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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학창시절
이종수(대전공업고등전문학교 전기과 1972년 입학 통45회)
내고향 충남서산, 초등학교 2학년때 집에서 200m 떨어진 지점에 동서를 가로막는 저수지(성암 저수지)공사가 시작 되었다
소규모 논(1,400평) 농토마저 저수지로 수용되에 이사를 가게됬다
지금은 정부에서 보상금도 현실화 됬지만 그당시는 일방적으로 보상을 해줘 보상받은 보상금으로 동일한 토지를 구입 할수 없어서 그곳에서 3km 떨어진 아래쪽 값이 싼 밭을 사서 이사했다
이사한 동네는 전체 200가옥 정도인 부락인데 우리집 근처는 20가옥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동내였다
쌀농사인 논은적고 밭이 많은 동내라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어려웠다
옹기종기 모여사는 20가구중 초등학생이 한 30명 정도로 기억하는데 그당시 이사온 우리집 마당이 제일 넓어 인근에 사는 초등학생은 매일 우리집 마당에서 자치기,술내잡기,땅뺏기등 놀이를 하고 놀았다
방학이면 매일모여 시끌벅적 거렸다
점심 때되면 각자 자기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반정도는 않가고 저녁 때까지 놀았다 집에가도 점심먹을 식량이 부족하여 점심을 안주니까, 그냥 종일 놀아 몇번은 우리집에서 고구마도 쪄서 나눠 먹기도 했으나 매일 그럴수도 없어 나도 같이 점심을 못먹는 날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니 동네서 고등학생이 1~2명 정도고 대학생은 한명도 없었다 그만큼 낙후된 동네였다
아버지는 항상 하시는 말씀은 공업학교에 가서 기술을 배워야 먹고산다 공고 가던지 농고(서산농고) 나와서 면서기 시험을 보던지 해라 라고 말씀 하셨다
입학동기
초등학생때 옆집에 전교1등을 하는 중학생 형이 살았다 그당시 전기도 안들어오고 라디오는 동네에 1~2집 보유할 정도인데 라디오 있는집에 뉴스나 연속극을 듣으려고 저녁 일찍먹고 라디오 있는집에 가서 집 마당에 멍석을 깔고 라디오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귀를 귀울여 듣곤 했다
그때 우리옆집 머리좋은 중학생 형이 광석 수신기 라디오라며 조립을 하고 안테나를 대나무 끝에 매어 나무에 올라가 높이 세우고 방향을 맞춰가며 귀에 리시버를 끼고 방송을 듣으면 신기하게도 1~2개 방송을 들을수 있었다
초등생인 나의 눈에는 신비스럽기만 했고 나의 꿈이 생겼다
나도 공업계 고등학교에 라디오 만드는 학과에 들어가 라디오 만드는 기술을 배워 서산 시내에서 라디오방(라디오 수리점)을 차려서 돈을 벌어야 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옆집형이 다니던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었고,공고는 보내줄테니 공고 졸업하고 돈벌으라는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공고보다는 조금 더 배우는 초급대학격인 5년제인 대전공전 택했고, 라디오를 만들고 고치는 기술을 배워야 겠다는 생각으로 전기과를 지망 했다
전기과에 입학하여 수업을 받는데 몇일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도 라디오에 관한 시간은 한시간도 없고 무슨무슨 법칙,전기가 이방향으로 흐른다고 가정해서 수학시간 처럼 수학적으로 풀어서 마이너스 숫자가 나오면 방향이 반대고 어쩌고 하며, 내가 배워서 라디오도 만들고 수리도 해야하는 수업은 찿아 볼수도 없었다
그때부터 고민과 갈등이 시작됬다 학교를 그만두자니 어려운 살림에 대전까지 보냈는데,다니쟈니 내가 꿈구던 학과가 아닌것 같고, 한학기 정도는 수업을 받으며 고민도 많이 했다
선배나 동내 고등학생이 있었으면 자문을 얻어 봤을텐데 아마 전기과 전자과도 구별을 못해서 이루어진 해프닝이었다
학창시절 기억남는 이야기
학창시절 5년동안 자취생활을 하였는데 연탄불이 꺼지면 번개탄으로 연탄을 살려서 밥을 하는데 1~2시간 가량 지나야 연탄이 불을붙어 밥이 되는데 연탄 아궁이 공기조절을 잘못해서 불꺼진날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쌀은 시골에서 부모님들께서 보내줘서 굶지는 안했으나 반찬이 없어 고생은 많았다, 지금은 추억이고 내가 어려움에 처해도 걱정이 덜되는것은 이런것을 이겨내는 인내심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되곤 한다
또한 우리학교는 국립이라 수업료가 아주적게 냈다 내기억으로는 한 학기에 시골에서 쌀2~3가마 정도의 금액으로 생각된다 40여년 지나서 물가가 다르겠지만 지금 시골 쌀값이 15만원 조금 넘으니 3가마면, 45만원 정도이니 요즘 한학기 사립대 등록금이 500만원 가까이 내야하지 않는가...
