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목요일이다. 글 모임에 가기 위해 매주 목요일을 비워둔 덕에 아침부터 집이 썰렁하리만치 한가하다. 아이들 일정도 오늘만큼은 모두 방문 수업이다. 그래서 매주 목요일은 내가 집에 없어도 모든 일정이 알아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만족스럽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온전한 나의 날이다. 하지만 나를 위해 비워 둔 시간이어서일까. 목요일은 내 성격과 많이 닮았다.
월요병에 시달리는 월요일, 빗소리가 들리는 화요일, 왠지 빨간 장미를 선물해야 할 것 같은 낭만적인 수요일과 불타는 금요일, 황금 같은 토요일, 여유로운 일요일 사이에 끼어있는 날, 목요일. 양쪽에 삼 일씩 날개가 묶여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날지 못하는 처지가 안쓰럽기까지 하다. 색으로 치면 회색. 난 항상 경계선을 서성인다.
일종의 결정장애란 생각도 든다. 모든 선택지는 매번 ‘당연히 날 찍겠지?’ 하는 표정으로 내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기때문이다. 그래서 음식을 먹을 때나 갈 곳을 정할 때, 똑같이 생긴 여러 브랜드의 물건 앞에 섰을 때 난 손톱을 깨문다. 사실 무얼 선택해도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만 색이 분명한 빨강이나 파랑이 되지 못하는 난 언제나 중간의 적당한 선을 찾는다.
그건 나의 정체성과도 관련 있다. 나는 한국에서는 미국인, 미국에서는 한국인으로 인식된다. 새도 쥐도 아닌 박쥐 신세다. 치킨은 프라이드 반 양념 반, 자장면과 짬뽕은 짬자면으로 재탄생해 사람들에게 인기라지만, 반반인 정체성은 본질적인 뿌리를 의심하게 만든다. 심지어 그 정체성을 아이들에게까지 유산으로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여러 가지 고민이 생긴다.
그래서일까. 목요일은 스트레스가 가장 심한 날이란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힘들게 끌고 온몸과 마음을 아직 주말이라는 멋진 휴양지 앞에 풀어 놓지 못하고 당겨 잡은 상태다. 그 긴장감은 롤러코스터가 꼭대기에 오른 듯 최고조에 달한다. 어쩌면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는 낙관적인 사람이 아니라 가장 예민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많은 고민과 걱정을 끌어안고 산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미국에선 유독 목요일에 행사가 많다. 즐거운 휴식으로 들어가기 전, 골치 아픈 일들을 모두 해치워버리겠다는 듯 한꺼번에 뭉쳐서 던져버린다. 학교 콘서트나 조회, 시상식 같은 것들이다. 그렇다면 목요일은 뭔가를 해소하는 날이 아닐까. 머리와 마음을 무겁게 했던 모든 것을 한껏 쏟아내고 가볍게 주말로 향하는 반환점. 마치 용변을 보는 것처럼 배설과 동시에 정화되는 카타르시스가 터지는 시간이다.
목요일의 어원이 되는 목성의 성분은 지구보다 가볍다. 하지만 목성은 태양계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행성이다. 그러니까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하지 않던가. 티끌은 작고 가볍지만 가벼운 것들이 모여 가장 크고 무거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 품고 있는 게 가볍다고 해서 그것을 그저 가볍다고 할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목요일은 무거움과 가벼움을 동시에 품어 그들 사이에 적당한 균형을 잡아준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일과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워라밸의 꿈이 현실 가능한가 가늠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러한 까닭에 수많은 위성이 목성 주위에 존재하는 걸지도 모른다. 포용력 있는 사람 주위에 많은 사람이 따르는 것처럼. 그러고 나니 갑자기 목요일이 살가워진다. 강렬하게 색을 드러내진 않지만, 물결무늬 나이테처럼 배경에 숨어 주제가 되는 사물을 돋보이게 하는, 메타포처럼 숨겨진 뜻으로 글을 더 풍요롭게 하는 존재. 그리고 누군가에겐 라임오렌지나무 같은 목(木)요일이 되어 힘든 마음을 털어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넘어가는 어느 한 지점이 되기를 소원한다. 그것이 나무의 이름을 한 목요일의 힘이 아닐까.
목요일이다. 글 모임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선다. 내 안에 글 나무를 키우러 간다. 아직 내 글은 초봄이라 꽃봉오리만 맺었다. 하지만 언젠가 예쁜 꽃도 피우고, 푸른 잎 무성히 자라서 싱그럽고 탐스러운 열매도 맺을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