으로 제사를 드렸던 것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고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참 그것이 자신의 모양은 아니었다.
그렇게 닮은 것을 가지고도 닮지 않았다고 한 것을 보면은 그렇게 명확한 것도 참 그것 자신과 같지 않다고 하였다.
하물며 미사나 예배 같은 것들이
어찌 명함이라도 내밀겠는가?
율법이라도 참 형상이 아니고 장차
오는 좋은 일의 전조, 징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그림자의 실재다. 모든 전조들과 징조들의 실재다.
그리스도의 몸은 구약의 제물의 실재이고, 그리스도의 인격은 율법의 실재다. 몸으로 오신 것은 제물로서
오신 것이며 그리스도의 인격은
율법의 완성이다.
“한 몸을 예비하셨다(히10:5).” 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다(히10:7).“고 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는 일이다.
이 인격만이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할 수 있다. 이 인격은
임마누엘이고 하나님 나라의 요소다.
인간이 아무리 형식과 모양을
개발한다 해도 구약에 나오는 형식과 모양보다 완전한 모양이나
예표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어느 종교 어느 종파가 어떻게 만든다 해도 조잡한 것밖에 나오지 않는다.,
라. 제물들을 대치하기 위하여
몸을 가지고 오심
히브리서 10장 5절에는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그런 제물들을 대치하기 위해서 한 몸을 가지고 오셨다.
희생 제물에 비해서
사람을 대표하는 한 몸을 예비하셨다는 말인데, 더 깊은 뜻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죄를 없이 하는 것이다.
죄를 없이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죽어야 된다. 죽고 다시 산 생명이라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옛 창조를 끝내는 것이다.
옛 창조를 끝내지 않으면
새것이 나올 수 없다.
2. 새롭고 산 길
그러므로 예수의 피를 힘 입어 새롭고도 산 길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자.
다른 방법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말고 오직 이 십자가의 한 길로만 나아가자.
가. 새롭고도 산 길로 나아감
히 4장에서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자고 하였고,
히 7장에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자고 하였는데,
히10장 22절에서는
하나님께(지성소로) 나아가자고 하였다.
하나님은 보좌에 계시고
보좌는 지성소에 있다.
지성소로 가는 것이
곧 보좌로 가는 길이고, 보좌로
가는 것이 곧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다.
또한 이것은 새 언약 안으로 가는 길이다.
새 언약은 새 시대를 의미한다.
옛 언약 안에는 옛 시대가 있었고
새 언약 안에는 새 시대가 있다.
새 시대에는 새로운 경륜이 있고
새로운 행정이 있으며 그리고
새로운 생명의 분배가 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성소로,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새 언약을 통해서 새 시대를 만들고 새 시대
안에서 통치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새 언약의
새 시대 안에서 은혜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으로만 성취된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쓴 사람은
지성소로 나아가자고 하였다.
성소는 옛 종교라면 지성소는 실재다.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은 구원이나 영화롭게 됨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는 문제다. 이것이 새 언약이고,
새 언약 안에 임마누엘이 있고,
임마누엘 안에 그분의 나라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나. 산 길이 열림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 길이 열렸다. 이 길은 새롭고도
산 길이다.
‘새롭다’는 말은 특이한 말로
‘최초의, 방금 죽은’이라는 의미가 있다.
‘새롭고도 산 길’을 직역하면
‘방금 죽임 당하고 산 길’이다.
이 길은 방금 죽고 산 길이다.
그래서 새 길인 것이다.
방금 죽고 다시 산 길이므로 새 길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옛날 산 것은 아무리 해도 새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다 죽고
다시 난 것만이 진짜 새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20절은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라고 하였는데,
이를 다시 번역하면
“휘장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바쳐진 바 된 방금 죽임 당하고
산 길”이라 할 수 있고 이는 곧 그리스도다.
방금 죽고 산 것이 진짜 새것이다.
다른 것은 다 수선한 것이고
방금 죽고 산 것이 새 것이다.
죽고 다시 산 것만이 참으로 새로운 것이다. 새롭고도 산 길이라는 말에는 이렇게 깊은 뜻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