그당시 한학기에 쌀 30여가마 값을내야 한다면 우리집논 총생산이 20가마 정도도 안되는데 식량을 안먹고 모두 팔아도 한학기 수업료가 안되는데 나로서는 대전에 못올라 왔을것이 분명한데 국립인 대전공전을 어찌 잊겠는가
학교 입학하고 1학년 여름 방학때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아마 학교에서 봉사활동 지시가 있었던거로 기억된다 우리일행은 서산군에서 대전공전에 다니는 선후배로 구성되어 서산군 지곡면 어느 낮은 산자락에 위치한 공기 맑고 인심좋은 부락에 봉사활동을 일주일 가깝게 했던 기억이 난다
1학년인 제눈에는 하늘같이 높아보이는 4학년 선배인 김용인,강명장 그리고 몇 명이 더 있었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나는 선배님들로 구성되었다
자장 쫄병인 나는 낮에는 소독약통을 짊어지고 하수도,화장실등에 소독약을 뿌리고
저녁에는 부락민을 모이도록 연락병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저녁에 강사로 보건소 소장을 모셔서 2자녀만 낳으라는 산아교육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당시는 둘만낳아 잘기르자는 구호아라 국가에서 장려하는 교육을 실시했는데 40여년이 지난 요즘은 그 교육을 안했어만 했던 교육이 됬다
3학년 여름방학에 같은반 친구들 7명이 등산을 갔다
각자 배낭에 쌀 한말씩 짊어지고 텐트는 단 한개만 가지고 수덕사 ,논산,부여낙화암,대천 해수욕장,갑사,계룡산을 넘어 동학사를 거쳐서 대전으로 오는데 일주일 걸렸다
간식거리는 생각도 않하고 쌀도 일주일을 먹을 거리를 가지고 가야했는데 등산에 경험이 없어 쌀한말씩 짊머지고 산을 넘으려면 얼마나 무거웠던지 식사때가 되면 서로 밥하겠다고 자기쌀을 줄이려고 실랑이를 벌렸던추억,텐트가 한 개뿐인데 3인용 정도 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4명은 밖에서 하늘을 벗삼아 잠을자다 중간에 텐트 안에서 자던 친구와 교대하며 일주일을 보내는데 밖에서 자려면 모기가 얼마나 많이 덤비던지 말이 자는거지 뜬눈으로 밤을 보냈던 기억들이 추억으로 떠오른다
현암제 생각이 떠오른다 몇일씩이나 수업을 않하고 체육대회를 하는것이 처음에는 낮설기도 했지만 점차 적응했고 나는 시골 중학교 시절에는 전교에서 육상은 1등을 했는데 대전공전 전기과 들어와서는 1등은 못하고 4등 안에는 들어서 400M 릴레이를 전기과 대표로 매년 출전한 기억은 있다
살아오면서 가장 어려웠던일
부모님들께서는 시골분 이시지만 교육열이 대단하셔서 자라면서 불편한 점은 있지만 어렵다고 생각 한적은 없다 어려웠던 것이 다 추억이고 지금 내가 더 굳세게 만들어 졌다고 본다
그러나 몇 번의 죽을 고비는 넘겼다
10년여년이 지나 지금은 우리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는데 세월호 사건이 온나라를 떠들썩하게 되니 내 머리에 문득 스처가는 사건이다
먼저 1993년10월 서해훼리호 침몰사고가 발생해 362명이 승선했다 세월호처럼 배가 침몰해 292명이 사망한 그배에 내가 안탔다는 것이 살운명 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회사 동녀들과 그해 매달 한번씩 위도에 낚시질하러 갔다
위도에 낚시질하러 갈때는 먼저 위도에 사는 선주들에게 약속을 한다 약속한 선주는 오후 저녁 약속시간에 자기배를 가지고 육지 선착장으로 나와 약속한 인원을 싣고 자기집으로 데리고 가서 숙식을 하고 아침에 서해바다(1~2시간)로 나가서 낚시를 하고 오후에 육지 선착장까지 실어다 주면 우리일행은 가지고간 차로 되돌아 온다
그날도 10월달 지나면 날이 추워지면 못간다 하여 그해 마지막으로 10월 9일날 출발하려다 그날 당직과 그 다음날(사고당일)은 처가에 일이있어, 내가 동녀들에게 가지말자고 하는바람에 동녀들은 출발을 못했다
출발 하는날은 날씨가 좋아 각자 예약된배로 위도에 도착했다 다음날(10일 일요일)에
풍랑으로 낚시를 못하고 육지로 나와야 하는데 낚시배는 소형이라 운행을 못하니 위도에 들어간 낚시꾼과 육지에 볼일이 있는 섬주민 일부는 서해훼리오 한대 뿐이니 방법이 있겠는가!
