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물레방앗간
학산3리 금광평(金光坪) 우리 마을은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면 희뿌연 아침 안개 사이로 망덕봉(望德峰)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망덕봉은 꽤 높은 봉우리로 중턱쯤에는 흡사 가오리연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바위 절벽이 있어 마치 꼬리를 펄럭이며 산꼭대기를 향하여 날아오르는 형국으로 보였는데 객지 생활을 하면서도 고향 꿈을 꿀라치면 언제나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내 꿈속에 나타나고는 하였다.
이 망덕봉 아래쪽 골짜기가 단경(檀景) 골인데 그 아래쪽으로 언별리(彦別里)와 모전리(茅田里:뙡마을)가 이어져 있고, 그 뒤쪽은 임곡(林谷)을 지나 피래산(彼來山) 봉우리를 넘으면 옥계(玉溪) 지경에 잇닿게 된다. 또 눈을 돌려 바다 쪽을 바라보면 납돌(申石)과 월호평(月呼坪:오리똘)을 넘어 강릉비행장과 남항진(南港津) 앞바다는 물론이려니와 안목항(安木港) 옆 죽두봉(竹島峰)도 아스라이 보인다. 여름밤이면 오징어잡이 배들이 밝힌 불빛으로 온통 바다는 꽃밭을 이루곤 했다.
망덕봉 자락에는 덕현리(德峴里)를 비롯하여 어단리, 언별리와 단경 계곡을 품고 있는데 어단리 쪽으로 다가가면 예전 2공구(工區) 수리조합으로 부르던 동막지(東幕池)가 나타난다.
연이어 십여 호의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동막골 마을을 지나면 곧이어 보리암(菩提庵:현 三德寺)으로 들어가는 절골이 된다. 예전에는 단경 계곡의 물을 끌어 오느라 산을 관통하는 굴이 보리암 아래쪽에 뚫려 있었는데 이따금 청년들이 천렵하러 단경 계곡으로 갈 때 산을 넘어가지 않고 지름길이라고 그 굴을 통하여 가곤 했다.
나는 형들을 따라 단경 계곡 천렵을 따라나섰던 적이 두어 번 있었다.
반두나 어항 등은 물론이려니와 냄비와 고추장, 된장 등을 챙겨서 나누어 들고는 관솔로 횃불을 만들어 어둠을 밝히며 20여 분 굴을 빠져나가는데 어떤 곳은 종아리까지 물이 차오르기도 했다. 이따금 관솔불이 꺼지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벽을 더듬으며 나갈 때도 있었는데 물에 뱀이라도 떠내려오지 않을까 겁에 질리니 멀리 훤하게 밝아지면서 굴 입구가 보이면 한달음에 철벙거리며 뛰어나가곤 했다.
단경 계곡은 골짜기 아래쪽에 갈대로 지붕을 덮은 오두막이 두어 채 있고는 계곡 전체가 무인지경이었는데 가는 곳마다 작은 폭포와 소(沼)를 이루었고, 맑고 차가운 물이 철철 넘치며 흘러 마치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연상시키는 곳이었다. 꺽지, 개리, 퉁가리는 물론 메기와 버들치까지 가지가지 물고기도 많아서 반두질을 하거나 어항을 놓으면 금세 한 사발을 채우곤 하였다.
동막지 아래, 금광리(金光里) 마을에서 동떨어진 산 밑 개울가에 오래된 물레방앗간이 있었다.
개울에서 물을 끌어 오기 위하여 좁다란 봇도랑을 만들고 그 아래쪽에 물레방앗간이 있었는데 가을철이 되면 방앗간이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다. 이 물레방아는 봇도랑을 만들어 물로 방아를 돌게 하는 옛 방앗간이다.
금광리 물레방앗간
머리에 나락 함지박이나 자루 등을 얹은 아낙네들과 처녀들이 울긋불긋 치맛자락을 날리며 줄을 맞추어 외나무다리를 건넜다.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날이면 종일토록 재잘거리는 아낙들의 이야기 소리와 처녀애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저녁이 이슥할 때까지 이어지곤 했다. 이맘때면 코스모스와 이름 모를 야생화로 온통 뒤덮인 방앗간 부근을 동네 남정네들은 마음이 들떠서 공연히 기웃거리고는 했다.
그때만 지나면 방앗간 문에는 빗장이 걸리고 봇도랑도 나무 판대기로 물길을 막고 바닥에 뚫어놓은 구멍으로 물을 흘려보내 물레방아가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달 밝은 가을밤이면 젊은 남녀들의 실루엣이 소리 없이 물레방앗간으로 스며드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이름 모를 풀벌레와 소쩍새 우는소리 사이사이로 소리를 죽이며 쿡쿡거리는 웃음소리, 뭐라고 볼멘소리로 쫑알거리는 여자의 소리에 웅얼웅얼 타이르는 듯한 남자의 소리, 그러다가,
‘아이~’ 어쩌고 하며 몸을 빼는 소리며 소리죽여 깔깔대는 소리까지 들리곤 하였다.
겨울이 되어 하얀 고드름이 물레방아에 주렁주렁 매달리고 찬바람이 개울가에 가득 휩쓸고 지나가도 물레방앗간의 은밀한 만남은 그칠 줄 몰랐고, 어른들은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