정원 221명인데 낚시군 섬주민해서 362명으로 정원 초과에 풍랑으로 침몰되어 실외에 있던 70명은 긴급 구조되고 배안에 있던 292명은 끔직한 일이 벌어진 것다
회사 직원중 한명은 아침에 회사 출근할 때 부모님한테 회사갔다 오후에 위도로 낚시 간다하고 하고 출근 했는데 내가 낚시를 취소하니까 나온길에 혼자서 설악산으로 여행 갔다, 그 당시만 해도 휴대폰은 특정인이나 소지했고 일반인은 삐삐를 차고 다니던때라 집에 연락도 않하고 설악산 갔는데, 다음날 오전에 특보뉴스에 위도 배침몰사건 보도는 나오고 위도간 아들은 연락이 없으니 부모는 파출소에 실종신고를 하고, 집안이 온통 난리가 났는데 저녁 늦게 아들이 설악산 갔다 집에 들어오니 얼마나 좋았겠나!!!
2000년 의학분규가 나서 의사가 파업 하던날이 나는 머리에 종양이 있어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 날자를 기약 없이 기다려야하는 신세가 됬으니 내마음이 어떻겠는가!
죽을지 살을지도 모르는 머리수술을 해야 하는데 언제 의사들 파업이 끝날지, 수술하면 살수는 있는지...
입원하러 가는날 나는 살아 돌아올지 못올지 몰라 학교에간 아들(그당시 중학생)책상 의자에 앉아 지난세월을 회상해 본다, 내가 이렇게 일찍 생을 마감할거면 왜 아들에게 모질게 혼내가며 키웠나!, 자유롭게나 해줄걸, 딸(그당시 초등생) 책상앞 의자에 앉아서는 내가 없으면 어린나이에 얼마나 충격받을 것이며 얼마나 어렵게 살아갈까
생각에 젖어보며,아내에게는 내 비자금으로 많치는 않으나 가지고있던 돈을 아무 말없이 건내주었다
내가 돈이 필요하겠나 하며 별별 생각을 하며 병원으로 입원하러 발길을 옮겼다 이렇게 병원까지 와서 머리수술을 해야하는데 의사들은 파업하고 ....
지금은 그당시 중학생이었던 아들은 대학졸업후 공기업에서 근무하고,초등학생이던 딸은 간호사가 되어 병원 응급실에서 옛날 나와 같은 환자들을 간호하며 지내고 있다
남은 인생설계
대전공전5년제(전기45)졸업후 광운대학교에 편입해서 졸업후 직장인 삼성물산(주)에서 살아온 세월의 반평생을 보내고 현재는 개인사업자인 제이에스파워라는 상호로 전기안전관리 용역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며 앞만보고 달려왔지 옆을 보지 못하고 생활하다 직장을 마치고 돌이켜 생각해보니 앞으로 20년은 더 살아야 될텐데 아무 설계와 조치가 없는것을 느끼는 순간 마음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 남들이 들으면 웃음거리가 될지 몰라도 나는 20년을 살아갈 목표를 지금부터 세우고 실천하려고 나자신과 약속 했습니다
첫째 여러명이 함께 할수 있는 등산과 운동 한가지는 가지자.
다행이 오래전부터 골프를 배웠으니 다행으로 생각하며 한가지는 됬다고 봅니다
둘째 사교춤을 배워 적적하거나 기분전환 할 때라든지 무릅이 안좋아 등산도 어려울 경우가 닥칠것을 대비해 사교댄스를 배워야 겠다고 생각을 했고, 시간 날때마다 문화센타에서 배우고 있는데 아직 미숙해서 틈틈이 연습과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셋째 혼자만이라도 연주 할수 있는 악기 하나를 배우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시간을 쬬개서 문화센타에서 가르키는 장구를 열심히 배우는 중입니다
넷째 사교댄스와 악기를 배우고나서 요리를 배우려고 합니다
내가 아프던지, 병원에 입원하면 아내가 요리를 해주겠지만 반대로 아내가 어떠한 이유로 식사를 못차릴 경우를 대비하여 요리를 20~30가지 정도는 배우려고 합니다
선후배님들께 하고싶은 말씀
현재 저는 김홍석 회장님과 나상호 사무국장을 모시고 재경총동문회 총무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이고 각 가정에는 족보가 있습니다
충청도에서 살던,경기도에서 살던,서울에 살던 간에 족보는 변할수 없습니다
대전공고든 공전5년제,2년제,산업대,한밭대 뿌리는 같습니다 제가 총무를 수행하는동안에 느낀점은 뿌리는 하나인데, 많은 동문들이 뿌리를 잊었는지,뿌리가 싫은지 무관심한동문이 많다는것을 느낌니다
돌림자로 다르게 이름 지었다고 그집 자식이 아님니까 아버지를 험담한다고 아버지는 나쁜사람이고 아들은 훌륭한 사람임니까, 반대로 자기 아들 못났다고 떠들어 대는 아버지를 남들은 아들만 못나고 아버지는 잘난 아버지라 합니까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힘을 합하여 가정을 꾸려 나갈 때 남들은 그집 가문이 좋다고 인정해 줍니다
우리 한밭(대공) 동문 여러분 후배는 선배를 따르고 존경하며, 선배는 후배를 아끼고 사랑하여 한밭(대공)호가 항해를 영원히 잘할수 있도록 서로서로 힘을 합하여 한방향으로 전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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